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간 부자에게 순간 순간 쳐들어온 잉여(완료)

(눅 12:16, 개정)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개정)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눅 12:18, 개정)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개정)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개정)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개정)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6:20, 개정)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눅 16:21, 개정)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 개정)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3, 개정)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개정)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5, 개정)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6, 개정)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7, 개정)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개정)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9, 개정)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30, 개정)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1, 개정)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누가복음 12장 부자와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항상 헷깔립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따로 따로 다른 이야기 이다는 겁니다. 한 번 헷깔리니 계속 그러네요

아무튼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최근에 주님이 붙여준 귀한 복음의 사람을 통해서 실감이 나는 주님의 배려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이 이야기가 떠올라서 중요하다 싶어서 적어 봅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았을때에 열심히 특심이다는 자기의 행함을 내세우게 됩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주님은 매몰차게 말씀 하십니다.

기다려라 참아라 더욱더 매진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성화론자 같으면 그런식으로 사기쳤겠지요)

7천명이나 따로 챙겨 두었다고 남은자의 의미를 부각 시킵니다.

저는 여기서 엘리야가 무엇을 내세운 것인지 비로소 알았습니다.

즉 자기의 완료랍시고 내밀었던 완료 덩어리를 기껏 내밀었습니다.
사실상 자기의 완료도 아닌데 우야다가 그렇게 되다 보니 완료처럼
지 혼자 해석 한 것이고 (베드로는 일곱번 용서한 것이 부족하다 싶어서 몇번 더 용서 해야 하냐고 그 부족분을 채우면 완료가 된다고 알고 묻는 것이다.)
우야다가 다 죽게 되어 혼자 남았으니 이 완료라고 내밀고보니 딸랑 혼자라서
거의 화내는 수준에 그래 내 뿐이다 우얄래 라는
식식 거리면서 얼굴 찌뿌등 거리면서
죽일라 카든지 말라 카든지 죽일려거든 지금 죽였뿌리라 라고
거의 땡깡 수준의 속내를 막다른 벼랑 끝에 다다른냥 혼자 흥분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너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에 예수님은 그것을 알려준 자가 성령이고 그 고백 때문에 교회라는 터가 잉여로써 완료로써 성령이 전담하겠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그 고백을 완료하시고자 십자가에 비로소 죽으러 가실려고 할때에 베드로는 안됩니다. 라고 막아서게 된다 그리고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책망받게 된다. 즉 여기서 인간 베드로는 인간의 일로써 자기의 고백을 자기가 이루고자 고정화 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이 완료하실 그 고백의 완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인 하나님의 숙제인 것이다. 즉 성령이란 잉여적이다. 완료적이다. 그 완료성을 베드로는 자기의 미완료로  또 고정화 시킴으로써 사람의 일로 취급해 버렸다. 완료 시킬수도 없으면서 자기만의 고정화된 일로 취급해 버린 것이다. 교회란 그래서 항상 잉여적이다. 만약 교회가 잉여적이지 않고 인간의 행함의 결과물로 채워질때에 그 교회는 마귀의 전당이 된다. 그리고 반드시 그 마귀의 전당이 된 교회는 성령의 잉여품을 반드시 핍박하고 쫏아내도록 되어 있다. 양립 불가 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십자가 지겠다는 것은 베드로는 십자가의 전리품이 되어야 한다는 전쟁의 잉여품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파라오 왕을 강퍅케 해서 반드시 부르짖도록 기도케 한 후에 그 기도의 응답으로써 출애굽이라는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 펼쳐지고 그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서 애굽왕 바로와 그의 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아서 반드시 전리품 잉여품으로써 이스라엘을 뽑아 내신다. 희년의 완성처럼 포로된자 갇힌자 눌린자가 구별 되어서 말이다. 그래서 그 잉여성이 광야교회에서 채쓸기 하듯이 걸러내는 작업을 하신다. 청함을 받은자 많되 택함을 받은자가 적기에 이 잉여성을 무시하는 자를 철저하게 가려내신다. 베드로가 그래서 사단이라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받는 것이다. 즉 베드로의 반석 됨 교회됨은 베드로 자신의 숙제가 아니라 그 고백, 성령이 알려준 그 고백에 대한 잉여(남은자)로써의 교회를 예수님이 완성 하실려고 십자가 길로 가시는 것이다. 그것을 막아선 자는 마귀다. 잉여로써의 전리품으로써의 교회를 구성하겠다는 취지에 사람의 일로 취급해 버리는 자는 성령의 소욕에 정면 도전하기에 교회란 항상 우발적이고 전리품이요 잉여품이요 처음자리의 첫사랑이 아니면 교회 아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기껏 운영하는 교회란 고정화 시킬려는 교회요 첫사랑 대신에 잡것으로 채우는 대체용으로 가득찬 교회가 가짜다)

