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교회이기 때문에 풀어버린 불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와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두 패로 나누심)
애굽나라와 광야교회의 차이점이 뭘까?
애굽나라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부지런히 세우고 짖고 쌓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광야교회는 세우기가 불가능하고 짖고 쌓고 자체가 통하지 않는 불가능 뿐인 할게 없는 광야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늘 바람잘날 없이 뭔가를 자꾸 짤라낸다, 깍고 깍고 짜르고 짜르고 토기장이의 손에 뚝딱 뚝딱 부지런히 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시선이 늘 애굽나라의 멋들어진 건물에 매료되어 빠져나오지 못할때마다 아니 미리 그런자이다고 아예 단정짖고 먼저 앞서서 자녀에게만 대시는 매를 들기 시작하신다.
불 뱀을 풀어버리시는 것이다.
이 불뱀의 효과는 저 애굽나라 사람이 썩여 있기에
그 애굽나라 마귀나라 사람을 뽑아내시는 작업으로써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불뱀에게 다 물리도록 하신다. (선악과에 다 빠지도록 하시고, 율법 아래에 다 가두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 불 뱀에게 물려 죽게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아는 자는
쳐다 보면 낫는다 라는 옆으로 통과 하는 말씀을 술술 믿도록 되어 있지만
쳐다 본다고 나으면 내 손에 장 지진다 라는 자들은 정면으로 서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부정한 방법의 치료는 싫타 라는 것이다. 수긍이 가는 방식으로 치료해 달라는 것이다. 과연 이 놈은 환자 맞을까? 의사를 자신이 취사선택하고 지랄이다. 아직 덜 아파봐서 그렇다. (도저히 납득 불가이다. 어떻게 문둥병을 깨끗한 물에 씻지 않고 더러운 물에 씻으라고 할까?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는 메시아가 고치지 않고, 아무리 봐도 메시아 것지도 않는 거름뱅이가 의사일까? 소경인데 창녀인데 똥파리세리인데 선지자라꼬?)
쳐다 보기만 낫습니다. 참 쉽지요. 라는 너무 너무 쉬워서 무시해 버리는 방식
이런 미련스럽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써만 일하시는데
왜 그런고 하니
이것보다 더 거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거룩이란 나누는 것, 분리하는 작업이다.
두패로 나누기가 쫘악 선명하게 누가봐도 쉽게 구별이 되는 방식이
바로 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방식, 부정한 방식이다.
기드온이 군사를 뽑는다.
군사란 자기의 전쟁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선택으로 적과 원수를 설정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래서 자기의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인에게 발탁 당하는 군사요 발탁으로 인해 사생활이 다 날라가 버리는 군사요
자신의 친구도 주인의 적이면 적으로써 싸워야만 하는 군사이다.
기드온은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군사를 뽑니다.
어떻게 뽑을까요?
우에 우에 하라 네 했습니다.
어떻더니? 어 이런자와 이런자로 나누어 지네요?
그래? 그럼 그 두 패거리 중에 작은 쪽으로 택해라?
알겠습니다.
이게 다입니까? 아니다.
이래 이래 저래 저래 해라.
기드온은 뽑혀진 그 군사를 데리고 또 주인이 시키는대로 남은 사람들에게 지시합니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 보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참 희한하지요. 주님의 꿍꿍이가 도대체 뭘까?
자 어떻게 하던?
네 이래 이래 하는자와 저래 저래 하는자가 또 둘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나누어 졌구나. 그럼 작은 쪽으로 택해라
자 이런식으로 나누어지고
그 나누어진 쪽에서 어리석은 쪽으로 미약한 쪽으로 처음자리인 역사 이전 묵시 쪽으로 뽑으시는 겁니다.
광야교회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 일 뿐입니다.
불뱀에게 물리고서도 그 불뱀의 형상인 구리놋뱀을 쳐다보라 라는 사건이 발생하니
반드시 나누어 지더라 라는 겁니다.
얼마나 주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을까요?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까요
주님의 창조에 인간들은 당연시 소외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자의 피조물이 아버지의 일에 참예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아닌 자는 아버지의 일이 뭔지 모릅니다.
