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5. 건축자와 십자가라는 머릿돌

2011년 8월 19일 금요일 오후 12:57:56  김대식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막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막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막 12:8, 개역)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막 12:9, 개역)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막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막 12:11, 개역)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막 12:12, 개역)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막 12:13, 개역)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 12:14, 개역)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 12:15, 개역)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 12:16, 개역)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십자가라는 것이 인간의 구원용이 아니라 심판용인 이유가 바로 십자가가 인간들에게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구원 장치가 이미 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구원장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입장에서는 그 장치들은 구원도 시키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지옥으로 더 앞당기는 장치라고 고발하는 겁니다. 심지어 인간들이 외치고 있는 십자가가 그렇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외치고 있는 십자가와 예수님이 외치고 있는 십자가는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이 외치는 성화와 예수님 곧 성령님이 외치는 성화는 다릅니다.

반드시 인간 쪽에서 구비한 것들을 허물지 못하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십자가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대상이 되고 인간 자체가 주체가 됩니다.
물론 인간 스스로가 노마니즘으로 탈주를 하면 그 탈주한 만큼의 십자가가 대상이 되겠지요. 그렇기에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스스로 늘 탈주 합니다. 대상이 되지 않고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스스로 부정해 버려서
어제의 십자가가 아닌 오늘의 십자가를 다시 새로 형성하는 겁니다. 즉 탈주는 십자가 외에는 응용할수 있도록 붙일수 없는 유일한 결정성 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딱 하나 십자가만 예정된 겁니다. 인간이 고정시키거나 탈주시킬수 있는 대상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십자가가 인간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십자가 뿐입니다.

그러니 인자개념에서 주께서 주를 스스로 치시고, 주님이 주를 거부하고 새로운 주를 매일 생산하는 겁니다.
결국 신학으로 인간의 믿음으로 포착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매일 매일 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모든 종교에는 구원용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부활을 위한 십자가죠. 인간 구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면 미쳤다고 인간들이 종교를 세우겠습니까? 그래서 방금 쓴 과격한 표현 미쳤다 라는 표현 조차도 종교인들은 자제를 하는 겁니다. 구원의 조건에 안 맞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르고 골라서 천국갈려면 그럴듯하게 가야하는 겁니다. 천박스럽게 갈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천박성을 거부하는 인간구원의 장치에 예수님은 일부러 그 천박성에 목숨을 걸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고착성을 날려버림으로써 인간의 하나님은 모조리 우상화 되어 목이 달아나는
십자가에 늘 빈자리가 되는 식입니다. 인간은 신을 세울려고 하고 십자가는 그 신을 매일 매일 날려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손에 죽는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의 몸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전과

예수님 자신의 몸에서 증거되어지는 성전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상 인간의 신체는 성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전은 하나의 가리개요 정작 관심사는 자기 신체입니다.
누가 자신의 신체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 신체에다가 무방비로 당할 수가 없어서
갑옷처럼 보호장비를 구비하듯이 갖추는 것이 성전 뒤에 숨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의 몸은 그 반대로 모든 인간으로부터 공격받는 몸입니다.
심지어 자기 백성으로부터 마저도 공격받는 몸입니다.

(눅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자는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그 일이 뭔고 하니 예수님의 몸으로부터 즉 창조주의 몸 주의 주 되시는 몸으로부터 갈라지는 정점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중에서 말이죠.

그래서 두 패로 나누시는 기준의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일을 베드로가 자신의 착한 마음씨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씨로 막을려고 하니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외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자기 일만 고집피운다는 겁니다. 자기 일이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로움은 때려죽어도 이스라엘을 두 패로 나누지 못합니다. 흥함과 패함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그 십자가라는 긍휼의 기준을

인간의 몸이 이상스럽게 막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시기하기 때문이요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된 몸이 되고파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내 몸에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선과 악을 판결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 몸을 배제 시켜 버리지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배제 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설마 성전 지으면 배제 안 시키겠지 싶어서 자기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뜻에 배제 안 당하도록 하는 조치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마귀적인 사고방식을 더더욱 활용하여서
그들이 세운 성전마저도 배제 시킴으로써 또 더더욱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시고자
차이 나는 대조적인 도구로 상대적인 비교대상으로 더더욱 활용하십니다.

