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 다윗의 자손과 발등상의 원수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오전 9:15:55  김대식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막 10:33,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막 10:34, 개역)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막 10:35, 개역)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 10:36, 개역)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막 10:37, 개역)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9, 개역)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막 10:40, 개역)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막 10:41, 개역)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막 10:42, 개역)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3, 개역)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5,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6, 개역)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 10:47, 개역)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막 10:48, 개역)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 10:49, 개역)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막 10:50, 개역)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막 10:51, 개역)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5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원수 즉 적이 있다는 것은 전쟁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즉 종말입니다.
그러나 이 적은 인간의 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전쟁의 상황이 아닙니다. 즉 비종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는 이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면 전쟁의 상황에 놓여졌다는 말이 이해가 되겠지만 눈에 보인적도 없고 앞으로도 포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싸울수 조차도 없습니다.

적은 어디까지나 예수님 혼자만의 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의 적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는 것이 모든 인간은 이 적에게 포로된 상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야 비웃죠. 무슨 포로된 상태냐? 포로 되었다면 억압과 결핍과 무슨 문제꺼리가 발생이 되어야 하는데 포로된 자들이 아무런 문제점 꺼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유의 상태다 라고 합니다. 자유의 상태 곧 억눌린적 없고, 포로된 적 없고, 햇빛도 못봐서 흑암에 주저앉은 상태가 된 적도 없는데 무슨 갇혔다 라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졸지에 예수님에게 인간들이 도리어 적과 같이 항변하게 됩니다.
마귀가 보면 얼마나 기특하기 짝이 없겠습니까?

이글을 쓰고 있는 저를 누가 방금 언급한 위의 내용을 보고 이렇게 따질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러는 너도 지금 갇혔는데 이 말을 어떻게 믿을수가 있겠느냐? 속임수 아니냐 라고 말이죠.

문제는 예수님의 적에게 곧 마귀에게 갇혀있던 자가 예수님의 숙제 때문에 풀려났으면 자유가 되어야 할텐데 도리어 감옥으로 도로 기어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포도된 자입니까? 자유자 입니까? 라는 문제가 이번 박윤진 성도가 문제를 낸 문제입니다.

문제 http://cafe.daum.net/holyyounger/8PR4/501

풀이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column&wr_id=1683

자유자는 딱 한분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그 분에 의해서 죄인된 우리가 구원자로부터 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 포로된 감옥소로 들어가는 것은 섬기는 자로부터 받은 성령이라는 영 때문에 죄수 복을 입고서 침투하여 감옥소에 있는 자들에게 자유의 소식을 죄수복을 입고서 전파하는 스파이 노릇을 하기 위함 곧 섬기는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바깥으로 탈출한 자들인 자유케 된 자들이 도리어 은사를 받고서 다시 감옥소 포로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겁니다.

자유복을 입고서? 천만의 말씀. 죄수복을 입고서 말입니다. 자유복을 입고서는 감옥소에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죄수복만 입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새로운 죄인을 만드시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죄인의 몸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예수님의 적에게 사로잡힌 포로된 자임이 먼저 전제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소유성이라는 조건 갖추기로써(김성수 씨의 주장이죠, 모든 개혁주의)

예수님은 창세전에 예정된 예루살렘과 그것을 관할하는 자들과 또 반드시 이방의 권력과 합세해서
(유대인은 손에 피 묻으면 안되니까 거룩한 율법 뒤에 숨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 살해해서 죽여주는 비거룩한 이방이 동원이 되는데 역으로 그들 또한 손을 씻음으로써 유대인을 걸고 넘어지는 한통속임을 알리바이를 형성한다. 빌라도 손 씻기)

그들에게 능욕을 받고 죽으심으로써 다시 3일 만에 살아나야 하심을 통해서 그들의 소유성(구원의 문을 확보=바벨탑)을 무효화 시키는 성령의 소욕을 새언약으로써 이루시는 것인데

여기서 구원의 소유성이 바로 탐욕이요 우상숭배이기에 모든 인간은 이 우상에 갇혀져 있다는 것을 그 반대의 소유성 때문에(반드시 십자가에 죽어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비로소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미 포로된 상태를 심각하게 다루시는 이유가 바로 그러합니다.
부자 청년의 근심 (왜 근심할까요? 구원이 날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조건 다 빼앗김)
제자들의 놀라고 두려워 함(남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문제가 되어버림 바벨탑 와르르 무너짐 구원의 통로가 허물어짐)
베드로의 구원조건 차단 당함(뻥뻥 구멍 뚫혀져야 할 것을 도리어 구멍 맥구었다고 과신)

이런 원수성을 담아서 십자가에 오르는 겁니다. 원수성을 담지도 않고서는 십자가에 오를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허물을, 원망을 담지 않고서는 그 위에 뿌릴 피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덮고자 함인데 덮을 꺼리가 없는데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는 덮을꺼리를 없애도록 하고자 행함의 노선을 추구토록 하는 겁니다. 이 두 소욕의 싸움입니다.

