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3 종말을 외치는 다윗의 자손

종말을 외치는 다윗의 자손과 교회

2011년 8월 3일 수요일 오후 5:12:07  김대식


(막 11: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막 11:12, 개역)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막 11:13, 개역)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막 11:14, 개역)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15,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막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1:18,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막 11:19, 개역)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막 11:20, 개역)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막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막 11: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6, 개역) 『(없음)』
(막 11:27, 개역)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막 11:28, 개역)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2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막 11:30,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막 11:31,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막 11:32, 개역)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막 11:33, 개역)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교회란 사람을 말하고 있지, 부동산 건물이나 또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는 동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란 성령 혼자 단독성으로써
인간의 이름이 배제된 것을 전제로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이름이 배제당한채로 주의 이름 때문에 졸지에 교회가 된
성령의 소욕으로 인한 죄인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라는 인간은 곧 성령의 전은 오로지 종말만을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종말이란 마치 할례처럼 짜르는 상황입니다. 짤리는 상황입니다.
삭제시키는 상황, 단절 시키는 상태, 가로막는 성향 등등입니다.
즉 힘의 차단성입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의 모임치고 힘이 결집 되지 않고서는 못배깁니다. 유지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힘의 일치성 결집성 부족분을 채우고자 하는 결핍채우기의 목적을 달성케 하는 파시즘 일치성은 종말과 거리가 먼 겁니다.

여성성으로 치며는 불임상태입니다. 미모가 날라가버리는 것입니다. 싫어버린바 된 겁니다. 그 어떤 생명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종말입니다.

결국 교회란 종말 때만 발생하는 것으로써 그 어떤 육적인 인간의 접촉성(소통)을 일체허용하지 않는 차단성으로써 이 땅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가시성이란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수 없는 바로 십자가(창세전에 예정된 유일한 사랑)를 외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길이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곳 마다 두 패로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마치 여성의 자궁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이유는 미래의 생명이 이미 쳐들어 와서 역사를 거꾸로 소급하면서 증거 되기 때문에 잉태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http://blog.naver.com/bsw75778/120027184242 의 천개의 고원 7편 얼굴성 요약본을 프린터 해서 이번주에 교회에서 살펴보다가 볼때 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듯이 또 새롭게 보게 되었는데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부분을 보다가 힌트 삼았습니다. 그 때 이렇게 메모했습니다. 가르는 시점인 제 3의 눈은 결국 생명 때문에 둘로 갈라지는 것이다.(두언약) - 아직 생기지도 않는 생명을 오히려 먼저 있었다고 역으로 소급해서 갈라버리니, 마치 창세전에 예정된 십자가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소급해서 이미 갈라진채로써 가시화 되듯 두 여인(두 패) 이 갈라지는 것이다. 결국 중심정 즉 제 3의 눈은 갈라지는 출발점이요, 그것이 바로 생명 곧 약속인 이삭 때문이다. 불임여성에게서만 나야할 이삭 때문에 소급해서 갈라진다. 결국 십자가로 인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두 패로 갈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실적을 바라는 인간은 즉 기적을 보고자 하는 자들은 전혀 그것이 기적으로 여겨지지 않고 도리어 웃사꺼리가 되는 비웃음의 어리석음입니다.

바로 믿음은 이런식으로 비웃음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면서 웃음(약속)을 외칩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라는 약속입니다.

육의 방식인 의도적인 100살 되기 전의 아브라함과 순풍 순풍 건강한 태의 종 하갈과의 생산방식이 훨씬 자연스럽고 납득이 됩니다. 누구든지 이해가 되고 본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런 자연스러운 생명 잉태 방식을 의도적으로 등장시키면서 철저하게 차단 시키고

'이것은 아니요' 라고 '이것이 옳다, 옳습니다.' 라고

후차적인 방식을 증거하는데 이 방식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고 본대로 설명을 어찌 하기가 참으로 곤란한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통은커녕 뚝뚝 끊어지는 차단과 단절로 인해서 전쟁과 소동이 발생케 되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영의 방식인 비웃음을 유발하는 100살 일부러 넘어서 도저히 생명을 생산할 수 없는 소위 고자 상태 만들기요, 또 여자 사래는 늙어버린 할머니로써 자궁이 죽은태가 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생 짜를 찾아볼수 없는 죽음 그 자체로써의 불임여성인 겁니다.

이런 고자와 죽은태에게 생명을 주겠다라고 하니 그들 스스로도 말도 안된다고 비웃습니다.

