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7. 종말 현상 과 성전 부재 현상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오후 5:35:24  김대식


(막 13:1,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막 1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막 13:3, 개역)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막 13:4, 개역)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막 13: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 13:6, 개역)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막 13:7, 개역)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막 13:8, 개역)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막 13:9,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막 13:10, 개역)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막 13:11, 개역)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막 13:12, 개역)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막 13:13, 개역)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막 13:15,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막 13:16, 개역)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막 13:17,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막 13:18, 개역)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막 13:19, 개역)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 13:20, 개역)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막 13:21, 개역)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막 13:22,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막 13:23, 개역)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 13:24, 개역)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막 13:25, 개역)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막 13:26, 개역)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3:27, 개역)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막 13:28, 개역)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막 13:29, 개역)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막 13:30,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막 13:31,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2, 개역)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3, 개역)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막 13:34, 개역)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막 13:35,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 13:36, 개역)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막 13:37, 개역)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종말의 현상은 바로 성전의 현상을 통해서 예수님 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톡 하고 건드려 보며는 종말의 상황이 펼쳐지는 겁니다.

성전이란 인간의 신앙력을 쌓아 놓은 마일리지나
또는 열심 충성 등등이 고스란히 모아진 장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구별하여서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것들이 한 껏 가득 모여진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근처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것을 큰 영광인줄 알아라 라는 식으로
뿌듯해 하는 거룩한 것과 가까이 있다는 안도감을 줄수 있을 정도로
성전은 마치 천국의 입구처럼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행동도 바르게 하고
함부러 하던 과거의 버릇도 고치게 되고
담배피고 싶어도 이 장소 만큼에서는 참게 되고
참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자연스레 담배 끊게 되고
워낙 셀수 도 없는 많은 효과를 아니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성전이라는 것은 마치 모든 것을 다 덮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편리한 장치를 확장 확대시킨다면 남에게도 유익이 되는 식으로써 널리 널리 퍼트리게 됩니다.

그러면 더더욱 교회 근처 성전 근처에서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이 될 정도로 영광이 되니까 말이죠.

제가 어떤 분이랑 대화를 하는데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교회가 있었는데 서울인데 (삼x , 전 xx 목사)
부산 사람이 일부러 그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하길래
참 기가 막혀서 그냥 사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를 보인 저를 보고 도리어 그 사람이 저를 보고 기가막혀 하더니만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단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종말입니다. 소통 단절입니다.

성전이란 바로 이런 기능을 합니다.
멀리서 있는 사람들까지 끌어당기는 잉여성이 참으로 큽니다.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절을 올리고
그 구원의 문에 자신도 동참하기를 바라는
그야말로 끌어당기는 기능 (확 잡아 땡기는 빨려들어가는 기능)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다고 합니다.
[아 그라제 요 잉 ~~~ ] 이라고 말해버리면 상대방이 공격하다가도
갑자기 그 말에 빨려들어가서 끌어안아버리는 바람에, 긍정화 된다고 ...

이 땅에 소망이 없고
가난하며
삶에 지쳐 낙심이 되고
온갖 재수 없는 상황인 절망 속에서
유일에 저 곳 만은 나를 포근하게 안겨줄수 있는 곳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 어떤 종교의, 모든 종교의 전(성전)은 다 이런 식입니다.
모든 허물을 씻겨주는 나를 감싸 안아주는 곳

가인이 위로 받고 싶을 때
견딜수 없을 때
유일하게 안식처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성입니다.

(창 4:17, 개역)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보호막 즉 안식처의 기능이 없다면 그것은 성전 기능을 할 수 없고
일반적인 장소나, 자신의 집 보다 더 못한 곳이 되는 겁니다.
(편안하고 안도감 안정감을 주어야지, 맨날 교회에 가면 싸움만 벌어지면 누가 가겠습니까?)