바로 그런 모습에 상대적인 것이 잉여입니다.

그래서 7천 명이라고 알려주니 심각한 아침 드라마에서
갑자기 채널이 휙 돌려져서 개그콘서트 로 바뀌게 되니

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밖에 없는 여유와 안정감과 평안함이 몰려 닥치는 겁니다. 이것이 잉여라는 겁니다.

안식도 결국은 잉여 개념인 것을 안식일 지키기로 해석 하니
백날 해석이 되어 지겠습니까. 그려

십일조도 결국은 잉여 개념인 것을 백날 십일조니 연보니 용어 백날 바꾸어 본들
잉여 자체 즉 영적이고 은혜적이다는 선물이 덮치지 않는 이상 백날 해석해도 소용이 없기에

십일조 안 내고 헌금 안 내는 인간들이 눈에 보이면 흥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본인이 잉여를 모르기에 말이죠.

그래서 우발적이고 잉여로써 다가왔을때에

사람이 웃끼는 것이
 
어려움이 닥칠때에
그 어려움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기도의 응답 조차도 잉여적이라서
주님이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고 하니
나보다 더 어려움을 격는 자를 일부러 의도적으로 붙여주시니까
그만 할 말이 없고 입이 쑥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내 어려움은 어려움도 아니요
내 고생은 고생 조차도 아님을
실제로 더 어려움을 격는 사람을 옆에 붙여 주시면
그야 말로 잉여 앞에서 두손 두발 다 들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자 그래서 사단의 가시를 빼낼 필요가 없는 겁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온전한 십일조, 안식일, 기타 절기(특히 성탄절) 등등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 왈가 못하도록 그 말씀 조차도 잉여적으로 하게 되니
어떤 인간도 해석할 재간이 없게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골 2:16, 개정)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결국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 이 부분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잉여개념으로써 십일조 안식일 등등을 해석하는 자가 없으니까

각 종교 방송의 상담 프로그램의 제가 직접 들어보니

여전히 상담 1위가 돈(십일조) 주일 성수입니다.
대답 수준들이 교리 신학 그딴거 대중들은 머리 아파 잘 안 묻고요
성경은 더더욱 안 묻고요
그저 교회가 협박하는 것에 대한 호소
좀 봐 달라 너무 다구치지 말라
말을 안해도 왠지 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설교 분위기 등등이
종교 상담 1위 매년마다 정상을 놓쳐 본적이 없다는 것을 봤을때에

이 거짓 목사들의 행동 조차도 잉여 값을 제대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십일조를 예를 좀 들어 보면
구지 돈으로 계산 할게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거룩이 덮쳐서 주님의 온전한 십일조를 이루시는
이유 없는 사랑 앞에 이유 없이 완료한(잉여) 긍휼 앞에
나 조차도 이유 없이 감사함으로써 주님 앞에 다가가는 것 자체가 십일조 요

같은 의미로서의 안식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만이 제대로된 십일조를 완성했고 안식일을 완성했기에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안식이요 십일조 이며

더더욱 완성된 십일조요 안식이기에 그 완성이 바로 잉여품인 나 자체가 된다는 겁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양산해 낸 하늘에 속한 잉여품 전리품인 나 교회 새피조물인 겁니다.

