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버려 두사

2009누가복음 2009. 1. 22. 13:14
내버려 두사 (로마서 1:24,28)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1-22 08:38:30,

성경의 비밀은 그리스도인데 이 계시가 열려지면 전체를 볼수 있고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말할수 있다고 하거든요 복음의 비밀이 열려지는데 주님이 부분이 아니라 전체인데 어떻게 전체가 안 보이고 부문만 보여지겠느냐

가려진 수건이 열리고 희미했던것이 선명해진다 아직 전체가 안 왔다면 희미하고 막연하게 말할수 밖에 없다

2009-01-22 09:00:00,

전 왜 그 말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참된 말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주님이 보내신 선지다 자신은 육의 소욕은 없고 오로지 영의 일만 말하고 있다 라고 하는 말 같이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말과 행위가 일치 하지 않는다는점 한편으론 탈출구로 자신도 사람이니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 말씀만 보라고 말하면 이것이야 말로 이어령 비어령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답변 :

그것은 님이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게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라 라는 말 속에는 상대적인 나는 절대 볼 필요성 조차 없다 날 보면 안된다 라는 그 실상을 성령께서 직접 실행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고 하니 아무리 봐도 가장 잘 믿는다고 우겼던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저주 받은 십자가의 싫어버린바 된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영의 일을 그들은 싫어합니다. 육은 후패하고 영은 날로 새로워 진다는 그 영의 일인 불가능한 일을 자기들이 무슨 수로 때우겠습니까?

이미 사기는 쳐 놨지 정작 눈에 보이는 실적들은 양산해 내어놓아야지 그래서 기껏 해 놓는 잉여 생산품이 바로 마귀와 결탁한 모습만 딱 떨어지게 내어놓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 또한 악마의 길을 안 가고는 못배기도록 그 지독한 미움을 받은 [에서]의 신비로운 길을 가야만 하는 겁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이유도 없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님은 전체를 모릅니다. 헬라어 할 줄 안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당연히 기죽고 당연히 철저하게 대조되는 모습들 뿐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주장대로 아브라함 조카 롯의 모습만 있을 뿐이니 늘 공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들은 늘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섬기겠다고 천사의 얼굴로써 다가올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체를 모르는 님은 전체를 안다고 하는 자의 그 달콤한 부드러운 속삭임이 철저한 속임수임을 성령을 통해서 더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식으로 성령께서는 일 하십니다. 님이 안 것이 아니다는 증거인 겁니다.
(물론 님이 성령께서 한 일을 가로채고 자기가 알아내었다고 하는 순간부터 그들과 똑같이 이제는 아주 적극적으로 같이 그 속이는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도록 되겠지요. 왜냐 성령은 안 보이고 님은 보이거든요, 왜 저들이 속일까요? 성령은 어차피 안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자신들은 눈에 보이기에 대중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쫏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만 채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공짜란 너무 너무 흔해서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원리처럼 말이죠. 햇빛 공기 바람 밤 낮 이 모든 것이 잉여이지 육의 소욕인 행함과 정반대임 창조는 모방이 아닙니다.)

지식을 인간에게 줘도 소용 없는 것이
인간은 담을 재간이 없고 그저 밑빠진 장독대임을 도리어 성령을 통해서만 알게 되고 직시하게 됩니다.

그런 자기를 부인케 하시는 성령의 작업으로써

님 또한 육의 소욕을 성령으로 인해 저지 당함으로써

타인 또한 예외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 게 되는 성령의 일하심의 직시함에 있어서

도리어 그런 님에게 알려준 성령과 다른 방향으로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 거짓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저들의 저 거짓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님이 성령의 조명 빨이 아니였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가장 숭고하고 가장 진리이며 가장 인간을 돕고자 희생적으로 다가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즉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항상 선한 말만 합니다. 악마가 거짓말이 뻔히 들통날 정도로 한다면 누가 그를 악마라 칭하겠습니까?