이것은 악마가 세운 성전이고 이것은 예수 내가 세운 성전이고

그럼 우리 인간은요? 인간은 이미 마귀에게 갇혀 버렸단다 라고

아예 이야기 할 자격조차도 주지 않고 빼버리십니다.

그저 그렇게 하신 주님만을 찬양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나보다 옳았습니다. 라고 말이죠.



인간이 눈에 보이는 존재 이기 때문에
성전도 기껏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전을 세워서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다 채워 넣게 됩니다.
결핍이라는 결핍성은 모조리 성전에다가 때려부으면
자동적으로 같은 욕망에 있는 인간들은 성전을 사모하게 되도록
아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설마 하나님 본인이 인간 보다 더 편애스럽게 외친 성전인데
이 성전을 외면하지는 않겠지 라는 식입니다. 본심은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교회죠.

그런데 주님은 그런 성전을 구약에서 조차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솔라믄 세워질 성전 같으면 아예 말을 하지를 않겠지요.

그런 성전을 말한적이 없습니다.

구약 어디에도 눈에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들이 오해를 해서 기여이 자기들 손으로 지을려고 하는데
특히 다윗이 그랬는데
못 짖도록 한 겁니다.

그래도 자기 욕심대로 기여이 짖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양보 안합니다. 오히려 그런 다윗의 눈에 보이는 성전을 이용해서
다른 성전을 말합니다. 곧 다윗의 자손인 다윗의 가문입니다.

가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멜기세덱 반차와 같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면 눈에 비가시적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다윗의 자손 이라는 진짜 성전 때문에 이스라엘은 두 조각이 반드시 나야만 하는 식이 바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활용하여서 그 차이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솔로몬이 죽고난 뒤에 이스라엘이 두 패로 나누어져서
더더욱 성전에 대한 충성과 집착
성전 사모로 인해 주님을 삼켜버리는 역사가 됩니다.

그러든 말든 주님은 이미 완료된 성전을 참선지자를 통해서 외칩니다.
그러면 참선지자들의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도록 하시느냐?

천만의 말씀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못받도록
전혀 무슨 소리인줄 모르도록 하시는 약속을 외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거짓선지자까지 천상회의를 통해서 누가 이 백성을 미혹할래? 라고 마귀를 보내어서
거짓선지자 거짓여선지자 모조리 다 동원시켜서
철저하게 차단 시켜 버립니다.

그러니 그 어떤 백성도 딸랑 한명 뿐인 참선지자의 말에 귀를 귀울릴수가 없도록
모든 대세의 흐름을 모든 왕 백성 거짓선지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도리어 참선지자를 갈기 갈기 찢어 죽여버리는 환경을 만들어 버리니
아무도 못 듣도록 하시는 겁니다.

철저한 차단입니다. 인간 쪽에서 뚫을 수 없도록 차단한 겁니다.

그리고 참선지자는 개죽음을 당해도 이미 완료된 성전으로 기뻐하면서 죽임 당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와 모든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 매진하도록 하게 합니다.

마치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반복된 사건 같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바로 연결이 되어 버리지만
가인의 제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안 덮쳐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제사를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서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을 건설하는 예루살렘을 짖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아벨에게는 아벨의 몸을 찢어버려서 예수님의 몸과 바로 접속시켜 버리고
물론 이것은 시공간을 떠난 성령의 소욕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정작 외부에서 다가오는 몸이 없기에 자신의 몸에서 나올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시공간을 넘지 못하는 겨우 영웅들의 성을 짖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은 예루살렘과 연결시킵니다. 인간의 몸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몸을 거대하고 크게 마치 다니엘서의 금신상 우상처럼 이제는 교회로 성전으로 세우는 겁니다.

