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삭제 시켜주지 않으면 지옥이다.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오전 9:07:33  김대식


섬뜩하다. 지나온 과거 그리고 지금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
시간과 공간에 갇혀진 나를 가두어온 감옥인 “나”라는 몸을
주님이 삭제 시켜주지 않으면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 이다.

늘 끄집어 내는 것들은 나 이고 또 나 일 뿐이다.

자랑하는 것도 나요 기념하는 것도 나요
대화의 모든 주제가 되는 것도 나다.

그래서 주님 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
이제는 끄집어 내는 것은 나를 삭제 시킨 주님이요
자랑도 주님이요 기념도 주님이요
모든 대화의 주제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된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 하면
그 말 끄집어 낸다는 자체가
듣는이로부터 구경꺼리가 된다.
자신의 수치를 스스로 발가벗기듯이 벗기니
오히려 보는이가 민망하고
듣는이가 부끄러워 한다.

바로 그것이다. 그 수치를 그 민망함의 굴욕을
거리끼는 부끄러움을
같은 인간으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죽음을 선취하듯이 먼저 끄집어 낸다.

심판날을 미리 앞당겨 그 수치를 격는다.
그것을 자수 하듯이, 항복하듯이
미리 항복해 버리니
듣는이가 민망하다.

같이 발가벗겨져 버리는듯하니 말이다.

어 어 어 ~~~~

그런데 그 부끄러움을 회피하고 외면해야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자가 있다.

그 죽음에 동참하는 자가 있다.

바로 죄인 중의 괴수다.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이 죄인 중의 괴수 즉 바닥의 바닥, 부정의 부정을

성경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로 행함에 반대되는 믿음의 사람
곧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자들이다.

(이것을 막사세요 라고 이근호 목사가 표현했다. 즉 안 막사는 탕자의 형을 염두한 말이다. 개방적인 인간을 염두한 말이다. 도그빌 이라는 영화에 의사 아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수용성 개방성을 가르치겠다는 명목으로 죄인 하나를 숨겨두는데 죄인을 집단강간한다. 남자든 여자든 아이들이든 노인이든 할 것 없이 말이다. 막사는 것을 감추는 것이 안막살기 라는 수용의 미덕, 개방의 미덕, 용서의 미덕을 말이다. 몇 번 용서할까요? 7번? 너나 용서 받아라. 영화 밀양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꼬끼오 x 3. 당나귀 왜 때려 x 3. 안 돼 ~~~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이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제가 들을귀 볼눈 깨닫을 마음을 막겠습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참 뻔뻔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나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여디디야.
머리 깍이고 눈 뽑히고. 수수께끼 덮쳤다. 삼손.

이것은 실천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의가 덮쳐지듯이 덮쳐져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과 만나는 문제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외면하는 상황이 반드시 반대급부에서 생기도록 되어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외쳤다가는 죽는다.

이것을 겁도없이 성령에 감동받아서 부끄러움을 들추어낸다. 수치를 드러낸다.
그리고 짤라낸다. 수치가 굴러간다.

여기에 동원이 되는 날카로운 칼
영과 혼 골수까지 찌르는 예리한 칼로써 동원이 되는 것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다.
여러 이방인 과부 중에 한 과부요
이스라엘 중 여러 문둥이 중에 한 문둥이다.

과부도 무시하는 과부가 미끼로써 등장한다.
마귀가 제일 탐내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맛깔나게 보이는 미끼다. 마귀는 법을 쥐었기에 범법자가 죄인이 제일 탐스럽다.

그 마귀 보란 듯이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성령의 소욕은 죄인만을 찾는다. 육의 소욕을 보란 듯이 말이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런데 그 선택을 날려버리는 것이 문둥이다.
줘도 못 먹냐 이다. 그런데 그 줘도 못 먹는 문둥이 여럿 중에 단 한명의 문둥이가 또 분류된다. 한 문둥이 나아만이다.

선택마저도 부정해 버리고 그 부정한 것 중에 또 부정한 문둥이라면
이것은 죄인 중의 괴수요
바로 잃어버린 자다.

저 사람은 도저히 하나님도 구원 못할 거야
용서 못하실 꺼야 라는 자이다.
이스라엘을 버리고 수리야 사람 곧 개같은 이방인 중에 또 더러운 문둥이다.

도대체 이중분절(여성성)을 몇 번씩이나 해서 얼마나 바닥을 쳤길래 제일 밑바닥까지 바닥을 친 한 마리 문둥이 인가?

