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름 : 박윤진 2008-02-12 00:48:14 http://cafe.daum.net/holyyounger/EodA/65

“도대체 원인을 모르겠어요. 그 까짓 돈 때문에 설날 아침부터 친척들끼리 싸우고 울고 불고 말이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런 푸념 섞인 질문에 제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답변이 뚝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상, 우리는 그 말씀을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인입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그 두 주인은 바로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한 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을 미워하고, 한 쪽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반드시 다른 한 쪽은 무시하고 내어버릴 수밖에 없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재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과 재물을 마치 라이벌처럼 나란히 인간의 주인으로 선언하고 계신 것일까요? 재물에게는 도대체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지금 방금 한 이 질문은 이미 앞서 어떤 분이 하신 그 푸념 섞인 질문을 그럴 듯하게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재물의 속성을 간파하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속성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하는 언어 놀이에 불과합니다. 이미 해석자는 재물이라는 개념과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모두 알아채버린 신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이제 남은 일은 다른 인간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이도록 논리라는 미끄럼틀을 쭉 타고 내려가는 것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하인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개념을 파악하고 파악된 속성을 상호 연결하고 유추하여 그럴 듯하게 설득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조차 마치 자신이 절대자인 것처럼 행사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에덴에서 추방당한 그 꼴 그대로입니다. 신이 되고 싶은 욕심. 그 무엇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절대주인으로서의 나를 꿈꾸는 존재. 하지만 피조물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이러한 존재가 바로 죄인입니다.

재물은 이렇게 해석자를 죄인으로 탈바꿈시키도록 하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재물은 탐심의 화체이고 탐심은 죄의 근원입니다. 결국 재물은 인간이 왜 죄의 영역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가를 설명하는 낙인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니, 나는 재물을 잘 다스려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재물을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욕심을 잘 고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의 구조 속에서, 재물 때문에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던, 말씀그대로 재물의 하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목격 당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갇혀있는 자신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의해 오도 가도 못하는 현실이 바로 “예수 안”이라는 영역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재물이라는 글자 사이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그 피를 따라 가다보면 내 인생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내 성경 해석이라는 것이 필요없다는 것이 절감됩니다. 나를 위한 내가 아니라 피를 흘리신 어린 양을 위한 나를 알게 됩니다. 피조물이라는 속성이 족쇄가 아니라 소망이 됩니다. 이러한 피조물을 ‘새 것’이라고 합니다.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신 유일한 분의 피가 재물을 해석하여 말씀을 뚫고 신이 되고자 하는 나를 죄인으로 만드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으로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왜 인간은 재물 때문에 설날에도 싸워야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의를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성취가 얼마나 완성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누가복음 말씀은 지금도 째깍째깍 잘도 돌아갑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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