마침 이런 가인의 제사와 연관된 질문이 올라왔기에 링크 달아봅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board02&wr_id=2211

그런 가인의 제사는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계속 무한반복되도록 주님이 이마표를 일부러 찍었습니다. 자신의 몸 곧 아벨의 제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차이성으로 반드시 대조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마가복음 본문에서처럼
예루살렘과 곧 인간의 몸과 예수님의 성전 되신 몸이 중첩이 되면서 동시에 그 차이성이 드러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몸 곧 예루살렘 성전은 원수의 성문으로써 그저 자기의 구원을 바라는 우상의 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그들은 정작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차이성으로 예수님의 몸이 그 원수의 문을 활짝 열어재낌으로써 원수성을 폭로합니다. 인간의 모든 신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마땅함을 예수님의 몸이 성전되신 몸이 실제로 보여줍니다. 그 몸이 옳았다 라고 어찌할꼬 라고 외치도록 부끄 부끄 부끄 럽게 만드시는 몸은 우리들의 몸이 아니라 우리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주님의 성전되신 몸 뿐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성전이란 이 기능을 합니다. 부끄 부끄 부끄

성령의 전 성령의 전 된 성도 곧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님처럼 인간들의 구원을 가로막고 차단하고 자신들의 꿈대로 사람의 일을 이루고자
착한일 선한일 예수님이 죽지 않도록 잘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없도록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자된 도리로써
말씀을 실천하는 자로써
은혜를 받은자로써의 당연한 도리를 하겠다는 그 사람의 일을

도리어 가로막고 버티는 꼬끼오 꼬기오 꼬끼오 울부짖는 닭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진짜 교회입니다.

당나귀처럼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매맞고 버티는
도리어 그런 어리석은 자기뜻대로 하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심판받는 당나귀

말이 참 재미있지요? 모순되나요? 헷갈리나요?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서 버티고자 도리어 오해를 받고 심판받는

심판을 막고자 심판받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심판을 막는일은 착한 일이 되어 버리지요.
그런데 심판을 막고자 반드시 오해를 먹으면서 심판 곧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이다는 겁니다.

이 일을 참 특이하게도  거리끼는 일이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안 나설려고 한다는 겁니다.

일의 성과란 보람과 만족이 있는 댓가가 따르는 겁니다. 가치가 있음입니다. [있음]

그런데 거리끼는 일은 평생 졸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악플입니다. 악플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법인데 이런 악플은 죽어도 안 사라지는 대대손손 따라다니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저주의 악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리끼는 십자가입니다. 바로 부끄 부끄 부끄입니다.

무슨 수로 돌파 하겠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면 참 쉽습니다. 어린아이도 다 알아먹습니다. 오로지 어른만 말귀 못알아먹습니다.

바로 재를 뒤짚어 쓰면 됩니다. 그렇기에 행함으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그것도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그 표현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 다 라는 이미 완료입니다.

맞습니다. 눈치 채셨군요.
구약의 참선지자들이 이 죄인 중의 괴수 라를 새피조물을 곧 이미 완료를 뒤짚어 씌임을 당한 겁니다.

그래서 그 시점에서 그 신체 곧 인자죠
그 몸을 기점으로 해서 두 패가 쭉 쭉 갈라지는 나누어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다윗의 가문이 쭉쭉 갈라지듯이 뽑혀져 나오는 겁니다.
눈에는 전혀 보이지도 않으니까 손을 탈수도 없고 확인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든 말든 남은자는 이스라엘 속에서 뽑혀져 나오는 겁니다.
심지어 바리새인이 그것을 눈치채고 남은자 운동을 저거들끼리 운동 펼쳐도 무용지물이 되도록
진짜 남은자 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그 완벽하게 경건을 추구하는 자들을 차단해 버립니다. 어딜 감히 육이 말이죠.

자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완료성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가 되든 말든 이미 완료가 덮친자는 얽매이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완료가 덮쳐지지 않는 자에게는
도리어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교리와 신학에서 더더욱 발전에 발전을 더하면서 여젼히 이미와 아직으로써 겸손떨며 부족합니다 ~~~ 라는 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식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또한 겁을 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든 말든 주님의 완료가 있기에 주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완료가 덮쳐지지 않은 자에게는 완료를 향한 미흡한 것에서 충성을 다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교회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회 속에서 말이죠,

반드시 이 두 패의 충돌이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단과 비이단의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통이 이미 기득권을 장악할 수도 있고
비정통이 정통들에게 개같이 취급당하고 있는 가운데서 벌어질수 있는
아무도 그 성령의 소욕을 파악할 수 없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겁니다.