나 자체가 새피조물의 의식의 없거나
새언약의 의미를 모르거나?(지식 개념이 아니라 그저 십자가의 용서에 고마워 하는 마음)이이유도 없이 사랑 받았기에 이유도 없이 자기가 주님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용서의 대상이 되었다는 그 자체의 마음이
바로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써 나타난 결과이기에 내 것이 일체 없는 겁니다.

이런 마음 자체가 없는 이상
백날 지켜서 하는 짖은 헛짖입니다.

돈 내어서 십일조 하고 주일 지켜서 주일 성수 한다는 자체가 도리어 완료(잉여)를 훼방하는 겁니다.

자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마귀의 일 조차도 잉여적이다는 겁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니 이 지옥이 잉여의 세계이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아
세상 종교에서 알려주는 지옥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 맛을 제대로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지옥의 잉여성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의 말이 아주 기가막힙니다.

(눅 16:23, 개정)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개정)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5, 개정)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6, 개정)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7, 개정)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개정)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가 고통스러워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통해서 물 한빵울만 제발 나의 혀에 주어서 서늘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 이 자체가 지옥 조차도 천국의 잉여를 더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의 값을 하게 되고
천국 조차도 지옥의 잉여를 더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천국의 값을 한다는 겁니다.

지옥과 천국만 그러하냐? 아니올시다.

지옥의 시민, 천국의 시민 조차도 그러하고
지옥의 예정된 자, 천국의 예정 된 자 조차도 그러하며

이 땅에 비록 둘 다 같이 발 붙여 살고 있지만

어쩌면 고맙게도 미리 이 땅에서 지옥시민 답게 살고
천국 시민 답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 간 부자 인데

부자가 잉여를 모르다 보니

건방지게 나사로님을 땅에 있을 적의 만만한 거지 나사로 인줄로 착각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가 뭔데 건방지게 나사로를 보내니 마니 여전히 종 부리듯이 부려먹을려고 하느냐 말이죠.

이런 생각은 절대로 지옥 속에서도 못고치고 못 버리는 모습입니다. 왜냐? 지옥 자체가 잉여요 부자 자신이 그 지옥이 생산해 낸 잉여품이기 때문입니다.

또 시건방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눅 16:28, 개정)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남 걱정을 한다는 겁니다.

남 걱정 해 주는 것 얼마나 성경적이지 않냐고 대부분의 성화론자들이 사기를 칩니다만
바로 이것이 지옥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눅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금 부자는 자기 혼자만이 고통당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의 남도 이 고통을 안 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호소 했는데
바로 이것이 지옥이 지옥 다운 잉여적인 생각이다는 겁니다.

지옥 자체가 잉여적이라서 남 생각 못할 것이고 타인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부탁한다는 것은 오히려 기특하기 짝이 없는 천국의 생각이지 않느냐 라고 반문 하시겠지만

아닙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지옥의 생각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고통이란 저주란 혼자만이 격을 때에

잠시 저도 헷갈려서 좀 정리를 하자면

위에 언급한 천국인의 잉여가 이 땅에서 어려움을 격었을때에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보다 더 험한 꼴 나는 사람들 7천명을 붙여주심으로써 다 같이 어려움을 당할때에 왠지 나의 어려움은 어려움 축에도 못 들어가는 것을 불쑥 불쑥 알게 됩니다.

마치 분명 자기는 어떤 일에 대해서 잘못을 했고 그 잘못에 대한 벌을 받을까봐 미리 자책을 하는 심정으로써 매맞을 준비를 하고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는데

참 잘했어요 라고 누가 막 칭찬을 해주더라 라는 겁니다.

영문도 모른채 칭찬 모드로 바뀌면서 채널이 확 돌아가 버리면

불안과 두려움이 도리어 희락과 찬송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의 당사자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가장 믿음 없는 자의 조상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장 믿음 있는 자의 조상으로써 만든

그야말로 순수 100%의 순금인 잉여품이 바로 아브라함 이다는 겁니다.