자기 아버지가 아니니깐요.
한 쪽은 불 뱀 물렸는데 불 뱀 쳐다보라고? 미친거 아니니? 똑바로 해 이것들아?
자 그렇게 되면 모조리 한 방향으로 안 쳐다보면 참 좋을텐데
꼭 융통성 없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닭의 노선인 불뱀 물리는 사건이 있기도 전에 창세전에 택한 노선입니다.
그러니 융통성이 없지요. 사건의 전말도 파악치도 않고
8년 광야 개척했다는둥 그런거 8년 이전으로 돌려 버리는
무조건 역사 이전의 자아가 생기기도 이전의 상태인 광야[없음]의 노선 예정된 노선
아무리 봐도 어리석고 미련한 노선 어린아이 벤또(도시락) 습격 사건 노선으로만
나타나는 자들이 꼭 있더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두 패거리가 될 수 밖에 없죠.
그러면 두 패거리로 안 나누어 지도록 정치(분배)를 잘 해서 한 노선으로 방향을 잡을려고 해도
이제는 저 쪽에서 이 쪽과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고 꼭 반대 노선으로 나오는 겁니다.
얼마나 경사가 낫는지 보시기에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금식날에 다 같이 금식하면 얼마나 좋나요?
그런데 먹고 마시고 잔치를 일부러 금식날에 펼칩니다.
나누겠다는 겁니다.
왜 먹고 마십니까?
신랑이 왔는데 신랑 신부 결혼식 날에 언 놈이 금식하더냐 말이죠?
이 나누어진 상황을 마귀들은 뒤짚어 씌울려고
세리와 창녀와 먹기를 탐하고 소주를 즐기며 강도와 한 패거리다 라고
너무 너무 고맙게도 뒷붓치면서 자신들이 또 나누기를 저쪽이 먼저 한게 아니라.
자신들이 먼저 했다고 뒷북치면서 정치적 처세술을 부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나누기(창조)에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나누심)를 소멸로써 증식 증폭 시키십니다.
저들이 불가능한 방식인 소멸입니다.
그래서 빚진자를 일만 달란트 평생 갚아도 못 갚는 빚을 탕감해 줍니다.
사실상 용서가 아니라. 심판이였습니다.
그 심판을 달게 받는 자는 단 한 명의 문둥병자였고
그 심판을 거꾸로 해석한 9명의 문둥병자는 드디어 예수님이 쳐 놓은 올무에 걸려
걸림돌에 부딧치게 된 겁니다.
그 용서를 심판으로 해석한 자는 한 명의 사마리아 인이였고
그 용서를 문자 그대로 용서로 해석한 자는 99마리 양 이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창조와 자신의 자녀와 자기 목자로써의 자기 양을 찾는 방식이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방식이였습니다.
종말 곧 여호와의 신으로 창조 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마음으로 자기 자녀를 찾으시는 겁니다.
똑똑한 5명의 처녀는 어리석은 자였고
미련한 5 처녀는 슬기로운 자였으니 지혜의 나라에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겁니다.
똑똑한 종은 주인의 돈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원금 그대로 돌려주면서
주인님이 무서운 분인줄 알기에 하나도 안 잃어버렸다 라는 잘 지켰고 사수했다는 방식으로 자신의 종 다움을 주인의 돈을 하나도 안 꼴아먹었다는 얼마나 본전사수 본방사수를 했는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종은 주인의 돈을 잃어버릴수 있다는 생각도 아니하고서는 조심 조심 조심스럽게 주식투자하고 사업이 망하지 않는 전망 좋은 대박나는 안정감 있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턱대고 사업을 하고서 뭐든지 주인의 맡긴 돈을 허비하듯이 일만 벌려 놓습니다. 꼭 불의한 청지기 같은 모습처럼 말이죠. 꼭 불에 뛰어드는 모습이고, 망하는 길로만 들어가는 모습이고, 제단 불에 불 붙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물 뿌리는 엘리야와 같은 거꾸로 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축복의 길 넓은 길로 안가고 저주의 길 좁은 길로만 가더라 말이죠.
