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의 만나

2009누가복음 2009. 1. 22. 20:35

잉여의 만나

과거의 글을 정리하다가 만나에 대한 글을 보고 다시 생각해 본다.

만나는 아무리 챙겨도 챙겨도 그 챙긴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일 자체를 만나 자체가 드러낸다.

즉 이미 완료된 잉여인 것을 아무리 그 잉여에 수고를 붙일려고 해도
도리어 완료 자체가 무시받는 의미로써 그들 덧붙일려고 하는 이에게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 썩은 의미가 되고

그 더 이상 더 가감할 필요가 없는 이미 완료된 그 완성(하늘)을 맴버만 교체 시킨 뒤에 여전히 유감없이 발휘 한다. 변함 없이 말이다. 그 완료성에는 더 이상의 흡집이나 훼방이 있을 수가 없는 그 자체로써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이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살과 피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 자체가 주도권으로써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확정짖는 사건을 벌린다.

무시 하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살과 피가 의미가 없도록 먼지 털어버린다.

그리고 맴버 교체 한 뒤에 확정된 완료된 그 살과 피에 맞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을 찾는 것이다.

이미 찾아 나섰다는 자체가 실패함이 없다는 뜻이요
이미 완료이다.

여기에 미완료는 없고 이미와 아직의 긴장도 없다.

완료 되었다는 그 자체가 모든 불완전한 것들이 두려워 떠는 것이다.

즉 완료 곧 사랑이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위기의 사건인 십자가에 모든 육체를 박는 일만 골라서 하는
그야말로 전능자 폭군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 한다. 왜 사랑은 질투 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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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8강 : 싫어버린바 된 생명의 양식 070513  우리교회  07-05-1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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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강 : 싫어버린바 된 생명의 양식 070513  이름 : 우리교회

2007-05-13 13:25:39 조회 : 20
 
18강 : 싫어버린바 된 생명의 양식 070513

http://222.231.1.74/~woorich1/student/wooristudent0705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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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글 18 : “만나”라는 이해 불가능한 이상한 양식  우리교회  07-05-1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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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8 : “만나”라는 이해 불가능한 이상한 양식  이름 : 우리교회

2007-05-13 13:24:11 조회 : 24     

글 18 “만나”라는  이해 불가능한 이상한 양식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은 흔히 인간의 종교에서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기적과 다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기적 예를들면 복권 당첨이라든지. 병고침을 모든 종교의 필수 요소로써 갖춘다든지 등의 기적은 인간을 위하여 육을 복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적은 그 반대입니다. 육은 썩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합니다. 육은 빨리 빨리 죽어야 해

그러면 정작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저주입니다.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한 자야 라고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 보호로 인해서
애굽이라는 가장 강국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구원을 사실상 원했던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작 했습니다.

인간이 시작하지 않았고 인간이 출발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기에
하나님 만의 아이디어인 기도 곧 울부짖음으로 인해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무슨 출발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압박해 들어갑니다. 고통이 날로 날로 심해지니
비로소 인간들은 여호와를 부르짖습니다.

그 여호와를 부르짖도록 하신 분이 여호와 자신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묵시적인 기도를 할 줄을 모릅니다.

인간의 기도는 그저 주문 밖에 안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적이지요. 육을 크게 확대하는 기적을 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바로 묵시적인 기도를 하게끔 하는 자로 만들기입니다.
생전 해본적 없는 묵시 곧 하나님의 열심을 요청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전쟁을 요청하는 것이 복입니다.

육 스스로가 그런 묵시적인 전쟁을 요청할 리가 없습니다. 육 스스로가 파괴될 일을 요청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영이 출발하고 영이 개시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악한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고통속으로 집어 넣어서 전쟁을 요청케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짖음입니다.

이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유도케 하시고 그 부르짖음을 듣고 여호와께서 전쟁을 개시 합니다. 여호와의 자작극에 이제 모든 육체는 여호와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만 합니다. 즉 그들의 열심의 움직임이 아니라 줄달린 인형처럼 여호와의 배치에 따라 움직이도록 꼭두각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 곧 육의 세상을 진멸하는 영의 일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기적인 겁니다.
육의 확대 풍요 복됨이 기적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작살이 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육은 작살이 나고 영의 승리만이 남겨지는 것을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자 그래서 여러 기적들은 바로 육을 철저하게 수셔댑니다.