이 비웃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반드시 그 비웃음을 웃음으로 만드는 방식만을 추구하는 것이 영의 방식인 바로 종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방식입니다.
(또 이래 말하니까 인간도 믿으면 되겠네 라고 그런 믿음을 실천화 시킬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죠 종교, 마약입니다. 세뇌 시켜서 돈 뜯어내고자 하는 수법 외에는 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생명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차이성을 외칠수 없습니다.
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저주를 거치지 않고서는 축복이 뭔지 모르게 됩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가짜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알리도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거치지 않고서는 참선지자를 알 길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행함을 거치지 않고서는 믿음을 알수가 없으며
악을 거지치 않고서는 선의 차이성을 알수 없습니다.
어둠을 알아야 빛과의 차이를 아는 겁니다.
율법을 알아야 율법 외에 한 의를 아는 겁니다.
선악나무의 법체제를 거쳐서 그 차이로 생명나무의 은혜를 아는 겁니다.
끝나지 않았다는 연속성을 알아야 왜 그 차이로 종말의 상황으로 몰고가시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즉 육을 알아야 영을 그 차이로 아는 겁니다.
반드시 가짜 교회인 육적 교회를 알아야, 영적인 교회 곧 성령의 전을 알수 있습니다.
거짓 영(평안하다 평강이라 멸망없다)을 알아야, 종말의 영(성령=십자가의 영)의 전쟁을 알게 되는 겁니다.

자 종말이란 결국 십자가를 외치면 어리석음 취급받고 기독교 교회 속에서도 거부당하고 이단시화 됩니다.

모든 상황을 바닥을 뜯어내듯이 더 이상의 바닥이 나타나지 않는 최종의 상태로 몰아붙이는 것이 종말인데 결국 종말은 그 최종바닥에 행함노선 조차도 바닥을 뜯어서 종말 스스로가 심어놓은 창세전의 예정된 십자가를 찾을때까지 뜯고 또 뜯어서 창세전에 심었던 약속을 캐는 겁니다. 그것 없으면 종말 때에만 나타나는 교회가 아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형성한 것은 다 쓰레기가 되고
육이 형성한 것은 다 배설물 취급 당하는 겁니다.
오로지 종말의 관심사는 창세전에 심은 자기 약속 찾기입니다.

피가 피를 찾아내듯이 피 스스로가 그 사람에게 발랐던 피를 피가 찾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만(고자, 불임여성) 피가 발리는 이유는 피 스스로의 피의 가치를 높이고자 함입니다. 곧 믿음입니다. 소망(기도)입니다. 용서입니다. 사랑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에게만 용서가 가치있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사의 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병든자 라야 의사는 자신의 솜씨를 뽐내는 겁니다. 의사와 짝은 바로 병자입니다.
예수님과의 짝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 고자와 불임여성의 단절성으로써 곧 종말로써
이 땅에 자신들의 죄악됨을 외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솜씨를 뽐내기 위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등장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 종교와 인간 지혜는 실로암 소경의 죄를 분석하고 학문연구로 삼는 겁니다. 아니 자신들은 왜 배재시키느냐 말이죠? 종교지도자(신학)라서? 소경을 눈뜨게 하고자 하는 지혜(과학,철학)을 펼치기 위해서?

죄란 인간의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 반대죠. 도리어 죄에게서 인간은 연구대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현미경이라는 성경을 도구삼아 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성경(실제로 마귀가 예수님을 성경말씀으로 시험을 함 즉 철저하게 성경적임)이라는 현미경으로 인간을 들여다(서울말 들 따~~~) 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파악하겠다고요? 죄가 비웃고, 마귀가 비웃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아주 제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종말의 상황입니다.
지난주 까지 살펴본 앞의 내용들이 뭔고 하니
예수님은 지금 불 속에서 즉 죽음속에서 종말속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불 바깥의 시선에서 보고 있으니 그것은 모조리 인간의 눈으로 인지가 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남겨지는 것들 만의 것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겁니다.
부자청년도 그랬고, 제자들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또 세배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하는 주의 영광 중에 우편과 좌편에 앉도록 해 달라는 것은 그것이 소통이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도에 사실상 다 같은 마음인데 먼저 질서를 지키지 않고 가로채기 했다는 이유로 소쿨이 소핫이 우이들봐 얼마나 겸손해 너처럼 선수치는 새치기는 안하잖아 서열도 무시하고 말야 우리들봐 얼마나 질서잘지키니? 순서 올 때 까지 기다리잖아 라고 분노하는 제자들 또한 그랬습니다. 여기에 대비된 것이 바로 소경이요 거지인 즉 고자와 불임여성인 종말의 존재가 등장해서 그들의 육적인 사고방식을 차단하는 믿음을 증거하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소동을 일으키면서 제자들이 막고자 하는 그 질서(평안)를 깨뜨리는 겁니다. 네 바디매오 죠 맞습니다.

