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4. 권세 :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는 머릿돌

2011년 8월 9일 화요일 오전 10:41:52  김대식


(막 12:1, 개역)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 12:2, 개역)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막 12:3, 개역)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막 12:4, 개역)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막 12:5, 개역)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막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막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막 12:8, 개역)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막 12:9, 개역)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막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막 12:11, 개역)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막 12:12, 개역)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있습니다. 곧 심판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그 심판이라는 흠집을 맥우어 볼려고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바벨탑이요 구원의 문은 성전입니다.

노아홍수의 심판은, 즉 공포는 곧 바로 대처방안인 바벨탑을 형성케 합니다. 구원을 형성합니다.
구음도 하나도 언어도 하나요 족속도 하나요
즉 네트워크 망의 하나됨의 일치성에 유비쿼터스(무소부재) 즉 소통이 안 되는 곳이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심판이라는 종말성 때문입니다. 종말이 아니였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겠지요.

(창 11:1, 개역)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개역)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개역)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개역)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5, 개역)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창 11:6,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 11:7, 개역)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8, 개역)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창 11:9, 개역)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결국 건축자들이 건축을 하는데 있어서 작은 집 작은 방이면 분산되고 흩어져 있어서 통일성을 갖출수가 없습니다.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고 태풍이 불면 날라가 버립니다. 곧 심판이요 종말 때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비한 것이 구원이 구원 답도록 하기 위한 것이 바로 보다 큰 건축물 방파재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 네트워크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입니다. 성전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부자청년이 바보가 아닙니다. 종말 때에도 견딜수 있는 반석을 추구한 겁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인간의 대표요 우리의 대표성입니다. 이 사람이 짤렸다면 우리도 짤린 겁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의 유일한 행동입니다. 다른 행동이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 반석의 값을 톡톡히 하겠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견딜수 있는지 한번 휩쓸어 보자입니다.
찔러 봅시다. 무너뜨려 봅시다. 망하게 해 봅시다. 허물어 봅시다.

어라 다시는 안 서는 겁니다. 오뚜기처럼 펄떡 하도 다시 일어나야 할 터인데
도통 일어서지 못합니다. 물론 시간을 달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반칙입니다.

3일 만에 일어나야 합니다. 안그러면 허물 필요가 없지요.

3일 만에 일어나야 한다는 내기를 예수님은 마귀와 한 겁니다. 욥기서처럼 말이죠.

생명이 진짜 생명이라면 3일 만에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였으니 3일 커녕 46년 보다 더 길게 시간을 줄 것 같으면
말라꼬 무너뜨리겠습니까?

그 따위 다시 일어날것이라는 소망 희망 같으면 구지 유대인의 종교 곧 악마교 믿을 필요가 없이 어떤 종교를 세워도 다 됩니다. 그게 무슨 희망이겠습니까?
결국 시간을 달라는 말은 돈 챙기겠다는 목적 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흩어버렸습니다.

그 흩어짐을 다시 세울려면 흩어진 실망한 마음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시간도 짧아야 하고
다시 재건할 돈도 있어야 하고(누구 하나 사유재산을 남겨두면- 아니리아 삽비라 또는 아간의 범죄, 그 일치성이란 이미 허물어진 상태죠) 또 무엇보다 마음이 일치해야 합니다. 누구 하나 마음이 딴데가 있으면 3일만에 세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럼 3일 만에 다시 세워지는 성전이 아닌 몸은

1 일단은 그 심판성 곧 허물어진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합니다.

(즉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성전의 화려함의 영광이 무너진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서 백합화 보다 못한, 더 나은 백합화 꽃의 영광에 차이성을 드러내면서 반드시 종말성을 담은 성전 아닌 몸이어야 합니다.)

(눅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눅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눅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2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처럼 고정화 된 장소가 되면 안됩니다.
움직이고 유동적이며 그 유동성이 혼자만의 독자성이 아니라 항상 죄에 딱 달라붙는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우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유동성입니다.
즉 죄를 일부러 일으켜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발생했는데 마침 그 죄가 있는 곳에 마침맞게 그 죄가 있는 장소를 지나가다가 마주친 겁니다.
어쩌다 마주친 죄입니다. 항상 죄가 있는 곳에 말이죠.

