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사건(차이 나게 하는 빼기)

플러스(더하기:일치:합치기)와 차이 나게 하는 빼기 (거룩:나누기:분리)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오후 5:49:50  김대식


사건이 주체가 되어서 벌어지는 현상은 곧 창조가 된다.
창조란 곧 거룩함이 행사,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나누임, 빼기 이다.

메이져와 마이너의 분리, 다수와 소수의 분리이다.
힘 센 것과 약한 것의 분리 작업이다.
일치(우상)와 차이(약속)의 분리다.

할례란 남성생식기 끝을 끊어서 분리 시킨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이다.
전쟁도 하기 전에 분리 시키는 나누임 곧 심판으로써 차이나게끔 한다.

그 차이성이 바로 주님이 찾는 죄인 곧 심판받은자 죽은자 이다.

전쟁도 치르기 전에 할례 곧 분리(차이)라는 거룩한 작업이 없으면 거룩한 전쟁은 성사 되지 않는다.

기드온이 군사를 뽑을 때도 일치성을 추구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
무조건 차이가 나는 소수 로 뽑는다. 차이성이다.

이 차이성이 곧 저들 적군과의 사고방식과 유일하게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사건이 벌어지면 대부분 힘과 다수가 있는 쪽으로 일치화 된다.
목사 까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스라엘 속에서 다윗을 빼내시는(마이너) 차이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원치 않았던 다윗이 막상 빼내임을 당하는 쫏겨남을 통해
분명히 이스라엘인줄 알았는데 악마의 터였는줄
밖이 라는 조건이 아니라. 빼내임을 통해서 즉 차이성을 통해서 알게 된다.
즉 속에 있어도 차이가 난다. 늑대 소글에 보내는 이유는 차이성 때문이다.

99마리 양에게서 빼내시고 차이 차별 구별화 시키는 1마리 잃어버림이 곧 거룩이다.
나누임이 바로 창조이다. 창조란 과거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창조라는 은혜는 계속 계속 확장 된다. 증식된다. 미래완료로 다 이루심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향유를 부은 여인을 가난한자 돕기 일치성으로써 욕하고
바리새인도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거룩한 율법 지키기의 일치성으로 저주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거룩한 율법을 차이성으로써 이 두 여인을 기념화 시킨다.
졸지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굴욕을 당한다.

바로 그런 제자들도 계속 차이나게끔 창조라는 거룩함으로써 빼내시기를 계속 시도하셔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로 직행 하심이다.

그런데 수제자 베드로는 또 끝까지 일치성을 추구한다. 우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구나

그런 베드로를 빼 내시는 방식은 바로 무시받아 마땅한 전혀 귀한 것이 없는 존재감인
닭으로부터 지적 고발을 당하는 수모를 격게끔 한다.

그 수모가 수모가 아니라 빼내시는 방식이다. 사람의 일인 마귀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는 빼내시는 방식은 내가 무시하고 저주해 버린 며느리 개같은 이방여자 다말로부터
도리어 화형(저주)이라는 불 속으로 불 바깥에서 빼내임을 당하는 방식이다.

이 빼내는 구별화 차별 차이화 가 바로 약속이지
빼내이는 방식이 없는 그 자리 자체를 고수하는 것은 모조리 우상이다.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한다.
바리새인은 일치성들을 기도라고 잔뜩 내 놓는다.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이 땅에 없었다.
그러나 세리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그래서 구석이다. 차이가 나니 찌그러져 있다.
모든 인간이 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노 세리를 돌삐 들어 심판할 기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의인이냐고 물으신다. 보편적인 자를 인간은 눈 여긴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이다.

(눅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눅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차이나는 자에게 외부의 약속을 개입 시킨다. 반칙이다.

그러나 이 차이성은 예수님만의 고유권한으로써의 분리작업 곧 거룩이다.

인간이 차이성이라는 조건을 자신을 행해본들 도리어 자기 꾀에 넘어가는 꼴이니
차별은커녕 더더욱 일치성을 추구하는 꼴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가 없다. 육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나는 죄인 중에 괴수 라는 표현도 외부에서 벌리는 작업 때문에
차이날 수 밖에 없음을 당해 버린 십자가의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사도바울을 빼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빼낼수가 없다.

매일 매일 빼내는 방식이 외부의 십자가의 개입이다.

다 이루심은 십자가 뿐이기 때문이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18:12, 개역)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3,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눅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거룩은 차이나는 한 마리에 창조의 사건 곧 십자가의 빼내기로 펼쳐진다.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는 차이나는 빼내시기로써 약속을 성취 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혜는 일치성으로써 약속(십자가)이 벌리는 전쟁 앞에
더더욱 결집성을 보이도록 되어 있다.

이 일치성이라는 비언약 곧 우상을 깔고
언약은 차이나게 증거 된다. 


ps

주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건성으로써 기능 곧 은사를 부여했다,
남자의 차이는 여자이다.
어른의 차이는 어린아이다.
건강한 자의 차이는 병자이다.
의인의 차이는 더러운 죄인이다.

(눅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잉여라는 찌끄래기 부스러기는 큰길을(우상)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차이나는 좁은 길(약속)이다.

곧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개 입니다.
맞습니다. 저 심판 받아 마땅한 저주받은자입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래기(잉여)를 먹지 않습니까?
그 잉여라는 은혜 없으면 안됩니다.

부쓰래기 주시옵소서. 십자가(뿌스래기)를 거두지 마옵소서.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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