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9. 피 잔치

2011년 9월 30일 금요일 오전 10:08:41  김대식


인자 축제 (피 잔치) - 인자의 살과 피 먹기

선악인간과 인자의 차이


(막 14:10, 개역)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막 14:11, 개역)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막 14:12, 개역)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막 14:13, 개역)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막 14:14, 개역)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막 14:15, 개역)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막 14:16, 개역)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막 14:17, 개역)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막 14:18, 개역)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막 14:19, 개역)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막 14:20, 개역)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막 14:21, 개역)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14:22, 개역)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4:23, 개역)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막 14:24, 개역)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25,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 14:26, 개역)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가니라』


인자를 십자가라는 모태가 생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자를 잉태하기 위해서
3일이라는 간격을 벌려놓습니다.
도저히 육의 소욕에서 날수 없는
성령의 소욕에서만 태어난 완료 그 자체를 낳습니다.

이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이스마엘은 왜 아닌지를 위해 또 반드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내기로 이삭이 태어납니다.
육의 방식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개방성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을 잉태하고 약속을 생산하는 방식인 십자가 방식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육의 방식을 일부러라도 차단하는 방식으로써
십자가는 차이성으로써만 나타납니다.

빛은 어두움이 없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는 것은 바로 인자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인데
여기에 선악의 세계가 맹렬하게 대립되어 있는 상태인 겁니다.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개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 개역)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개역)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개역)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개역)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개역)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6, 개역)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7, 개역)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요 1:8, 개역)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 본문에 인자를 기록된자로 표현 되었습니다.
어디에? 말씀에 말입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자는 함께 하지 않는자로써 말씀과 무관한 자가 되는 겁니다.
말씀세계와 대립된자입니다. 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자가 까부는 겁니다. 생명책에 없는자가 말입니다.

기록된자

곧 인자는 참으로 특이하게도 밀어내는 밀쳐내기 속성이 있습니다.
밀추어냅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선악인간의 속성은 곧 어두움의 속성은 팔아버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팔어버린다는 것은 챙길것이 있다는 겁니다.
챙김으로써 소유와 유익을 하나의 재산과 창고로써 저장해 두겠다는 겁니다.
(어떤 누구든 장사란 상대를 속이지 않고서는 이윤을 창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윤의 거래상대는 놀랍게도 선악법인 겁니다. 팔아넘겨야 죄의 소원을 넘어갈수 있다는 착각에 아니 그 저주에(시치프스의 신화처럼) 물 한방울을 혀바닥에 찔끔 뭍히는 겁니다. 그만큼 죄의 소원이 가혹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해결방법으로 오로지 근육사용량 곧 행함입니다. 지키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밀어내는 자와 챙기는 자의 충돌입니다.
(여기서 밀어내기란 의도적인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비추이는 것은 완료 그 자체 이기 때문입니다. 즉 충만입니다.

밀도의 촘촘함. 빽빽함 쭉쭉쭉 뻗어가는 막힘없는 무한질주요 막힌담을 허물어 버리는 구멍뚫기입니다. 막을길이 없다는 것을 막아서는 자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쭉쭉 뻗는 생명의 강도를 그 흘러 흘러 넘치는 생명을 도저히 멈출수가 없어서 밀려버림을 당하고 빼앗겨 버림을 당하고 사적인고 개인적으고 독자적인 영역은 모조리 종말에 홍수에 약속에 피에 잠식당하는 겁니다.

충만하니까 넘쳐 넘쳐 넘쳐 흐르다 보니 상대적인 것이 밀려버리는 겁니다. 문제는 안 밀리면 됩니다. 안밀리면 되는데 이상하게 밀려버립니다. 완료이기 때문에 미완료는, 미흡함은, 흐릿함은, 모호함은, 의문은 밀려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빛은 그 충만함을 어두움을 등장시켜서 쫏겨남으로써 설명합니다.)

챙기는 자는 그 썩을 것을 챙기다 보니 헌부대에 아무리 넣어본들 의미가 없습니다. 완료는커녕 더더욱 궁핍과 결핍으로 가득차 버립니다. 시치프스 신화처럼 또 구르는 돌을 다시 올라가서 쌓아야 합니다. 자아를 챙기는 것은 그만큼 무겁고 시험드는 모호하고 의문의 짖입니다.

