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와 독립투사 (아내 신부와 가정부의 차이)

2011년 8월 22일 월요일 오전 11:45:30  김대식


상하이 라는 영화를 앞부분 찔끔 보다가
생각난 것 까먹을까봐 싶어서 얼릉 적어본다.

며칠전에도 어머니랑 나눈 복음이였는데
영화 화면으로까지 나오다 보니
한번 정리해 봤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가장 메시아를 고대하고 고대하던
우리로 치면 일제치하인 로마치하일 때

정작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오지 않으셨다.

독립운동을 저마다 펼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
각 파당 파당 하나 하나를 오히려 악마로써 활용하신다.

독립하겠다는 자체가 문제다.

주님이 가두었는데 어딜 독립하겠다고?

율법으로 죄 아래에 가두었듯이
로마로 가두었다.
그리고 마귀로 모조리 가두었다.

갇혔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잃어버렸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반대다.
오히려 더더욱 독립운동을 펼치듯이
율법을 더욱더 생생하게 지키고 있다.

넘어서겠다는 것이다.

바리케이트를 쳐도 기여이 넘어서고 마는 인간이다.

어라 예수님까정 오셨으니
그 예수님이 도리어 넘어설려는 우리들의 발판이 되어 줄것이다는 희망에 부풀어
잔뜩 기대만땅으로 날개를 달아준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이요 망상일 뿐이다. 우상이다.

도리어 예수님은 그 상상의 날개를 모조리 찢어버린다.
갈기 갈기

누구보다더 기대했던 독립투사 가룟유다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이라고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한 말을 서슴없이 하신다.

유대인에게 닥친 상황에서의 유일한 희망을
무참히 짖밟아버린다.

독립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왔는가?
독립도 시켜 주지도 않을 꺼면서?

오히려 천국 가도록 이 땅을 넘어서라고 발판이 되어 주실려고 온게 아니라
천국 자체가 이 땅에 넘어서 왔다.

그런데 이 땅에서 유대인 로마인 서로 원수지간으로써의 적국들이
정작 천국이 멍청하게 인간들이 원수를 넘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천국 자체가 이 땅에 쳐들어 오게 되니
정작 원수는 로마도 아니였고
유대인 자체였다.

로마 유대인 모조리 악마의 세계였다.
오늘날 교회는 악마의 집단이다.

주님의 잃어버린 자를 유대인은 또 오늘날 교회는 갈기 갈기 찢어버렸다.
자신들의 독립운동의 명분으로 성화운동 묵시운동의 명분으로 말이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탕자를 찾으러 오셨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서 인간의 눈에 이스라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잃어버린 자를
죄인 중의 괴수를 찾으러 오셨다.

오죽하면 주님이 넘어오셔야만 할 정도로 무능한 자 인가?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신다.

(마 10:5, 개역)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7, 개역)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마 10:8, 개역)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로마로부터의 해방에 관심 없다.
이스라엘의 독립도 관심 없다.

주님의 관심사는 자신의 희년완성이다.

그래서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고아
흑암의 백성인 과부
개같은 이방인과 같은 나그네

에게로 가라 라고 하신다.

열둘 본인들의 처음자리이기 때문이다.

무능의 자리요
죽음의 자리요 블랙의 자리인 빈자리 이다.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끌어당길수 있는 자리도 아니요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끌어당길수 있는 자리도 아니요
자신들의 바리새인 보다 더 낫기 위해 넘어설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그런 자리는 인간의 육의 자랑이 되는 탐욕의 자리일 뿐이다.
특히 성화 되고픈 가장 마귀의 자리는 더더욱 탐심의 우상자리다.

그럼 차라리 이스라엘 집 속에서 잃어버린 자에게로?
도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잃어버린 자가 누군가?

나라 말아먹는 매국노다.

오죽하면 우리도 놀려먹는 자이다.

도대체 예수 당신은 누구길래

세리와 죄인과 창기의 친구 노릇만 하느냐?
우리는 금식하는 판국에
왜 당신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마시고 춤을 추느냐?

그것은 간단하다.

금식이 독립을 이루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와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이 꺽으신 뼈를 살려낼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주님 쪽에서 넘어오신다.

누구에게로?

세리 강도 창기 죄인 에게 말이다.

그게 바로 너 다 라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넘어가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에게로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했다는
그 십자가의 똥고집을 높이고자

내가 다가가는 모든 방식을 차단해 버리는
고 못때빠진 소통의 다리, 연결접속인터넷망 하나 하나를 다 짤라버리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와이파이 Wi-Fi 차단이다. 무소부재의 유비쿼터스를 보란 듯이 끊어버린다.

그 고집불통의 십자가의 사랑만 더 높이고자
약올리듯이
매국노만 찾는다.

어라? 매국노가 더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독립군들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이빨을 갈고 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예수님은 더 심하다.
독재와 맞써서 싸우고 있는 노마니즘의 정의를
악마라고 규정해 버리시니 말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악을 규정할 수 없도록 하셨는데
모조리 악과 싸우는 자들이 가득한 그 속으로 들어가셔서
도리어 그런 자들이 악마라로 규정해 버리신다.

그 증거를 예수님 자신의 몸에 남기면서 말이다. 십자가로써 말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신체를 건드렸다고 악마라고 규정하고
독립운동을 펼치고 그런 자신의 몸에 하나님까지 끌어당시면서
모든 정의라는 정의, 거룩이라는 거룩, 의로움이라는 의로움은
온 몸에 칭칭 감아버린 그 신체를

도리어 가장 제대로 된 마귀라고
그런 신체에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몸을 드리대면서
마귀라고 규정하면서 그런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자들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빼낼려고 왔다고 하신다.

인간들의(독립투사) 복수는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그 몸에 뒤짚어 씌워서
어딜 빼 갈려구 하면서 예수님을 죽여버린다.

과연 누가 악마 일까?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나니
악마들이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다.

유대인들이 난리다.
교회 다니는 인간들이 난리다.

이단이라고 죽여버렸는데
그 이단이 옳았으니

그 잔당들을 다 죽여야 한다.
 
너희가 죽인 예수 라고 외치고 있으니
매국노라고 몰아세우면서 더더욱 죽여버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안그러면 악마라고 규정한 예수의 말이 진짜로 옳게 되니까 말이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퍼지고 있다.

교회는 이 소리를 막을려고 발악하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매국노들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저들 속에서 외친다.

참 희한한 일이다. 아무도 해석을 할 수가 없다.

매국노의 외침이 옳은지?
독립투사의 외침이 옳은지?

이 땅은 바로 십자가가 태동시켜놓은 두 언약의 싸움 터 이다.

옛언약과 새언약 이다.

매국노와 독립투사의 차이의 간격을 더 극과 극으로 벌려놓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 곧 피 뿐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부의 차이를 벌려놓듯이 말이다.


십자가는 이 두 언약을 매일 매일 새로 생산한다.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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