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문 열기 - 교회 허물어 뜨리기 (원수 만들기 = 죄인 만들기)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오전 7:48:22  김대식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행 2:29, 개역)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개역)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일단 원수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다.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곧 구원의 문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기능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란 소통의 수단이다.

바벨탑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언어가 없다면 바벨탑(구원의 통로)을 형성할 수가 없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지만 영생을 하지 못해서 생명나무를 따먹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영생의 길을 차단해 버렸다. 구원 단절이다. 영생의 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구원 단절이라는 것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구원의 통로를 형성한 바벨탑 건립은 그 기원이 바로 가인의 제사이다.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소통 시도이다. 구원 시도이다.

그 구원 시도 조차도 단절 되었고 그 가인의 제사를 이마표를 주어서 확장 시킨다. 확대다.

그렇게 되면 그 결핍은 더더욱 크게 된다.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그 구원에 대한 자극제를 줌으로써 더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노아 홍수 심판은 더욱더 그 결핍을 채우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애굽나라가 괜히 힘을 결집시키고 피라미드를 짖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국가를 형성하는 인간의 모습은 괜히 할 짖이 없어서 국가를 총과 칼을 쓰면서 보호 사수 지키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바리새인들이 민족과 이스라엘과 성전 곧 율법을 지키고 사수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들을 자극시킨다. 더더욱 그들의 결집성을 끌어 모은다. 하나 되게 한다. 아무리 많은 분파로 나누어 졌다고 해도, 목적은 하나 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을 사수하고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서는 로마라는 이방과도 손잡고 하나가 되는 소통의 일치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결집성을 구체화 시켜놓고 원수의 속성을 보여주신다.


두 점을 찍는 것이 바로 교회를 허무는 방법이다.
심판의 점 구원의 점
저들의 소통을 단절 시키는 것은 곧 원수의 문을 여는 것은 딱 하나다.
구원(소통)을 차단 시키는 것은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를 증거하면 저들의 소통이 단절 된다.
그들의 소통은 바로 구원 욕망이다. 곧 행함이다.

행함을 바벨탑 사건의 언어처럼 톡 하고 쳐 버리면
저들의 소통이 단절이 되어서 수평으로 곧 좌우로 퍼지게 된다.
행함을 쳐버리면 저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행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행함만이 저들이 서로 서로를 알아 먹는 유일한 언어인 소통 수단인데
그 행함을 쳐 버리니 서로 서로가 알아 먹을 수 없다. 일치성이 파괴 된 것이다.

단절성으로 뚝 뚝 끊어지고 차단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무수히 예수님과의 접속을 시도한다. 인간 쪽에서의 접속(클릭:제사)이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 하는 이유는 심심하면 죽으시겠다는 십자가로 인해 단절이 되어버리기 떄문이다. 접속은커녕 차단 당한다. 그것은 바로 원수성 때문입니다. 감수성, 원수성

아니 접속을 시도 했잖아요, 그러면 접속 되어야지 아니 그것을 매몰차게 차버리십니까?
너무해요. 너무해.

아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만, 아이구 미안해 미안해

이런 왕은 가짜다.

이스라엘의 왕은 그 접속 시도의 차단을 더더욱 간격을 벌려 놓고자
십자가의 죽음 곧 모세가 요청한, 엘리야가 요청한 별세를 이야기 함으로써
저들의 도무지 알수 없는
소통이 안되는 소리인 십자가를 구체화 하신다.
단절이 분명히 구체화 됨으로써 십자가를 구체화 하신다.

이제 십자가는 저들에게 있어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비밀이 되고 말았다.
모든 언어를 파 하고 십자가로 단절 시킨다.

십자가로만 교통(소통)하는 세계를 다 이루셨다.


흔적 곧 원수성이 찢겨진 그 흔적의 싸인으로만 통하는-
인간의 믿음인 행함(소통)을 쳐버리는 십자가로만 소통하는 세계를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벨의 제사이다. 더 나은 제사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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