3 1도 불가능성이요 2도 불가능성인데
즉 말도 안되는 소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으로 나타나는데 1과 2를 합친 것의 성전 아닌 몸(사실 성전이지만 자꾸 기존의 사람의 손으로 세운 성전 때문에 헷갈리기에 그 차이성으로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몸으로 제가 참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이 등장하는데 바로

1과 2라는 불가능성인데 그런 1과 2의 죄악을 잔뜩 묻힌 몸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전제된 몸인데

싫어버린바 된 몸이고, 모든 인간의 죄악 심지어 우리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사실 믿음도 개뿔도 없으면서도 인간끼리 지기싫어서 꿀리기 싫어서 갖춘 그 쥐불도 아닌 그 헛된믿음을 추구한 우리 손에서 죽임을 당하는,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외면 당하는 몸,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다 묻힌 몸

그 몸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다윗의 가문에서 나야하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가문이란 유다의 속성 곧 며느리 다말에게 자기의 죄악을 고스란히 뒤짚어 씌워서 자신의 약속관을 고집피우다가 도리어 며느리 다말의 약속에 의해 박살이 나야하는 혈통(역사)의 고정성을 부정한 이방여자(삑사리)의 유동성(죽었다가 살아나는)에 박살난 사건을 담고서 찬양아니하고서는 못 배기는 어리석은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가문- 처음자리 되돌림 당한, 창세전의 예정된 피 가 나 보다 옳았습니다를 담은 약속의 가문)

동시에 그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죄악을, 원수성을(유다의 원수성) 감당하여 찬양케 만드시는
(비웃음이 웃음이 되게 하는 약속,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주께서 깨끗케 하셨네요 라는 약속을 노래하는) 자가 바로 다윗의 주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의 주여 다윗의 주여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시도록 하는 이유는
마치 사도바울이 하라 하지말라처럼 바울이 너도 나처럼 당해봐라 상관없다 라는 것과 똑같이
다윗의 주여 라고 안하고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고쳐주십시오 라고 외치도록 하시는 이유는
너도 다윗과 같은 똑같은 케이스를 밟아 오라는 겁니다.
그 뻔뻔스러움은 정작 아쉬울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마귀에게 사로잡혔고
다윗처럼 마귀를 손님으로 대접코자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죽인 자신의 모습이
마귀가 그렇게 했다고 저는 마귀에게 갇혀버린 자입니다 라고 포로되고 갇혔고 눈먼자임을
고쳐달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빼내어 달라고 외치는 자에게는
그 다윗의 자손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유일한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고쳐주시든 안고쳐주시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마귀에게 장악된 세계에 심지어 유대사회에 현재 기독교사회에
모두다 치우쳐져서 마귀에게 장악된 그 세계에 다윗의 자손이 오셨다는(창세전에 예정된 다윗이 있기도 전의 약속) 그 자체가 이미 승리했다는 겁니다. 믿음이 왔으니까 말이죠. 우리 믿음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결국 다윗의 주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은 우리의 악마성을 담는 자입니다.
담아야 씻을 것 아닙니까? 다윗을 담는 자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안하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출처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여기서 출발했다는 겁니다. 그냥 믿음이 아니라 가짜 믿음을 대조시키면서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짜 믿음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믿음의 출처가 된 마냥 아브라함을 쳐다봐야 합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 어 어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덮쳐졌습니다. 그 가짜 믿음이요, 우상 조각가요, 믿는 것 자체가 안되니까 우상 조각하듯이 믿음을 모조리 행함으로만 나타낼 수밖에 없는 그 행함을 도리어 외부에서 온 믿음이 아브라함의 가짜 믿음인 행함을 쳐서(마치 며느리 다말로부터 시아버지 유다의 약속관이 부서뜨림 당하듯이) 쳐들어오는 그 진짜 믿음이 바로 이삭의 제물 됨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삭이냐? 아니죠. 이삭은 하나의 언약의 화살표를 보여주고 어린 아이 이삭을 움직이는 눈에 안 보이는 분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삭이 약속을 비웃은 아브라함을 담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훨씬 미래의 예수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비로소 실체를 본 겁니다. 그림자의 화살표를 따라서 어디가 실체인가를 제대로 보게 된 겁니다. 그러니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삭이라는 희생타로 말이죠. 새언약의 출처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꺽으신 뼈 그리고 상한심령 그리고 여디디야 로 인해서 그들의 희생안타를 통해서 비로소 다윗의 자손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주 라고 부르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기뻐하듯이 말입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버립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또는 우리 인간의 믿음은 시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이기에 가짜입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믿음이라고 제시하면 또 반드시 달성할 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니까 행함이요 행함은 결국 육에서의 출발입니다. 영 곧 예수님의 몸에서의 출발이 아닙니다.

