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6. 죄(종교:인간구원)와 충돌하는 십자가의 죽음


2011년 9월 1일 목요일 오전 11:21:35 김대식


(막 12:18, 개역)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막 12:19, 개역)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막 12:20, 개역)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막 12:21, 개역)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막 12:22, 개역)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막 12:23, 개역)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막 12:2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 12:25, 개역)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막 12:26,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막 12:27,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막 12:28, 개역)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막 12: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개역)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 12:31, 개역)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2, 개역)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4, 개역)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 12:35,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막 12:38, 개역)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막 12:39, 개역)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막 12:40, 개역)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 12:41, 개역)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막 12:42, 개역)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3,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 12:44, 개역)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복음은 항상 죄와 맛물려 가면서 증거가 됩니다.
그 당시 시대상의 죄악은 그 이전의 죄악상이 깊어진 상황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종교든 신학이든 철학이든 인간의 죄악이 그 이전 보다 더 높이 길게 깊어진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발전했다고 보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다면 인간에게는 발전이라는 것이 없고 점점더 악화되는 증세를 그대로 몸뚱아리에서 반영하게 됩니다. 즉 몸뚱아리는 도화지요 불뱀의 독은 필기도구입니다. 그리는대로 새겨지는대로 그려지고 나타나게 됩니다. 그 몸뚱아리는 시간이라는 역사에 저촉을 받으면서 공간이라는 몸에 가득 채우게 됩니다.

잠시 땜빵으로 주사를 놓으면 잠시 괜찮은 듯이 보이나 임시방편입니다. 그 임시방편의 가짜성을 계속되게 해 달라고 한다면 곤란합니다. 바로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마약입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세대입니다. 마약을 맞은 인간들의 특징이 그 마약의 효능 그 순간은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가듯 무한가능속에 놓여지지만 막상 약효 떨어지면 더더욱 피폐해지는 겁니다.

그 임시방편을 통해서 그 임시방편은 가짜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로 진짜가 있구나를 알게 왜 그것이 가짜임을 그 내막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임시방편의 가짜들을 그들은 진짜인냥 손에 가득쥐고 있습니다. 마치 부자청년이 가짜 거룩을 손에 가득채운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불뱀에게 물려서 챙긴 거룩인데 말이죠. 그런 내막 곧 우리 속내를 주님은 알려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비언약적 속성을 가지고서 차이성으로 언약을 증거하십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죄악성은 도리어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악이 아니라 거룩하고 선하고 깨끗하고 남들이 더럽게 살 때 자신은 말씀을 지켰다고 한 것들을 손에 가득 쥐고 예수님 앞에서 까지 그 버릇을 그대로 펼치고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죽음의 십자가 점과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사시는 부활의 점을 찍어서
그 간격인 광야 곧 죽음을 벌려 벌려 벌려서 철저한 단절을 즉 가로막기를 실행하시는데 있어서

반대로 저들에게 십자가에 달릴 죄몫으로써 잡혀주는 사건이
바로 가이사 세금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런 악마적인 속성 마저도 무엇으로 포장을 하는고 하니 반드시 성경으로 포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라고 올무를 치는 겁니다.

(막 12:14, 개역)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 12:15, 개역)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 12:16, 개역)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그런데 우리가 이미 결론을 알기 때문에 그렇지 사실상 우리가 늘 이렇게 예수님께 시험하고 올무를 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이 다 이렇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그런 취지가 아니라
이미 미쁘신 것이 완료 되었기에 미쁘신 주님의 세계를 보라는 취지입니다.

미쁘신 주님의 세계를 안보는 이상 아무리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와 실제로 그런 일이 나타했다 하더라도 바로 이어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건이 터지면 또 불안하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런짖 하지 말라고 하면 시험꺼리가 가시느냐? 천만의 말씀
육은 어쩔수 없다는 겁니다.
어쩔수 없는 것은 어쩔수 없으니 내버려 두고, 발버둥 치고 싶으면 쳐서도 상관없고
다만 딴 세상이 이미 완료 되었으니 얼마나 미쁘고 든든한지 그 쪽을 보라는 취지입니다.
완전 딴 판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이 두 세계를 대립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험거는 이유는 본인들이 이미 시험들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물려서 그 독의 확산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시험에 안걸려들겠지 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 반대입니다.