오늘 본문도 주님께서 덮으실 원수성을 여지없이 들추어 내십니다. 마귀의 소욕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욕과 대조 대비 차이성을 드러내십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심으로써 두 소욕을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소욕은 여지없이 예수님 때문에 더더욱 요청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우상화 하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똑같습니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구하는데로 달라하면 주신다고 했으니 구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막 10:37, 개역)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단순히 권력의 소유성 욕심이라기 보다는 유대인은 다른민족과의 차이성이 뭔고하니 항상 믿음에 대해, 성전 그리고 거룩한 율법, 하나님을 자기자신보다 먼저 떠 올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믿음의 반열에 설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욕망인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똑같습니다. 교회속에서 또는 천국에서 누구보다 더 믿음있고파 하고
누구보다 더 충성하기를 원하고 누구 보다 더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겁니다.

부자청년을 언급했듯이 너무 너무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지금도 오늘날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자들의 말에서 더더욱 그 내막이 구체화 됩니다.

(막 10: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9, 개역)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아니 할수 있다고 합니다. 자 그럼 소통이 되어야겠지요? 문제는 또 예수님께서 자기가 물어놓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으면 오케이 했으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걸어버립니다. 넌 못한다 라고 말이죠.

소통을 끊어버립니다.

인간은 항상 소통을 열어놓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단절이란 없습니다. 막힌 곳을 인터넷 공사를 해서라도 반드시 개통시켜서 유비쿼터스를 이루는 것이 인간의 신체의 특징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두루 두루 도는 화염검 화염방사기 총을 든 천사들을 보디가드로 깔아놓고서
그 어떤 네트워크 접속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해커들이 방어막을 아무리 뚫을려고 해도 이 예수님의 몸 만큼을 해킹할 수가 없습니다.

안 뚫히는 해킹은 예수님의 몸 빼놓고서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비쿼터를 형성하는데, 제자들도 소통 곧 접속 시도하는데 접속이 되지 않습니다.

차단 합니다. 연결망 메트릭스를 모조리 다 끊어버립니다.

여기에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화를 내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접속을 시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접속자인데
넌 엉터리로 접속해서 그런거야 라고 화를 내지만 여전히 그들 또한 접속이 차단된 상태입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과 소통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 갇혔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예수님과는 소통이 안되지만 반대로 누구와는 소통과 접속이 광초고속속도 소통으로 잘 접속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는 말을 철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를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막 10:41, 개역)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막 10:42, 개역)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성령을 주시겠다 라고 유일한 접속망은 소통망은 성령임을 말하셨듯이 유일한 구할 것 기도는 바로 무능함인 섬김이라고 하십니다.

유일한 소통은 섬김입니다.

(막 10:43, 개역)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5,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 하면 또 삯꾼 목사들이 이 본문을 인용해서 교회 섬기라고 목사 섬기라고 더 노골적으로 서로를 섬기라고 아예 예수님을 흉내내지만

지금 그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지금 제자들의 섬기는 모습으로 보라는 겁니다.

인간 끼리의 섬김은 저들끼리는 소통이 될지 몰라도 정작 예수님과는 단절된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죄수 복을 입고서 투입된 죄인을 자기와 똑같은 죄인 인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접속 가능하고 소통가능한 죄인 말이죠. 그래서 맨날 소통 소통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절을 외치는 자들입니다. 단절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죄인이라거든요. 죄인이 처음 탄생한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라는 자들 말입니다. 그들의 출처인 모태는 바로 모든 접속을 차단하는 십자가(죽은 태에서 태어난) 라는 모태인줄도 모르고 소통과 접속을 시도하니 실족케 되는 겁니다. 간격(소통)을 좁힐려고 시도한 부자청년은 도리어 더 멀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받으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숙제를 보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라는 적을 어떻게 다루시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기 숙제 밖에 안보이는 자는 일단 갇힌줄(네트워크 그물망)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숙제가 보일리도 없습니다.

그 섬김을 봐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유일한 소통인 성령의 소욕인데
이 성령의 소욕은 이상하게 시리 모든 접속 시도인 (바벹탑 성전) 인간의 몸이 생기기도 전에
창세전의 예정된 십자가만 자꾸 자꾸 주장한다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는 소통 차단입니다. 그 어떤 접속도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방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그저 당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에 당하고 섬김에 당하는 일 이것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 받는 겁니다.

책망받게 되면 반드시 그 발가벗겨짐을 통해서 손가락질 하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놈들 걸려들도록 하시는 겁니다. 걸려들어야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시는 주님의 일 하심 앞에서 또 부끄 부끄 부끄가(머리에 숯불 얹은 것처럼) 되도록 얼굴 빨개 지게[ 하시니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 입니까? 이것이 저들에게는 반드시 어리석음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부끄럽게 하시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일하시지 않는 겁니다.