시공간에 갇혔다고 말해 줄 수 있는 분도 예수님 뿐입니다.
철학자들이 깨달아서 시공간에 갇혔으니 그것을 초월하고자 나온 사상 종교 학문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오로지 빼내주실자가 아니면 나올수 없는 겁니다.

그 분을 아브라함은 또 다윗은 예수님이라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보게 되는 겁니다.
무슨 수로 수천년을 뛰어넘어서 기뻐할까요? 하나님이라는 추상적인 분을 보고 기뻐한게 아닙니다. 반드시 이 땅에 발 딛일 분을 본 겁니다. 그것이 희생안타를 통해서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다. 죄악을 원수성을 담을 자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그냥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하니까 믿어주지 뭐 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아주 아주 구체적으로 결국 내 손에 반드시 죽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제대로 역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종합해서 반대로 한번 살펴 보면
위의 1 2 3 세가지로 나열한 그 불가능성을 기어코 인간은 추구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놀랍게도 예수님을 경쟁상대로 죽이는 꼴이 됩니다. 결국 반대를 해 봐도, 예수님이 몰고온 방식을 반대로 추구해 봐도 역시나 그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육은 무슨 짖을 해도 예수님 죽이기 밖에 안나옵니다.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 가짜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결국 자기자신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음을
예수님이 역이는 방식을 그렇게 설정한 이상 안그러고는 못배기도록 하신 겁니다.
그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을 안따를려고 했던 것이 도리어 십자가 대로 한 것이고 또 잔머리 굴려고 그럼 십자가 방식 추구하지 라고 해도 결국 그 십자가는 어차피 인간의 뜻대로 벌어지는 법이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괜히 말을 빙빙 돌리면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또 해석망상을 펼쳤지만
쉽게 말해서 행함이 없다고 해도 무조건 마귀를 겨냥한 믿음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가득 가득 까가득 묻혀서 그런 몸을 앞장세울 때 우리는 도리어 십자가에 죽여라 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어두운 눈임을 드러내는 방식인 십자가의 방식을
그 어리석은 방식을 미련한 방식을 고지곳대로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십자가가 왜그렇게 고마운고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음의 서열, 착함의 서열, 행함의 서열, 말씀 잘 지키기의 서열 등등이 또 그런 장난을 천국에서 까지도 펼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아예 다 차단하는 방식은 십자가 뿐입니다.

에이 설마 안그렇습니다 라고 의외로 많이들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제가 교회 다녀봐도 교회에서 하는 짖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안하면 되지 않느냐? 개판된다고 눈꼴 시러워서 못 봅니다.
그러면 기득권을 쥔 자는 질서가 개판 된다고 하고
기득권을 쥐지 못한 자들은 그런 말(개판된다고)하고 있는 정치꾼들을 또 눈꼴시러워 못보고
자신은 정치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둘 다 매 마찬가지로 마귀에게 장악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제가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죽일때는 정작 그렇게 분파지고 서로 원수지간이고 상종도 하지 않던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 목표 하나에는 일치점을 추구하게 됩니다. 분명 서로가 서로를 으르렁 거리는 자들입니다.

또 놀랍게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그 목표가 달성 되었을 때에는
그럼 그 이후로 하나의 당파로 합세 되느냐?
천만의 말씀 역시나 다들 흩어져서 서로가 상종하지 않는 으르렁 거리는 자기영역을 고수하게 되는 겁니다. 참 희한하죠?