주님은 아에 시험 자체에 들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시험이 얼마나 무용지물인지를 도리어 시험걸려 주시면서
왜 그런 시험이 무용지물인지를 밝혀 주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죽음이 먹혀 들지 않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죽음이 먹혀들지 않는지 알마볼려면 죽여보면 압니다.

자 또 여기서 나도 의인이다 라고 흉내내면서 죽음을 유발하지 말고
의인은 예수님 뿐이니 괜히 예수님을 상대로 경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선악나무처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을 유발케 하여
자기 스스로 꾀에 빠지도록 경쟁상대로 몰아가게 만드십니다.
긍휼을 입지 않은자는 그래서 주님이 심어버린 강퍅함 때문에
예수님을 경쟁상대로 삼아서 예수님의 흉내를 내게 되는 겁니다.

주체가 자아가 되고 대상이 예수님이 되어버리니
믿음 조차도 예수님을 대상으로 해 버리는 겁니다.

자 그래서 본문은 누가봐도 세상사람인 악한자를 두고서 두 언약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가 봐도 믿음좋다고 정평이 나 있는 자들을 상대로 하니

다들(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자기자신마저도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저 바리새인도 짤릴 입장이라면
자기자신은 마땅히 제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불러일으키는 일만 골라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임시방편의 그림자를 실체인냥 가득 손에 채웠지만
사실상 그 그림자를 가득 많이 남들보다 더 소유했다는 의식 자체가
가장 악마적임을 남이 아닌 예수님 한테만 들켜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예수님만 없애버리면 여전히 같은 욕망의 공통분모에 있는 대중들은
그저 정치적인 상황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면 순순히 따라오게 되니
저 예수만 없애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그 시험을 거는 쪽쪽 걸려 넘어오는 겁니다.
분명이 모든 공방에서 예수를 이길수 없고 철저하게 공방 속에서 졌다는 상황이 벌어졌고
모든 대중들에게도 탄로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올무에 잡혀 주고 시험에 걸려주더라 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걸려든 겁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죄 몫이 되는 부분을 살펴봤듯이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죄 몫의 구실이 되는 사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부활논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첫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논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장 13장은 종말이 마땅함을 외칩니다.
즉 철저하게 흡집내시는 예수님 이십니다.
유대인 전체를 말이죠.
더군다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 제사장들 율법사들 등등이 벼루고 있고
그들이 에수님으로부터 당한 수모와 굴욕으로 트라우마가 점점점 더 크게 아물지 못하도록 봉합되지 못하도록 전체 이스라엘로 확산시키듯이 아예 막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장은 드디어 참다 못한 인간들이 예수님을 법정에 세웁니다.

자 그러면 왜 부활논쟁과 첫계명 논쟁 사건이 오늘 언급되는고 하니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이 가장 과시할만하다고 여기는 그들의 거룩성
진짜배기 참됨을 쥐고 있는 그 허상을

제대로 박치기 정면충돌로써 예수님은 무참히 갈기 갈기 흠집을 내시면서 찢어버립니다.
인간이 가만히 당하기만 할까요? 결국 14장에서 예수님의 몸을 찢어버립니다.

바로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예수님을 몸을 찢어버렸다는 십자가를 완성함은
곧 이들의 종말성 심판성을 완료하심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찢었듯이 이들 또한 그 육체를 갈기 갈기 십자가에 못 박아 찢어도
이제 할 말이 없게 된 겁니다.


부활이란 모든 종교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부활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상품을 살려고 몰려들게 됩니다.