반드시 오해를 불러일으키시는 방식만 하시는 겁니다. 너는 나보다 옳도다 라고 유다가 다말을 보고 하는 그 고백만이 새노래입니다. 새노래란 계시입니다. 룰루랄라 흥얼거리는 노래가 아닙니다. 찬송이란(기도) 우리는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였는데 도리어 그는 우리를 기뻐하고 용서하고 살려서 잃어버린 자식 기다리며 되찾았다고 살진소 비단옷 금반지로 기뻐한다는 겁니다.

이 찬양의 방식만이 새창조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는 방식입니다.

이 일 때문에 섬기러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대조적으로 누가 접속을 하는지 보여주시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고래 고래 고함치는 자가 있습니다.
주변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좋던 분위기 다 깨뜨리니 얼마나 싫겠습니까?

바로 여리고 지역을 지나가는 중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른 겁니다.

참희한합니다. 제자들은 몇 년을 같이 다녀도 접속이 안되고 늘 단절만 느낍니다.
그런데 이 거지 바디매오는 단 한번에 접속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 쪽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 있는 겁니다.

왜 그럼 불공평하게 편파성을 두시는 것일까요?

문제는 항상 창세전에 예정 된 바를 이루심이지
인간을 염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구원의 목적은 마귀라는 적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마귀를 이기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 된 바 뿐입니다.
그것을 이루시면 인간은 저절로 딸려 들어올 뿐인데
인간 자체적인 독자노선에서 구원의 조건을 형성할려는 소유성 소욕성을 가질려고 하니
제자들을 통해서 그것이 차단당해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독자노선은 마귀에게 허용한 행함노선 율법노선을 쥐도록 되어 있지
행함노선의 반대인 지혜노선에서는 접속 조차 안됩니다. 모조리 다 차단입니다. 단절입니다.
욥이 그것을 격는 겁니다. 애매한 고난, 그래서 다른 신체를 보는 겁니다. 다른 몸.
자신의 몸을 쳐다보지 않고 그것도 가장 예민한 아픈 몸을 벅벅 긁어가면서
다른 몸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내 몸 좀 봐 달라고 어느때 보다 내 몸이 더 나에게 호소를 합니다. 내가 몸을 소유한게 아니라. 내 몸이 나를 소욕 했음을 제대로 보여줌을 통해서 갇혔음을 직시한 겁니다. 불뱀에게 물린 몸입니다. 그런데 불뱀을 쳐다보라니요? 말도 되도 않는 소리입니다. 아무도 불뱀에게 안물린척 하고 있는데(욥의 세친구) 왜 나만 물린 것을 그것도 제대로 그것도 아주 아주 심각하게 직시로 보여줘야 합니까?

그것이 선물 이기 때문입니다. 원해 병든 몸이라는 겁니다. 병이 나서 병든 몸임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병나지 않았는 가운데서도 이미 병든 몸이라는 겁니다. 몸이 문제가 있는 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물을 통해서 다른 몸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욥은 비로소 고쳐달라는 몸에 재를 뒤짚어 씌우고 입을 함구합니다.
저는 고침받을 자격조차도 없군요. 누구의 몸을 보니 더 처참한 겁니다.
나는 매일 매일 가짜 이군요. 죄인 중의 괴수 이군요.

바로 오늘 나는 가짜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외치는 땅거지 바디매오가 단번에 예수님께 접속합니다.

늘 우편 좌편으로 주님의 일에 목숨 걸고, 주의 영광에 자기를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제자들의 접속은 아예 차단되는 상황과 대조를 이루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지 바디매오가 창세전에 예정된 것으로 접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현재 뚝딱 뚝딱 맹글어낸 노력의 산물을 내놓으면서 접속하니 접속될 리가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접속이 안됩니다.

그럼 거지 바디매오처럼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면 될까요? 그럼 또 구원의 조건 갖추기죠. 그 고함치는 것이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아 그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함 쳐야 하는 구나 !! 그것도 아닙니다. 지금 인간 쪽의 접속은 아닙니다.

미래의 곧 십자가의 죽음이 벌어지는 사건과도 일치해야 합니다.

뭐야 그럼 또 너가 우리를 가지고 장난치는거야?
창세전 시간도 있기전의 예정 된 바와 일치해야 하고
미래의 십자가의 죽음과도 일치해야 한다면 불가능하잖아.

바로 그겁니다. 불가능 하죠.

그런데 거지 바디매오는 접속 가능했으니 자꾸 우리도 가능한 줄 착각하지만
한번 따라해 보세요 바디매오 죽이고 싶어 할 껍니다. 바로 그겁니다.

