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자리에 서기 (죄수복 입히는 성령의 부정적 집단 보편 판대기)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오전 10:17:17  김대식

선지자는 성질 더러운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자이다.
차라리 거짓선지자야 말로 마음씨 넓은 자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런 참과 거짓의 구분은 그들 자체 내에서는 없다.
즉 어떤 누구도 구별하거나 차이를 가름할 수가 없다.

오직 예수님이 새로운 기준(즉 기존 기준을 염두한 상대적인) 아래에서 참과 거짓을 나누이고(창조) 그 새창조로 인해서 참과 거짓은 반드시 돌출(우발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어지는데

예수님이 앉은 자리가 죄인의 자리이다.

단순히 죄인 죄인이 아니라.
차이나는 의인을 슬슬 끍는 기능(은사)로써의 죄인이다.

바리새인이라는 당대의 최고의 의인 점잖고 이웃사랑실천의 대가로써
어떤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않는 악플러가 없는

이 완벽하고도 완벽한 자를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에서 서서 끍어 댄다.

졸지에 천사가 한 순간에 악마로 변하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해야 한다.

그리고 참선지자는 삐닥하게 이런 천사와 같은 이스라엘 무리들을 악마집단으로 몰아가는데
몰입해 버린다.

그것도 죄인이라고 취급받는 부정한 것을 잔뜩 몸에 지닌채(심판을 몸에 장착하니 의인 바리새인의 눈에는 악마가 아니고 무엇이랴?)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치닫는다.
(미래의 심판을 미리 앞당겨 자신의 신체에 담고서 - 에발산
현재의 평강을 누리는 자들과의 차이성에 놓인다.  - 그리심산)

이 부정적인 불륜의 스캔들인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헤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저들의 가면 속을 들따(들여다)볼수가 없다.

저들의 가면을 벗기는 방법은 딱 하나다.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하는 방법.
저들의 주특기 기능인 주님이 심으신 악마의 기능을 발휘케 하는 방식이다.

곧 나 자신이 재를 뒤짚어 쓰는 것이다.

법을 쥐었기에 주특기가 발휘하지 않고서는 못배긴다.
아무리 말려들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에 다짐을 해도 주특기가(자리가) 사람을 다루지
사람이 주특기를 다루거나 사람이 자리를 변화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 값을 사람은 자리의 주특기(기능:은사)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비언약의 자리가 그에게 덮치면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아무리 어중이 떠중이 바보같은 더러운 악마 취급받는 자라 할지라도
어떤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사람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리(기능)가 중요하기에 언약의 값을 톡톡히 하도록 되어 있다.

자기 스스로 부인을 하지 않아도 언약의 값을 해야 하기에
재(불심판에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 찌끄래기 먼지)를 뒤짚어 씌우면

꼭 차이가 나는 것들이 자기의 은사(악령을 씌우신) 값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주특기를 발휘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듯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정죄하는 위치에 서버렸다.
그 법의 위치의 판결이 그 소유성이
반대의 소유성과 충돌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주님의 기능과 충돌한다.

그들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막는 기능을 무의식 중에 발휘한 것이다.

또 가난한자를 위한 희년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는 기능으로(이유만으로)
향유를 깨뜨린 여인을 화를 내면서 정죄한다. 졸지에 가해자로 나선 것이다.
가해자란 피해자와의 차이성이다. 그런데 항상 그 피해자는 마조히즘 환자가 아니라
그 어떤 폭력성의 피해도 오직 피해자는 단 한 분 예수님 외에는 없다.

욥이 세 친구들의 신앙(신념)횡포와 마귀의 장난에 자신이 피해자 라고 울부짖고
밤새도록 몸이 건지러워서 긁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만
정작 미래완료인 예수님의 고난을 보고서는
입을 막는다. 자신의 고통은 고통 축에서 낄수가 없다고 머리를 쳐박고 입을 틀어 막는다.
그저 감사 뿐이다.

그리고 욥은 자신이 분명히 그 고통 속에서 힘들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새 싹 잊어버린냥
욥은 선지자로써 자신이 당한 것을 주님의 자녀에게 뒤짚어 씌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불 세례이다. 불 속에 집어넣어야 살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저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구원의 동앗줄이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는 자신이 평강 평강을 외친만큼
자신이 알고 격은 그 기능의 자리 값을 하기 위해
오로지 자신의 진심어린 밧줄을 던진다. 썩은 동앗줄이다.
다른 밧줄을 던질 수가 없다.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 값어치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누가 자기고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고플까?

혹시 주님이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을까봐 전전긍긍 근심하신다.
듣고 깨달고 내게 고침이 될까 내가 두려워 떤다 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괴상한 취미 아닌가?

가룟유다야? 니가 맡은 역할을 해야지?

전혀 생각도 않던 가룟유다가 그 말을 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자신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고 팔아넘기는 일을 실행하라는 취지이다.

가룟유다가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 자신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예수님은 창세전의 계획된 그 생명의 언약 대로만 되어야 한다는 걱정으로
가룟유다가 빨리 실행에 옮기라고 스타트를 끊어주시는 동기유발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주의 주 되심은 주 께서 주님 자신을 치시는 창세전의 예정된 십자가의 사랑 만을

오로지 실행할 뿐이다.

예수님이 죄인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그 자리에 섰다는 것은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밖기 위함이다.

그 이유 하나 만으로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에 앉는다.
예수님의 자녀는 의인의 자리에  넢 쭉  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압샵하게 그 자리는 빈자리로써 차이나게 만들고(마이너 사건 : 빼기)
도리어 죄인의 자리에 앉는다.(선지자도 그러했고 성도도 그러했다. 믿음의 선배들이 다 그러했다. 히 11장)

모조리 다 죄인의 자리에 다 앉다 보니 마귀는 어쩔수 없이 그 빈자리에 앉아
쭐꾸덕 미끄러지는 십자가의 예정에 걸려들게 된다.

주님의 자리에 앉아버리는 하만처럼 클라이막스에 십자가 진가를 발휘케 하는 역할을 한다.
주님의 자녀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죄인의 자리에서 이 십자가의 지혜를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그리고 마귀가 씌여진 자들은 자기자리가 없이 오직 마귀가 앉아버린 거주하는 집이 되어서
마귀의 그릇의 역할인 진노의 그릇의 값만 하다가 지옥에 갈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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