그러나 밀쳐내임을 누리는 자는
나는 아간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아간이 안되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나야 말로 아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챙긴 것을 빼앗겨 버림을 당했는데
그 나 같은 도둑놈의 것을 다시 도둑질하는 빼앗는 자를 보고

누구십니까 라고 졸지에 인자를 만나는 것을 누리는 겁니다.
즉 외부인과 만났다는 겁니다.
원치 않는 만남입니다. 빼앗는자와의 만남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참으로 어리석게도(지혜롭게도 즉 십자가롭게도)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영접 이라고 합니다. 영접

주님 쪽에서 빼앗는 방식으로써 만남을 주님 쪽에서 넘어와 놓고서는
영접했다 라고 빼앗긴 자에게 그 공로를 돌려버리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반어법이라고 하나요? 문법을 잘몰라서 모르겠는데 하여튼
성경말씀은 이런 표현이 비일비재 합니다. 사실상 전부 다입니다.
믿음이 작은자와 대립되는 자로써 여인아 네 믿음이 크다 라고 일방적으로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은 사실상 그 여인이 믿음이 커서가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님이 너 여인을 일방적으로 만나줬고
그 여인은 불신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신을 예수님으로부터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그 둘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크다 라고 하는 겁니다. 충만이 덮쳐서 완료되버렸습니다.

큰 예수님의 세계에 졸지에 찍혔다 라는 겁니다.

작은 너 여인의 세게는 이제 삭제 당하고 빼앗겨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큰 예수님의 세계를 누리는 일 뿐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빈정상한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 빈자리를 누릴줄 모르기 때문에 행함으로 빈자리를 결핍으로 채우는데 바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정죄함 없듯이 앞으로는 정죄함 없는 행동을 함으로써 정죄함 없음을 유지시킬려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짖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누려야할 산상수훈의 충만함에서 밀려나야하고 빼앗겨야 하는데
그런 완료에 완료성을 당함을 누려야 하는데

도리어 누리기는커녕 지키기로 대처해 버리니 그들은 산상수훈이 졸지에 현대판 십계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계명조차도 지킬게 없는 누리는 것인데
십계명은 지켜야만 십계명답게 된다는 식으로 산상수훈까지 그렇게 더럽히고 있습니다.

아무튼 완료된 [충만] 조차도 같은 용어도 달리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정반대로 말입니다.

두 사람에게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충만에게서 갈라지는 겁니다.

충만이 밀려오듯이 주님이 넘어오심의 방식이 바로 인자의 방식인 십자가 뿐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서 각각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두 사람을 두 몸으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잉태한 자를 인자로 예수님은 자신을 표현하시면서
이 인자로 인해 갈라지는 현상을 벌리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쪽은 인자 곧 십자가라는 빈자리(없음, 죽은 태, 할례의 고자 = 광야)가 잉태한 인자로 충만함을 누리는 잔치 즉 페스티발 축제가 열리고
(이것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참으로 특이합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먹고 마시는 유월절 페스티발 잔치입니다.)

이 잔치에 배제되고 소외되는 자는 상대적인 매매 거래에 빠져있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겁니다. 즉 선악법의 세계가 덮쳐버렸기에 거기서 빠져나올 재간이 없고 오로지 행함의 법칙인 시치프스의 수레바퀴에서 이미 팔려버렸음을 당한줄도 모르고 안팔림 당하고자 자기챙기기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로써 일만달란트 즉 돈 4조 2천억 원의 돈을 연도로 16만 4천 3백 8십 3년을 일해야(하루 품삯 7만원 ? 6천 만 일을 쉬지도 않고 일해야) 빚을 갚는 겁니다.

그 죄 값, 죄의 소원을 병신같이 갚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법지키기의 방식이 바로 행함이요, 챙기기인 팔아넘기기입니다. 편법입니다.

편법 보다 더 편법은 차라리 손 놓아버리는 겁니다. 무슨 수로 손 놓고 누릴수 있겠습니까?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래서 그 간격좁히기를 더더욱 간격벌리기 앞에서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듯이

누가 이런 죄의 소원 아래에 갇혀버린 자에게 넘어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 넘어오심이 얼마나 충만하면 빚갚기는커녕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 하는 겁니다. 잔치입니다. (빚갚기 포기 잔치입니다. 매매 거래 포기잔치입니다. 이걸 또 매매거래포기 지키기로 또 자기를 챙기는 순간 제명되면서 지키기로 행해버리니 용서를 누리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에게 백 데라니온, 말이 쉽지 7백만원 나름대로 꽤 큰 돈입니다만 상대적인 일만달란트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겁니다. 상대적, 즉 일만달란트 용서를 무시하니까 상대적인 백데나리온이 커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용서를 못하는 겁니다. 내 피 같은 내 돈 내 돈 내 돈 ~~~~~ )

