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더, 더, 더듬거림의 행복과 세미한 음성

2011년 3월 25일 금요일 오후 10:28:56  김대식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2010)




드라마 |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 118 분 | 개봉 2011-03-17 | 
홈페이지국내 kingsspeech.co.kr/ | 해외 www.kingsspeech.com/
제작/배급㈜ 화앤담이엔티(배급), ㈜영화사 그랑프리(수입)
감독 : 톰 후퍼
출연  : 콜린 퍼스 (조지 6세 역), 제프리 러시 (라이오넬 로그 역), 헬레나 본햄 카터 (엘리자베스 역), 가이 피어스 (에드워드 8세 역), 제니퍼 엘 (머들 로그 역)  


줄거리

연합군의 비밀무기는 말더듬이 영국왕?!
세상을 감동시킨 국왕의 컴플렉스 도전이 시작된다!

때는 1939년,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왕위를 포기한 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왕위에 오른 버티(콜린 퍼스 분). 권력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진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이.크! 그는 사람들 앞에 서면 말을 "더더더..." 더듬는 컴플렉스를 가졌던 것! 국왕의 자리가 버겁기만 한 버티와 그를 지켜보는 아내 엘리자베스 왕비(헬레나 본햄 카터 분), 그리고 국민들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 게다가 지금 세계는 2차 세계대전중! 불안한 정세 속 새로운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는 국민들을 위해 버티는 아내의 소개로 괴짜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 분)를 만나게 되고, 삐걱거리는 첫 만남 이후 둘은 기상천외한 치료법을 통해 말더듬증 극복에 도전하게 되는데…

세기의 선동가 히틀러와 맞선 말더듬이 영국왕… 과연 그는 국민의 마음을 감동시킬 연설에 성공할 수 있을까?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58122&t__nil_upper_mini=thumbn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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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도중에 생각이 나서 몇자 적, 적, 저 ~~ 적어 본다.


(왕상 19:11,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개역)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언어는 권력이다. 표준어는 각 지방의 언어들 속에서 하나의 지방이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그 지방 사회를 중심으로 힘과 권력이 재편성 된다. 그리고 표준화 시키는 기준이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방언과 표준어로 나누어지는 차이성을 가지게 된다. 중앙집중이 인간언어의 차이내기이다.

힘이라는 지배와 그 힘에 다스림을 받는 피지배 층으로써 말이다.

아담이 이름을 지으니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

주종 관계를 언어로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허무한 것에 복종한다.
곧 인간이라는 [허무] 요 [안개] 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다.

모든 것이 인간 죄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저주는 죄 때문에 그 형벌을 받는 것이다.

곤고한 인간의 바닥을 뜯어내는 선지자로써 인간으로부터 이름 붙여진 존재들은 다 소모품으로써 작용한다.

그 바닥의 바닥 뒤에 예수님의 죽음이 이들 선지자의 죽음과 결탁 되어 있는 것이다.

해 라는 선지자
달 이라는 선지자
낮 이라는 선지자
밤 이라는 선지자

(시 1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2, 개역)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 19:3, 개역)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 개역)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5, 개역)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시 19:6, 개역)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흰 눈 도 선지자다. 다 덮어버린다.
파도
쓰나미
태풍
허리케인
지진
추위
더위
언어도 선지자다.

이들 선지자의 특이성은 소모성이다. 심지어 방언이라는 선지자도 소모성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를 증거하고자 등장하는 소모품들로써의 선지자다.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흘리신 피를 증거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를 증거한다.


오늘 킹 스피치 라는 영화를 앞 부분 15분만 봤다.

왕 이란 또는 왕족이란 소위 권력과 힘이 집결된 자이다.
(동시에 허수아비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힘차고 당당하고 또렷하고 명쾌한 발음의 달변이
대중의 사로잡기에 충분해서 왕 다움을 발현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모세가 생각났다.
모세는 자신도 인지할 정도로 심각한 말, 말, 마~~  말더듬이다.

그런 자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삼을 때
모세는 극구 만류 한다.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공부로써 충분히 인지할 정도이다.

정말 세우고 싶다면 말빨이 잘 먹히는 자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 말빨이 전혀 먹혀 들지 않는 자를 사용하는 것이 주님의 취지이다.