그래서 거룩의 요소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온갖 정성으로 성전의 물건 하나하나
성전 의식 하나 하나
성전의 율법이나 규례 법칙 교리 하나 하나
온갖 모든 거룩을 색칠해서라도
그 안식처의 기능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렇게 성전을 유일한 천국의 문으로써
모든 것을 바쳐서 해 줄 것 다 해주고
바를 것 다 발라 주었는데
(소는 누가 키울 해줄 겨를이 없도록 오로지 성전에만 매달렸는데)

이제 성전 따꺼 따꺼 철거 철거 치워 치워 라고 외쳐버리면
모든 삶을 그 성전에 맞추던 사람들은
갑자기 몸뚱아리가 금단현상처럼
그 성전의 부재 상황을 견딜수가 없게 됩니다.

평생을 성전 중심으로 생활해 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성전없이 지내세요 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든든한 아버지가 없어져 버린 고아가 된 신세가 되고
든든한 남편이 사라지게 된 과부가 된 신세가 되고
지혜롭게 할만큼 백성을 일일이 사랑하는 섬기는 왕이 죽어버린 나라없는 임금없는 떠돌이 백성이 된 처지가 되는 것과 같아지는 겁니다.

하루 아침에 고아 되었고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되었으며
하루 아침에 떠돌이 집시 집시 집시 여인 ~~~~ 가 되어버리면

갑자기 없었던 미움들이 돌연히 생생이 되어 주변의 그 따가운 시선들이 풍랑처럼 온 몸을 매섭게 뺨 때리듯이 때리게 됩니다. 하루 아침에 그 어떤 보호막이 다 사라져 버리니까 말이죠. 친구도 원수로 변합니다.

똑같이 비슷 비슷하게, 같은 집이 있고 재산이 있고 가족도 있고 아버지가 있을때는
전혀 몰랐고
그렇게 친절하던 이웃이
이제는 코를 막고 냄새난다고 근처도 오지 말라고 쫏아낸다면
그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마귀취급하듯이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때서야 하늘 원망, 아버지 원망, 온갖 원망이 온 시간을 다 덮치게 됩니다.
설마 나는 절대로 그런 원망하지 않을 거야 했던 자도
자신이 설마 그렇게 될 줄이야 라고 자신이 자신을 봐도 한심스러울 정도로
상황은 혹독하게 너무 너무 냉정하고 차갑게 세찬 바람으로 몰아치게 됩니다.

그저 가라앉는 침몰하는 배처럼, 기정사실화 된 현실을 부정할수 없듯이 그야말로 포기가 나을 뿐이지
버텨봐야 아무 의미 없는 차라리 그런 버텨본 시간을 손해 보기 싫어할 정도로
이미 마음도 잠식 상태가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주님께서는 자꾸 다급하다는 식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목적으로 달음박질 하면서
전력질주로 내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님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도 그런 예수님의 행동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리 함께해서 예수님의 시선으로써 큰 그림을 그리면서 전체 상황을 다 파악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일치점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십자가로 치닫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 쪽에서 알려줘 봤자
십자가 라는 것은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질 않습니다.

기껏 죄인들의 형틀? 하나님이 나무에 달린자 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
기타 등등

기존의 알고 있던 과거의 경험과 지식축적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계시란 묵시란 종말이란 바로 그것을 비켜가기 위한 목적이니
애초부터 안맞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예수님과 매치 시킬려고 해도 안 맞고
또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에게도 매치를 시켜봐도 안 맞는 겁니다.

아무리 적용을 해 보세요 되는가?

그러니까 예수님의 평상시 말씀은 늘 황당하게 이야기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맞는 말
수긍이 되는 말은 수용하고 납득이 되는 말은 긍정하면 그만이니까
또 실제적으로 그런일이 되었을때는 기적성이였고
그런 기적은 내가 특별나게 축복받은 행운아 로써
동시에 남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지

그것이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며, 떠돌이 백성이 될 것이라고는 일체
일체 조금의 눈치도 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리 도적같이 온다해도
인기척을 느낄 그 어떤 감도 오지 않았던 겁니다.
일부러 더 예민하게 귀를 쫑긋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는 곧 죽음이요 그 죽음은
내 목숨 보다 더 굴욕적인
내가 죽는 것 보다 더 싫은
난 죽어도 이것만큼은 안된다는 그것을
십자가는 결부 시키면서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도적 같이] 라는 표현이 딱입니다.