그러나 끝까지 인간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행함을 멈출수가 없습니다. 행함에게 잠식 당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안행하고 싶은데 행함을 멈출수가 없는게 아니라. 선악이 덮쳐서 법이 덮쳐서입니다. 결혼도 결국 매매입니다. 매매란 타인의 욕망을 공유하는 겁니다. 매매가 없이는 사고 팔고 이익이고 손해고 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활신앙도 그래서 개방성 자유시장처럼 매매하는데, 성전도 양 비둘기 매매 하는데 사고 파는데 그 상을 뒤엎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상거래의 연결고리를 누가 끊어줘야 합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매매결혼을 끊어주는 며느리 다말이 부정한 매매 도장 도장끈 지팡이로 끊어줘야, 가로막아야, 꼬끼오 라고 세 번 울어줘야. 3일 간격 벌려줘야, 죽으면 죽으리라 단절시켜줘야. 비로소 참결혼인 혼인잔치가 성사되는 겁니다.

(마 22:30, 개역)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눅 17:27, 개역)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 20:35, 개역)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마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개역)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개역)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개역)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눅 14:16, 개역)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눅 14:17, 개역)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눅 14:18, 개역)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19, 개역)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20, 개역)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눅 14:21, 개역)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4:22, 개역)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눅 14:23, 개역)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4:25, 개역)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눅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결혼도, 부활도 다윗이 말한 주께서 내 주께인 인자 되심을 누리는 것인데

반대로 인간의 결혼은 매매가 되었고. 부활신앙은 매매가 되고, 심지어 유월절 잔치도 사고팔고 하는 매매거래가 되어버린 겁니다. 교회도 매매 관계입니다. 난 안해야지? 천만의 말씀 ! 그 아간을 고발한 장로 또한 결국 그 고발성이 매매입니다. 챙기기입니다. 내 영역 지키기입니다. 우리는 아간 맞습니다. 그래서 아간의 세계에서 빼내기 하시는 분이 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글쎄 다윗이 만남을 당해 버렸다는 뜻이 주께서 내 주께입니다.
나의 매매 하나님을 인자가 깨부셨다는 겁니다. 우상을 말입니다. 가짜 하나님을 ...

결국 선악 인간은

결혼도 인자 되심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써 여자로써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남자 됨을 지키고 여자 됨을 지키고. 그 지키고 행한 것을 서로 서로가 매매 하는 겁니다.
나는 아이를 가질수 없는 몸인 남자이니, 아이를 가지는 여자 몸을 거래하는 겁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위해서 도덕을 또 돈 주고 사와서 가미 시키고 교육 시키는 겁니다.

도리어 남녀로 거래하는 겁니다. 사고 팔고 하는 결혼으로 졸지에 매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도 그런식이 되는 겁니다. 부활을 따지는 논쟁에서 누구 아내냐? 라는 소유

누구의 소유라는 매매 거래 개념이
졸지에 인자 때문에
졸지에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어찌 주라고 하느냐 앞에서 밀려나고 쫏겨나게 되고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부활을 졸지에 예수님에게 빼앗기고 쫏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빼앗기고 안 쫏겨날려고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죽이는 매매를 성사시키는 겁니다.
눈에 안보이는 마귀가 그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지젝은 컴퓨터가 몸으로 들어와서 가시화에서 비가시화 된다고 입는 옷 컴퓨터를 예로 들면서 신체 속으로 은폐 숨어버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비가시화 시키는 제사입니다. 그 저장창고는 결국은 자기신체 뿐입니다.(미완료를 계속 계속 만능기능을 아이템을 첨가 첨가해서 점점점 만능인이 되어 가는 겁니다. 초인 천리안 등등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비밀무기를 몸 속에 장착하는 겁니다. 이마표를 획득하기 위해서 뭔가 매매, 거래를 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벨의 제사는 몸이 처음부터 아예 찢겨집니다. 거래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방이 없는게 아니라, 상대방은 생생한데 내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그 찢겨진 몸에서 외부에서 투입된 비가시화된 인물이 나타납니다. 가시화 됩니다. 그분이 바로 인자입니다. 약속입니다. 완료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족보인 [죽었더라 족보]입니다. 자꾸 비가시화된 인물을 드러내기 위해서 퍼뜩 퍼뜩 죽어나가는 겁니다. 참 어지간히도 퍼뜩도 하다 그죠 한 사람 평균 천년 조금 못살정도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 족보를 막을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리는 족보]입니다.