모세는 힘이 없어야 하는 지도자 이어야 한다.
일체 힘을 집결 시킬 수 없는 자
하고 싶어도 못하는 자
하자 마자 그 되도않는 힘이 와르르 쭐꾸덕 미끄러져서 웃사꺼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자

언어 말빨이든 (모세)
힘이든(삼손, 다윗 왕)
정력이든(삼손, 다윗 왕)
신학이든(사도바울)
믿음이든(아브라함)
지혜든(솔로몬)
부자든(욥)
선지자든(요나)

그 어떤 것도 손 아귀에 잡을 수 없도록
오히려 상대방의 기능에 웃싸꺼리로써 작용토록 대비된 입장에서 등장한다.

정작 그런 은사들은 자신을 한 껏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로 방향(벡터)로써 (벡터인간, 마이너 인간)
마이너 기능을 한다. 빼기다. 차이로써 등장한다. 기능이다 기능

즉 정 반대로 상대방의 바닥을 뜯어내는 지옥 뚜껑을 열게끔 하는 기능이
은사다.

카리스마 있게 대중을 확 휘어잡을 정도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새는 발음으로써 삑사리 날 때 마다
(니가 무슨 지도자냐?
나는 가수다? 너가 무슨 가수냐 삑사리 나는 주제에 !!)

오히려 혼돈과 무질서를 야기 시키는 전혀 힘을 결집시킬 능력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 바로
은사다. 이런 무능은 [하나됨]은 커녕 그 무능함 때문에 분열과 충돌과 무수한 사건들로 인해 미꾸라지 한 마리로 맑은 물을 혼탁케 만드는 요인으로써 지목케 만드는 식이다.

이것이 은사 스스로가 하는 역할이고 이 기능으로써 주어지는 은사 자체가 주체로써 덮쳐진다.

양을 늑대 무리 속에 보내신다.
이 늑대들이 교회에서 천년 동안 사람(양) 안 잡아 먹고
금식을 하면서 도 딱고 이슬(마늘)만 먹고 잘 살고 있는 그 판대기에

난대 없이 너무 너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양 한 마리를 집어 넣으면
철야금식하던 늑대들이 우 우 우 ~~~ 회개 하면서 발버둥을 친다.

이제 와서 늑대로 되돌아 갈 수 없어

오늘 하루만 참으면 인간으로 환생 할 수 있어 구원이야 구원
참아야 하느니라

부글 부글 끌어오르는 원초적인 본능을 꾹꾹 눌러 가면서
눈을 감을 때 마다.

양의 특유한 냄새가 코를 자극해
입에 잔뜩 춤이 고이게 된다.

아 이러면 안돼 이러면 안돼
천년 동안 하나님 나라 운동 펼쳤고 묵시 운동을 펼쳐서
이웃 사랑 원수사랑을 외쳤건만
이제 와서 괴물로 되돌아 갈 수 없어

벽을 치고 화를 버럭 버럭 내고 잊자 잊자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귀를 막고 코를 막고 눈을 막으면서

이 종말에 던져진 목 배여야 할 양을 피하고자 아무리 몸부림 쳐도
주체할 수 없는 본능은 온 감각기능을 양을 찢고자 뾰족 뾰족 튀어나온다.

그러나 선지자 양은 영문도 모른채
양의 탈을 쓴 늑대 무리 속에서 벌벌벌 떤다.

이상하다 왜 같은 양 끼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래 고래 고함치는 소리와
무슨 놈의 양이 저렇게 힘이 좋아서 벽을 부수는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지?

그러나 그 양은 자신이 공포를 당한다고 피해자라고 우기지만
정작 평화로운 양의 탈을 쓴 늑대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은
자신인줄 모르는 것이다.

누가 과연 누구를 괴롭히는 것일까?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사건으로써 늘 터진다. 단 3초로써 짧게 짧게 끊어져서 등장하듯이

(왕상 18:15, 개역)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왕상 18:16, 개역)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왕상 18:17, 개역)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왕상 18:18,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9, 개역)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또 너냐?

잘 하고 있는 교회 다니기 운동
섬기기 운동
봉사하기 운동
충성하기 운동
이웃 사랑하기 운동
말씀 실천하기 운동
성전 바르게 거룩하게 하기 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
묵시 종말 운동

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운영이 되고 있는 그 질서를, 시스템을, 바벨탑 구원의 통로를,

파토 내는 이 양(폭탄)은 정말로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괴롭히는 자다.

(왕상 18:17) 『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 엘리야 너냐』

바로 이런 선지자들의 언어가 바로 기존 표준언어 곧 소통이 되는 언어를 깨는
말더듬과 같은 혼돈 속으로 몰아가는 소통불가인 단절 언어이다.

대화는커녕 말장난 친다. 소통이 될 리가 없다. 대화는커녕 아예 반대를 위한 반대다.
모든 언어를 끊어버리는 바벨탑 결집언어에 단절언어이다.
아예 말을 썩지 않겠다는 심뽀로써 다가오는 언어이니
상대하면 할수록 손해다.