소경이요 땅거지도 하는 판국에 나도 못하겠느냐? 라는 그 원수성을 거지 바디매오가 끌어모으는 식입니다.

해석망상은 편집증적으로 모으면 모을수록 계급과 지식이 되어서 실질적으로 사회의 위치를 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나라 곧 국가 체제입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위치 곧 계급은 그 사람의 해석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해석망상에 또라이 집단이 바로 행동망상인데 해석할줄도 모르고 병든 몸 부정한 몸 그 모습 그대로 들이댑니다. 그것이 부르짖음입니다. 자기가 부르짖고 싶어서 부르짖는게 아니라. 누구의 욕망이 덮쳐버린 겁니다.

곧 여호와께서 그 부르짖음을 듣고파서 일부러 파라오 왕을 강퍅케 하니까 그 몸이 상하게 되니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갇히고 포로되고 억눌린 자가 외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졸지에 죄인이 새롭게 형성된 겁니다. 부르짖는 자가 새롭게 창조된 겁니다. 이것이 행동망상 즉 해석망상에 상대적인 행동망상이 바로 이스라엘 곧 죄인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이스라엘(교회) 내부에서 갈라지는데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해석망상 집단과(거짓선지자 포함, 왕 포함, 백성 포함, 즉 99마리 양)

거기에 해석 할줄도 모르는 일자 무식한 행동망상자 선지자 딸랑 한 마리 양이 대립되어 충동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기존의 방식을 무조건 배신때리는 방식으로써 대조적으로 등장하는데
제사장 즉 의문의 그림자 집단인 국가체제에

선지자는 사제가 아니라서 말할 줄도 모르고, 해석할 줄도 모르지만,
선지자의 입에 말들을 집어 넣으시는 여호와 때문에 말이죠. 이것이 정념 곧 사랑이라는 욕망 이요 소욕입니다. 십자가의 소욕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제단숯불을 입술에 대니 부정이 제하여 져서 아니 외칠수가 없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래서 듣기는 들어도 해석못하는 소리만 해야 합니다. 왜? 해석망상인 파라오왕의 크고자 하는 강퍅을 더하기 위해서 말이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소리를 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창세전 곧 시간이 있기전의 십자가입니다. 창세전 카니까 창세 전 이라고 시간적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의식을 유도하는 겁니다. 결국 창세전도 시간에 갇혀진 상태로 해석할 줄 밖에 모르는 겁니다. 시간을 깨뜨리는 십자가인데 말이죠. 나의 몸을 깨뜨리는 십자가인데)

쓴 잔 쓴 나물을 아예 먹어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 겁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막 10: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사실상 먹지만 도리어 먹히는 겁니다. 도킨스의 계획적 프로그램 이 생각나죠. 개미이야기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여 먹히지만 정작 이들이 마치 오늘 소경 땅거지 바디매오의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결부 시키는 겁니다. 향유를 깨드린 여인과 같습니다. 미리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당겨 기념하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예정된 단 하나 십자가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즉 나는 갇힌자입니다. 포로된 자요 억눌린 자요 눈먼 자입니다 라고 외칩니다.

거기에 제자들은 시끄럽다 조용히 안해? 소쿠리 소핫이 옷도 거지같이 입어가지고 말야?
차단하고 막아섭니다.

예수님이 뚫고서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막 10:51, 개역)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저 바디매오입니다 라고 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못 보는 소경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저 바디매오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년을 몰고오신 창세전에 예정인 십자가의 용서를 몰고오신 죄인을 찾는 예수님에게 딱 맞습니다. 성령의 소욕에 딱 맞습니다. 주의 주 되심에 딱 맞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우리들은 전혀 이런 것은 요청하지 않습니다. 이미 확보했다고 여기니까 말이죠. 그래서 덧때기를 합니다. 이미 확보한 것은 마일리지 확보했으니까 됐고.

부족한 결핍 채우기를 나서는 겁니다. 부자청년처럼 말이죠. 이 차이입니다.

천국이 가르는 것은 이 둘의 차이입니다.

무조건 처음자리(빈자리)로만 밀어붙이는 십자가 곧 창세전의 예정과

이미 그것은 소유했으니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영광된 위치가 되는가 하는 소유성

이 둘의 싸움입니다.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입니다.

아예 이 두 소욕의 싸움이 없다는 것이 불행한 겁니다.
이 몸뚱아리는 두 소욕의 전쟁터입니다.

내가 사랑하느냐? 주님이 사랑하느냐?
내가 사랑하면 자꾸 자꾸 수준의 높낮이를 의식한 처음자리(빈터)를 외면하는 것이고
주님이 사랑하시면 무조건 미끄러뜨리는 모조리 처음자리 만들기 곧 죄인만들기 상한심령만들기입니다.