(벧후 3:10, 개역)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계 3:3, 개역)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16:15, 개역)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나는 비록 죽어도 상관없어도, 단 이것만큼은 때려죽어도 안된다는 그것 ...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인간의 이름 삭제는 제명은 자기가 죽는 것보다 더 싫은 겁니다.
죽으면 그만이지만 그 이름이 짖밟힌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자취를 삭제시켜 버리니까 말이죠.

그래서 이름에 모든 것을 걸고 그 이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타나면 그 것에 이름을 도박하듯이 올인하여 걸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때부터 해오던
성전이
가문이
민족이
국가가 바로 성전 성향의 형태를 띤 바로 바벨탑입니다.

인간의 이름에 가면의 형태로 겹겹이 포장된 것이 바로 성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종말현상은 바로 이 성전과 맛물려 있습니다.
종말은 이 성전 아니면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종말이 나타났다면 성전과 연관된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이 성전과 결부 되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름 가족 가문 민족 국가 바벹탑 등등으로 표현이 되었지만 이것을 하나로 설명하면 몸입니다. 몸

왜 성전과 십자가가 결부가 되는고 하니
십자가는 이런 몸(성전)을 치겠다는 겁니다.

단순히 콱 죽었뿌지 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몸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진 내용물 하나 하나를 끄집어 내어서
십자가에서 하나 하나 못 박겠다는 겁니다.
하나 하나 끄집어서 새약속의 의미를 끝까지 도출시키고야 말겠다는 똥고집 입니다.

그래서 종말이란 성전과 연관되어 있지
텔레비나 영화 사회현상에서 말하는 종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난세영웅처럼 현실이 궁핍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적인 상황이 될 때 역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을때 묵시운동이 펼쳐집니다. 땅에서는 희망이 없으니 차라리 하늘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자

그래서 초인사상과 같은 현실 뒤짚기 전복을 꿈꾸는 문학들이 발전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이라도 되게 해달라고 꿈꾸고 기도하게 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환상의 세계 묵시문학이 발전하는 겁니다.
그만큼 삶이 피폐하다는 겁니다. 전쟁에서 패한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면 곧 바로 묵시문학이 희망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메시야 사상이 강하다는 것은 땅은 피폐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정 안되면 물리적으로라도 현실도피를 하는 겁니다.
마약을 한다든지 술 마약 등등
그것이 또 종교요 성전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이야 말로 이 인간의 몸 구조와 딱 떨어지는 겁니다.
선악이 만들어낸 몸이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성전의 몸입니다.
이 몸의 등장으로 인해 그 어떤 해석도 안 먹혀듭니다.
선악의 해석으로는 풀릴리가 없습니다. 즉 그 어떤 육체인 몸도 이 딴 몸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몸은 성전과 결부된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인자로 에수님은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죽인 몸이다는 겁니다. 맛물린 몸입니다.

기존에 나타낸 적도 없는 전혀 금시초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도 몰랐습니다. 참 선지자도 해석을 하고 이해를 충분히 해서 외쳤던 것이 아니라
그냥 입에 닿게 되니 그냥 외쳤던 겁니다. 완료를 봐 버린 이상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자신들이 이게 정답이다 라고 누가봐도 당신의 삶이 그러니까 맞나 보네 라고 수긍이 가도록 모든 것을 올인한 것을 다들 가시적으로 확인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행동하면서 그 정답이라고 했던 것을 다 날려버리고 이건 가짜다 라고만 외치는 겁니다.
그럼 정답은 뭐냐? 그러면 안 알려주지롱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의 입에 닿게 된 것이지

그들이 알아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그 이전에는 밝혀진 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야 인자야 라고 하십니다. 이유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성전에 대비되는 딴 몸으로써의 충돌로 맛물림으로 등장한 겁니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붙여버린 호칭입니다. 상대방에게 물어보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말이죠.)

그러면 괜히 오답만 붙잡고 있는 놈들만 바보 쪼다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이 오답인 성전이다 라는 겁니다.

