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을 깨뜨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오전 11:28:04  김대식


행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나라에 먹혀들지 않는다.
오히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십자가 나라에만 먹혀든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행함을 깨뜨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인간의 행함이란 곧 언어로 표현되는 소통이다 라고 했다.
행함이 아니면 소통이 되지 않는 악마의 세계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에는 행함이 통하지 않는다. 악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나라에는 십자가만 통한다.
그 십자가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곧 행함 깨뜨리인 인간의 소통을 단절 시키는 십자가다.

인간의 행함을 해석망상이라고 한다. 좀 더 나은 해석
좀 더 새롭게 혁신적인 해석
좀 더 나은 잉여로써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행함인 해석 망상이다.

이 해석망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행동망상이다.

행동망상은 해석 할 줄도 모른다. 그냥 말씀이 입에 붙어서 그 말씀을 먹음으로써
쓰디쓴 배앓이를 발설할 뿐이다.

말씀을 먹었지만 정작 그 말씀에 먹혀진 자로써
해석(모든 행함)을 파하는 이상하고 괴기스러운 행동망상을 펼친다.

이것이 젖먹이의 전쟁이다. 젖먹이가 무슨 수로 전쟁을 하는가?
힘도 없는데
바로 이 힘도 없이 고자처럼, 불임여성처럼 생명이 단절된, 짤린채로 전쟁에 던져진 자가 젖먹이다.

인간이 행동 즉 행함으로 전쟁을 펼치는 가부가 아니라.
전쟁 자체가 젖먹이를 앞장세운다.

전쟁이 펼치는 배치이지
인간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전쟁이 펼치는 배치가 바로 젖먹이만을 앞장세우는 전쟁이다.
이것이 십자가 전쟁이다. 힘과 힘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함만이 소통 되는 악마의 세계에서 그 행함의 축척이 힘이 되는 세계에서
젖먹이는 무능하다. 행함의 반대이다. 이상한 행동이요 행동망상적이다.

어머니가 이근호목사가 얄굿다 라고 했다.
아니 왜요? 왜요?
인사를 했으면 인사를 받아줘야지 왜 얼굴 돌리고 일부러 피하느냐 기분나쁘게 말이다.
어떨때는 저 멀리서 쫏아와서 인사를 하니 우스워 죽겠다 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도 작년 여름수련회 마치고서 본격적으로 이근호의 장난을 보게 되었다.
화요일 수련회 마치고 수요일에 인사를 했는데 안 받아 주었다.
본채 만채 휙 지나가더니 아는채도 하지 않았다. 무슨 기분나쁜일 있나? 했다.
그래 놓고 수요설교 마치고서는 수고했어요 수련회 너무 수고했어요 라고 억수로 고음으로 칭찬한다. 사람들이 많아서 의도적으로 칭찬했다. 예배전에 왔을때는 인사도 받아주지 않더니만 말이다.

이런 행동망상을 의도적으로 하는 이유가 선지자는 죄에 예민하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기분나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작년 독일 가기 전부터 가장 극심한 행동망상을 펼치더니만
독일 다녀 온 난 뒤에 몇주가 계속 그러다가
어 느낌에 이제 끝났구나 했는데 마침 끝났다.
그런 행동망상을 강이아빠랑 대화 하면서 웃었다.

이제는 우리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아마 당분간 계속 그러지 싶다.
어떨때는 저 멀리서 쫏아와서 인사를 막 하다가
어떨때는 인사를 해도 아예 본척 만척 일부러 고개를 휙 돌려 버리는
이랬다 저랬다 그야말로 괴상하고 기이한 행동망상을 펼치는 이유는

행함이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라는 소리 이다.

이 행함이 통용되는 세계에서 행함을 단절시키는 것이 십자가다.
그래서 아비와 자식의 대화 소통이 가능한 곳에서
십자가만 들어가면 단절이 되고 서로가 원수가 된다.

어제 까지만 해도 화목하던 집안의 화평이
십자가로 인해서 원수지간이 된다. 이 얼마나 신비한가?