상대적으로 올라갈려고 높이 쌓을려고 내 영혼아 안심해라 창고를 또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또 성공하게 되었다고 창고 늘리고자 하는 판국에

공중나는 새 즉 까마귀를 대비하듯이 거룩은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갈라놓는 것이다.

개방성이기는커녕(수용의 미덕, 용서의 미덕을 외치는 도그빌사람들)
철저한 단절성이다. 이것이 바로 좁은길로 가라는 것이다.
좁은길이 눈에 보이면 개방적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길이다.

좁은길이란 없다. 없는데 있다고 좁은길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으니 그 좁은길을 가고자 하는 자는 다 지옥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살기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데 양이 될려고 하니 다 지옥갈 수밖에 없다.

잃어버림이란 주님 입장에서의 잃어버림이지 인간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림 자체가 없다.
막살기 자체가 없다. 오로지 마귀가 장악한 몸뚱아리 이기 때문에 마귀가 주인 노릇을 할 뿐이다. 그래서 도둑이 주인을 결박하고 세간을 집주인의 물건을 빼앗는 것이다.

주님 입장에서만 전리품이지 우리 스스로 자기가 자신을 빼돌려서 전리품 될 수가 없다.
운명 지어진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꿀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아무리 동사무소에서 새이름으로 개명을 하며 새롭게 작명하여 서류를 완벽히 갖추어도
이미 집주인인 마귀가 장악한 이상 벗어날 길이 없다. 그래서 전쟁 뿐이다.

충돌뿐이다. 오로지 죽음으로써 목숨값인 피 값으로 산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이 피 값을 새록 새록 새록 새롭게 한다.
그래서 서로 피 터지도록 싸움 붙이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오는 피 값이 나오는지?
아니면 나의 억울한 원한? 한풀이? 절대로 삭제하면 안된다는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나오는지? 그래서 가인은 과거도 풀어야 하고 현재도 풀어야 하고 미래도 풀어야 하는 죄의 소원을 넘어서야만 한다. 나비효과 라는 영화에서처럼 이것 땜빵하니 저것 터지고 저것 땜빵하니 이 땜이 터지고 단 하나도 단 한 개도 푸는 것 없이 도리어 놀림만 실컷 당하는 농락을 죄가 인간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삭제 시키면서 다가오는 주님이 얼마나 고마운가?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미 삭제 했는데 왜 또 세우려고 하느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었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 라는
잃어버린 자를 새롭게 만들어서

늑대우리 속에 집어넣으심으로써 거룩을 펼치시는 갈라지는 현상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참으로 기가막히게 대비 하신다.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를 대비하시듯이
부자 vs 거지 나사로
맏아들 vs 탕자
가인 vs 아벨
99마리 양 vs 한 마리 잃어버린양.
지옥백성 vs 천국백성 
이스라엘 장로 vs 깡패 입다
9명의 유대인 문둥병 고침받은자 vs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

이런 성령의 소욕으로써의 죄인을 부르심은
평상시 인간들의 육의 소욕에서 대비하는 버릇과 일부러 대비해서 나타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대표성이다.

저 소경은 날때부터 소경인 죄인인데 부모 죄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주여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레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자신들의 신께 대한 개방성(접속)을 저 단절적인(폐쇄적) 인간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러나 엘리야와 엘리사는 일부러 전체를 부정하고자
여러 과부 중에 한 과부
여러 문둥이 중에 이스라엘 일부러 빼고 수리야 사람 한 문둥병을 찾는다.

처음자리요 빈자리요 시간과 공간을 부정한 자리이다.
곧 죽음이다. 십자가다.

그리고 죽였다 살렸다 죽였다 살렸다 그 간격을 계속 계속 벌린다.
7번 똥물에 씻으라고 한다. 이레라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라고 묻도록 만든다.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저런 저주의 마을 나사렛에서 무슨 그리스도가 나시겠는가?


모든 육의 소욕을 피해가고 비켜가기 때문에 주여 뉘시니까?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다.

우와 내가 아무리 지울려고 해도 못 지우는 것을 지우시는
아무리 삭제하고파고 삭제 할 수 없는 나를 삭제하시는

주여 당신은 뉘 시니까?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를 삭제 하시는 분이 샛별처럼 떳어요 떳어
먹보다더 검은 나를 흰눈같이 희게 삭제시킬 선지자다
아니 목마름 자체를 삭제시키는 그리스도가 오셨다.

보세요 저 분이예요

(요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개역)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4:17,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 개역)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세상 죄를 삭제 시키는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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