이 원수성을 담고자 함에 있어서 때려죽어도 안담기고 안들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사랑 곧 육의 소욕인 반면에

때려죽어도 너가 지옥가는 꼴을 못보겠다고 기여이 원수성을 담아서 피와 결부 시키겠다는 그 고집 그 소유가 창세전 예정된 십자가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하는 일은 바로 이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바를 이루는 겁니다. 십자가입니다.

곧 십자가에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그 원수성을 들추어내시고
우리가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외치게 하심으로써 내가 주님을 죽였는데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고 우리의 원수성을 담아서 십자가의 사랑을 외치도록 하는 그 부끄 부끄 부끄를 외치도록 하는 것은 죄인 뿐입니다. 의인은 때려죽어도 못 외칩니다. 부끄러운 것 다 빼버리거든요. 어리석은 것 다 빼버리거든요.

그래서 원수를 나의 발등상 둘 때까지 주님은 우편에 즉 성령의 소욕에 상대적으로 육의 소욕에(검사) 반대하는 변호사 자리에 앉아 있겠다 하시는 겁니다.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편에서 다윗의 원수가 누구인고 하니 바로 다윗 자기자신이였습니다.
빨리 자수하여 광명찾자 라는 겁니다.

주여 제가 원수입니다. 저를 고쳐 주십시오. 저는 눈이 멀었고, 포로 되었고. 억눌린 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 소리를 주님이 제일 듣고파 했던 겁니다. 이유는 피를 준비해 놨기 때문입니다. 예정

오냐 이제 피가 피 값을 하는 구나 라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이나 의인이나 개혁주의자나 바리새인은 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편집증처럼 끌어모아서 어떻게 하면 해석잘할수 있도록 지식을 늘리고
말을 늘리고 행동을 늘리고 믿음도 늘리고 행함도 늘리고 계명지키는 것도 늘리고

그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이 배설물 똥 덩 어 리 로 이미 확정시켰습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그거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까?
그것으로 소통 접속을 시도하면 벌써 되었겠지요.
그러나 차단 당하는 겁니다.
어떤 해킹도 생명나무를 뚫을수 없습니다.

오로지 생명나무가 결정하는 겁니다.
생명나무가 생명 곧 영생을 줄려고 합니다.
생명 있는데 더 생명 덧입힐려는 자는 차단입니다.

죽음 속에 있는 자만이 영생이 딱 맞습니다.

성령의 소욕은 죄인이 딱 부합된다고 생명나무가 증거합니다.

아니 죄인도 아닌데 변호사가 왜 필요합니까?
그래서 다들 의인의 자격으로 심판대에 서고 있으니 졸지에 검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차단 된 줄도 모르고
과잉행동의 고래 고래 고함치고 있는
그것도 소경이요 거지 주제에 접속을 시도를 하니 막아서는 겁니다.

어린아이를 차단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 기이한 즉 특이성의 성도를 전혀 특이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이 부여함으로써 불쌍히 여기시는 창세전의 예정된 십자가의 피와 연결 접속 시키시는 겁니다.

이로써 십자가의 피로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처음자리를 시시하다고 차버렸습니다.
아무 자랑거리도 못되는 부끄러움이요 미약한 것이요 내세울꺼리가 되지 않는
그 어떤 조건도 없었던 일방적인 사랑이였기에
그 빈자리가 싫어서
까까득 채우고자 문둥병자 9명처럼 도리어 나의 존재가 살아있는 과거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문둥병자는 아무리 봐도 고침 받을 자격이 없음을 정작 피흘리심을 통해서
욥처럼 알게 되었습니다.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십자가를 이루셨음을 말입니다.

그 용서를 외칠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을 피로써 찢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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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보고 성도라고 하나    박윤진

문제 http://cafe.daum.net/holyyounger/8PR4/501

풀이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column&wr_id=1683


누구를 보고 성도라고 하나    박윤진

2011-07-24 21:36:02 조회 : 14          


1 성도가 성도를 알아볼 수 있을까?
2 성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3 성령의 열매는 성도에게 반드시 맺힐까?


이런 질문들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도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이중성이란 계시된 성도라는 부르심(A)과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예수 안으로 끌려 들어온 어떤 죄인(B), 이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A만 성도입니까? 아니면 B가 성도입니까? 아니면, A, B 모두가 성도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안]의 세계(A)가 그 안으로 밀려들어온 대상들(B)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알면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온 B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실체에게 가능성을 부여한다면 B도 성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의 세계가 그 안으로 들어온 B를 죽은 자로 여기고 오직 A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세계라면 B에게 굳이 성도라는 이름을 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없는 존재에게 이름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는 존재라는 표현을 야고보서의 기록에서 찾는다면 ‘안개’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죠? 흙, 마른 뼈,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존재 등등

그렇다면, 오직 A만을 성도라고 해야 할 것이고, B에게는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입니다. B의 다른 이름이 바로 ‘죄인’입니다. B를 죄인이라고 부를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마도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수도 없이 B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불렸다는 기억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복음 전파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칭찬하고 싶거나 같은 이유로 꼭 안부를 전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성도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곁가지를 칩니다.