그렇다고 피해도 소용없다.

괴로울 뿐이다. 말이 안 통한다. 말이.

방언이다.

다른 세계의 언어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다.
방언이란 무조건 딴나라 말 딴나라 언어로써
표준언어인 권력 소통언어를 파토 내는 심뽀 뿐이다.

말더듬은 잉여다. 방언이다. 성령의 언어다. 십자가 언어다.

어떤 접촉점도 있을 수 없다.

겨우 접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음 뿐이다.
그 죽음 뒤는 그 어떤 것도 장담 못한다.

성경의 언어는 바로 이런 방언이다.
못 알아 먹게끔 하는 불가능 언어다.

그런데 인간은 소통이 가능한 언어요
교육이 가눙한 설명가능 이해가능으로써
또 운동을 펼친다.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써
다시 제 2의 방주인 바벨탑을 세운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대화의 물꼬를 틀것이며 구원을 문을 반드시 열겠다는 뜻이다.

힘의 결집이다.
방주의 비밀을 파악해서
역청이라는 새로운 지식으로 흡입 모방 카피해서
다시 바벨탑을 제 2의 방주로써 투사시킨다.

물 폭탄에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약속의 비밀을 해석해 내었다는 취지다.
(과거부터 있어 왔던 계시록의 비밀 구원의 비밀 다 이런 류다)

그러나 그 물 폭탄이라는 종말인 성령
곧 임의로 자기 멋대로 부는 바람을 누가 캐취 할 수 있으랴?

생뚱맞게 물폭탄이 아니라 언어혼란 폭탄이 떨어지니
아무리 에덴동쪽의 구원의 길을 딱아도
소통할 길이 없어 딱아놓은 길 단 한 사람도 밟지 못하고
다 흩어지고 만다.

교회란 이렇게 계속 흩어지고 흩어지고 짤라내고 짤라내어도
장소 시간과 상관없이
그 어떤 편리도 상관없이 헤쳐모이는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모이는 곳이지

이 주의 이름 만으로 충분한데
다른 무슨 무슨 운동의 명분을 가지고 모이면
수시로 언어폭탄을 던져야 할 것이다.

과연 소통인지 아니면 단절인지?

주님의 이름은 세미한 음성이다.
즉 무시받는 것을 유발케 하는 상대방의 의식을 도출 시키면서 오신다.

큰 지진
번개
벼락 천둥
큰 비바람

누구든지 눈치채고 움츠리고 본능적으로 피할수 있도록
감각화 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 것이 주의 이름이다.

주의 이름은 그 반대다.

모르도록 오는 단절성이다.

이것이 바로 말더듬이다.

언어파괴다.

대화로도 접근 불가
소통으로도 접근 불가
(화염검을 든 세계이다)

너무 높아서?
너무 커서?

아니다.

너무 너무 작아서
너무 너무 안들려서
너무 너무 싫어버린 바 되어서
너무 너무 고운 모양이 없어서
너무 너무 초라해서 풍채도 없다.
너무 너무 새까맣게 타서 화상입은 얼굴과 마주치기 싫은
얼굴과 얼굴을 만나기는커녕 처참하다.

너무 너무 심하게 말을 더듬어서 말빨이 먹히지 않는 왕이다.

안쓰럽기 짝이 없다.

(즉 은사란 상대적인 기능이다. 히틀러는 상대방을 말빨로 휘어잡는데 달변적인 기질과 웅변잡기로써 백성들을 속이는데 혼을 빼버렸다. 그것에 다수의 대중들은 힘을 실어주고 집결시켜 그 어떤 벽도 없이 다 뚫어버린다. 바벨탑 완성이다. 이 악의 탄생과 학장을 배경으로 깔고(창 11장) 등장하는 것이 아브라함 우상조각가 이다(창 12장).