자 그러면 그 상품에 대한 가치를 진정성 있게 포장할려면 더더욱 진지함이 가미가 되어야 합니다. 소비자도 이제는 만만치 않습니다. 상품이 조금이라도 거짓이 발견이 되면 악플을 남겨서 다른 소비자도 피해가 되지 않도록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법 대 법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있냐 없냐로부터 기초 논쟁에서 사두개인은 없다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시아버지 결혼법  아 실수 시형제결혼법에 의하면 맏형수의 남편이 죽으면 시형제결혼법에 따라서 시동생과 결혼하는데 여차저차하여서 다 죽게 되어서 막내시동생과 살게 되었는데 이제 다 죽어서 천국에서 살게 되면 과연 그 형수는 누구의 아내로써 사느냐? 족보가 개판이 된다. 족보가 개판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천국의 이미지가 나빠지기에 천국이미지를 손상시킬수 없다고 아예 부활을 재고조차 할수 있다는 식이 사두개인입니다.
얼마나 일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은 다릅니다. 부활이 없으면 천국 자체도 무의미하게 된다는 식입니다. 그들은 묵시운동가들입니다. 노마니즘 사상가입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써 부활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 이런 논쟁에 예수님이 끼여들게 됩니다. 저들의 요청으로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저들의 모든 신앙과 신학의 근간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완전히 흠집을 내어버리는 부활로써

인간의 자신의 신체를 순간적인 공간이동의 수단으로써의 부활을 아예 차단하는 부활입니다.
순간이동의 몸, 공간이동의 몸 즉 여전히 자신의 신체를 염두한다는 자체를 찢어버리는 부활입니다.

그 어떤 연장선과 모든 접촉점의 차단이 부활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모세를 언급하고 가시떨기 나무를 언급하는 이유는
너희들은 죽은자이다 라는 겁니다.
죽은자 속에서 나온 부활관 천국관 백날 언급해 본들 소용없다는 겁니다.

산자의 하나님이란 육의 차단을 반드시 구체화 하는
십자가를 완성하심 자체가 부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에서 엘리야 조차도 자신이 격었던 승천 맛배기 부활 맛배기는 그림자일 뿐이니 실상을 보여달라고 별세에 대해서 논하는 겁니다.

모세가 탈락한 판국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어했다는 것을 말씀에 나온 것을 어머니가 보시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에수님의 별세가 아니면

즉 실상이 아니면 자신은 기껏 인간들의 신앙적 영웅일 뿐 다 가짜이니 무슨소용이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의 실체를 보여달라고 십자가의 죽음을 논하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왜 죽어나가고 핍박받고 한 그런 그림자 끝의 실체를 이제 보여주세요 라고 엘리야가 별세를 요청하는 겁니다. 자신들을 마치 반납하는 식입니다.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반납하듯이 말이죠.

어쩌면 사두개인은 율법의 대표자 모세처럼 율법적의식으로써의 부활이니 개판되면 안된다는 것이고
바리새인은 한발 더 앞서가서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처럼 묵시를 염두하면서 부활관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둘을 동시에 다 치시면서 흠집내듯이 찢어버리시고
둘의 요구를 동시에 이루시는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즉 놀랍게도 부활이 뭐냐? 부활이 어떤상황이냐? 부활의 바른 개념은 뭐냐 라는 모든 질문들을 파토내는 것은 딱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입니다. 부활이 하나의 인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인간들의 신앙 속에서의 하나님을 쳐버리는 것이 부활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신을 쳐버리는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곧 십자가완성입니다.

마치 이것은 안식일 몇째날이냐 날짜 운운하고 손씻고 등등을 운운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안식을 통해서 재편성되어서 기존의 안식일 개념이 다 파토나는 식입니다.
결국 예수님 자체가 안식이 되는 새로운 뿌리를 근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사실상 새로운 뿌리가 아니라 원래 안식은 예수님을 근간으로 했습니다.
하도 말귀 못 알아먹으니까 육체에 맞게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그만 정통이 되어버린 식입니다. 아무도 해석해 줄자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지키겠다는 인간을 가로막아버리는
고창병 환자에게
예수님은 고창병 환자처럼 오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고창병 걸린자를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 안식일 지키겠다는 자체가 문제다 라는 그 고창병을 예수님이 고치시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깜작 놀라죠 자기들은 병 안걸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에 참예 못한다는 것을 혼인잔치와 연관해서 증거하십니다. 눅 14장

그들은 이미 자기 안식일 지킴 마일리지가 소복히 쌓여 있기에
예수님이 몰고온 안식을 거부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의 안식을 갈기 갈기 찢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첫계명 사랑이 뭔가 라는 논쟁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이야기를 생뚱맞게 증거하십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이 첫계명을 지킨 것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반증하여 확인받고팠는데
도리어 예수님은 도저히 풀수 없는 수수께끼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4, 개역)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 12:35,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막 12:38, 개역)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막 12:39, 개역)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사랑이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증거해야한다는 어떤 율법 행함 지키기가 아니라 실제로 이미 쳐들어 왔기 때문에 빨리 항복하라는 겁니다. 누구처럼 기생라합처럼 말입니다. 그게 믿음인데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정작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원망합니다. 오히여 이 이방여자 때문에 접붙임 당할 뿐입니다.

