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몰고 오신 현실
 
2011-04-02 09:54:20 이름 : 박윤진


요한복음 17장은 마치 산 정상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이 관계라는 용어 속에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어 17장에서 왼쪽을 보면 16장 이전 말씀들의 깊은 뜻이 모두 다 보이는 듯 하고, 오른쪽을 보면 18장부터 시작되는 체포, 재판,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등이 숨가쁘게 전개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마치 산 정상에서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는 듯이 보입니다.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분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사실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제자와 제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는 자 속에서 동일하게 투영되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결국 하나됨이 되고 그 하나됨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입니다.

인간은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17장을 천천히 읽어보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장 1절)

우선, 예수님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예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상호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광 따로 아버지의 영광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의 영광은 공유된 영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신 분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광은 단순히 자신의 몸에 고정되고 마는 소유의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광은 인간의 몸을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영광은 자신의 몸이 발산해 대는 욕구 충족이기에 그러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긍정적으로 채워지는 것 중 가장 황홀하게 완벽하게 충족된 것을 인간들은 영광이라고 하기에 그 영광은 죄와 같은 명찰을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충족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가지신 채, 아버지와 영광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어떤 자들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구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이고 아들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아버지와 아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마치 축구선수끼리 주고받는 공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 또한 아버지와 아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 목적이므로, 아버지가 단독으로 영생을 주기로 결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생을 주고 안주고의 문제는 아버지가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쪽에서 아들 쪽으로 “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는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는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까지 주어야 영생문제가 해결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이제 만민 중 영생할 자와 영생 못할 자를 나누는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아들안에 있는 모든 자는 영생을 받습니다. 영생을 주기로 두 분이 결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만민을 다스리시므로 아들 밖에 있는 자들도 다스리시지만 그들을 다스리는 기준은 영생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성도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결정을 하실 자가 아들로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주고 받은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들을 내게 주셨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내게 주신 자들은 반드시 이렇게 됩니다라는 선포가 아들에 의해 행해질 뿐입니다. 아버지가 평가해보니 구원받은 자들에게 이러 이러한 자격이 있어서 아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이 영생 줄 권한 있음을 알릴 목적으로 인간들이 보내진 것입니다. 반면에 그 외의 사람들은 아들이 영생주지 않을 권한 또한 가지고 있음을 알려 줄 목적으로 있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생명과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전부 넘겨주었음을 알려주기 위한 광고판 역할을 하기 위해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아들, 예수님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그냥 이 육체의 목숨이 끊이지 않고 계속 생존하는 것입니까? 영생의 권한을 부여받은 아들의 영생에 관한 정의(定意)는 참으로 놀랍고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가 영광을 공유하고 서로 누군가에게는 영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기로 주고받으신 완전 폐쇄된 것이므로 도대체 인간쪽에서 어떻게 그 분들을 객체 삼아 탐구하고 알아챌 수 있단 말입니까? 벽, 엄청난 벽에 부딪치고 말죠.

영생은 곧 참 하나님과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17장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참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 2절에서 자신과 영광을 나누시고, 자신에게 어떤 인간들과 영생과 만민지배권을 주신 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하나님이 단독으로 어떤 분이라고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계속 나옵니다만, 참 하나님의 개념은 반드시 그가 보내신 아들과 연결될 때만 등장합니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A -----> B

A가 창조주이다, 선하다, 사랑이 많다, 하여튼 굉장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A는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특정(特定)합니까?

그 대단한 A가 보낸 자가 바로 B이다. 이미 육체로 특정되어 계신 예수님(B)에 의해 A가 자연스럽게 특정되는 것입니다. B를 통해서 A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A가 여호와로 특정되어 있지 않느냐, 이스라엘의 그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사건을 일으키신 그 분으로 A를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특정됨이 육체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갔다왔다, 하나님을 만났다 혹은 예수님을 만났다 등등..... 하나님의 특정화는 이름을 통한 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혹은 선지자 중 일부가 하나님의 음성 혹은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을 뿐입니다. 뒷모습을 보거나....

그런데 이것은 공개된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이 한 육체를 통해서만 보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확실하게 공개되지만 그 공개는 오히려 본다고 하는 자를 보지 못하는 자로, 듣는다고 하는 자를 깨닫지 못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수순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를 유발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육체는 그들에게 봄과 깨달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스스로 보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들의 봄이 되어 주시고, 깨달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이란 바로 이러한 앎입니다. 즉, 공개되어진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수집하고 논리적으로 쭉 줄 세워 설명가능하고 이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보지 못함과 깨닫지 못함을 죽이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의 앎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송두리째 대체하시는 작업입니다. 인간 쪽에서 시도한 알기가 아니라, 인간의 알기를 모름으로 몰아넣는 별도의 육체가 따로 준비되어 있음 자체가 앎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체를 가지고 계신 터라, 별도의 육체를 가지고 버티고 있는 인간과 하나된다는 것은 곧 육체의 해체, 죽음조차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인 것은 죽음조차 초월한 어떤 분이 지금 육체의 해체를 준비하고 계심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은 특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 육체로 특정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을 죽음조차 초월한 분으로 보내신 자가 바로 참 하나님이 된다는 역방향만 확인되는 것입니다. 결국, 참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 통해서만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지요.