결국 종말이란 이런 원수성을 발등상 되게 하는 겁니다. 끌어모아야 합니다. 원망을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피를 종말을 뿌리는 겁니다. 단절성을 뿌리는 겁니다. 다시는 안 보겠다는 겁니다. 허물을 말입니다. 원수성을 말입니다.

이 종말을 곧 끝장난다 끝장나 즉 종결자로써 종말을 완성하고자 하는 분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지요.

그 다윗의 자손의 즉 종말의 종결자의 예루살렘 입성에 호산나 찬양을 어린아이들이 젖먹이가 외치는 겁니다. 이미 승리한 게임오바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비로소 평화가 이 전쟁으로 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오로지 누구만이 펼치는 전쟁?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 종말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이렇게 증거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예루살렘성전과 무화과나무가 중첩됨으로써 사건이 벌어집니다.
무화과나무1 예루살렘성전1 또 다시 무화과나무2 예루살렘성전2
이렇게 지도를 그릴수가 있습니다. 사건의 지도 말입니다.

먼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보시고 이틀후에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얻을까 싶어서 갔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저주를 내리십니다.

(막 11: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막 11:12, 개역)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막 11:13, 개역)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막 11:14, 개역)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냥 저주가 아니라 아예 영원한 저주요 사람이 너 무화과 나무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도록 그 어떤 생산도 멈춰버리는 저주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엎어버리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고 장사꾼들을 쫏아내십니다.

(막 11:15,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막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자 여기서 피조물인 무화과나무와 만민이 기도하는 집 성전과 대조를 해 보죠.

둘 다 누구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겁니까? 피조물 이라는 의미 자체는 창조주를 겨냥한 의미입니다. 창조주가 아니면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아니면 꽃을 꽃이라 할수 없는 겁니다. 즉 기능입니다. 피조물로써 말입니다. 아주 아주 당연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악 중에 있다 보니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고 하니 죄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즉 단절입니다. 그래서 갇혀버렸습니다. 갇혀버린 이상 갇혀버린 자는 가두는자의 법칙아래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시간과 공간입니다.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되어버린 갇혀버린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죄 때문에

그렇기 떄문에 죄를 다룬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도리어 죄로 인해 다루어짐을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뚫고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물의 기능을 요구하십니다. 아직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무슨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때도 아닌데 지금 열매를 내놔라 얻고자 하시는 분이 창조주요 그 영광에 동참하라 했으면
시간이라는 역사를 초월해서라도 열매를 내 놓아야 합니다.
이미 죄를 뚫고 역사 곧 시공간을 뚫고 왔다는 자체가 열매를 아니 맺고는 못배기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뚫히지 않았고, 계속 시공간에 갇혀진 상태로 놓여졌다면 그것은 지금 역사를 뚫고 온 분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것을 다시 예루살렘성전에 고대로 적용해 봅시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고대로 예루살렘성전에 말이지요.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십니다.
 
(막 11:15,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막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1:18,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소위 비둘기 매매 등을 우리가 나쁘게 볼 수가 없는 이유가 지금 우리들도 교회에서 하는 짓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편이를 제공하기 위한 서비스였습니다.

먼 길을 이동하는 중에 짐승이 죽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이고
오늘날 교회 속에서의 물품등등이 모두다 편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직분 매매 특히 최근에는 교회매매에서 교인의 수 까지 옵션으로 거래 되고 있는 겁니다.

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막상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누가 밤에 몰래 목사 단독적으로 교회를 매매하고 돌연사라져버렸다? 그럼 이 성경 본문이 남의 이야기가 될 줄 알았는데 자신의 이야기가 실제적으로 되는 겁니다.

교회에 어떤 의미를 많이 부여한 자는 억울해 할 것이고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자는 그다지 남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부여하지 않는 자가 딴데는 안 투자했겠습니까? 즉 자기 자녀 말입니다. 그것도 교회가 아닙니까? 그 자녀가 어릴적부터 개혁적인 복음적 교회를 다니게 해서 잘 커도록 했는데 다 장성한 후에 우야다가 사업이 그래가지고 자기도 먹고 살겠다고 부모 재산 가지고 날랐다면 결국 투자한 자식에 대한 원망은 커질 수밖에 없겠지요.