그 현상은 지금도 현재 오늘날도 여전히 마찬가지 이다 라는 겁니다.
이 상황을 지금 이순간 알려줘도 제가 알려주든 누가 알려주든 백날 알려줘도
결국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말이란 인간 쪽에서 뭐 이렇게 저렇게 하고
준비를 하고
이런 저런 것을 갖추고
신앙해 보고
성전을 지어 보고
믿어도 보고
실천도 해 보고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 없다는 겁니다.

의미 없으니까 안해야지 라고 안해야지도 의미 없고
[의미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해 봐야지
아 이래 행해 보니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겠구나 라고
알아도 사실상 의미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안 것으로 인해
종말이나 복음이 나에게 나 개인에게 맞춰주진 않는다는 겁니다.
이미 정해져 버린 고정이니까 말이죠.
그 고정을 근거로 해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것이니까 말이죠.
(오히려 곤고해집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부딧히는 돌에 부딧혔다는 뜻입니다. 머릿돌이 쳐들어 와서 가루가 된 그 생생한 현장 때문에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의 처참함을 보게 된 겁니다.)

반드시 성전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담습니다.
집단 보편성을 띱니다. 즉 몸과 같은데 몸은 개개인 하나 만을 의식하지만
사실상 공동분모는 욕망이기에 그 욕망의 집단성을 가시적으로 띄게 하는 것은
바로 성전인 겁니다.

그러니 쉽게 생각하면 사람이 교회 충성 성전봉사는 사실상
성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을 사랑해서 이다는 겁니다.
자기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동시에 주의 몸을 삼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이유로 열심이였고, 눈에 안보인다는 이유로 주의 몸은 삼킴을 당합니다. 안보이는데 삼킴을 당한 것을 우찌 알겠습니까? 예수님을 때린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다짜고짜 따지니? 때린적 없는데요? 라는 식의 상황에 졸지에 일방적으로 처해져 버린 겁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부자청년이 율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킨 이유도 자기 몸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난한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어라 라고 한 것은
바로 직격탄인 자기 몸 관리를 그 다음부터는 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몸입니다 몸
거룩도 사실상 자기 몸 뚱아리에 바르기 위함이였지 (칭칭 감고)
주를 사랑해서 거룩할려고 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짜고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킨다고
아니 손도 안대었는데 누가 주님의 몸을 해하게 합니까 라고 감이 안오는 소리만 하신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에 예루살렘 성전이죠 성전에 제자들과 나아갈 때
제자들의 관심사는 종말이 아니라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돌을 가지고서 운을 띄웁니다.

(막 13:1,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님의 답변은 뚱딴지 같은 동문서답의 답변을 하십니다.

(막 1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위기감의 생뚱맞은 표현입니까

그런데 사실상 이것이 사랑입니다.

마가복음 13장이 이런식으로 시작해서 13장 전체가 종말로 휘감기게 됩니다.
그러나 종말은 쉽게 말하면

두 몸의 대립 상황이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 쪽의 몸은 허물어 버리는 몸으로써의 침략이고
다른 한 쪽은 그 몸에 의해서 불살라 버림을 당하는 몸으로써 상황이
바로 종말입니다.

계시록을 이렇게 보면 쉽습니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기쁜소식입니까?
나의 가짜 몸 가짜 성전 그림자 성전을
진짜 몸 진짜 성전이 쳐들어와서 태워주셔야만
쓸데 없이 이 가짜 몸에 가짜 성전에
그림자에게 목숨거는 그런 헛짖은 안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림자 이니까 사실상 자기 몸에게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가짜들이 들통나면서 가짜 몸들의 발악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겁니다.

성전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종말의 상황을 펼치면서
가짜 몸들을 가짜 라고 밝혀주는데 있어서
가짜들의 격렬한 저항들이

얼마나 제대로 참된 것이 제대로 쿡쿡 건드렸으면
가짜들은 다 넘어지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은 진짜가 왔다
그래서 기뻐하자
그러니 마치 계시록은 빰빠바 라는 나팔소리의 잔칫날 같습니다.

한쪽에서는 불타는 지옥인데

다른 한 쪽에서는 파티입니다. 어린양의 파티입니다.

