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엡 6:12, 개정)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라고 성령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의 소욕인 성급함으로써 영적 싸움을 먼저 운운할 것이 아니라

혈과 육의 싸움이 무엇인가 라는 성령의 알려주심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잉여로 주어지는 선물인 영적 싸움에 대한 성경말씀의 교훈을 듣게 되는 겁니다. (왠 공짜야? 왠 은혜?)


그렇다면 단적으로 말해서

혈과 육의 싸움이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영적인 싸움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영적인 싸움 뿐이다 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껏 영적인 싸움을 한다는 모든 취지는 육적인 싸움 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분명히 육의 싸움의 의미를 배제하고 영적인 싸움의 조건만을 철두철미하게 골라서 갖추고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육과 혈만이 남아버린 잉여)


영적이란 항상 육과 대비된 입장에서 행함이라는 원인에 의한 결과의 도출방식을 떠난 문제라서 (인간의 숙제 조차도 될 수 없는, 언약(십자가)만의 독점적인 숙제)

항상 우발적이고 항상 원인 없는 결과로써 잉여적인 모습만 양산케 되는 것이지

육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결과로써 드러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을 통해서도 볼수 있듯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말씀의 결론은 인간의 모든 해석을 불가능케 만드는
해석단절 해석불가로써

오로지 잉여적으로만 믿음이라는 선물을 외부에서만 주어짐으로 알게되는 것이지
아무리 지식으로 뚫어서 해석하고 저장할려고 해도
그 저장 공간 자체가 감당을 할 수 없는 헌술 헌부대로써 터져버리고 찢어질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인 겁니다.(물론 신비 그 자체라는 것이 더더욱 부각 되어지는 것을 성화론자들을 통해서 감사하게도 알게 됩니다. 헌부대에 아무리 거룩인 영적인 것을 아무리 집어넣을려고 해도 성공한 자를 본 적이 없고, 그저 집어넣었다고 우기는 인간 뿐이며, 다시 처음부터 해 봐라 라고 했을때는 반복이 불가능해서 부자청년처럼 근심하고 등 돌리는 모습 외에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가 지독한 미움을 받은 것은 이 신비에 해석을 제대로 하는 인간이 없듯이 ... )

또 놀랍게도 지독한 편애에 대한 신비로움이(해석불가 오직 잉여로만=십자가 죽으심으로만)
심지어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한 바울에게서 조차도
그냥 가시가 아닌 사단의 가시, 악마의 가시 조차도 잉여로써
은혜로만 다가오는 것이기에 아무도 흉내조차 못내는 접근불가의 철저한 소외만이
은혜가 은혜 아닐 수 없도록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나중까지 이 은혜성은 결코 변함이 없었음을

비로소 육의 단절로써 알게 하신 겁니다.

(롬 11:5, 개정)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개정)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남은자 = 잉여품 = 새피조물 = 전리품)
(롬 11:3, 개정)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 개정)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 조차도 이 잉여에 철저하게 소외된 겁니다. 선지자란 누가 잉여인가를 드러내는데 자신 또한 소모품=잉여품으로 동원되지 선지자의 조건을 갖추어서 결과를 도출해 낼수 없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이것이 더 확정되는 것이 십자가에서의 버림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는 구경꺼리 미말에 둔 찌기가 되는 겁니다.)

(고후 12:7, 개정)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8, 개정)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정)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 빼내주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더욱더 깊숙이 푹 수셔 넣습니다. 십자가가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에 대한 해석이 화평케 한다는 인간화해용이 아니라(양무리 마귀 집단의 엉터리 해석) 도리어 더욱더 푹푹 수셔대면서 모든 육(인간)을 공격하고 있다는 겁니다. - 아래 첨부된 [인간공격용십자가] 참조, 이번 대구강의의 취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즉 성령의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밖는 것)

이 잉여적인 활동의 독보적인 전담자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기어코 받아내는 고백 아니 심어서 터트려 내는 고백은
나는 죄인이요 원수인데 주님은 그 원수를 용서한 사랑입니다. 나는 틀렸고 주님은 옳았습니다. 라는 고백 뿐이다. 이것만이 잉여로써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인 이스라엘의 유일한 고백이다.)