이것을 뻔히 주님께서 아시면서 그들의 손에 죽으시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말이죠.

절대로 마귀는 주님의 뜻에 벗어나는 일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옥도 아무나 가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 때문에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천국도 아무나 못갑니다. 오로지 주님의 영광 때문에 갑니다.
그러니 인간의 천국관 지옥관 마귀관 언약관은 모조리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무조건 틀리는 겁니다. 순간 맞추는 부분이 있다해도 고정되어버리면 이미 벌써 틀린 겁니다. 유동적인 진리관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으니까요

진리는 변한다 라고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진리는 변한다 라고 인간들에게 대중에게 박아놓은 이상 고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진리는 변한다 라는 소리가 변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진리는 변한다 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라고 또 어떤 철학자가 말했기에
그 진리는 결국 고정화 된 가짜입니다.

진리가 누구다 라고 말을 못합니다.
왜냐 인물이 되어 버리면 철학자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요 인간은 누구나 유식하게 다 알 듯이 죽는다는 사실이기에 유한적이지 절대로 무한적일수 없기에 아예 처음부터 인간에게 또는 인물 즉 누구에게 붙일 생각 조차 한 적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감히 성경말씀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이라는 언약을 진리를 누구 라는 인물에 겁도 없이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르함은 이삭을 본 겁니다. 이삭은 곧 바로 화살표로 작동이 되어서 아브라함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려버립니다. 시공간의 초월하는 눈을 열게 말이죠.

그래서 처음 알파의 점을 찍고 아 이것이 창세전의 예정이구나
그리고 나중 오메가의 점을 찍고 장차 오실 구름타고 오실 인자

이 두 점을 찍는 분인 인자를 보는 믿음이 덮쳐져 버리는 겁니다.

진리는 그 분이다 라고 말이죠.  알파 점도 창세전 곧 시간 전인데 지금 현재 찍힐리도 없잖아요 그런데 찍으러 왔다는 것은 역사적(시공간의 시선)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쳐들어오는 방식 뿐입니다. 그리고 미래 점은 더더욱 말이 안됩니다. 완료점입니다. 시간도 멈춰진적 없고 공간도 멈춰진적도 없는데 어떻게 시간의 끝 공간의 끝이 미리 앞당겨져서 쭈욱하고 주름접혀지듯이 그 끝이 다가오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때 곧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한 겁니다. 즉 끝을 본 겁니다. 처음과 끝을 다 본 겁니다. 처음이 덮쳤으니 시작한 분도 주님이요 나중이 덮쳤으니 끝도 주님임을 본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자 이제야 본문을 들어갑니다. 위에서 말한 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종말이 왔다는 겁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이 왔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덮쳤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덮쳤던
그리고 다윗에게 덮쳤던

그 종말이가 바로 다윗의 자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 살펴봤고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 종말의 권세를 안알려주지롱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알려준다고 캐놓고 알려줍니다.
알려주는데 기분 좋게 서로 서로가 소통되는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화과나무에게 때도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 내라 안내니 저주한 것처럼
도리어 그것에 제자들이 놀라고 그 신기한 일에 도통 해석이 되지 않아서 해석해 달라고 빨리 풀어야 자신들이 그 입장과 마찬가지임을 알았기에 알려달라고 했지만
정작 말해줘도 못 알아먹는 겁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까지는 두 점을 찍기 까지는
알려줘도 모릅니다. 때를 쓰고 달음박질 할 문제도 아닌 겁니다. 모로지 예수님에게 모든 권리 모든 권세를 박탈당하는 것 밖에 없듯이 손 놓아야 할 문제일 뿐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주는 권세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놀려먹으니까
모르겠다고 하니 나도 안 알려주지롱 이라고 하시면서

(막 11:33, 개역)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종말을 알려주시는데 그 종말이 아브라함에게 또는 다윗에게 알려준 긍휼의 심판이 아니라
아주 아주 못때 빠진 모습으로 썩은 동아줄의 종말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마치 맏이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고
동생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된 것처럼

무슨 짖을 해도 무조건 미움이고
무슨 짖을 해도 무조건 편애의 방식으로

종말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뭐 제사드리겠다고? 난 아벨꺼만 받을 거야!
치 그럼 아벨 죽여버리면 나 외에는 받을 제사 없지요 뭐? 내 제사를 무조건 받으셔야 할껄요?