악마는 주님만이 들추어내지 인간이 아무도 들추어 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갇혀야 하고 포로 당해야 하고 사로잡혀 눌리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이 되었고

그 율법을 악마들이 다 장악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렇기에 악마는 원치 않아도 악마 값을 톡톡히 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주님의 자녀는

바로 그 사단의 가시를 푹 찔러 수셔넣고 공격하시는 폭군의 예수님(남이 아닌 나를 겨냥해서 공격하시는 그 십자가의 실족케 하심 다리걸어 태클로 넘어뜨리는 그 작업을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면 육의 소욕과 사단의 활동과 비언약의 세계와 비창조의 활동과 성화론 바리새인 그리고 이단들의 활동 상활을 모르게 됩니다.

어두움의 실체를 모르는데 어찌하여 빛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때문에 실로암 소경의 어두움에 갇힌 모습이 도리어 예수님으로 인해 영광을 보게 되는 빛의 선물을 받게 되고

빛의 선물(잉여=원인 없는 결과)도 받은 적 조차도 없는 자들이
자꾸 소경 아니다 자꾸 눈 뜬자 다 난 볼 수 있다 라고 우기니까
예수님은 기가막히게도 어두운 눈을 열어 달라고 요청 조차도 할 마음 조차도 없는
그 상심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시기에

차라리 소경입니다 고백하였더면 고쳐라도 줄 것인데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 소경인 겁니다.

그들이 고백할 수 없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라서입니다.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예수님에게 굴복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굴 복  이라는 이 어리석음이  긍휼의 대상인 겁니다.

그러나 굴복 할 수도 없을뿐더러 굴복 하지 않는 자들이

항상 하나님이라는 트레이드 마크의 효과와 그 효과의 실적만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거룩 빙자)만을 내세웠지 정작 하나님으로부터 굴복 당한 적 조차도 없는 그들의 아비는 마귀였던 겁니다.

(롬 1:21, 개정)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개정)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롬 1:24, 개정)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 1:28, 개정)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32, 개정)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히 6:6, 개정)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롬 8:7, 개정)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저들의 주장 중에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회개 하면 된다 라고 하는데 회개 해도 소용 없습니다.

회개 조차도 그들의 행함의 문제 인간의 숙제로 본 겁니다.

즉 그들의 주장의 회개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사건을 다시 한번더 재현하는 꼴과 같습니다.

마치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나 회개 했으니까 옳잖아 회개 했으니 나 나쁜자 아니니까 구원될만 하지 라고

조건을 갖추고 결국 그 자체가 시험(자기챙기기=반대말은 미쁘시다 공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든 것을 모르는 결과입니다.

회개란 예수님의 단번에 피흘리심으로 주어진 공짜인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회개 조차도 자기의 실적과 그 실적의 결과물로써 따로 챙겨서
회개 했으니까 지옥 보내면 안된다는 조건과 법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정작 회개란 나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제발 지옥 보내주세요 지옥 가도 백부당 만부당한 지옥 가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성령이 임해서, 정직한 영이 임해서 상한심령이 임해서 자기 부인을 성령 때문에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회개를 통해서 자기 구원의 정당성을 구원의 확신 따위를 더 구체화 하고 챙기는 수단으로 본다는 자체가 회개의 의미 조차도 모른다는 뜻이죠. 회개 금심 기도 찬양의 의미는 다 같은 원리입니다. 이웃 환대법 저 같은 이웃 조차도 이웃 취급받은 자격이 없지만 불쌍히 여겨달라는 긍휼을 말하는 것이 율법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가 되어 버리니까? 졸지에 율법이 자기 구원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거죠. 부자청년처럼
그러나 누리라고 알려주니까 율법을 누리는 가난한자가 되어야 하고 그 가난한자의 이웃이 되어 주시는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의 이웃이라는 대상이 되어 버리니까
싫은 겁니다. 베드로 7번 용서 이야기는 용서의 주체자 즉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대상자 무한대 용서를 누리는 자가 되어라고 하는 겁니다.
지키기는 몇 번 이라는 실적과 양이 중요하기에 그 숫자가 내려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지만
누리는 것은 매일 매일 용서의 대상이 되는 무한대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에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는 것이 싫은 겁니다.)

결국 십자가의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랑을 뒤엎어버리겠다는 마귀의 자녀됨 그 자체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마귀 자식 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님의 아버지는 누구 입니까?