유일한 제 3의 시선으로써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밖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우발과 우발의 싸움이요
잉여와 잉여의 싸움이요
예정과 예정의 싸움이요
지독한 미움과 지독한 편애의 싸움이요
악한 영과 십자가의 싸움인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작극으로써
오로지 은혜 곧 희생의 피인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소모품(잉여)로써 사용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가인의 죄의 소원이 덮치는 그 사건의 계기 조차도
가인의 우발적인 잉여가 (이유 없는 살인의지)
결국은 아벨의 더 나은 제사로 인한 (이유 없는 긍휼) 것이듯

그야말로 정하심(예수님의 자작극=은혜)만을 도출하기 위한

가장 해석 불가인 이 사건이

그야말로 가장 은혜로만 된 사건임이 드러나고

놀랍게도 이 사건을 더더욱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버림 받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싫어버린바 된 쓰레기 취급도 모자라서
예수님을 잉여적으로 만드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바 되었다는 명분을 남기면서
모든 결과를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웠다는 그 자체가

놀랍게도 계속 계속 잉여적으로 잉여와 잉여의 연결 뿐이기에

성령은 이 기준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지금도 이 잉여의 일들을 똑같이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 만이 잉여 새언약의 기준이기에
(갈 6:14, 개정)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바울은 자랑이란 곧 잉여란 십자가 뿐임을 가장 십자가의 원수로써 훼방자로써 최전방에 있었던 자로써 활동하다가 졸지에 겁탈당하듯 가장 냉혹하게 공격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림을 당했기에 비로소 그가 나 보다 옳았다를 잉여로써 터져나오게 된 고백이기에 다른 고백이 일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육이 일체 설 자리가 없도록
두루 두루 화염검을 쥐고
생명나무의 영생의 길을 차단성을 펼치던 영이 이제는
입체화 즉 그 차단된 공간에 가서야 단절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차단 자체가 아무 연관성을 갖지 않을려고 하는 모든 육체에 직접 일일이 개입해서
육체의 가시로 (바벨탑을 통로=구원의 문 뚫는 작업에 개입으로 흩어버리고 모든 땅을 바벨탑의 속성을 드러내도록 구체화=국가 시키는 것임=서로 서로가 가시가 됨)

십자가의 못 으로

그 은혜성(잉여)을 구체화 한다는 점에서

아무도 이 성령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재간이 있는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으로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인 싸움에 모든 인간들은 다 동원 되는 겁니다.

단 한명의 예외가 없이

심지어 낙태당하는 아기 조차 (아무리 봐도 육 뿐이지 영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는 그 버려지는 아기 조차도)

모든 피조물

해와 달과 심지어 버려진 쓰레기 조차

모든 피조물(잉여로써 생산되었기에)이 이 성령의 탄식에 동원되는 겁니다.

누가 회개치 않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잉여로써 (아무 이유도 원인도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는 정한바 로써)
유일하게 인간만 이 회개에 소외되었다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죄의 소원을 덮치도록 구체화(율법을 폐하고 율법을 완성하심=약속성취) 하신 겁니다.

이제 폐하여진 율법이 아닌(찢어진 의문의 증서)
완성된 약속으로써

성령의 법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잉여로써
우발적으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오로지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잉여로만
성령의 전쟁만이
십자가의 사건만이
매일 매일 터지는
새창조의 사건만이
모든 육체를 무릎 꿇은 그 이미 끝난 전쟁을, 이미 완료된 전쟁을
육의 소욕이 펼쳐질 때 마다
가만히 두시지도 않고 내버려 두시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쳐들어 와서 그 육의 소욕을 도둑질하고 빼앗는
광야교회로 만드시는 겁니다.