앞에서 배운 물없는 곳으로 인도해서 쓴물로 몰아가서 육의 한계에 이르게 되니 원망이 튀어나오는데 원망하기 싫어도 나올 수밖에 없는 육의 거짓됨을 철저하게 목격하도록 함으로 육에 기대 걸지 못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놓고 병주고 약주고 해서 치료의 하나님임을 알려 주십니다. 결국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은 바로 육체라는 본색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 뿐임을 알려주고 지적받는 것이 바로 기적인 겁니다.

아 그래서 난 원망할 수 밖에 없는 나는 아니구나 예수님만이 옳으신분이구나 날 믿지 말고 예수님만 믿을 분이구나 라고 자기의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기적이 인도하는 육의 실체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런 각기 제길로 가는 원망만 하는 양같은 자를 용서하시고 세상의 물이 아닌 하늘의 음료로 채워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바위에서 쏟는 음료는 곧 예수님의 살과 피만을 먹이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희생인 십자가의 피만 용서만 사랑만 먹이시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전쟁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피를 얼마나 싫어하는 것 까지 광야에서 철두철미하게 보여주십니다.

마치 방주에서 홍수 심판을 받지 않고 은혜를 받아 구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또 선악을 주장하여 저주 받은 함과 가나안 처럼

홍해를 건너고 애굽이라는 강국의 혹독한 노예살이에서 구원해 낸 여호와를 만나고 베푸신 용서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원망하는 자를 철저하게 가려내시겠다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즉 함과 가나안 저주 하기입니다.

다시말해서 사랑은 미움을 통해서 증거 됩니다.

무엇을 지독하게 미워하는지 모르면 사랑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적을 퍼붓습니다. 왜? 무엇을 가려낼려고?
지독하게 미워하시는 것을 가려내실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퍼붓습니다.

자기를 위한 음식, 음료, 기적, 승리 등등은 올무 곧 넘어뜨리게 하는 실족케 하는 우상이 됩니다.

이 만나의 특징이 바로 일용할 하루치 양식이다는 겁니다.

즉 내일것 까지 챙겨본들 썩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아예 육체를 위하여 쌓아 두고파도 쌓아 둘 수 없는 양식인 겁니다.

뭐 이런 기적이 어디있나요?

그런데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양식만 세상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첫 번째 전쟁이 없어 집니다.

전쟁의 원인은 모두 욕심 때문입니다.

더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쌓고 더 높이 추구할려는 것이 무의미 해 집니다.

두 번째 내일 양식을 걱정할 리가 없기에 욕심 부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즉 선악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누가 옳고 나쁘고 라는 법체제가 무용지물입니다.

모든 법은 바로 양식 다툼, 양식을 내는 땅 다툼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얼마되지 않는 몇 년 뒤의 미래는 물 결핍, 양식 결핍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고상한 인간도 개로 변하여서 도둑질은 물론이고 자기 하나 살기 위해서 개처럼 멍멍 큰소리 쳐야 자기를 겨우 하루 하루 살릴수 있는

그야말로 서글프기 짝이 없는 곤고한 날이 닥치게 됩니다.
그것이 광야 라는 결핍뿐인 곳인데

세상에 그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만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왜냐? 육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아닙니다. 육을 배불리 먹일 이유가 사라지는   (목마름이 없는 양식 - 우물가의 여인)
하늘의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를 먹고 마실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먹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자기가 이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챙길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챙길 이유가 없음을 알려주는 양식이 참된 양식입니다.

그것이 만나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의 교인 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더욱더 자기유익을 위하여 땡기고 챙길려고 합니다.

그러니 만나는 곧바로 척박한 식물로 변하는 겁니다.

내일것 까지 챙겨먹겠다고 미리 땡기고 챙겨버리니깐
썩어버리고 늘 그 입에 이와 이 사이에 끼여서 열받고 짜증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리 참고 참아서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게 먹고파도
자기를 위하여 먹는 양식은 싫어버린바 되는 양식으로만 작용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10가지의 재앙 보다 더 심한 재앙이 이스라엘에게 덮쳐버린 겁니다.

그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곧 그들을 위한 자기 유익을 위한 신 곧 우상들이였습니다.

다시말래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자기 유익으로 챙겨드니깐 곧 우상처럼 작용하니
애굽의 10가지 재앙보다 더 그들을 광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 속에서도 여호와의 긍휼만 쳐다보는 자는 죄와 심판과 죽음이 묻지 않는 오히려 사랑의 매로 여기지만

매 자체만을 겁내고 있기에 애굽 보다 더 혹독한 매가 무서워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만 일관되게 외치면서
틈만 나면 모세를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 나를 위한 여호와가 때려죽어도 안되고

오로지 약속만 고집피우는 여호와 앞에 항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은 마귀다 라고 애굽으로 돌아갈려고 하는 겁니다. 못 돌아가게 막으니깐 모세를 죽일려고 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자를 다 죽이니깐
늘 마음 속에 살인 의지를 감추면서
내 가족 내 아들 딸 아내를 괴롭히는 자를 반드시 원수 갚겠다고 틈만 노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더 원망할 만한 곳으로만 인도하십니다.