예수 안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죠. 인간은 누구든지 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행위는 율법을 만나 예외없이 모두 죄로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행위를 만들어내는 주체(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힘이 작용합니다. 죽은 주체는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러므로 법도 소용없고 결국 죄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주체와 행위와 법과 죄를 모두 피로 덮어버립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이 주체가 되고 행위가 되고 법이 되어 죄까지 용서하는 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하나님이 되고 의인이 되셔서 그 다 이루심을 온 천지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적용시키는 곳이 바로 [예수 안]이라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름까지 기록했던 그 사람들의 용도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사도바울이 성도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면서 제시한 수많은 실생활의 모범 규준들을 그들은 모두 기억하고 생활에서 적용하는 성령의 열매의 소유자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용도는 앞서 말씀드린 예수 안의 세계가 예수의 십자가 피만으로 충만하다는, 즉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죄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바울이 이름까지 적었던 그들은 죄인입니다. 성도 아닙니다. 성도라는 공간에서 그들의 주체는 박살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별도로 소유하고 있어 별도로 칭찬받고 챙길 만한 행위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피가 무조건 그들을 성도라고 부른 것입니다.

단 한가지 조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셨기에 [깜짝 성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다면 이미 그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어떻게요? 성령의 열매는 과연 무슨 맛일까요? 성령의 [나무]가 어떤 나무일지를 알면 쉽겠죠. 사과나무의 열매는 사과고, 배나무의 열매는 배이니까요.

성령의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의 열매에서는 피맛이 납니다. 내 죄 용서하신 피 맛이 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B가 맛보기에는 성령의 열매는 마치 죄처럼 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절제, 온유,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들이 모두 용서받은 피 맛이 납니다.

여기서 갈라짐이 생깁니다. 성도라는 부르심(A)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불려들어온 어떤 이(B)도 성도여서 그에게도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한다면, 그 주체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고, 그 주체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십자가와는 단절된 성령의 열매에 대한 [별도의 의미]분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무엇이지? 아, 이런 저런 행동이구나 의미 확인!
온유가 무엇이지? 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온유구나 하면서 개념 확립!

왜 그럴까요?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에서 열려야 하는데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 뿐이시고, 그 예수님은 철저히 나만 나다라고 주장하시고 다른 인간들은 모두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하시므로, 절제니 온유니 성령의 열매를 [내가] 소유하려면 십자가 말고,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다 혹은 나도 성령 받았다를 주장하면서 나에게 매몰된 예수, 내가 진 십자가, 나에게 사로잡힌 성령이 반드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19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느니라

B의 역할이 바로 찍혀 불에 던져질 나만의 성령의 열매를 죽을 때까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부되시는 분이 오셔서 진짜 열매를 보여주십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여 주십니다.

“나는 성령의 열매인 온유가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댓글 다는 것도 포함되는 줄 알았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로 온유 그 자체되심을 이제 알았네. 내가 생각했던 온유는 죄네. 이 죄도 용서하셨네.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샛별이 뜨면 속일 수가 없네......”

성도가 성도를 알아볼까요? 성도는 한 몸입니다. 알아보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갑돌이 성도가 주체가 되어 을순이 성도를 객체삼아 성경놓고 분석하면 성도라는 합격 통지서가 인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을 유도하고 그것의 실체를 체험하면서 경험을 통해 기억에 누적시킬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씀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배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중략)


[악인들의 대답]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게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절)

의인이나 악인이나 주님의 처분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둘 다 자기의 기억을 더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위목록을 꼼꼼히 들여다 볼 때 의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 칭찬받고 있고, 악인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지 않았는데 영벌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의 행위여부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행위 누적분을 누가 잘 기억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만일 위 본문이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서 섬기거나 구제하는 것이라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라고 상상하고 내 주위를 살펴보고 그 중 하나를 지극히 작은 자로 삼고 행위에 나서는 순간, 그 사람은 십자가와는 이별하고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나름대로의 행위 열매를 규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란 이런 의미이고, 영접한다는 것은 이런 행위 목록을 말하고 옥에 갇혀다는 것은 이러 저러한 상태이다 등등.

과연 누가 지극히 작은 자입니까? 과연 누가 예수님이 자신과 동일화한 사람입니까? 정답은 예수님만이 아신다 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화된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지 누가 결정합니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예수님 아닌가요? 그 예수님만 결정하시지요. 아주 주관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 찾기 놀이의 게임방법을 객관화하여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을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를 마음대로 결정해서, 마치 인간이 “이 사람이 바로 주님과 동일시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라고 하면 바로 그 지목한 봉사와 구제를 요리조리 피하시면서 부정에 부정을 쏟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던 의인에 포함된 자도, 악인에 포함된 자도 머리만 긁적거릴 수밖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셈입니다.