즉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본문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거래와 매매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 있다는 것을 미리 인정하고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제가 이런말 한다고 제가 지킬수 있는 것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말씀도 인간에 의해서 지켜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 어떤 말씀도 인간에 의해 지켜짐을 당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강도가 출현했고 그 강도가 기도의 집을 자신들의 아지트 본부로 사용했다는 말은 뭔가를 가리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되었고 그들의 가리개 역할을 지금 성전이 딱 맞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어찌 이럴수가 있냐 말입니다.

사실상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어쩌면 아주 아주 당연한 겁니다.

정치적으로 권세를 발휘할려면 반드시 신과의 화목을 친화력을 보여줘야 백성이 그 사기에 넘어가는 겁니다.

가장 쉬운 예로 선거날이 되며는 꼬빼기도 안 보이던 정치인들이 갑자기 교회 성당 사찰절에 수시로 들락날락 하는 겁니다. 이득꺼리가 없다면 만날이유가 없지요. 이윤 때문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지금 그 이윤이 서로 거래가 되고 있기에 강도도 그 속에 있고
인간의 종교적 편리성도 거기에 있고 모든 것이 이윤에 따라서 성전에 점점점 모이고
그 성전은 이윤이 모이는 동시에 추적불가능한 검은돈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되고 만 겁니다. 참 재미있게도 결국 성전은 돈이 모이는 곳이 된 겁니다. 곧 강도입니다. 굴혈 소굴 즉 은밀한 장소이다는 겁니다. 본부입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삶 자체가 그러합니다.

문제는 기도하는 집이다 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겁니다. 즉 무능의 기도가 펼쳐지는 그 어떤 이윤꺼리가 허용되지 않는 장소라는 겁니다.

부자청년 이야기에서 구원 자체가 소유 꺼리의 이윤으로 언급이 되는 입장에서 그 소유성 곧 이윤 이익꺼리를 날려버립니다. 구원이라는 우상(이익)을 날려버리는 겁니다.

엉뚱한 소욕이 펼쳐집니다. 두 점을 필히 찍겠다는 소욕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공간을 설정한 이상은 이윤은 필히 따라 붙습니다. 그런데 이윤꺼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 공간 자체가 종말성을 띤다는 겁니다.

즉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펼치겠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종교성으로써의 당연한 구원이라는 이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그 당연함에 졸지에 성령에게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밝혀지는 것이 강도의 굴혈이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 지적이 듣고 보니 맞네요. 참으로 맞군요 라고 인정하면 될 것인데
교회를 다니던 어떤 장소에 가던 인간이란 이윤을 챙기는 목적 외에는 없고
천국도 구원도 다 이윤 챙기는 시험 꺼리인데
미쁘시사 사랑하시사 이런 지적을 생전처음으로 듣게 된 것이면
당연히 맞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하면 비로소 아 이것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라는 말씀이 기록된 바 대로 맞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함이 마땅한데

도리어 어떻게 저 예수를 멸할까? 즉 죽일까 라고 생각이 든 것 자체가
우리는 마귀이다는 겁니다. 강도의 굴혈이 맞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다시 무화과나무 이야기2 로 콜라주 겹쳐지면서 종말을 더더욱 구체화 시키십니다.

(막 11:19, 개역)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막 11:20, 개역)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막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막 11: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6, 개역) 『(없음)』

아침에 지나가는 가운데에 어제 예수님께서 말씀한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제자들이 주여 주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게서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즉 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을 엎으신 사건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결국 기도란 미친짖입니다. 결혼은 미친짖이다 라는 소리도 있지만
사실 기도란 종말을 가시화 시켜 달라는 겁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이 가시화 될려면 어제 말한 무화과나무 보고 영원히 열매를 내지 못한다고 저주한 것이 기도로 인한 것이다는 겁니다. 기도 외에는 귀신이 물러가는 법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기도란 종말의 가시화인데 그 종말이란 시공간의 역사 곧 행함의 단절입니다. 곧 믿음의 실상화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인 자기영광의 실현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기도로써 즉 무능함으로써 가시떨기나무처럼 달라붙어 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이것이 제사가 아닌 순종이다는 겁니다. 행함이 아닌 믿음이다는 겁니다.

즉 행함(이윤 보상)이 아닌 믿음(무능 곧 고자 불임여성의 종말성)이다는 겁니다.