인간의 재주에서 떠난 광야교회를 만드는 성령과
인간의 재주를 펼치는 가짜교회를 대립 시키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목격케 하시는 것 조차도
잉여요 놀라운 은혜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갈 5:17, 개정)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8, 개정)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개정)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개정)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갈 5:21, 개정)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2, 개정)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정)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정)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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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공격용 십자가(우리교회에서 펌) 
글쓴이: 가을바람 조회수 : 130 06.11.27 20:53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Bq/677

십자가: 인간 공격용이다.    이름 : 이근호

사람은 공격받고는 가만있을 인간이 아니다. 맞공격하든지, 저항하든지, 도망치든지, 아니면 숨든지 한다. 요한계시록 6:14-17에 보면 인간들의 이런 양상이 나온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인간들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면서 피신하고 있고, 자기를 향해 공격하는 분이 누군지도 잘 안다. 그 분은 바로 ‘어린 양’이다. 예수님의 명칭이 하필이면 ‘어린양’일까? 그것은 그 분의 지속적인 기능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명칭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린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우주 국면을 몰아세우고 계시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양’의 진가를 확실히 드러내는 무대로서 전 우주를 동원하신다. 악마를 바다에서 끄집어내시고, 귀신들을 옥에서 끄집어내는 이유도 이런 차원에서 활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점이 더욱더 분명한 것은, 어린양에 대해서 무서워하기는커녕, 어린양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린양을 환호하는 자들의 특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의 특징은 ‘어린양’의 피가 묻힌 흰 옷을 입고 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4-17)

이들은 결코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가 가려라”라는 식으로 절망의 절규를 외치지 아니한다. 똑같은 어린양을 결국 대하게 되면서도 이들은 도리어 평소에도 더불어 인도함을 받아왔으며 수시로 교제를 나누는 사이였기에 그야말로 ‘화목’ 그 자체이다. 즉 이들은 일상 속에서는 단독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린양’으로 더불어 함께 지내왔었다.

물론 ‘어린양’께서는 이들과 함께 계신 이유가, 이들의 구원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린양’으로만 일하셔야만 하는 그 취지를 위해서이다.

결국 성도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이 ‘어린양’의 취지를 담아내는 영화 스크린과 같은 환경 조성이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인간은 ‘나도 살았다’가 아니라 ‘이제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만을 말해야 한다’이다. 영화관에서 허연 스크린만 2시간동안 보여주려고 입장료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스크린의 영상이 돈 값을 하고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스크린 없이 영화관을 그것을 보여줄 환경이 못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왜 자신이 영원토록 ‘어린 양’ 행세만 하셔야 하는지를 본격적으로 개시하시기 위해서이다. 결국 인간들은 요한계시록 1:7의 국면을 접하게 된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왜 예수님은 과거에 자신이 십자가에 당한 수모를 그냥 잊어버리시지 않는 것인가? 왜 혼자 속으로 삼키면서 감내하시지 않고 인간을 상대로 그 억울함을 유감없이 분풀이 하셔야만 하는가?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을 상대로 갈구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어린양’이 되셔야만 하는 자기 운명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이다.

그 ‘어린양’ 중심으로 온 우주가 지배받는 주가 되시기 위해 ‘어린양’의 형상으로 존재하셔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위해 예수님은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 그런데 인간은 이점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사유(思惟)하고 자기만 챙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은 받았지만 정작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식으로 등장되는가는 몰랐다. 인간들의 무지몽매함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쏟아낸다. “우리 인간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단다. 그러면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구나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만을 잘 유지하면 되겠구나. 혹시 범죄로 훼손되면, 다시 용서받아 다시 회복하면 그만이지 뭐”라는 식이다.