비정통도 권력과 힘과 돈 정치가 손에 잡히면 개 가 되는 것을 불 보듯 뻔하고요
정통이라고 우기는 놈들은 더 심하고요. 이미 개이면서 개를 보면 못견디니까 더 가관인 겁니다.

주님이 다 개로 보는 판국에 누구의 시선이 더 두렵지 않기 떄문에
자신들의 시선을 주장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겁니다.

개들이 개들끼리의 시선에 이미 서열과 정통과 비정통으로써 권력이 배분되어 있는 정치가 곧 질서가 이미 완벽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예수님이 깽판을 놓습니다. 그렇게 되니 다 개판이 됩니다.
무질서가 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개로 몰고자 하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문제는 전혀 악마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도리어 악마스러운 면을 예수님 쪽에서 툭툭 튀어나도록 흐름을 장악할려고 합니다.
고도의 심리전이지요. 함정수사입니다. 범죄를 안짖고는 못배기도록 자신들이 이미 법과 법사이의 한계점과 그런 법망의 상황들을 다 파악하고 있으니 힘이 작용하면 멀쩡한 인간도 한순간에 죄인 만드는 것은 유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행사합니다. 사건을 벌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교활하게 그런 내막을 이미 꿰뚫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들의 법망에 걸려줍니다.

이것도 모르고 우리는 베드로처럼 단순하게 죽으시러 가면 안됩니다 라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이런 사단의 일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예수님이 대신 사단의 일에 말려드는 겁니다. 대신 당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는 죄목을 저들의 뜻대로 말려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원수들에게 넘겨주시는 겁니다.

맏아들이 이미 사단에게 넘어간 탕자를 왜 거두느냐 라고
아버지의 뜻에 저항합니다.
그러니 진짜 마귀는 단 한번도 마귀에게 넘어간 적이 없다는
그래서 마귀에게 넘어간 탕자를 용서하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더 밉다는 그 악마성이
도리어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들통이 나는 겁니다.

맏아들은 기준이 사단에게 넘어감 이지만
아버지의 뜻은 사단에게 넘어갔더라도 용서함 이라는 십자가 기준입니다.
여기에 탕자를 아벨처럼 돌삐로 쳐죽이는 사고방식이
가인의 제사(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다는 사단에게 넘어간 적이 없다는)가
죄의 소원이 덮친 제사로써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것이 사단과 한 패가 된 제사입니다.

희한하죠. 그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난 단 한번도 사단에게 넘어간 적이 없다는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다는 사고방식이
죄의 소원이요 그 자체가 그 가인의 제사 자체가 죄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또 이 말을 오해하면 그럼 누가 구원받냐? 그러면 제사 드리지 말라는 말인가? 막살아 라는 말인가? 이래 버럭 거립니다.

기준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 기준 때문에 마귀의 활동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마귀의 활동상이 드러나니까? 도리어 우리가 화를 냅니다. 즉 이 말은 우리가 악마에게 사로잡힌바 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들통이 나니 고마운게 아니라 도리어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결국 그 기준은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심을 우리가 막을 것이 아니라
물론 막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일 생각 뿐이겠지만
고맙게도 주님이 도리어 우리를 막아서
기여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니
비로소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행한 바가 악마의 짖으로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것이 고마운 겁니다. 그래서 기준인 겁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예정하신 바 대로의 화목제사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깨작 깨작 거리는 그림자 제사가 아닙니다.
본격적인 실상의 제사입니다.
이제 그 실상의 제사가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가 있는 곳마다 골라 골라 가면서 우발적으로 그 제사와 충돌 되면서
그림자 제사에 십자가 제사가 난데없이 들이닥쳐서 파토 내는 식입니다.