꼭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 파티로 인해
한 쪽은 고기 뜯어먹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장자(접속: 부활을 성공한 육 잇기)가 죽어나가는 시체가 넘쳐나는 울음바다가 되는 겁니다.

두사람이 맷돌 갈다가 한 쪽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쪽은 불타게 된다는

이 상황이 바로 종말 곧 거룩 : 분리 현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말이 거룩이 가시화 되고 현실화 되고
실상으로 나타나게 되니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전혀 안 기뻐하고 도리어 화내는 쪽이

바로 두 몸의 충돌로써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한 쪽이 그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시간에 저들은 비교당하는 몸 때문에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기껏 한다는 점이 기존의 다수의 기준에 의한 약점 잡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당신의 몸이 우리 인간의 몸을 건드렸으니 우리도 너를 건드리겠다고 한 것이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라고 착각한 가이사 에게 세금내는 문제로써

몸에 직접적인 구속을 가할수 있는 법 문제로 본격적으로 파고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예수님의 몸에 걸려든 겁니다.

몸이 차이가 날려면 두 몸이 대립이 되는 비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를 다루시는 방식이 똑같습니다.
성도는 정작 종말 속으로 내 몰아버리십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종말에서 빠져나와야 할 몸뚱아리가 되어야 할텐데
성도를 괴롭혀야만 하는 입장이다 보니 같이 종말의 상황에 말려드는 겁니다.
종말에 말려듬으로써 이제야 비교가 되는 대립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소재로써 알리바이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 곧 종말 때에만 나타나는 교회 곧 성도는 미끼입니다.
물어라 물어라 낚시꾼들이 그냥 낙시줄을 던지면 안 뭅니다.
안 물고는 못배기는 맛있는 먹잇감을 물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글로 남겨서 혼자 흥분이 되어서 글로 남겨 올리기도 했는데 개무시 내용으로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에게 무조건 며느리 다말은 쳐다보기도 싫은
내 자식들 다 죽이고
내 명예를 실추 시키고
나의 신앙관을 흔들어 버리는
저 이방계집

그럴때는 언제고 때려죽어도 보기 싫다 라는 그 며느리 다말을 화장 쓱쓱 가면을 했더니만
안보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 버리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이제는 아예 빼도박도 못하는 쌍둥이까지?

아이들이 할아버지 라고 달려와서 유다의 품에 안길려고 할 때
며느리 다말이 애들아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란다 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이야기 할 것 아니냐 말이죠? ㅋㅋㅋㅋㅋ  

몸을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건드리고 파고들어오는 겁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꽉 문게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저들을 제대로 꽉 물어서

종말로 치닫는 겁니다.

그 종말을 감사하면 되는데
도저히 감사 못하는 겁니다.

즉 지금 본문에 난리에 난리가 난다 라고 했을 때 그 난리 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것은 몸입니다. 몸이 그 난리에 저촉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시아버지 유다 입장인 몸뚱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다말의 입장에서의 몸뚱아리는 그 난리를 조장하고 그 난리를 주도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몸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자 라는 몸 자체가 남자 라는 몸을 겨냥한 대립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얼굴도 비기도 싫어서 아예 쳐다보기도 싫어했는데
지가 지 스스로 쳐다보면서 발악하는 상황 자체가
몸 기준이다는 겁니다. 몸

그 몸에 딱 맞는 상황을 바로 다말이 펼치듯이
종말이가 시아버지 유다와 같은 우리의 몸 뚱아리에 딱 맞는 상황을 펼치는 겁니다.

그것이 난리입니다.
그 난리란 나의 몸을 치는 상황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인 이유는
내 몸을 치지 않으면 다른 몸을 쳐다도 안 본다는 겁니다.