즉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위하여 우주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착각이 유지되는 동안, 하늘에서 메시야마저 ‘자기를 위한 어린양’으로 해석해 버린다. 하지만 정작 하늘의 ‘어린양’을 인간을 진노로서 공격하시는 ‘어린양’이시다.

직업이나 직장이나 연륜에 상관없이 공격하신다. 그 공격의 근거와 이유는 예수님의 ‘어린양’ 기능이다. 이 기능이 곧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비로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제대로 완료적으로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 그 ‘십자가’ 기능이 본격적인데 그 증거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십자가밖에 모르신다. 다른 말로 말해서 ‘어린양’의 취지 밖에 모르신다. 이것은 곧 인간 전체를 공격하시고자 함이다. 세상을 ‘어린양’ 중심으로 통일하시려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공격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도 뽑혀나왔다.

그는 십자가라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모든 세상 지혜를 다 부수려고 한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8-20)

여기에 보면, 인간의 지혜를 구축하려는 자는 도로 그 ‘교묘한 사기술’에 스스로 푹 빠지도록 조치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곧 하늘의 ‘어린양’께서 부지런히 지금 그 작업을 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과 다음의 말씀과 관련있다.

“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4-27/ 요 12:40 / 마 13:17 / 사 6:8-10 )

즉 진정 ‘어린양’에서 벌리시는 활동을 이해하는 자는 십자가 자체가 인간의 지혜에 포착하거나 함유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고 더 나아가 도리어 그 십자가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으려는 자는 공격하는 능력이 그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된다. 즉 믿게 하시는 십자가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안 믿어지도록 부지런히 역사하는 것도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이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이것은 곧 심판 하실 수 있는 권한과 그 심판 속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권한 행세에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완전히 배제되어 있음을 뜻한다.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코자 한다는 그 어떤 방해도 개의치 않고 구원할 수 있는 일이요,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버리고자 하는 자는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자는 버려지게 되어 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미 우주의 주도권은 ‘어린양’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원해달라도 아우성쳐도 소용없는 일이다. 인간의 아우성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피에서 나온 고유 능력으로만 구원된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학을 할 수 밖에 없으되 결코 그 신학으로 구원되는 경우는 전무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늘 신학을 치는 신앙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십자가 신학’을 쥐고 있으면 안된다. 십자가 신학보다, 십자가가 늘 자신을 죽이고 친다는 사실을 고백되어지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외치는 사도 바울조차 ‘자신은 성도들을 위한 십자가 피를 흘린 적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전 1:13) 사도 바울은 복음을 창시자도 아니요 복음의 제조자도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복음을 소지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복음이 그를 소지하여  그 복음으로 인해서 날마다 은혜로서 죽는 자이다. 자신이 강자로 등장되면 자기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 능력이 증거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후 12:9-10)  

이런 십자가 고백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자칭 사도라는 자들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자들이다. 실제로는 악마의 힘으로 움직이면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위장하는 자들이다. 사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평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도대체 사도가 무슨 근거로 함부로 외람된 평을 하고 그 사람들의 인격을 일률적으로 매도하는가? 그냥 입다물고 있으면 왜 안되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은 망하는 자들의 특징을 말해야만 하는 것이 사도의 복음 전파의 필수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망해야만 하는 자의 특징은, 혼자서만 어린양 되시고 혼자서만 피를 흘렸다는 그 십자가 앞에서 자꾸 뭔가 인간적인 긍정적인 면으로 치장을 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피가 가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그 피는 이제 말라붙어 버린 피인양 규정짓고, 그 피 흘림을 과거 한 때의 일로 넘기려는 시도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양의 진노는 이처럼 자기 안으로 깊숙이 고개를 숙여버린 그런 자들에게 온 우주적인 저주로 퍼붓게 된다. 무엇으로 이 저주의 심판을 가릴 것인가! 아무 것도 소용없다! 