그러니까 아벨 꺼만 받잖아

아니 아벨이 없다니깐요.
아벨을 제가 죽여버렸기 때문에 없어요.
예수는 우리 인간이 죽여버렸기 때문에 없어요.
우리 인간의 성화를 받으세요.

어허 그러니까 지금 예수의 것을 잘 받고 있잖아
어디요? 안보이는데요? 없는데 왜 받으신다고 하십니까? 보이는 것만 받으세요.
보이는 것 끼리 이야기 합시다 자꾸 안 보이는 것 가지고 이야기 하지 맙시다.

그건 니 사정이고 난 예수의 것 외에는 안 받는다. 십자가 외에는 나는 자랑할게 없다니깐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래서 십자가 곧 종말을 외치십니다. 거리끼는 겁니다. 걸림돌이니까 넘어져 실족케 하니까요. 또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미련하니까 죽는 다고 보는 겁니다.

(막 12:1, 개역)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 12:2, 개역)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막 12:3, 개역)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막 12:4, 개역)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막 12:5, 개역)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종말의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는고 하니 반드시 능욕받아서 죽는 방식으로써의 종말의 노선을 이끌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 장소가 반드시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곧 인간 구원의 장소인 바벨탑, 오늘날로 치면 교회요(왜냐하면 구원의 장소요 문이기 때문에), 세상사람으로 치면 우상이 되는 것들 돈 또는 국가입니다. 결국 소통의 교환(편리의 매매)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장소 = 공간 = 몸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언뜻 생각이 나서 말이죠, 과거의 철학은 공간철학이였다고 압니다. 물건 물질 중심으로 사고를 펼친 철학이였는데 그것이 시간철학이 활성화 되면서 꽃을 피우다가 그다음에는 시공간을 합친 시간 중심의 철학으로 이어져서 이제는 공간중심의 시공간철학이 현재에 펼쳐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공간중심이 바로 인간의 몸 중심의 철학입니다. 몸 곧 공간에 따라 시간이 달려지니까 구조중심의 철학이 현재 펼쳐지고 있습니다. 몸 중심)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은 즉 몸은 딴 민족의 몸과 다른 공간입니다. 저마다 몸은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라는 유대인의 몸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구약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약속을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만약 그 공간을 그 몸을 깨뜨리면 완전히 사라지든지? 아니면 도리어 우주적으로 확대되든지? 하겠지요. 소멸이 확정되는 의미인지? 그렇다면 더더욱 사수하고 보호하고 지켜내어야 하겠지요. 아니면 제한된 것을 확대 시키든지? 그렇다면 확 깨뜨려서 구약의 모든 원리가 유대인의 몸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에 해당되도록 확대 적용케 되는 것이겠죠.

예루살렘을 마치 시아버지 유다처럼 유다가 생각한 혈통적인 그 약속이 맞는지
며느리 다말에게 덮쳐진 반드시 유다의 약속관을 깨뜨린 그 장소 그 속에서 새로운 약속을 펼치겠다고 쳐들어온 며느리의 불온성, 그 불온성이 옳은지를

시아버지 유다를 확 깨뜨려 보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확 깨뜨려 보는 겁니다.

물론 더러운 이방여자 며느리 다말이 역여야 하듯이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예수님이 죽으셔서 역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구약에 담겨진 내용물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노선은
앞선 참선지자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 참선지자는 예수님의 노선을 따르고 있고요
미래와 과거가 뒤죽박죽처럼 썩인 짬뽕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예정된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예정된 십자가 라는 겁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처럼 인간의 몸은 이 종말에 이리 뚫히고 저리 뚫히는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구원의 공간 구원의 시간은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짐을 당한다는 자체가 뒤 따라 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이미 완료된 성전을 외치다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무효화 시키는 거짓선지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당합니다.