여기 어디에 [박윤진]이라는 이름표가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창세전에 예비한 나라를 상속 받도록 내가 귀한 존재라구요? 창세 전이란 [나]라는 존재가 있지도 않은 때입니다. 아무 육체도 없었던 때입니다. 결국 창세전에 예비한 나라란 아무 육체도 그 나라를 상속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통하시면, 죄를 덮고 계신 진리가 거리마다에서 소리치는 것을 듣게끔 하십니다. 내 기억이 내 행위의 퇴적층이 거리마다 활개치는 그 소리사이에서 은밀하게 들려오는 십자가의 신음소리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소리 말입니다.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어 온유라는 단어를 제시하자마자 십자가는 그 단어를 품으면서 달콤한 나의 행위 누적분을 점검하던 나를 송두리째 폭파해 버립니다. 물론 온유라는 단어 또한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내 기억 속에 내장되었던 온유의 그림, 그 이미지 전체가 죄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나의 전 존재가 죄인의 괴수로 들통하는 순간압니다. 그 순간 예수 안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언어인 십자가라는 새로운 언어와 조우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노동력의 산물을 맛보는 것 보다 달콤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구원의 성패여부를 판단케 한다는 성령의 열매와 비교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십자가 안에서는 사도 바울처럼 나는 항상 주님을 핍박하는 자로서만 주님 앞에 서게 되고, 주님은 자신을 핍박한 그 죄인 중의 괴수를 자신의 살과 피로 먹이시면서 창세 전에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예수 안이며 예수 안에서는 모든 벽이 허물어지면서 피만, 그 사랑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철학을 이야기 하고 누구는 설거지를 하면서 신세타령하더라도 성령이 “어때, 십자가만 밝히 보이지?”라고 알려주시면 그 누구의 철학도 그 누구의 신세타령도 남아나질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 지심만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김대식  11-07-24 22:25    

이글을 읽고 이것 하나가 생각됩니다.

성도가 성도를 보고 성도인줄 인식하느냐?

성도가 성도를 볼때 성도로 안보이고 서로서로가 화살표로 보일뿐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구지 성도 라고 서로를 말할 필요가 없이 그저 화살표의 방향만 보면된다는 겁니다.
(즉 성도라는 열매, 곧 자식을 쳐다볼 필요없이 그 열매의 출처인 나무로 가려내면 되는데 이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숙제가 아니지요. 숙제당할 뿐이지요, 내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문제로 인해 졸지에 당할 뿐이지요. 아 이래 이래 주님이 숙제를 푸시네요 라고 그 풀어가는 과정을 쓰는 연필로써 내가 목격하고, 종이로써 목격할 뿐입니다. 그래서 편지입니다. 반드시 도착하는 편지, 그래서 화살표로 생각해 본 겁니다. 서로 서로가 권면하고 지적하는 것은 출처를 말하는 것이지, 윤리 똑바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 똑바로 행위 똑바로가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을 말해줄 뿐입니다. 출처 죠, 처음자리, 처음사랑 말입니다. 출처가 두 나무 이더라 라는 겁니다. 두 언약, 두 소욕, 사도바울의 서신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계속 출처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인지? 십자가인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썩여있던 그 무리 속에서 두 패로 나누어지는 충돌현상이 출처를 외침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이 충돌의 양상이 초대교회의 모습이니 지금 현대교회의 사고방식에서는 아마 시험들껍니다. 맨날 싸우니 말이죠. 그러나 오늘날은 출처 싸움이 없습니다. 열매싸움만 있을 뿐이지요.)

(빌 3:13, 개역)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개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5,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혹 누가 화살표를 잘못 제시하고 잘못된 방향을 갔다손 치더라도 그 사이 그 사이 마다 또 무수한 화살표가 있기 때문에 따라가다보면 감이 잡히는 겁니다. 방향성입니다. 운동 곧 욕망의 흐름의 방향성이라는 기능이 화살표로써 표출되는 겁니다.

그러니 순 엉터리 화살표도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는 겁니다. 그 화살표를 책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 조차도 주님의 계획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충분히 이해하자 라고 하는 겁니다.

이미 푯대가 정해져 버린 이상 그 어떤 화살의 방향도 정해진 대로만 되어 있는 겁니다.