교회 교회 마다 십자가가 파토내고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감사하면 영접이요
화를 내면 심판입니다.
심판이 내리지 않도록 심판을 막았는데 도리어 심판하는 식입니다.

참 기가막히게 맞물리도록 한 겁니다. 원수의 성문열기와 십자가의 죽음이 말이죠.
원수가 비로소 생전처럼 창조되고 거기에다가 죽음으로써의 사랑이 결합이 되는 겁니다.


지금 본문에 예수님은 사단의 일에 말려줍니다.

뭔가를 뿌리치고서 말이죠.

(막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결부시키는 말씀을
반드시 베드로는 절대로 십자가의 죽음과 결부되지 않도록 하는 열심과의 충돌을 살펴봤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자기 쪽에서의 사람을 뿌리치고
예루살렘에서 본격적으로 벌리시는 제사를 펼치시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제사가 아니면 그 어떤 누구도 화목이 될수 없습니다.
심판이 넘어옵니다.

어제 어머니랑 아주 중요한 대화가 갑자기 나왔습니다.

왜 이스라엘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줄 아느냐?
왜요? 기적이 아니라 10가지 재앙이잖아요

마침 생각난게 있어서 재앙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까먹을까 싶어서 말 짤라 버리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내용 다시 나누다 보니 어머니 이야기는 또 그대로 같은 의미로써 이야기 하신 겁니다. 일단 어제 제가 한 이야기의 심판 재앙 10가지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같이 똑같이 재앙을 받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두 쪽다 재앙을 받으면서도 한 쪽은 안 받고 한 쪽은 받는 겁니다.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은 대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사람은 남는 겁니다.
이유와 원인은 그들에게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피 발림이라는 비밀의 약속만이 그 기준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심판을 안 받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쪽은 물 속에서 꼬르르 잠겨 죽고
또 다른 한 쪽은 물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피기름 발려서 둥둥 떠있더라 라는 겁니다.
죽음이 심판이 뱉어내더라 라는 겁니다. 이미 유월절 어린양이 대신 심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다 양같아서 제 갈길로 간 겁니다.

오늘 확인차 방금 물어보니 어머니 왈 그 기적을 애굽 왕 바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행사하는 것은 너희 후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게 하려 함이다 라고 하신 거다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똑같은 의미입니다. 맞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겁니다. 이름을 새기는 겁니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이름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양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시 회상하면서 그런데 왜 그렇게 세밀하게 일일이 제사장 옷 성막 무늬 하나 하나 온갖 세밀하고 치밀하게 다 알려줄때는 언제이고 이제 신약에서는 다 의미없도록 예수님께서 그림자 취급하느냐? 물론 실상이 왔기 때문이지만

그런데 지금은 천주교 개신교에서 물건 하나 하나 새기고 따르고 있고 수건도 쓰고
촛대 세례식 할 때 등등 까운 등등 여전히 따라 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실상 그들이 출애굽하여서 가지고 온 물건이 아무리 많아봐야 15일을 못 버티고 다 고갈납니다.

그런데도 물건 하나 하나 세밀하게 바느질 이렇게 저렇게 모양새 다 일일이 알려주는 것은
거룩이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움 그 자체로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거룩이 없는 비거룩이 무시무시한 심판 그 자체이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거룩을 유지할 재간이 인간 쪽에서 출애굽한 인간 쪽에서 아예 없다는 겁니다.
무조건 외부에서의 공급 뿐입니다.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다른 놈 꺼 빼뜰어서 먹이든 살리든 다 외부에서의 공급입니다. 내부에서 물을 자가 공급하면 물은 썩습니다.
외부에서 물이 끊임없이 공급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듯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제공하여서
에봇이라는 제사장 의복처럼 복잡하고 이름 하나 하나 보석 하나 하나 다 외부에서 주어진 공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사랑의 처음 자리의 모습인데

이사야 때에 보면 아주 가관입니다. 기가찹니다.
좀 살고 좀 재산이 있고 좀 있다 싶으니까 힘이 있고 능이 있고 하다보니
교회에 성전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막 바칩니다. 용돈 부족합니까? 제가 용돈 드릴께요
눈이 어두우시지예? 제가 돋보기 안경 드릴께요
귀가 잘 안들리지예? 보청기 최고급으로 드릴께요

이게 가짜 하나님이 되고 만겁니다.