오늘날 도 예수님의 증인은 그렇게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하니까 그것이 심각하냐? 오히려 그렇게 하신 것이 더 좋은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면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을 무효화 시킴으로써 싫어버린바 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외치는 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외치는 자들에게서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무효화에 공포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결국 두 몸의 싸움이 이 성전 곧 예루살렘 한 공간에서 두 세계가 충돌하는 식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예루살렘을 반드시 언급하면서 그 예루살렘 속에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외치십니다.

(막 12:1, 개역)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 12:2, 개역)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막 12:3, 개역)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막 12:4, 개역)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막 12:5, 개역)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막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막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막 12:8, 개역)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막 12:9, 개역)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비유 곧 비밀로써 말씀하시는데
너희들은 나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라는 소리입니다.

이 얼마나 이상한 소리 입니까?
아니 죽일 마음이 없었는데 졸지에 이 소릴 듣고 갑자기 죽이고픈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을 말이죠.

인간의 보편적 속성은 선악입니다. 그런데 그 선악을 건드리니까 안 죽이고파도 안죽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렇게 안되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한 것이 아예 없습니다.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나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다.
포도원 주인이신 내 아버지께서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갔는데
때가 차서 포도원 농부에게 소출 얼마를 받고자 종을 보내니까
그 종을 심히 때리고 그냥 돌려보내길래
다시 다른 종을 보내어 소출을 받을려고 보내니
이번에는 농부들이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여 돌려보냈다.
다시 또 다른 종을 보내었는데 이제는 아예 죽여버렸다.
다시 많은 종들을 보내었는데 게속해서 죽여버렸다.

자 이제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보내면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은 공경할 것이다 라고 보냈는데

오히려 저들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더 잘 되었다 이 아들을 죽여버리고
상속자가 없으니 그 재산은 모두 우리 것이 되도록 하자 라고
아들을 죽여버리고 포도원 밖으로 던져버리니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딴 농부들에게 주는 겁니다.

(막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막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막 12:8, 개역)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막 12:9, 개역)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막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막 12:11, 개역)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상식적인 소리입니까? 이해 가능한 소리입니까?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장소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육체는 예수님의 몸과 차이나야만 하는 육체로써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어떤 육체도 예수님을 안 죽이고는 못 배길 육은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는 육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그러합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만
사실상 늘상 벌어졌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무수한 종들을 선지자를 예루살렘에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것을 고스란히 담고서 예루살렘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것이 죄입니까? 그런데 왜 이런 소리를 아무 이유없이 들어야만 합니까?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예루살렘에 의미를 두고 있고 그런 의미로 여기 예루살렘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들이 단순히 과거의 자신들 조상들처럼 참선지자를 죽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안 죽이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안죽이고파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지금도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 언급된 세례요한의 죽음입니다.
결국 역여버린 겁니다. 세례요한은 이를 위해 역으면서 죽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은근슬쩍 감추고자 한 사건을 지금 어딜 감출려고 하면서 쏘옥 삐집어 도려내듯이 파재끼는 겁니다. 감추인 것이 안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다들 알아 먹는 소리를 한 겁니다. 아무리 모른채 해도 말이죠.
왜 내 종 세례요한을 죽였느냐 이 예루살렘아 이 인간들아 라고 발가벗겨버리는 겁니다.

결국 예루살렘이라는 교회 곧 성전은 세례요한을 죽였던 것을 죄악을 감추이고자 한
자기들 손으로 지은 가리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실 일은 뻔합니다. 그 가리개를 확 벗겨버리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을 확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로써 드러나야만 하는 겁니다.

뭐 구원의 문? 웃끼고 있는데 강도의 소굴이야 라는 겁니다.

교회를 왜 다닐까요? 결국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죄악을 가리고자 감추고자 가리개로 삼고자 교회에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 저 비유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셰계 전 우주에 다 저촉되는 주의 목전 앞에서 감추인 것이 없이 다 드러나야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육의 소욕이 다 까발려 져야 하는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주의 목전입니다. 주님의 눈 앞입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꼼수로써 도리어 성전을 가리개로 다들 찾는 겁니다. 바벨탑을 세우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그런다고 가려집디까?

육체는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죽입니다. 육의 소욕은 성전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구원의 문으로써 우상이 됩니다. 그러니 그것을 벗겨버리니 허물어 버리니 강도의 소굴이 맞는 겁니다.