결국 종말이란 나의 유익 나의 이윤은 아예 단절이 되어버렸고
예수님의 유익 그것이 바로 소욕이지요. 예수님의 소욕 때문에 나타난 존재들인 소모품들이 바로 종말 때에 라야만 등장하는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종말의 존재인 기도하는 존재이다는 겁니다. 기도란 행위가 아니라 종말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했습니다. 내 나라 인간 나라 나의 의 인간의 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반대로 상대적이다는 것이기에 종말의 나라 종말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나라 나의 교회 나의 가족 인간의 나라 인간의 의 인간의 가족을 모조리 치시는 종말의 나라와 의 이라는 겁니다.

왜죠? 그것은 소통이 가능한 소통꺼리입니다. 그러니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는 것은 아주 아주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둘 다 같은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윤입니다. 돈이죠. 물론 형태는 다릅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힘이지 부도 맞은 종이돈 백날 갖고 있으면 뭐합니까? 실질적인 권력 권세를 추구하는 겁니다.

똑같이 종교도 구원을 하나의 권세로 소욕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다른 힘은 싫은 겁니다. 구원의 힘이라는 권세를 장악하고픈 겁니다. 그런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소통입니다. 소통 꺼리입니다. 접속 네트워크 접속으로 일치성 하나됨을 추구하는 겁니다. 단절 되었기에 소통해서 접속해서 하나됨을 추구함으로써 목적달성을 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끊고자 하는 것이 종말이다 라는 겁니다. 뭐든지 다 끊어버립니다.
지진이 나고 홍수가 나고 폭설이 나면 전화도 불통이고 휴대폰도 안터지고 인터넷도 안됩니다. 양사방으로 꽉꽉 막혀버립니다. 그 어디에서 구원이란 없습니다. J M 절망 뿐입니다.

그 단절성을 구체화 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기도란 곧 부르짖음이란 소통케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절케 해달라는 겁니다. 한 쪽이 단절이 되어야 한 쪽이 소통이 되는 겁니다. 양쪽다 소통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과의 단절이 되어야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소통이 되는 겁니다. 양다리 걸치기가 허용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든 말든 우리의 속성은 어쩔수 없이 양다리 이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로 만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윤 때문에 어쩔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뭘 주신다? 성령을 주신다
우리 힘으로 안되기에 성령이 나서시는데 확실히 학실히 단절시켜주신다는 겁니다.

(눅 11:9, 개역)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개역)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도 주님의 뜻을 나보다 더 성령이 잘 아시고
성령이 이 마귀의 소욕을 알기 때문에 그 반대인 성령의 소욕대로 맡기는 것이 기도이다는 겁니다, 뭐가 필요한지 나보다 더 딱 기가막히게 잘 아신다는 겁니다. 누가 성령이, 성령의 소욕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대로 된 것이 기도대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욕의 기도가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그 기도에 대한 언급은 자연스럽게 용서로 연결이 되는 겁니다.

악의 소욕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라는 주의 기도 앞에 용서개념이 나옵니다.
자 그러면 몇 번 용서 할까요 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맞잖아요 그런데 틀렸습니다. 도리어 용서를 받아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똑같이 소욕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용서를 몇 번이라는 숫자 개념 즉 역사 개념 행위개념 시공간개념이 나올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왔다는 것은
정작 무한대로 용서 받아야할 입장의 묵시개념 즉 종말개념 앞에서는 정말로 정말로 시험을 들 수밖에 없음을 이 무한대의 미쁘심 앞에서 들통나는 것 자체가 용서요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용서를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결국 기도를 언급하면서 용서 라는 종말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여 저도 무화과나무처럼 저주 받아 마땅함을 주님의 용서를 긍휼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를 이 저주의 세계에서 건져주시옵소서 라는

바디매오의 소경됨 거지됨 이라는 그 저주를 통해서 정작 제자들도 동일한 입장의 평탄한 균등한 입장으로 지금 보여주시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 개념으로 결국 종착되는 겁니다.

종말도 결국 용서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저주의 점 찍고 용서의 점을 찍는 두 점을 찍는 종말을 펼치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점을 찍고, 다시 3일 만에 살아나시는 부활의 점을 찍어서 두 개의 검은 눈동자를 형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는 겁니다. 종말의 얼굴입니다. 광야의 얼굴입니다. 신랑과 신부된 교회의 얼굴입니다. 성도는 이 두 점을 찍는 자인 종말의 사람입니다.