십자가도 있지만 행함도 가미 시켜야 하는것에 대해서
일체양보 못하는 이유는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단절 시킨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님 쪽에서의 사랑이기에
우리 쪽에서의 사랑인 행함을 의도적으로 단절시키는 것이다.

각양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이쁜 것 가치있는 것 힘이 되는 것
의미 있는 것 좋은 것 모두다 성전 하나님의 집에 가득채우지만

주님은 싫어하신다. 행함이다.

부자청년의 어릴적부터 지킨 거룩한 행실도 단절이다.

맏아들의 아버지 말씀 어기지 않은 행함
단 한번도 한 눈 팔지 않고 아버지께 충성한 행함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아버지 말씀을 순종한 행함

그 모든 것이 차단 당한다.

오로지 십자가만을 부여 하니까
아버지의 사랑에 탕자가 도리어 창세전의 예정된 십자가의 용서가 그 빛을 발하게 되자

비로소 악마성이 맏아들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맏아들은 창세전의 예정을 거부한다. 곧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한다.
의인은 부자청년은 맏아들은 행함으로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십자가로만 소통한다. 행함을 단절 시키면서 말이다.

이 세계에 다윗이 원수인 다윗으로부터 이혼하고 빼내임을 당해서
여디디야에 다윗은 접붙임 당한다.

구스 여인이 모세의 온유에 접붙임 당하듯이 말이다. 여기에 미리암이 행함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미리암 조차도 빼내이시는 온유를 부으신다. 그것이 단절이다. 미리암이 구스여인과 같은 입장이 되어서야 그 행함의 세계에서 십자가의 세계로 옮겨짐을
행함의 단절을 통해서 격게 되는 것이다.

유다의 약속관은 행함이다. 정결을 모아야 행함이 행함 답다는 것이다.
며느리 다말 때문에 그 정결의 약속관이 부정이 되면 안된다 라는 행함 의식 때문에
다말은 그 유다의 정결을 깨기 위해서 부정으로 일관한다.

그 부정의 물증의 세가지가
유다의 악마관으로 행함관으로 포장한 거룩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기이한 부정의 행동망상인 다말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니면 벗겨지질 않는다.

화형 당하는 그 거룩을 포장한 말씀지키기의 살인의지를 점 찍고(저주의 점)
그리고 이 열매는 남이 아닌 당신의 아기입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생명의 점)
그 증거가 이 주인의 물건이요(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고 점 찍는 것이다.즉 두 점은 인간은 반드시 행함을 구원에 접목시킨다. 그 행함에 반대의 행함을 찍는 부정한 걸림돌의 행함이 바로 단절의 부정성 곧 죽음이다. 그거 생명 아닙니다 라고 외쳐야 하는 괴기스러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기생라합의 거짓말처럼 말이다.

그 죽음의 점을 찍고 그 다음 다시 생명의 점을 찍는 것이다.

아니 죽었는데 어찌 생명이 될수 있느냐? 라는 반문 속에서 뻔뻔스럽게 생명을 활짝 만개 시키는 것이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눈을 고치는 희년
그리고 부자청년도 구원을 못 받는 판국에 어찌 부자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그 천국을 행함(부자청년, 제자들, 베드로)이 아닌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루시는지? 그것이 믿음이라는 의인은 믿음으로 사신다 라는 점을 찍는 것이다. 죽어야 사는 믿음. 이것이 생명 점이다.

이 두 점을 찍을때에 창세전의 약속된 십자가는 유다를 통해서 새노래 새찬송이 나오도록 하게 하시는 것이다.

(창 49:8, 개역)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 49:9, 개역)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창 49:10, 개역)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 49:11, 개역)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창 49:12, 개역)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사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바로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나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라는

행함으로는 도저히 알수 없는 기이한 특이한 부정인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를 사랑할려고 또 행함의 무리가 발생한다.

십자가의 용서는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용서 받으면 된다.

영화 밀양이 생각 난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사랑도 거짓말 ~~~~~

자기 밖에 믿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믿음이 자기 사랑이 옳다는 것이다.
행함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 단절 차단 삭제 시킨다.
예수님 자신 쪽에서만 베푸시는 사랑만 용서만 피흘리심만 주장하신다.
두 점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창세전에 예정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행동망상이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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