그것의 의미를 부각 시키는 것이 바로
잉여로써의 결과물이 부자와 거지 라는 의미입니다.

부자도 주님께서 만든 것이고 거지 라는 것도 주님께서 만든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의 영광을 자신 스스로가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소경도 같은 원리인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소경을 분석합니다. 잉여를 흉내내는 해석을 하는 거죠.

과연 저 사람의 소경 됨은 죄로 인한 결과 잉여일까?
그렇다면 자기 죄일까? 부모 죄 일까?
잉여에 대한 해석을 연구하고 결국은 연구대상의 실험 쥐처럼 분석하고 노리개로 삼았던 겁니다. 네 삼아도 좋습니다. 그렇다 칩시다. 놀랍게도 그들은 잉여를 생산해 낼수가 없는 겁니다. 연구 자체가 원인과 결과으로 따졌기 때문에 이미 잉여와 거리가 멀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또한 저들 바리새인의 마귀적 잉여적인 생각에
완벽하게 정면 대립되는 영적인 잉여를 발언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문서답처럼 착각한 거죠.

누구의 죄 오이니까? 라는 질문에 봉창 두드리는 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까지 평생 소경으로만 살았어야 했다는 겁니다.
졸지에 그 동안의 의문은 의문 조차도 안됩니다.

이제 새로운 예수님의 발언을 새롭게 분석하고 해석해야될 숙제가 바리새인들에게 덮친 겁니다. 이거 해석 못하면 죄의 소원이 덮친 꼴이 되는 겁니다. 우짜지?

그래놓고도 율법선생이라고? 완전 쪽 다 까는
이거 바리새인이 해결 못하면 자기들이 가짜인 것이 드러날 판국입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지옥의 잉여품입니다.
그래서 그 궁여책이 바로 나 모세 제자다 너 뭐 예수 제자 라꼬?
누가 큰 가 내기 해 볼래? 

굿 굿 굿 이것이 바로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바리새인은 결국 지옥의 잉여품이였다는 것을
발가벗기심으로 밝혀지는 겁니다. 아무나 그들의 가면을 벗길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오셔서 하시는 겁니다. 오늘날도 거짓 목사들의 위선은 아무도 못 벗깁니다. 성령만이 벗기고
그 성경의 미끼로 투입되는 자들이 바로 잉여품들인 겁니다.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성령의 잉여에 대해 반대로 보시면 악령의 잉여가 되는 거죠.

아브라함이 잉여품의 산 증인으로써
거지 나사로 또한 아브라함 품에 있다는 것은

지금 부자가 역시나 천국의 잉여를 해석 못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이래라 저래라 시켜먹는 행동들이고

또 아브라함에게 요청한다는 자체가 지옥의 잉여적인 행동이고
그 요청 내용 조차도 여전히 지옥의 잉여적이다는 겁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세요

부자는 지금 지옥의 사도인줄 모르고
선지자를 보내면 자기의 형제들이 여기에 안 올 것이다 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옥의 사도로써 이미 자신이 지옥 갈 수 밖에 없도록
지옥의 잉여품으로써 자기 형제들에게 심어 놓은 것을 남이 아닌 자신이 심어 놓은 것을
(왜 자신의 땅에서의 삶 자체가 지옥의 선지자 였기에) 취소 시킬수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무슨 이런 이런 행동을 취하면 그 원인의 결과로써 지옥에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란 죄의 잉여로써 나타나는 것이지
죄를 안 지으면 죄 안된다고 착각하는 원리와 같은 식으로 지옥간 부자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설명하니까 갑자기 무서워 지지요?

저는 지금 이 순간 이 무지 무지 쉬운 것을 정작 적어보니까

어 무지 무지 쉽던데 와 이렇게 어렵게 표현이 되는 걸까? 라고 의아해 하는 중입니다.

지옥간 부자가 지옥불의 고통에 생생하게 불타는 현실에 남을 배려하는 생각 조차도 일체 허용이 안 될 정도로 자아에 대해서 생생한 자아 뿐임을만을 본다는 것에서 다른 것이 없다는 겁니다.