이제 악마의 얼굴과 대조됨을 형성함으로써
악마는 자신의 가면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이제 예루살렘 성전 2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막 11:27, 개역)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막 11:28, 개역)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2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막 11:30,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막 11:31,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막 11:32, 개역)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막 11:33, 개역)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저들 성전종사자의 관심사는 권세입니다. 누가 세냐입니다. 누가 크냐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능력을 부여받은 서열 1인자 인가 라는 겁니다. 이것이 이윤의 세계입니다. 육의 소욕의 자기유익의 우상세게입니다. 지금 현재의 세상이 이런 세계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어딜 감히 새로들어온 초짜가 까불고 있냐? 너 어느 명문대 출신이냐? 지방대냐? 라는 식으로 권세 타령을 하는 이유가 이런 겁니다. 이것이 강도의 세계입니다. 맘만 먹으면 권세도 거래하면 언제든지 돈으로 직분을 사고 언제든지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이 세상의 권세 개념 이윤개념 유익개념인 우상의 세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 치고 안 그러는 교회 없으니까 애초부터 교회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도 이런 판국이니 다른 곳은 두말할 것 없구요.

그래서 권세 타령으로 너 누구에게 그런 권세 받았냐 라고 예수님께 따지니까?
그 출처를 알면 서열을 매기겠다는 취지이고 더 나아가면 이윤적으로 정치적으로 거래를 해야 즉 소통을 해야 소속감으로써 접속(클릭) 네트워크가 된다는 식입니다. 만약 소통이 안되면 넌 불이익이야 이단 취급할 거야 라는 접속차단 즉 왕따 공인된 왕따를 선언하겠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가관입니다. 도리어 내가 너거들을 접속차단시키겠다 라고 저들의 인터넷연결망을 차단시킵니다.

거꾸로 묻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권세냐? 사람에게서 온 권세냐? 라고 되래 묻습니다.

하늘에서 왔다 라고 대답해버리면 자신들이 안믿었다는 것이 들통나는 누워서 침뱉기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되는데 이래 대답했다가는 대중들이 요한을 참선지자로 믿는판국에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답을 못하게 되니

그래서 모른다 라고 답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도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매매하는 상을 엎어버리고

(마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 병든자를 고치는 그 권세가 출처가 어딘지? 누구인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안 알려주시겠다고

안 갈켜 주지롱 이라고 접속을 차단 시키는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소통은커녕 철저한 배제요 단절성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구체화입니다.

교회를 구체화 할려면 이런 종말의 상황 곧 소통은커녕 단절 되는 것만
도통 무슨 소리인지? 저 소리의 출처가 어디인지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죽을 곳만 골라서 가고
양식 없는 곳만 골라서 가고
원망할 만한 곳만 골라서 가는

그것이 바로 정말로 정말로 특이한 즉 정반대이다는 거죠.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반대를 위한 반대인 접속차단인 할례입니다.

육에 무조건 반대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욕인 종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만을 어깨에 짊어지고 여호와의 전쟁을 펼치는 것과 같습니다.
할례처럼 칼도 무기도 쥘 수도 없는 무능한 힘을 의도적으로 빼내임 당한 상태로써
적진에 죽음에 뛰어든 상황입니다. 불속에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원수의 문 원수의 성에 아예 죽을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뛰어들어가시는 겁니다. 죽음의 점을 찍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다시 3일만에 사시는 생명의 점을 찍어서 종말의 얼굴을 형성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종말의 믿음에포위 당하지 않는 자는 악마의 얼굴입니다.
종말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에 종말이 펼치는 일이 어디서 온 줄 알수 없는 겁니다.

차단 당하는 겁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안 알려 준다

이 말씀을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때에만 알려주시는 이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이 불쌍히 여겨주심을 알길이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아 말라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영을 주시사 기도케 하십니다.
용서를 구하도록 말입니다. 그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종말 때에만 나타나야할 종말인간인 바로 교회입니다.

용서를 쳐다보지 않는 자는 아무리 같은 교회를 다녀도 강도의 굴혈로만 인식하는 자들입니다.

그 분리 사건이 예수님의 종말의 구체화 사건 때문에 갈라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신체 몸을 또 교회를 늘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서
늘 나의 유익만 챙길려는 그런 죄에 갇혀 버렸습니다. 그런 악에 갇혔습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주시고 고쳐주옵소서
주님의 믿음으로 이 저주 속에서 이 강도의 소굴에서 빼내어 주시옵소서
오로지 주님의 유익만이 펼쳐지게 하옵소서
그 십자가의 용서만 남게 해 주옵소서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이 깨어지고 박살이 나도록 주님의 피만 남겨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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