십자가의 공격을 막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떤 신학이라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도 하늘의 어린양께서 직접 감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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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 : 이근호 십자가 신학에 대한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이 글을 끝으로 더 이상 이근호 목사의 글을 옮겨오지 않을 껍니다. 06.11.26 21:29

아침이슬 : 가을바람님 이젠 가을바람도 거의 물러간 것 같습니다. 이젠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게 되겠죠. 십자가는 절대 인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자비하심이 어떠한지를 맛보게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됨을 고발하고 우리를 정죄하지요/ 죄성을 가진 우리는,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공격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공격앞에 무기력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져주시고 율법이 정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06.11.26 23:01

아침이슬 : 십자가는 곧 주님께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구원해준 자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구원의 십자가이지 인간을 죽일려고 덤벼드는 공격용 십자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있어서는 공격용 십자가라는 말이 맞지만, 주의 택하신 자녀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랑의 십자가 입니다. 06.11.26 23:05

doremi : 이 분은.. '탕자의 비유' 같은 걸 들으면 참 싫어하실 것 같은 느낌이.. 06.11.26 23:32

아침이슬 : 글세 말입니다.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의 용서하심에 감격하여, 기뻐하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저들은 가장 싫어하죠 06.11.26 23:57

holyjoy : 이가노님의 질문에 대한 이근호목사의 답변에 대해서 저의 견해를 올리느라고 시간을 못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대해서도 저의 견해를 곧 올리겠습니다. 06.11.2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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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이준님 자신의 글로 자신의 글을 비평합니다!'  holyjoy  0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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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공격용 십자가(우리교회에서 펌)  가을바람  06.11.27 
Re: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용이다'  holyjoy  0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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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용이다 

글쓴이: holyjoy 조회수 : 74 06.11.27 20:54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용이다

이근호목사는 십자가가 인간공격용이라고 한다. 일견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죄와 허물을지적하고 공격하는 일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옳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십자가의 한 면만 강조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근호목사의 인간공격용으로서의 십자가에 대해서 성경의 십자가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근호목사는 자기 신학에 근거한 십자가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계시록6장을 인용한다. 하지만, 계시록6장의 인용된 그 구절에는 “어린양의 진노’라는 표현은 나와도 “십자가의 진노”라는 말은 없다. 그가 십자가가 인간공격용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잘못 인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십자가’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표현되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골로새서에서 ‘십자가’라는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1장1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 “십자가의 피”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면, 도대체 “십자가가 인간공격용이다”라는 이근호목사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구절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근호목사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고 한다. 또한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근호모목사의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일지 모르지만, 성경의 십자가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하해용, 화목용이다. 어떤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일까?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판단해야 한다. 어느 십자가가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줄 것인가? 공격하는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그것을 넘어서서 화해케 하고 화목케 하는 십자가인가?

실은 얼핏 보면, 십자가가 공격용으로 사용되는 듯한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성급하지 않아야 한다. 우선 그 구절을 보자. 골로새서2장14-15절의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지금 십자가로 “증서”를 도말하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공격용인 것 같다.

잠깐, 스톱! 십자가가 무엇을 공격하는가? “인간”이 아니다. “증서”를 공격하고(만일 “공격”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정사와 권세”를 공격한다. “인간공격용”이 아니고, “증서공격용”이요, “정사와 권세 공격용”이라고 해야 한다. 왜 증서를 공격하는가? 왜 정사와 권세를 공격하는가? 그 증서, 그 정사와 권세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또한 그 인간과 더불어서 “화해”하시고 “화목”하시려고 “공격”하는 것이다.