여자아이가 인형을 옷을 입히고 하나 하나 빵깨이 소꿉놀이 하듯이 인형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습니다.

출애굽 때는 아무것도 없어도 고아 과부 나그네 같은 노예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주시고 그 이름에 걸맞는 언약의 옷을 주셨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옷을 입혀주셨는데

이제는 거꾸로 좀 가졌다고 소유가 넉넉하다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헐벗은자 취급해서 자꾸 바치겠다고 성전에 가득채우니 거꾸로 인형취급하듯이 입혀주는 겁니다. 인간이 주님에게 옷 입혀주겠다는 마귀의식에 사로잡혀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 파괴 시켜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도 아예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정신만을 잇겠다고 바리새인이 설치지만 웃끼는 소리입니다.
여전히 바리새인 조차도 인형 다루듯이 헐벗은 하나님께 옷 입히겠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의 비거룩 사상인 악마성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님쪽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데 화목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막습니다. 안됩니다. 주님이 심판 받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막아서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성전에서 행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율법으로 4배나 갚으라 라고 큰소리 치는 것과 같습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자식의 죄악도 모르고 모조리 며느리 다말 이방여자에게 뒤짚어 씌우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쪽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의 열심히 심판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막고자 하는 일이 사람의 일로써 사단의 일로써 주님의 일을 도리어 막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로써 나의 고상한 뜻이 좋은 뜻이 하나님의 약속의 일인냥 사기를 치는 그 일을 가로막고자 나 보다 더 더러운 이방인 더 더러운 이단 더 비천한 이방여자 창녀
나 보다 더 믿음 없는 여호와 증인을 통해서 가로막습니다. 버티는 겁니다.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닭이 웁니다. 당나귀가 버티는 겁니다.

마치 내 쪽에서 넘어갈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바리새인을 바리케이트로 쳐서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 간다 라고
마귀를 바리케이트로 치시는 겁니다.

왜 우리는 마귀를 물리치지 못합니까 라고 마귀로 넘어서지 못하냐

기도 외에는 안되는 겁니다. 기도란 무능한 자입니다.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를 일부러 일으켜서 그 부르짖음을 듣고 주님쪽에서 벌리시는 것이지 모세 자기가 자기 힘으로 벌리니까 40년 뒤로 미뤄지는 겁니다. 그것이 가시떨기 나무에 불꽃으로 나타난 여호와입니다.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넘어서 오시겠다는 겁니다. 너희는 잠잠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마귀를 넘어서 오시겠다는 겁니다.

희년은 고와 과부 나그네 에게만 의미 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희년 자신의 영광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안다고 좀 있다고 좀 할줄 안다고 이제는 막살지 않겠다고
주님에게 옷 입히겠다는 인형 다루듯이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멍청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이 대견스러워서 구석에 쳐박힌 노인네 노릇을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이 조작한 하나님이겠지만

언약은 그런 인간 조져 버립니다.

오로지 자신의 피 영광을 위해서 거꾸로 인간을 인형 다루듯이 피 옷을 입힙니다.
희년의 의미의 자작극 때문에
일부러 고아 같은 기업이 없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만들었 뿌리고
일부러 과부 같은 흑암의 백성 만들었 뿌리고
일부러 나그네 같은 개같은 이방인 만들었 뿌려서

오로지 주님 쪽에서 심판이 못 넘어오도록 닭 울음소리를 꼬끼오 꼬끼오 꼬기오 내시면서
당나귀처럼 우리에게 3번 매 맞아 가면서 그 잘난 육의 행함을 약속이라고 우기는 시아버지의 엉터리 약속관을 개같은 이방여자가 창녀 노릇을 해가면서 약속을 도장 도장끝 지팡이 이 부정한 물건의 임자가 애 아부지입니다 라는 증거로써 부끄 부끄 부끄 맹글어서 약속의 옷을 입히는 겁니다. 자기도 약속 안 쫏으면서 약속 가졌다고 소유했다고 우기면서 약속도 잇지 못하는 것을 고맙게도 이단여자 며느리가 약속을 잇는 겁니다.