이것은 남은자 개념 잉여는 인간의 육에서 절대로 나올수 없고
오로지 영에 의해서만 나오는 데 이 영의 일은 무조건 육의 소욕의 반대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종은 처음부터 주님이 함께 하기에 잃어도 남고 남아도 남는 주님 자체가 남은자 이기에 나는 남은자와 함께 있다는 자신의 남은자 될려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이 남은자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종말을 증거하는 자였고
반대로 똑똑한 종은 남은자를 자기 숙제로 보고 남구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원금 그대로 남겼다고 그냥 그대로 남은 것으로 쳐 달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은 여기에 남은자(잉여) 개념을 명확하게 따져 묻습니다. 차라리 원금을 땅에 묻지 말고 은행에 넣었다면 이자라도 생겨 남았을텐데 라고 악한 종이라고
너무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입니다. 남은 잉여란 창조의 세계입니다. 그 창조를 무시했다고 (원금 남겨도 소용 없습니다.)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마로 취급해 버립니다.
이것이 종말의 사고 성령의 사고입니다. 육의 사고가 없다면 그 차이성을 알 길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봐도 양이고 자신이 봐도 양이고 남들이 봐도 양인 모든 인간들이 양이라고 본 그 양을
예수님 단 혼자만 염소라고 뒤짚어 씌우면서 창세전의 양 역사전의 양이 아니니까
백날 양의 일을 해도 염소는 염소다 라고 취급하고
그러나 아무리 봐도 염소이고 자신이 봐도 염소이고 남들이 봐도 염소이고 모든 사람들 에브리 바디 다 염소라고 취급하는 그 자를
예수님 단 혼자만 양 취급을 해 버리는데 그 시선이 바로 창세전의 예정의 시선으로만 보는 방식이다 라고 창조 곧 나누심을 실행을 하니
종말을 어떤 인간이 풀 겠습니까?
종말의 단체인 교회를 어떤 인간이 세우겠습니까?
광야(종말) 교회를?
주님이 손수 움직이는 교회는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그런지 안그런지 시험해 봐야 합니다. 물론 이것조차도 주님이 직접 하십니다.
시험을 할려면 불뱀을 풀어버리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를 풀어버리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를 광야교회에 풀어버리는 겁니다.
풀어보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도가 있고
불뱀을 풀어보면 음부의 권세가 너끈히 이기는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서 있는 겁니다.
우리가 당장 뽑고 싶겠지만 주님은 알곡이 다칠까봐
타작 때 까지 두십니다. 종말의 때 까지 두십니다. 성령의 때까지 두십니다.
이것이 더욱더 나누는 창조의 방식입니다. 아무도 이 창조를 흉내낼수 없는데
드디어 차라리 그럴바에 내가 나누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창조를 흉내냅니다.
이것이 바로 타작의 때요 육도 무르익었고 알곡도 무르익은
곡식 거두울 때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세요
들에 핀 백합화를 보세요
악인에게도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분을 보세요
내일 아궁이 불에 던질 들풀도 오늘 귀히 귀히 너무 너무 소중하게 입히시는 분을 보세요
드디어 타작의 때 종말의 때 성령의 타임에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는 자는 낙원에 가고
마땅히 용서 받아야 한다는 자는 지옥에 보내버리는
양 팔을 어긋맞게 하는 종말의 방식이
바로 광야교회를 통해서 역전을 창조를 나누심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알곡 중에 알곡, 성화 중에 수준 높은 성화 되었던 자가 쭉정이로 불에 던지우고
쭉정이 중에 쭉정이, 가리지 중에 가라지, 죄인 중에 괴수는 알곡으로 곳간에 모아지니?
어찌된 일인지?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헌 부대에 담으면 둘 다 못 쓴다는 겁니다.