다시 그 성경구절을 보기 바란다. 이근호목사의 주장은, 성경구절만 유의해서 보면 금방 그 주장의 허구가 드러난다. “증서”가 어떤 것인가? ‘정사와 권세”가 어떤 것들인가? 증서는 바로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이 글을 쓰는 바울을 포함한, “그리스도안에서 신실한 형제들”(골1:2)이다. 곧 “성도들”이다. “증서”를 도말하고, “정사와 권세”를 드러내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한 사람들, “화목케 된” 사람들이 바로 이 구절의 “우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구원받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이근호목사가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라는 말을 할 때에 얼마나 그 말을 조심성 없이 사용하고 있는 지 금방 드러난다.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라고 할 때에, 그 ‘인간’이란 말이 ‘어떤’ 인간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그런 구분이 없다면, 그의 인간공격용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공격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당신과 더불어 화해하시고 화목시키신 바로 그런 성도들을 공격하게 된다.

이근호목사의 공격용십자가는 어떤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가? 손무성목사를 공격하고 있다. 손무성목사는 무언가 자꾸만 인간의 긍정적인 면만을 드러내려고 한다고 이근호목사가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무성목사가 무엇을 주장하는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 곧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손무성 목사가 이 점에 있어서 한치도 어김이 없다. 그가 성도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이다. 자랑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고 하지 않았는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 때문에 이근호목사가 손무성목사를 공격한다면, 그의 공격용십자가는 도대체 성경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까? 화해용십자가를 공격용으로만 사용하면 과연 성경의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과연 누구와 화해하는가? 십자가가 화해한 자들과 더불어서 그가 화해하는가? 아니면 자기의 공격용십자가와 화해한 자들과만 화해하는가? 도대체 그가 말하는 화해의 기준이 무엇인가? 자기의 신학인가? 십자가인가?

성경은 십자가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6-18)

십자가가 공격용인가?

인간공격용의 십자가는 바로 이근호목사의 십자가이다.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성경의 십자가는 여기서도 화해와 평안의 십자가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십자가는 인간공격용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만물화해용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의 도가 양극단으로 오해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값싼 십자가로 변질되어 버렸다. 회개도 없고 참믿음도 없이 “화해”와 “화목”을 이야기함으로 인하여, 그 십자가는 장사꾼의 십자가로 변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변질된 장사꾼들의 십자가를 비판하다가 그만 이근호목사의 십자가도 또한 변질되어 버렸다. “화해”와 “화목”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고 제대로 강조하지 않고, 그냥 십자가를 “공격용’으로만 강조하다 보니, 십자가의 성격 자체가 “공격”용으로만 곡해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변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십자가가 거짓된 것이어서, 그 거짓을 공박하다가, 자신들의 십자가도 변질되고 만 것이다.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근호목사의 십자가신학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의 빛에서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십자가.

이 십자가를 두고 바울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다(고전2:2).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고전1:18).

무차별인간공격용십자가인가? 죄인을 불러 의인되게 하시는 화해용십자가인가?

십자가를 변질시키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좌에서 혹은 우에서.

모든 영을 믿지 말고 시험하라고 사도요한이 권면하였다(1요4:1). 이 글을 읽는 이도 이 글조차도 직접 시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책임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대한 피값은 이제 나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내가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로다!

댓글 2 개 이 글을...(+2)
  
 holyjoy 저의 답글도 퍼오셨다는 <우리교회>게시판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교회>를 "우리"교회로 삼아야겠군요 ^^ 06.11.27 20:55

 쌀쌀쌀 저도 홀리죠이님 글에 superb~, 십자가마을로 퍼옮깁니다~ 06.11.28 04:15

 '이근호목사신학은 건전한가?' 게시판의 다른 글더보기 제목 닉네임 날짜
Re:이준님의 쓰레기글은 그렇다치고, 이근호목사의 다음글은 어떤가요? 홀리죠이님!'  쌀쌀쌀  06.11.29 
인간공격용 십자가(우리교회에서 펌)'  가을바람  06.11.27 
Re:십자가는 인간공격용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용이다  holyjoy  06.11.27 
아시는 분?'  파라볼레  06.11.27 
이근호 목사의 잘못된 해석을 재해석해 주세요'  아침이슬  0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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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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