이 방식 부끄 부끄 부끄의 방식이 아니면 심판을 막을 길이 없고
도리어 심판 받겠다고 지옥가겠다고 바리새인도 넘어설려고 하는
그런 악마성을 그런 사단의 일 사람의 일을 추구하기 떄문에

주님 쪽에서 버티고 가로막아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고 피옷을 입혀주시는 겁니다.

주님의 숙제 뿐입니다.

이것이 저들 행함의 노선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빼내이시는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방식입니다.

자 성전 지금까지 실컷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 쪽에서 마귀를 이기고 넘어가겠다는 방식입니다.
그것을 막고자 가로막고 버티는 주님의 울부짖음이 십자가 방식입니다.

서로가 안 맞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책잡아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막고 거부할려는 일을 달성할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구원을 막아서는 예수님을 반드시 막아야 자신들의 일이 성사가 되기 때문이지요.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마귀에게 장악 당한 죄의 소원이 덮쳤기에 그것이 옳은 줄 알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매진 합니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저들이 말한 악마의 세력인 로마와 손을 잡아서라도 막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소리가 남의 일이 아니지요?

일단 목적을 달성할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런 인간의 악마적인 속성, 육의 소욕성을 끌어당겨서 들추어내시면서 십자가의 차이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인간의 악마성에서 빼내이시는 방식은 십자가 라는 걸림돌 뿐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걸림돌에 부딧혀 넘어져야지만 사단의 일이 자신에게서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알고서 그 차이로 건짐을 받고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줄 주님이 매우 잘 아십니다 라는 고백을 성령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걸림돌이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 죄의 소원이 덮쳐진 그 상태 그대로 지옥가는 겁니다. 에수님을 십자가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그 착한 일 했다는 것을 기념비로 삼아서 그대로 지옥가는 겁니다. 절대로 절대로 막산적이 없다고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이 살았다고 좋은일 실컷 하고 지옥가는 겁니다.

주님이 막아선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가로막은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당나귀처럼 매맞으면서 버텨주신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우리의 죄악을 감당하신 것이 없이 우리가 알아서 말씀 지켰기 때문에 지옥가는 겁니다.
주님이 기도해 주신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지금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사건이 계속 벌어집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의 몸이 달릴 십자가를 이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눈에 보입니다.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만 눈에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 라는 참성전의 의미를 새로 맹글어 내야 합니다.

다말처럼 말이죠. 그래서 3가지 죄 몫을 저들이 저당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저당잡는 겁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처럼 말이죠.

부끄 부끄 부끄  인간 쪽에서 못 넘어서도록 주님 쪽에서 당나귀처럼 대신 매 맞도록
창녀다말처럼 불 속으로 심판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냥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3가지 물증을 잡아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에 한 가지를 잡는 겁니다.
저들이 책잡았다고 좋아라 하겠지만 정작 주님이 거꾸로 잡혀주시는척 하면서 잡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행함노선 엉터리 약속 노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겁니다. 저들이 말이죠.

책잡히는줄도 모르고 도리어 책잡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성전세를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돈으로 내야 합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이것은 자기들끼리도 논쟁이 되어서 심지어 두로지방의 돈으로 환전해서 성전세로 내는 자들이 있을 정도로 신앙을 자기 쪽에서 마귀 곧 우상숭배자를 배척하는 열심? 성전세바치는 일? 등등으로써 성전에 대한 자신들의 경건성을 말하고 있고 동시에 너 예수는 어느정도로 경건하냐? 또는 우리처럼 이런 완벽한 거룩실천 할수 있냐의 경쟁심? 또는 실제적인 우리 내부에서의 갈등을 어떻게 풀꺼냐? 또는 만약 가이사를 무시했다가는 우리도 잡혀가듯이 잡혀갈수 있으니 너는 우상의 형상을 절대로 허용못하겠지 라는 식으로