화살표인간

어떤 이는 평생을 지옥을 가리키기 위해서 방향을 제시해야만 하고
어떤 이는 평생을 천국을 가리키기 위해서 방향을 제시해야만 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천국이라는 방향을 지향했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도 예수님이 와야 밝혀졌듯이
또 그 속에 있던 바울도 자기믿음대로 철두철미같이 믿었지만
그 방향을 꺽임 당했습니다.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는 그 예수님 때문에 꺽여졌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십자가 때문에 화살방향이 꺽인 겁니다. 배설물 똥이 잔뜩 묻은 화살표 바울

그러니 누구든 예외 없습니다. 지옥을 지향하던자가 천국으로 지향할줄?
지금 천국을 지향하던 화살표가 또 어떻게 바뀌어서 지옥을 지향할 줄?
우리는 감도 못 잡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푯대는 십자가로 확정 되었다는 사실
(그저 감잡는 것은 두 쪽 다 십자가라는 기준에서 갈라진다는 겁니다. 소욕이니까요.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잡아먹을 듯이 충돌합니다.)

그러니 예정되지 않은 것에는 미련 둘 필요가 없겠지요.
(특히 나 라는 존재를 미련둘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만 들 뿐입니다. 미쁘신 분은 딱 한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으니 믿을 필요 없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십자가 이니까요.)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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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 그리고 삶 이라는 용어가 주는 것이 자신도 삶을 산다고 보니까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삶이라는 용어 보다 소욕 욕망으로 표현하면 참 쉽죠잉 이라고 생각 됩니다. 소욕 욕망이라는 느낌이 부정적이라서 그런지 잘 안 쓰시던데?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의 욕망 곧 소욕으로 표현하면 아주 간단하게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대비되게 됩니다.

이 좋은 차이성 대조성 대비성을 괜히 삶이라는 표현 때문에 차이성이 불분명하게 나타나다 보니 나도 삶 살줄 안다 라는 식이 되다 보니 예수님과 동격으로 보게 되는 것이겠죠.

절대 아닙니다. 차이성으로 보시면 아주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늘 책망 받는 성령의 소욕에 놓여진 겁니다. 죄와 의와 심판 곧 종말성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 수 없고 그저 성령의 소욕으로 인해 징계라는 매를 맞으로서만 아 사랑 맞구나 만 인식할 뿐입니다. 죄도 모를뿐더러 의도 모르고 더더욱 심판에 대해서는 아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징계라는 매 로써만 사랑을 아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이것을 안 겁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지키는 율법노선 행함노선이 아니라 그것은 육의 소욕을 더더욱 부채질 하구요.(욥의 세친구 노선)

알수 없는 징계라는 애매한 고난으로 통해서 지혜노선인 어리석은 십자가가 욥에게 덮쳐버립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상한심령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께서 붙잡아 주심이(행함이 아닌) 오늘 오전 설교에 기가막히게 잘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삶 이라는 단어 보다 마음 또는 소욕 또는 아버지의 욕망 뜻 계획 양보할수 없는 것 등등으로 표현하면 쉬울 것입니다.

저처럼 무식하게 삶이라는 고상한 단어 보다 그냥 무식하게 소욕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괜히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삶은 없습니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딴 사람의 글에서의 삶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 출처를 따져봐야겠지요). 소욕이라는 욕망 즉 두 소유 소욕, 두 욕망, 두 마음, 두 언약, 두 몸의 싸움. 충돌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화살표 라고 생각해 본 겁니다. 화살표는 자기 삶에 관심없습니다. 방향을 가리키는 그 기능만 표출할 뿐입니다.
 
두 소욕이 있습니다.

형 에서 의 소욕과 동생 야곱의 소욕 그런데 둘다 똑같은데 동생 야곱의 소욕은 자신의 소욕이 아닌 딴 소욕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차이가 나야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두 언약이 있습니다. 두 여자가 있습니다. 똑같은 식입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소욕은 곧 삶은 남성 생식기로 인한 출처인가? 아니면 불임여성과 할례인간의 출처인가로 그 뿌리를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반차 곧 계보를 역으로 소급해 들어가면 멜기세덱이냐? 아니면 그냥 육체(마귀)인 흙이냐 라는 겁니다.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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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세 번째 열매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겠네요. 이미 중복되었지만

갈라디아서에 성령의 열매를 언급해 놓고서는 그 바로 아래에 십자가에 정과 욕심를 육체와 함께 못박았다고 했습니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이 곧 출처를 갈아엎어버렸다는 겁니다. 출처가 십자가가 되어버리면 저절로 나무가 바뀌었으니 열매도 달라지는 겁니다. 결국 출처는 육체라는 출처를 바닥 뜯어냄으로써 정과 욕심이 못 박히면 저절로 성령의 소욕이 출처로써 저런 열매들을 풍성이 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그러합니다. 땅의 속성을 씨를 뿌림으로써 밝혀지게끔 되어있듯이 말이죠.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요 15장의 언급도 출처 싸움입니다. 보호자 싸움입니다. 열매싸움 아닙니다. 너거 아버지 누꼬입니다. 모태 싸움입니다. 너거 엄마 누꼬? 하갈 종 곧 육체입니다. 너는 모태가 누꼬? 지는예 약속 입니더. 자유하는 여자가 우리 엄마라예.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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