쭉정이 중에 쭉정이가 작은 자였고(묵시적인 [없음] 광야성, 종말성을 보여줬고)
알골 중의 알곡은 많은 자였다는 겁니다. (역사성 [있음-원인 있는 결과의 가능성] 즉 종말성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염소를 양이다 라고 예수님만 처음자리(종말)로 해석했고
양을 염소다 라고 어떤 누구도 동의를 하지 않는 자기 쪽에서 나누는 창조(성화작업)을 주장하다가 예수님의 마음 곧 성령의 일을 훼방자로 나서게 되는 염소였던 겁니다.
용서를, 일만달란트 탕감을, 도리어 그 정도로 자신은 잘 난 인간으로 해석하도록 착각에 빠졌고
도리어 주님이 일부러 하필이면 우발적으로 삼백데라리온 빚진자 눈 앞에 지나가도록 해서
과연 그 일만 달란트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떠 보는 걸림돌에 제대로 넘어진 겁니다.
광야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기에
과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지 이기는지 알기 위해서 그 차이를 드러내는 나누임을,
그 창조를 소멸의 방식, 즉 어리석은 미련한 십자가의 방식, 불뱀을 풀어버림으로써
그 불뱀 조차도 왜 왔는지를 그 불뱀 조차도 은혜로 창조로 못 보는 자는
그 사람 자체가 음부가 되어 지옥이 되고 무덤이 되고 시체인 좀비였음을
주님의 자녀를 가려내는 방식으로 풀어버리시는 겁니다.
마귀를 잡기 위해서 선악과를 설치한 것인데 엉뚱하게 알 필요 없는 선악을 먹고 만 겁니다.
불뱀 물리게 불뱀 풀어놓고 불뱀 쳐다보라고 하니 그것은 옳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불 뱀입니다 라고 비로소 불 뱀을 봅니다.
쳐다 보기가 참 쉬울줄 알았는데 불가능의 세계였습니다.
그 불가능의 세계에 참예된 것인데
가만이 보니 거기에 누가 있습니다.
바로 인자입니다.
새 몸입니다.
우리가 불 뱀 취급해서 불 뱀이라고 악마 라고 못 밖아 죽인 선악에 의해 죽임당한 분이
너끈히 우리의 사망의 종 권세인 살인을 이기고
너끈히 우리의 미움을 선악을 넉넉하게 이기고
새 몸으로써 총에 맞아 죽어도 다시 사는 새 몸으로써 당당히 달리시는 겁니다.
새 몸입니다. 새 교회입니다. 역사화 될 수 없는 교회입니다.
8년이라는 창단 맴버가 있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매일 매일 창단 맴버 창조 맴버는 예수님 단 한 분 뿐입니다.
그 분만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를 쥔 인자입니다.
인자(종말, 묵시)를 쳐다 보는 자와
8년 된 교회, 걸림돌에 의해 9년 되는 역사에 넘어지는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 아니였죠
바로 음부의 권세로 사단의 가시로 이 교회를 나누시는 겁니다.
계속 남은 자를 뽑아내고 그 뽑아낸 것에서 또 뽑아내고
십자가 마을 둘 로 나누시고 또 그 나누어진 십자가 마을에서 또 나누시고
8년 된 우리교회 예외로 해 달라는 것 자체가 기존의 교회 특히 개혁주의의 이단성이겠죠.
고정될수 없기에 나누시고 나누시는
없애버리고 두 패로 조각 조각 내시는 분리작업으로써 주님의 살아계심을
인간에게서 증거토록 함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스스로 증거하십니다.
그저 우리는 나 라는 인간이 위에서 아래로 번제물처럼 칼로 두 조각 나누어짐을 당할 입장 뿐인 겁니다.
전쟁은 나에게 속하지 않았고 주님에게 속했기에 말이죠.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착역에서의 만남 (1) | 2009.08.12 |
---|---|
사이코패스와 찰떡궁합인 히스테리 (1) | 2009.08.07 |
인간 목회(교회) vs 예수님의 목회의 차이 (2) | 2009.07.19 |
교회에서 죽다 : 강구만 장로 (1) | 2009.07.19 |
목사를 협박하자 (1) | 2009.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