며느리 다말이 나의 모든 것을 다 빼앗가 가는데
그래서 불태워 죽이고팠는데
마침 아기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간따나 미워 죽어서 이년을 어떻게 죽일꼬 했는데
잘됐다 내 그럴줄 알았어
행실이 못땐 열매가 그대로 심은대로 나타는 구나 아이고 주님 드리어 저의 한을 풀어주시는 군요. 눈 부릅 뜨고 나의 최후의 보루 막내까지 내 놓아라 약속하지 않았느냐 라고 그 못땐년이 덤벼들 때 얼마나 마음이 안타깝던지 주님여 내 심정 아시지요? 그래서 이렇게 들어 주셨군요. 이제 너 한번 죽어봐라
아예 죄악의 뿌리까 그 씨앗을 다 불태워 버려야해

이게 바로 종말이에게 말려든 겁니다. 도리어 낚인 겁니다.
외부에서 다른 몸이 쳐들어 오는 방식은 이 방식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 몸 외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에 자기가 취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가증한 물건이 서게 되면 빨리 도망치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자기가 빠져있는데 도망칠 재간이 인간의 몸 자체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성전을 치는 곧 자신의 신체의 몸을 치는 다른 몸이 와야 하는 겁니다.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막 13:15,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막 13:16, 개역)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막 13:17,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막 13:18, 개역)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런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환란이 온다는 것은
인간 몸 자체를 기준으로 해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몸이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뚱아리는 죽어도 상관없는 그저 껍데기일 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환란이 누구 몸을 기준으로 해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전초전이다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동물들이 사람보다 먼저 선취 하듯이 반응을 나타냅니다.
인간만 아무것도 모르죠. 그래놓고 동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충만케할수 있는 자격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냥 우리 입속으로 들어와 주는 것도 모르고 말이죠.

아무튼 환란은 바로 이런 전초전인 겁니다.
그 뒤에 인자가 오기 때문에 필히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두구등 두구등 이라는 빵빠레와 같습니다. 너무 가차이 있는 사람은 귀가 따가운 소음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소리 때문에 졸지에 뭐지 뭐지 뭐지 라고 졸지에 궁금증이 생겨서 누가 등장하는 갑따 라고 뻘건 카페트를 깔고 등장하는 그 등장 인물에 대해서 목 빼면서 짧은 다리 치켜 세우면서 쳐다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전초 효과 인 겁니다.
그림자 효관

실상 실체 되신 인자를 말하기 위해서
인자가 얼마나 무서우면 그림자에 혼비백산하는
실체는 더 겁나지롱 이라고 소리가 먼저 실체의 등장을 알리고자 선발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기생라합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여호와 하나님 이요
기생라합에게 나타난 정탐꾼은 바로 선발대 그림자로써 실체를 등에 업고 나타난 메신져 소리인 겁니다.
그러니 기생라합은 실체 때문에라도 이스라엘 그림자를 숨겨주는 겁니다.

관심사가 이스라엘 곧 종말의 존재(없는데서 생겨난 약속을 담은 그릇으로써의 집단)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런 약속을 안겨다 준 그 실상 그 실체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생라합이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전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은 정작 안 믿는 판국에
그것도 다 까먹어 버린 이야기를
이 여인은 매우 실상처럼 그것도 40년 전의 일을 지금같이 생생하게
간담이 서늘하게 한 그 여호와께서 이제야 왔다고 좋아라 기뻐 펄쩍 펄쩍 뛰면서 도리어 이스라엘은 시큰둥한데 말이죠.

결국 누가 복음 때문에 기뻐했다면 상대적으로 복음 때문에 졸지에 화가 새로 덮쳐진 상황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종말이라는 상황인 겁니다.

그것은 성전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마치 전초전처럼 미리 알려주시는 겁니다.
어차피 벌어집니다.
어차피 난리가 납니다.
어차피 그 난리에 몸은 힘들거나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자 효과에 너무 예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상 때문에 벌어지니까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인자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자가 지금 종말을 성전과 결부시켜서 이야기 하고 있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뭐가 무섭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이 뭐가 죽임을 당하며
뭐가 난리가 나며
뭐가 거짓선지자들이 활동할 수밖에 없고
뭐가 서로 서로 죽이는 상황이고
뭐가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불타고 뭐가 도대체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지금 전혀 무섭지도 않은 우리 몸 뚱아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예수님이 하시니까

간담이 서늘해지기는커녕
기다리고 기다리고 설레고 설레였던 40년의 기다림이기는커녕

와카노?