어두움은 더욱 더 어두움의 모습을 드러내고
빛은 더욱더 그 어두움 속에서 빛을 영롱하게 비추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여지없이 다 폭로하시고
그 육체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긍휼을 아무 댓가 없이 퍼부어 버립니다.

그럼으로 인해 모든 입술을 함구케 만듭니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할 말 없게끔
입이 딱 벌어지겠 끔 하시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난 아닙니다. 주님만이 옳습니다. 주님 같이 거룩한 분이 나 같은 더러운 이스라엘 계의 쓰레기인

교회 속의 쓰레기인 나와는 절대 가까이 하시면 안됩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러나 바로 그런 원수이기에 사랑은 다가오시는 겁니다.

이 언발란스 한 사랑을

주님 쪽에서 예 라고 하면 아무이유 없이 예 인 겁니다.

아니요 함이 없는 겁니다.

즉 만나는 나를 원수로 만드는 양식입니다.

다시말해서 떡은 나를 가치 있다고 여기도록 하지만

말씀은 아무 기대할 것이 없는 가치 없는 죄인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겸손이요 섬김입니다.

오죽 가치없는 전무한 인간이기에 말씀이 찾아오셔서 아예 지워버리고 단절시켜서 새롭게 만드셔야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감사하게 여겨 무릎을 꿇을수 있게 되는가 말입니다.

얼마나 가치 없는 죄인 중의 괴수 였으면 .....

만나 곧 하늘의 양식 즉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살을 찢으심과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순종이 아니면?

인간은 바로 제사 지킴으로써 제물의 희생은 제물의 순종은 안보고 제사 지켰음에 빠져서 법적으로 하자 없다는 것에 빠져 살게 되는 영원한 선악의 지옥에서 못벗어나는 겁니다.

그 제사 지키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더욱더 미련하게 제물이 되어 주시는 순종하는 어린양의 피 흘림이 아니면? 무슨 수로 제사가 성립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표적입니다.

육체가 법을 지키겠다고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에 아무도 제물되지 않고 제사드리는 자만 되겠다는 것에 죽음이 양산되고 그 죽음에 피흘림으로 남을 무조건 용서하는 그 희생에

이제 산 제사는 영적예배는 사도들의 도살장 끌려가는 예수님의 운명이 된 것을 기뻐하는 넉넉한 승리에 동참되는 그 약속이 자작극으로 펼치는 믿음에 의해

믿음으로 화답하는 것이 바로 표적임을
육체의 허물을 친히 감당하시는 놀라운 사랑이기에
자기 것 하나 챙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넉넉하게 내어주심이 바로
육체의 진정한 탐심은 자기 챙기기를 무용지물로 만들게 하는 사랑인 겁니다.

만나는 아무리 챙겨본들
챙길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넉넉한 사랑의 관계성을
인간은 육체라는 공장에 쌓으면 축적이 된다는 서글프기 짝이 없는 육의 열심을
철저하게 단절 시키는 유일한 표적인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주면 믿어주겠다는 믿음 쌓기에 빠진 인간에게

만나는 그런 인간들의 체제 갖추는 종교성에
싫어버린바 되는 썩어버리고 척박하게 짜증하게 하는 양식으로써

우리를 육의 죽음으로 몰고가서 철저하게 육의 탐심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용서를 보도록 철두철미하게 낮추고 낮추시는 그 겸손이 아니면
우리는 자기자신의 탐욕에 육체에서 빠져나올길이 없음을 만나라는 표적은 알려줍니다.

이런 지적은 사랑과 긍휼만이 알려주시는 크나큰 배려입니다.

용서를 무시하지 않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지만 주님은 늘 용서로써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늘 용서로 다가오시는 그 용서마저도 이용할려고 주님의 용서를 무색케 할려고 늘 법체제에서 떠나지 않고 법으로 쌓고 챙길려고만 합니다. 그런 법을 허물어 주시고, 아무것도 없어도 용서해주신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내 죄를 용서한 분을 타인에게 증거하는 자 되도록 우리의 입술을 열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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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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