예수님 빼고 그 어떤 성전도 다 더러운 강도의 소굴입니다.
예수님만 참성전입니다. 그러면 참성전이 하는 역할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 만을 내세우니까 다들 발가벗겨짐을 당하는데 그것이 강도의 소굴로써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를 믿으면 안됩니다. 교회야 말로 예수님을 못 믿도록 하는 중간에 가로막는 예수님을 가려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참교회란 없네요 네 없습니다. 없다고 생각하시면 마음 편한 겁니다.
참성전은 예수님 뿐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잉태하여 세상에 내놓는 교회라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 성도라는 교회가 이런 가짜교회와 부딧히고 충돌하는 역할로서 세상에 내던져지는 미말에 구경꺼리, 웃사꺼리, 비웃음꺼리로써 주님이 세우신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같은 노선이 되는 겁니다.

이러니 교회라는 꿈같은 놀이동산 아담하고 소박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한 그런 동산은 없는 겁니다. 

성도는 세상사람들이 비웃는 십자가라는 현실을 주장할 수밖에 없고
그 십자가라는 현실은 도리어 가짜교회가 가장 배척한다는 양상을 들추어내면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 조차도 성령의 소욕이니 의도적으로 인위적인 상황을 맹글어낼수가 없습니다.

누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바울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바울 역할을 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를 죽여야 할까요? 과연 그 죄책감을 넘어설수 있을까요? 넘어서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이기 때문에 주님 스스로가 하시는 겁니다.

결국 사로잡힌바로 하게 되는 겁니다.

육체는 개입할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수님께서 비유로써 말씀하시는 것은

(막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막 12:11, 개역)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이 예언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와 동시에

(막 12:12, 개역)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저들의 공포는 곧 살인의지로 변하여 속내를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복음은 곧 십자가는 그냥 전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반드시 악마의 속내를 긁어가면서 증거 됩니다.
복음이니 저주를 들추어내지 않고서는 안되는 겁니다.
빛을 증거하니 어두움이 드러나듯이 말이죠.

그럼 어두움은 자신의 본성인 빛을 미워하는 속성을 반드시 나타내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종말의 상황이니 어디 인간의 숙제가 될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십니다. 그 주님의 하심이 덮치면 그저 당할 뿐입니다.

내가 하면 내가 판단한 악마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악마가 훨씬 능합니다.
내가 분별할수 있는 악마란 없습니다. 나에게 분별당하는 그런 멍청한 마귀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덮친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주 되심을 위해서 나를 스피커로 안외치고는 못배기는 성령을 하늘의 전기선을 꼽아버립니다. 스피커는 자동적으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자청년도 아니였고
구원의 조건을 갖춘자도 구원을 못 받으면 누가 구원 얻겠습니까 라고 하는 제자들도 아니였고
반대로 나는 다 버리고 주님을 쫏는다고 외치는 베드로도 아닌

그런 인간 쪽에서의 출발이 아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난 소경입니다 눈 먼 나를 고치소서 라고 하는
거지이자 소경인 바디매오

아무것도 내세울 꺼리가 일체 없이 오로지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

그 이름만 앞장세우는 자 만이

이 예루살렘과 대조 되면서 등장하듯이

예수님도 그 노선으로 오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꺼리가 없는
비웃음꺼리가 되는 그 십자가만을 종말로써 처음이자 나중의 끝으로 종지부를 찍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게만 보여줄 표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내 쪽에서 출발한 것으로 도리어 주님의 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차지 할려는 악마의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세우고 높이고 나의 이름을 내고 소통하자고 했던
그런 성전 그런 교회는 강도의 소굴임을 주님의 어리석은 십자가가 발가벗겨주셨습니다.

이런 육체의 소욕이 가득한 교회를 예루살렘을 허물어 주시고
그 애굽에서 빼내셔서

주님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성전에 거하게 하소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함을 받게 하시는 그 전에 거하도록

우리를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에서 빼내시고 건져주시옵소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기이한 성전을,

그 어린양의 피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계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 되신 어린양의 피만 자랑하게 내 부정한 입술을 숯불로 지져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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