뭣땜시?

이런 시큰둥한 반응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 몸 자체가 그런 겁니다.

예수님 몸 뚱아리만 심각하지 뭐 어쩌라는 건지?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도 우리 영역 밖의 소리이니
대비도 소용없다.
준비해도 소용없다.
참아도 소용없다.

그렇다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왜 하느냐 라는
뭐 예수님이니까 그런 거고 나는 나 니까 그런거고 이것이 인간의 한계의 전부일 뿐인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 마나 한 소리처럼 전혀 딴나라 소리를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사랑이냐 말이죠.

우리는 기껏 눈에 보이는 성전이 전부인데?
그 성전은 그림자일 뿐이다 라고 말해준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고마우냐 말이죠.

그래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있어서 기쁜소식인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허물어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몸이 성전으로 안보이고
그 몸이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자 이래 말하니까 교회일 다 깽판치고 할 필요 없겠네 라는 놈들이 반드시 나옵니다.

더 안절부절 못하는 자가 목사입니다.
겁먹습니다.

결국 여전히 기준이 인자 되신 예수님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자 되신 예수님이 기준이 아니라
종말에 대비하는 나 의 자세가 기준이 되고
나의 태도 여부에 달리게 되는 식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정작 그 성전을 쳐 버릴 때 누가 제일 반항하겠습니까?
제사를 차라리 안 드리면 별 시큰둥 하겠지요.
괜히 제사를 드렸던 가인이 얼굴에 안색이 변하여서 화를 내는 겁니다.

즉 중간에 매개물이 뭔가라도 그 빈자리를 채워져 있어야 하는 것과
빈자리 그대로 여도 상관없는 쪽이

인간의 자발성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종말 때 심으셔서
심겨진 대로 나타나는 것이

지금 본문의 상황입니다.

종말 대비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뭐 아무도 없으니 마음대로 살아야지 ~~~~ 라고 반드시 나옵니다.

아무도 없다메?

마음대로 살아야지를 아무도 없어서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요
원래 마음대로 살아와 놓고 말이죠.

그러니 하나 하나 주님의 거룩성 곧 갈라놓으심에 안 걸려들 인간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의 준비 초청이 없는 자는 아예 다 지옥인 겁니다.

그러니 이전의 모든 말들은 별로 기분이 안 나쁜데
최종적으로 결국은 주님 마음대로 이다 라는 말에 확 나쁜 겁니다.

마음대로 사세요 도 내 쪽에서의 마음대로 살아라 라는 것은 별로 확 기분 안 나쁩니다.
그런데 언제 기분 나쁘냐?

주님이 마음대로 하시는 것에서
되도않는 인간을 통해서 저런 말 할 때
확 기분이 나쁜 겁니다.

그 상황이 종말입니다. 갈라놓는 방식입니다.

성전이 바로 그 종말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완전히 미쳐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 욕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 성전과 같은 것이 이방인에게는

일반인(종교인이 아닌)에게는 바로 몸 뚱아리 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대적인 예수님의 몸뚱아리가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에서
확 기분이 나쁜 겁니다.

그래서 돌삐 들고 죽여버리는 겁니다.

가인의 아벨 죽이는 사건의 재현입니다.

십자가는 재현입니다.

성전에 미치도록 해 놓고
자기 몸뚱아리에 미쳐버리도록 해 놓고
자기 제사에 미쳐버리도록 해 놓고

그것을 확 박탈 시켜버리는 무시 무시 개무시

이것이 종말의 상황인 겁니다.

이 무시의 종말의 상황에 반드시
그림자 효과로써 거짓영들의 활동 등등은

실체가 등장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기뻐 하라 라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림자일 뿐인 우리에게 실상을 보여주시니

그 실상의 세계의 초대에

우리는 놓여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인자가 구름타고 오실 날을
기생라합처럼 간담이 써늘하게 느끼면서
그 십자가 사건의 다 이루심을 감격하면서
인자를 쳐다 보게 해 주소서

실상 앞에서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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