똑같이 지금 예수님이 기생라합처럼 

그리스도가 어찌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합니다.

(마 22:31, 개역)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개역)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개역)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마 22:34, 개역)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개역)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개역)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개역)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개역)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개역)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사랑은 다윗을 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담아서 그 죄를 지적하고
심판하여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만들어서 그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져서
부정을 물러가게 수치가 물러가게 하시는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사온즉 내가 순전케 되었다는

다윗이 알고 있던 하나님을 쳐버리고 다윗을 원수 만들어서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우편에서 변호하는 그 일을 성사 시키는 새로운 주

곧 주께서 내 주께를 통해서 그 간격을 벌리시는 주님을

다윗은 주라고 했고 그 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들의 하나님
특히 유대인의 하나님
요즘으로 치면 기독교인의 하나님을 쳐버리는 예수님
인간들이 운운하는 예수님을 쳐 버리는 예수님이

바로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부정하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첫째계명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합니다. 자기부인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예수님이 자기 부인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자기부인 한 뒤의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만약 에수님이 자기자신을 부인한 그 뒤의 예수님을 인간들이 믿었다 손 치더라도
예수님이 또 그런 자신을 부인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인간의 믿음은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막으시는 겁니다.
찢어버리시는 겁니다.
흠집을 내어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인간 쪽에서 베드로처럼 나는 절대 안버리겠다고 남들은 다 버려도 나 만큼은 안버리겠다고 하는 인간 쪽에서 넘어올려는 그것을 차단하는

미천한 닭 꼬기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그 부정으로 통해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겠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참으로 뻔뻔스럽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나보다 더 억수로 잘 안다 아입니까 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고백이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의 모든 출발
신앙이든 행함이든 그 어떤 열심히든 모조리 다 차단하는 것이 바로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만이 곧 사랑만이 창조의 방식이며

이 창조를 거부하는 쪽 반드시 만드시는 진노와
이 창조를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긍휼을 퍼부은 쪽으로 나누는 식이 바로 거룩완성이다는 겁니다.

이 거룩 완성이 도리어 (물론 그 다음장 13장 에는 본격적인 흠집내기 갈기 갈기 찢어버리는 종말의 상황을 증거하시지만) 이 땅에서는 14장에 나타나듯이 인간 쪽에서 말씀을 이루겠다고 예수님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는 상황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에 걸려든 인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로지 자신의 구원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찢는 짖 밖에 모르는 겁니다.

이 상황을 예수님이 찢겨주셔져 가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한 짖을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우리도 모르는 꼭꼭 감추었던 마귀가 심은 죄악을
수시고 후벼가면서 파내시고

고쳐주시고자 이 땅에 직접 죽으시러
십자가 지시러 오셨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남의 모습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은 그 예수님을

예수님을 믿노라 하는 우리가 귀히여기지 않고
그저 예수님을 내 좋아라 하는 식으로 우상으로 인형으로 가지고 놀기 좋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하나 하나 지적하시고 들추어내시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얼마나 엉터리 신앙으로 자기(나)를 보호하고자 첩첩겹겹의 애굽성 10개의 겹으로 쳐있는 그 성전 육체를 허물어 뜨리고자
삼손처럼 성전중앙 깊숙이 쳐 들어오시는
그 사랑을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루셨습니다.

빨리 허물어 뜨려 주시옵소서
빨리 별세해 주시옵소서

얼마나 마귀가 밀까부듯이 까부는지
주님께서 기도해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옵소서 라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뻔뻔스럽게 주님만 쳐다볼수 있도록
인간의 그 어떤 소리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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