자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옥간 부자의 잉여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나사로를 여전히 거지로 보는 땅에서의 차이를 하늘에서도 똑같이 본다는 것

또 여전히 땅에서의 지옥 갈 것 같아 걱정되어서 생각해 주는 그 형제들에게
이미 선지자들의 잉여적인 활동들은(종말적=완료) 이미 결정이 낫다는 것 조차도 모르는 잉여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들의 활동이란 이미 끝났습니다를 선포할 뿐이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의미도 모른채 선지자 보내면 달라진다고 보는 거죠. 선지자는 성령의 잉여품인데 지옥의 잉여품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여전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를 보내면 달라질 것이다? 아니다는 겁니다.
선지자를 보내면 보낼수록, 맞은데 또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자의 형제들 조차도 부자 자신처럼 잉여품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의 잉여품?

지옥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진노의 잉여품

그러나 아브라함 품에 있는 확정적 완료적 잉여품인 거지 나사로는
누구의 잉여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약속을 완성하신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는

긍휼의 잉여품 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화론자들은 이 잉여의 의미를

역시나 지옥간 부자의 사고방식처럼 똑같이

선지자 보내주시면 달라지고 고쳐지고 변하고 돌아 올 것이다 라고 착각하는 해석 그 자체가 악령의 잉여로써

그 잉여 그대로 성경 전체를 보는 시각이 어쩌면 일관성 있게 옆으로 시궁창으로 빠지지 않고 한다는 점에서 아주 아주 놀라운 정도로 통일적입니다.

즉 행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령의 잉여, 육의 소욕의 해석 외에는 달리 할 게 없는 겁니다.

참 위에서 잠간 언급했는데 누가 또 지옥의 잉여에 해당되는고 하니

부자청년은 언급 했고

니고데모와 나다나엘을 대립 시켰으니까

니고데모가 그 잉여의 그릇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지요
니고데모가 아무리 열심히 자기 노력으로 예수님을 사랑할려고 해도
소용없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라서 니고데모에 대한 해석도 성화론자들의 해석을 들어보면 다 틀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예정(잉여=완료)으로 해석하는 인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가인과 아벨처럼 에서와 야곱처럼

이미 미움 받기로 작정 된 자와 이미 편애 받기로 작정 되었다는 것에
현대 기독교는 안색을 붉히면서 상당히 거부를 합니다.

방종 또한 잉여이기에 아무나 방종 못 합니다.

지옥 가기로 되어 있는 자들만이 방종하고

그 방종 자체가 성화론자들의 자기 모습인데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운 겁니다.

성령이 임한 눈으로 보게 되면

방종을 공격하는 그들이 도리어 방종자들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실로암 소경을 그래서 일부러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붙여 버립니다.

즉 새로운 해석을 해야할 판국에 놓이게 된 겁니다.

눈 감은 소경에 대한 해석을 그동안 장난치듯이 하다가

이제는 눈 뜬 소경 아닌 이유에 대해서 해석을 해야 할 판국에 놓여져서

새로운 해석을 못하는 것에 해명을 해야할 판국에 놓인 겁니다.

즉 예수님은 실로암 소경만 새로 창조하는 잉여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을 이제 본격적으로 멀쩡히 눈 떳음에도 불구하고 눈 깜은
눈먼자들의 바리새인으로 소경으로 새롭게 창조를 해야만 하시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소경 창조를 예수님은 새롭게 그 순간 하시는 겁니다.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즉 지옥 간 부자가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를 여전히 못보는 소경(완료=창조=잉여)로서 지옥의 잉여를 유감없이 드러내듯이

바리새인 또한 새롭게 소경으로서 지옥을 선물로 주신 겁니다.

(사실 누가복음 전체는 잉여=완료 로서 만이 해석이 되어지기에 성령과 천사가 인간의 행함에 일체 도움없이 단독적이고 독보적인 활동으로써 다 이루어진 희년이기에 인간은 상대적으로 잃어버림속에서 잉여의 맛을 보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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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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