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떻게(How)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냐(Who)의 문제이다.

2009-10-28 12:51:26  이름 : 박윤진
 

신앙생활에 갈등하고 있다는 분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확인받고 천국행이 보장되는가,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흥되고,
어떻게 해야 가정이 화목하며,
어떻게 해야 건강과 재물과 영생까지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는 지 궁금하고 또 궁금합니다.

오늘 날의 우리 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바로 '어떻게'에 빠져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은 천국을 확보할 수 방법으로 제사를 제시했고 예배의 장소를 중요 요건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된 병자는 어떻게 하면 가장 먼저 물이 동한 연못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매여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조치는 간단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가의 여인도 니고데모도 베데스다의 환자도 결국 "내가 어떤 분을 만났다"라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어떻게를 질문하는 마음 심보에는 그 어떻게를 뿜어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는 죄악이 들어 있습니다.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방법만 안다면 나 같은 훌륭한 사람이 그대로 해 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금 어떻게를 발설하고 있는 그 인간 자체를 마귀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이 탐욕과 살인, 음란 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무엇을 해서 죄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냥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법을 몰라서 죄인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방법을 써도 그냥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어떻게'라는 질문은 애시당초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죄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이 질문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주님께 했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자신이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결국 그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바로 그 죄인성이 그대로 표출되는 바로 그 질문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누구시길래 저 같은 마귀 새끼도 구원하십니까? 누구시길래 저 같은 창녀도 깨끗케 하십니까? 누구시길래 자신의 살과 피를 참 양식과 음료로 저 같은 죄인의 괴수까지 먹이십니까?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분은 바로 내가 찔러죽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핍박하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단 한번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복음의 주인공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한량없는 은혜를 때에 따라 시절을 쫓아 부어주십니다. 그 증거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주여 누구십니까를 내뱉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입에서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라는 고백이 연달아 터져 나오게 하는 피의 현장입니다. 십자가는 어떻게를 고집하는 인간에게 나는 어떻게를 질문 조차 할 수 없는 살인자 맞습니다를 증거하면서 동시에 그 위에 달리신 분이 바로 사랑이라는 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자가는 긍휼을 받은 자와 긍휼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해내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들이 맞기에 십자가 앞에서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자백할 것이지만, 왠 은혜인지 그 중 누군가 구원되었다면 그것은 그가 어떻게를 잘 알아맞추어 실천한 공로가 아니라, 사랑되시고 믿음되시고 소망되시는 그 분이 친히 사로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죄인이란 없습니다. 용서받을 만한 원수는 없습니다. 그저 진짜 피해자되시는 그 분이 사랑하고 용서하기로 택하신 것 뿐입니다. 이 상황에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라는 질문은 나는 오직 나의 가능성에만 관심있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가 눈 앞에 보이던지 말던지 그냥 내 몸뚱아리에서 터져나오는 행위의 법칙에 의지하여 살아남고야 남겠다는 마귀다운 발생일 뿐입니다.

질문자 : "그럼 그 분이 선택하지 않으시면 어떻합니까?"

답변자 : "뭘 어떻합니까? 원래 마귀가 갈 곳인 지옥으로 가면 되지.... 죄인은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원래 지옥이 내 자리예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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