님을 진정으로 보호하고 빚을 대신 값아주는 기업을 무르어 줄 자인 당신의 기업은 누구입니까?

저들의 속임수를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도 공짜로 말입니다. 님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잉여로써 알게 해주심을 당한 것 누린 것 처럼 말이죠.

주님은 이 공짜와 아버지 됨을 더더욱 명확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더더욱 고아 과부 나그네로 철저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가짜 아버지 가짜 남편 가짜 임금의 실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란 바로 그 가짜 아버지 가짜 나면 가짜 하나님(임금)에게 철저하게 농락 당한 사도바울이

가짜 자녀로써 산 그 부끄러운 수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수치를 제거한 그 할례 세례 주님의 뛰어드신 한 몸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육과 영의 대립 구조로 되어 있는 출발인 겁니다.

(갈 5:17, 개정)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전체 바울서신의 내용인 겁니다. 육과 영의 대립

육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상
영의 일이 뭔지를 모르기에

그 일에 사도바울이 뽑힌 겁니다.

마치 제자들이 허물 많은 죄인으로써 뽑혀야 하듯이 말입니다.
(죄인으로써 원수로써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자로써 불순종하는 자로써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같은 자로써 말이죠. 예수님은 성화될자 앞으로 성화 될려는 자 미래와 희망이 보이는 자 안 뽑았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 흑암의 백성인 고아 과부 나그네 포로된자 갇힌자 눌린자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들만이 산상수훈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산상수훈의 내용이 마귀자녀들에게는 자신을 숨기기에 가장 적절한 내용만으로 되어 있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으로만 되어 있기에 아주 적극적으로 그것을 단 하나라도 지켜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화되었다는 구실과 실적을 갖출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악마 답죠)

바로 그런 사도바울의 서신은 인간들은 육의 소욕을 지적하는 성령의 소욕인 충돌을 싫어해서
싹 감추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사도바울 행동 따라잡기입니다. 흉내내기죠.

전체를 알아야 희미하게 보는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라고 구라를 치는 겁니다.

그러나 전체를 알던 그 사도바울에게 사단의 가시를 심었을때에

과연 사단의 가시를 감사하게 수용할 수 있을까요?

사단의 가시 심었다가는 사단과 하나 였음이 비로소 들통날 수도 있을텐데 말이죠?

성화라는 흉내내기를 곧 잘 잘 하다가도
도저히 자기들 능력 밖의 행위를 하고자 할때는 발뺌 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에게 제발 좀 물어보세요

사단의 가시가 당신에게 심겨져 있냐고? 무엇이 사단의 가시인지를 조목 조목 따져 보세요.

헛소리 반 핑개 반 변명 반 빙빙 돌려대는 말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 찔러 버린 사단의 가시는 누가 봐도 가시 축에 들지도 않을테니
그런 반박을 할까 미리 걱정 할 필요 없겠죠.

자 그래 놓고 성화 출발 자체도 한 적도 없으면서 왜 성화 성화 라고 우려먹냐 말이죠.

성령의 성화란 바로 십자가에 정과 육을 못 밖는데서부터 시작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공짜(잉여)가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땅에 떨어져 죽으면
저절로 열매는 맺는 겁니다. 이것이 본으로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성경은 증언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의 증언을 뒤엎어버리고
자기의 증언으로 바꿀려고 그것을 지킬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죽은 적 조차도 없으면서 죽은 티를 내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죽은 적 조차도 없으면서 이웃을 사랑한 티를 모아 모아서
그 허망한 똥덩어리를
주 여호와 앞에 보이려 들고오니
주님의 마당만 짖 밟히는 겁니다.

거룩 하면 거룩 할수록 더 더러운 냄새만 성전에 가득 채우는 그야말로 썩어 빠진 인간들의 땀냄새인 겁니다.