그러나 상대적인 영국의 조지 6세 왕은 중앙집권은커녕 서로 안할려고 사임하는 가운데 등떠밀려서 세워진다. 무능하기 짝이 없고 초라하며 아무도 기대걸지 않는 J M 절망 뿐이다. 이 단절 속에서 펼쳐지는 성령의 일은 항상 이런 식이다. 오직 주의 주 되심의 창조만이, 십자가만이 개입할 뿐이다. 조지 6세 왕은 본인도 원치않고 치명적인 결함을 한껏 지닌채, 아니 말더듬이는 달변가 히틀러와 대립된 상태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무자격증의 언어치료사라는 불의한 선지자의 도움은 히틀러를 이기기는커녕 자신조차도 못 이기는 어중이 떠중이 왕일 뿐인 모습으로 전락시킨다. 돕는 건지? 방해하는 건지? 불도 안붙는 장작나무에 물 뿌리기라는 채널돌리기, 가로지르는 탈주만 있을 뿐이다. 항상 이런 어리석음의 비밀로써 일관하는 강력한 힘의 최고봉 바로왕이 세워져야? 겨우 물에서 죽다 건짐받은 모세가 대립으로써 소모품성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정적인 마이너(비주류)의 모습이
메이저(주류) 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

불의한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 보다 훨씬 더 나은 지혜이다.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바로 이런 불의한 모습으로 오겠다는 것이다.
불의한 언어로만 오겠다는 그 단절성이

십자가의 언어이다. 방언이다.

(이 뛰어난 변주곡은 모든 경직된 틀을 가로지르는 탈주로써 잉여를 맛보게 하는 유일한 창조다.

(시 34:7,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 34:8, 개역)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9, 개역)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10, 개역)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1, 개역)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 볼 지어다.  (출 14:13)

선악의 힘과 권력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창조한다.
힘으로 모든 것을 뚫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는 긍휼로써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희년을 이룬다. 세미한 음성 곧 무시받고 조롱받았던 그 죄성을 신체박스에 담아서 보여주는 확정적인 사랑이다. 다른 완료란 없다.

부정적인 언어야 말로 기존의 언어를 파괴시킨다. 이 잉여야 말로, 이 변주곡이야 말로, 이 주님이 직접 찬양하는 새노래야 말로 모든 것을 가로지른다.

(시 33:3, 개역)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시 40:3, 개역)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96:1, 개역)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 98:1, 개역) 『[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시 144:9,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149:1, 개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사 42:10, 개역)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계 5:9, 개역)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 14:3, 개역)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


아무도 못 알아먹는다. 이 새 노래는 아무나 못 부른다. 방언이다.

그저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혼동과

잘 통하고 있는 그 소통의 관계를

뚝뚝 끊어버리는 모습으로만 온다.

메이저 언어로써 권력화 된 언어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삐로써

굴러들어온 방언이

주인장이 되는 언어로써 (팔을 어긋나게 - 전복)

십자가의 언어는 아주 심하디 심한 말더듬으로써, 속삭임으로, 듣낄락 말락 세미한 음성으로

손가락질을 유발(이질적인 방언에 위기감을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선악언어를 치고들어오면서)하고, 손가락질 받는 모습으로만 일관한다.

살인을 (법적인 정당방위, 거룩실행이라는 법언어가 반드시 튀어나오도록- 나는 이래 이래 정당했는데? 법을 지켰는데? 제사를 드렸는데? 분명 법을 행했음에도 불구한 정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살인과 이어지는 그 아이러니의 죄의 소원을 들추어내면서 등장한다.) 유발케 하면서, 살인의지인 지독한 적개심을 받는 미움받는 모습 죽임당하는 모습으로만 일관한다. 성령의 소욕이기에 육의 소욕인 살인을 들추어내면서

우리 속에 파고 들어온다.

이 죄성을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의 피로 덮어준자는

다윗이 말한 방언에 아멘 할 것이다.

유일한 행복이다.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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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11-03-26 12:13  

노래를 배운 적이 있었다. 노래를 배울 때 마다 자꾸 힘 빼란다.
자꾸 잘 부르고 싶은데
소리가 잘 나오기는커녕 삑사리다.

힘 빼 힘 빼

피아노로 예를들면 멋진 곡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자꾸 힘 빼란다.
1년 내내 도 도 도 도 만 친다. 힘 빼 힘 빼 힘 빼

광야란 교회란 힘 빼는 곳이다. (목이 곧은 잘난채 하는 백성만 모이기 때문이다.)

단절 뿐인 성령의 전이다.

믿음으로 잘난채. 행함으로 잘난채 그러나 상관 없다. 삭제(단절) 뿐이다.
신학으로 잘난채, 철학으로 잘난채.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거 해서 박살 나야만 하는 곳이 성령의 전이다.
정치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정치 해서 박살 나야만 하는 곳이고
잘난체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잘난체 해서 박살 나야만 하는 곳이다.
멋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 살아서 박살 나야만 하는 곳이다.
뭘 해도 상관 없다. 묵시 운동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묵시운동해서 박살난다.

이 간섭이 있다는 자체가 사랑이다. 사생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의 주 되심만 있을 뿐인, 남기는, 족한, 완료인 빈자리 만들기 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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