이 자체가 인간 쪽에서 어떻게 거룩을 형성하느냐 로 왜 성전 거룩한 성전과 연관된 율법적인 행위 이기 때문에 거룩차원에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동일합니다. 안식일날 왜 제자들은 일하냐? 왜 병든자를 안식일날 일부러 고치느냐?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자신들의 큰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광고 해 달라는 차원 등등의 모든 질문들이 다 같은 맥락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우리 쪽에서의 거룩한 행실 매도하지 마라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 성령의 소욕은 딴게 아니라 바로 그것을 막는 겁니다.
막히는 자는 답답하죠 나 말고 진짜 악마들 못땐 짖만 골라서 하는 나쁜놈의 일 좀 막아라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놈이 바로 너다 라는 겁니다.

아뿔사 나단 선지자로부터 지적받은 다윗은 바로 자신인줄 비로소 알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는데 자꾸 있는척 했다는 자체가
주님의 막으심의 쓰리 희생안타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내가 만든게 아니라 희생 3 안타가 내 속에 없던 정직한 영을 맹글어 준 겁니다.
그래서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춤춘 겁니다. 쓰리 막 살기입니다.

정말 정말 웃기게도 저들의 성전세 문제는 지금까지도 풀수 없습니다.
의문의 증서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때 다른 겁니다. 상황윤리처럼 말이죠. 꼭 노마니즘 같습니다.

성전세 낼 때마다 돈에 새겨진 형상이 나쁜놈이면 환전해야하고
좋은 놈이면 그대로 내고

바로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다 라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 거룩을 갖추겠다는 발상입니다.
조금이라도 깨끗한 것을 추구해야지 더러움은 제거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놀랍게도 제거 대상에 놓여진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들의 계산기 두들기기에 십자가는 항상 비거룩에 해당되어서 제거대상에 놓여지는 겁니다.

왜 그들의 그런 계산을 막고자 십자가는 지금 유대인들로부터 매맞는 당나귀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로막아주시는 것이 고마운 일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행실을 갖추겠다는
바리새인도 넘어서고 마귀도 넘어서고
가이사도 넘어서겠다는 거룩한 행실 갖추기 자체가 사단의 일이라는 것을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막아서고 가로막는 겁니다.

그러면 막살아라 라는 말인가? 또 이래 나옵니다. 그래서 책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인간 자체에서 기준을 만들겠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고맙게도 십자가의 불온성이
우리의 병듬에 뛰어드신 그 불륜성, 부정성이 옳았다는

기준을 인간 쪽에 안 두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이 말귀를 못알아먹으니까
인간의 삶을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막살면 안된다고 나오는 겁니다.

주님은 도리어 안막살겠다고 인간 자신의 뜻을 펼칠려는 사람의 일을
꼬끼오로 막으시는데? 바리새인 보다 더 낫고자 하는 바를 막고자 하시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불안해서 그 막고자 함을 매로 때리고 심판해 버리는 겁니다. 이 방식으로 부끄 부끄 부끄 만드시는 겁니다. 도리어 막고자 책잡을려다가 책잡히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미끄러뜨리기 방식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 사건에 한치도 벗어나는 법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한치 오차 없이 십자가 사건만이 또 우발적으로 발생하며 벌어지는 겁니다.

구약의 참선지자에게 벌어진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진 참혹스러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똑같습니다. 자기백성으로부터 발생한 사건입니다.

성령의 일 또한 동일합니다.

과연 이 십자가를 무슨 수로 인간의 힘으로 믿을수 있겠습니까?

주님 쪽에서 막으심으로써 벌리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지금도 멈추지 않고 벌어지는 그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무릎 꿇게 하소서

나 아니요 주님이 옳았습니다.

나 보다 주님이 강하십니다.

나를 막고자 닭으로 오셔서 꼬끼오 탄식하시고
당나귀로 오셔서 매 맞으시고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안 돼 ~~~ 라고 심판 속에서 심판이 넘어오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옳았다고 외칠수 있게
부정한 입술을 찢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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