지금까지 잉여로서 주신 햇빛 공기 물 바람 이 모든 것이 은혜(공짜) 아닌 것이 없고
또 그것을 지금 인간으로써 재생 불가 하도록
여전히 공짜로써 은혜로써 잉여로써 주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공짜를 무시하는 짖만 골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공짜 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쉬운 것이기 때문에
누릴려고 하지 않고
기어코 지킬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누리면 감사만 튀어 나오고 저절로 범사에 감사와 항상 기뻐하고 항상 찬양하고 항상 기도하게 되어 있는데

자꾸 잉여를 자기의 실적으로 바꿀려고 하니까
인상 그려가면서 적극적 마인드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가 억지로라도 되어서

기여이 지키고야 말므로 말미암아 감사가 아닌
육의 자랑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자랑

나 지켰으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라멕의 찬양처럼

나 성경대로 지켰으니까 만약 반칙으로 지옥보내면 자기가 하나님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입을 미리 막고자(그런 일이 분명히 있기에 미리 차단하고자)
예수님 조차도
독생자 조차도 아끼지 않고 버리시는 다 내어주신바 된

십자가에 바로 그런 자들의 손에 죽도록 하신 겁니다.

구원의 야망에 불탄자
천국에 아예 관심이 없는 자가 아니라.
천국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
선민만을 유일하게 고이 고이 간직한 자
교리와 율법과 십계명을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다 지켰고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예수님이 지적해 주면 언제든지 지키겠다고 그렇게 겸손하게 유순하게 낮아진 마음으로 선하신 예수님이라고 깍뜩이 대우 하면서 다가오는 그 성화론자를
매몰차게 몰아버리는 그 예수님을 등돌리고 돌아서는 일관성이 있는 자(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누리는 것은 방종하는 자들의 무책임한 모습이기에 지존을 지켜 순결을 간직하는 겁니다.) 그 순결이 가장 악마적이라서
예수님은 일부러 창녀가 빛의 아들들 인 너희 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일부러 불의한 청지기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래의 완료만을 쳐다보고 누린 자만이

빛의 아들들 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고

더 나은 제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죽음으로써 제사를 통해서

가인의 지켜서 행해서 제사 조건 갖추어서 드린 제사 보다 훨씬 낫다고 하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그 뻔한 조건갖추기 보다

더 나은 주님이 공짜로 다 선물로 잉여로 주시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자는

어차피 천국 가봐야 그런 지킨 것 자랑하는 자이기에
천국 가봐야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 짤라 버리는 겁니다.

아무도 들어 주는 자가 없기에 자발적으로 지옥 가게 될 것을 느릿 느릿 말이죠.
주님이 빨리 미리 앞당겨서 잉여로써 처음부터 넌 지옥이라고 알려주시는 배려는 베푸시는 겁니다.

아무튼 그런 3초 동안 알려주시는 그 성령의 임의로 알려주시는 내용들이
나머지 모든 시간을 자기 지키기로 채우는 님의 본능의 육체의 소욕을
그 자그마한 3초가 아니 2초 아니 1초가 모두 흔들어 버리는 겁니다.

마치 파라오 왕의 꿈에 나타나서 파라오와 관련된 국가 심지어 아들까지
모두다 다 흔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 꿈 하나 때문에 말이죠.

바로 그렇게 허물어 지는 것이 없다면 인간은 지킬려고 달려들 것이고
허물어짐을 당한다면 그 허물어 짐을 누리는 일 밖에 없는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 허물어 짐이 저주 받았다고 보이겠지만
정작 성령의 소욕에 의하면 나를 제대로 세워 주실려는 겁니다.

겉 사람은 날로 날로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운 새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고후 4:16, 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둘 다 동시에 같은 속성의 반응이 나타날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화론자들은 우기지만요 어제 질문처럼 야곱은 유순하고 에서는 고집이 세다는 둥의 정반대의 해석을 말이죠. 야곱의 약탈자 성격이 끝까지 갑니다. 기어코 내 손에 붙잡히는 것 뭐든지 다 이기고 쓰러뜨려야 나는 살 수 있다 라는 그 지킴 속에 주님이 뛰어들어서 지키는 자 되지 말고 누리는 자 되라고 아예 지킬수 없도록 허리 뿌라 버립니다. 힘 없으면 인간은 못 지키거든요 그래서 겉사람 후패 하니 속사람인 이스라엘이라는 영적인 이름이 새롭게 주어지는 겁니다. 새피조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만을 드러내는데만 증거하기 위해서 창조된 새롭게 태어난 피조물인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갈 5:17, 개정)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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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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