위 그림에서 A(참 하나님) ----->B(예수님) 이지만, 결국 A가 참 하나님이라는 증명은 A <------- B(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A가 참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면, 여전히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과 "그냥"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예수님 스스로 인간의 앎이 되는 방식의 영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생명까지 주관하고 계신 참 하나님이 실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생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그의 죽음으로, 즉 사랑으로 죄인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앎이 덮쳐 온 것입니다. 이 덮침의 의미는 원래부터 성도의 용도가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발견되어 지는 것입니다. 원래 참 하나님 안에 있었던 자들을 참 하나님께서 예수님안으로 보내셨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만 성도가 성도로써 발견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의 피와 결합하여 성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만, 피안에서만 참 하나님 안에서 원래부터 있었던 자로서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피와 결합되어 또다른 독자적 영역을 갖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가 원래있었던 참 하나님의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자리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사랑의 자리였음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본래의 자신을 품고계셨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그제서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이며, 그 앎이 바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을 아는 방법 그대로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게 되는 결론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을 아는 앎이 성도에게 덮치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렇게 영생의 삶이 정의되면 17장의 말씀들이 새롭게 조명됩니다.

8절 말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컨대, 위의 8절 말씀 중 등장하는 안다, 믿었다라는 말이 주어가 “저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내막이 읽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 영생 안에서 참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됨을 그대로 투사받고 있는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들만의 앎과 그들이 생산해 낸 믿음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8절의 말씀은 20절에서 제자들의 말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확장되는데, 여기서의 믿음도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대로 복사되었음과 같은 말입니다.

참하나님 --A--> 예수님 --B--> 제자 --C-->성도들 로 도식화 할때

B, C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의 관계가 그대로 B와 C로 투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A의 관계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구체화 고정되는 관계이므로, B, C의 관계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명확하게 구체화 고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명확하게 구체화 고정된다는 말을 어떤 뜻일까요?

23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위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우선 내가 저희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믿는 성도 안에 계십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위 두 그림을 합치면,



이 그림에다 요 17: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라는 말씀을 감안하면 그림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사도바울의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씀까지 고려해서 그림을 그려보지요...




이제 23절의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말씀, 그것이 왜 십자가 사랑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위 그림에서 성도는 안 밖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둘러쌓여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이 성도 밖의 예수님과 성도 안의 예수님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위 그림은 성도는 안 밖으로 예수 말고는 아무런 독자적 영역이 없음을 뜻합니다. 성도가 예수를 품고 별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씀은 현재 성도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은 인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죄라는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성도의 안팎을 모두 예수께서 둘러쌓고 있다는 말씀은 원래 성도는 안팎이 모두 철저한 죄 덩어리 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님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그 이름은 여전히 예수인 것입니다. 성도는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참 하나님, 예수님,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 아래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함은 한 몸을 향하신 예수님의 처절한 예배, 즉 십자가 사랑만으로 가능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위 그림은 이제 아주 단순해 집니다.


 

이렇게 됩니다. 참 하나님도 성도도 다 이 그림 하나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길게 예수님이라는 참 하나님과 제자, 성도의 통일체를 완성코자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일체를 툭 튀어나오게 할 배경, 즉 세상을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자신 속에서 이루어질 우주의 통일체와 그 통일체를 공격하고 이제 공격당할 세상을 확정하는 작업을 십자가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입니다(6절).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이유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9절). 이제 예수님을 세상을 더 이상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11절). 세상은 제자를 미워합니다.(14절). 18절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결국 23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목적이 성취됩니다.

즉,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일체가 배양되고 있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죄의 공장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주의 완성된 통일체가 자라는 것입니다. 왜 굳이 죄의 공장 속에서 일까요? 그래야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성도를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이 세상과 차별화되며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은 그냥 죄 덩어리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당해보니 세상이 비로소 세상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성도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세상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완전한 죄와 의와 심판의 배경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껏 제가 드렸던 아주 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압축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과 성도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분리된 채 서로가 죽었다고 하는 이 형국!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몰고 오신 현실입니다.



이근호  11-04-02 11:49 
 
세상 모든 신학이 마귀의 솜씨였음을 폭로하는 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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