한 쪽은 사고팔고 매매 거래의 족보인 지키기 족보 행하기 족보 인데 (막살면 못챙긴다 챙기자족보)

다른 한 쪽은 죽었더라 족보로써 누리는 족보입니다. 퍼뜩 죽자.(막살자 족보)
뭘 누린다는 족보입니까? 죽었더라를 누리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요? 아닙니다.
인자가 나무에 달리심을 외치는 족보다 라는 겁니다.
인자의 죽으심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잔치입니다.

인자를 먹고 마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기록된
기록된 인자입니다.

그러나 사고 파는 자는 기록된 든든한 미쁘심이 없기 때문에
시험든 겁니다.

시험든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사고 팔고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또 오해 하지 말 것은 그럼 돈도 벌지 말고 직업도 가지지 말고 그러란 말인가?
이래 말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나는 아간이 아닙니다 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성도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죽었더라 족보는 인자의 족보는 부정성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부정한 여자 5명은 남자의 족보와 족히 비교도 안되는 남자 족보의 단절성에서의, 그 차이성으로 다윗을 밀어낸 다윗을 빼내기한 족보입니다.

다윗은 아간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밀쳐내어서 빼내기한 우리야 장군 아내의 족보인 겁니다. 다윗은 죄 아래 팔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가 충만하게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겁니다. 다윗에게 접붙인 당한 것이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야 아내에게 다윗이 죽은자로써 접붙임 당한 겁니다.

(마 1:3, 개역)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5, 개역)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개역)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16, 개역)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4배나 갚으라는 매매 결혼 또는 남녀관계를 추구하는 율법적 다윗을 깨뜨리고
인자로써 여성성 에게서 인자를 생산하는 겁니다.
(잔치 놀이의 반대말이 권력집중이라고 철학자들이 말합니다. 매매는 힘의 축적입니다. 바벨탑쌓기입니다. 여기에 해학 놀이 장난 잔치는 비틀기로써 갈기 갈기 쪼개버리는 겁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 안 버립니다.
우짜라꼬?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갈기 갈기 쪼개버리는 겁니다. 개무시,
채널돌려버리니까 그 심각한 자기 챙기기가 자기 거래(사탄아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가 심각한 것 아무것도 없는 7천명 남겨놨지롱 이라는 멍때리기 당하는 겁니다. 이런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여성성 에게서 가 아니면 인간은 심심하면 바벨탑을 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갈기 갈기 쪼개버리는 겁니다.)

이 여성성은 선악인간으로부터 무시받는 부정성입니다.
죽은자 취급 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죽은자 같으나 산자로써 인자의 세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비록 죽은자 취급 당해도 말입니다.

이 죽은자 취급 당함이 바로 찌끄레기. 도살할 양같이 여김받는. 세상 미말에 둔 구경꺼리, 놀림깜, 조롱깜, 등등으로 표현된

상대적인 존재를 드러내는 의미입니다. 조롱하는 자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것이 언뜻 보기에 조롱당하는 자가 밀려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조롱하는 자가 누군가와 매매하고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임을

인자는 들추어내는 겁니다. 비가시화 된 마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미끼로써 인자와 인자 스스로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 비밀을 저들에게서는 아무리 공개되어도 비밀이고
우리에게는 비밀이어도 공개된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간격을 쭉쭉 벌려버리는 겁니다. 어떤 누구도 좁힐수 없도록 3가지 물증을 담아버립니다. 그리고 그 3일이라는 공간에서 그 빈자리에서 그 광야에서 그 십자가에서 인자를 생산합니다.

인자가 태어남으로써 온 세상이 피의 축제로써 피 범벅이 되는
피 잔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록된 인자입니다.

완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흡하고 모호하고 의문이기에 인간은 매매를 합니다.
요셉이 완료로 보인다면 절대로 부정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은30량에 팔 리가 없습니다.

든든한 미쁨이 아니라 불안해서 그 불안요소를 유익꺼리(소유)와 매매해서 팔아버리는 겁니다.

위험스러운 것을 팔아서 안정감으로 개방성이라는 자유무역으로 성취하는 겁니다.

매매하는 인간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으리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매매 한 적이 없는데 우리는 매매, 거래, 주고 받기 라는 선악의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을 추구할려고 악을 팔아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선함 보다 더 선한 놈을 이기기 위해서 더 더 선함을 추구하고자 악과 손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로마와 손잡을 수 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과연 유대인만 그럴까요? 우리는 매일 매일 매 순간 수시로 그런 짖을 밥먹듯이 즉 매매하듯이 합니다. 그것도 기도로 말입니다. 날 살려주시면 내가 주님께 뭐 뭐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거래하는 몸

이런 선악의 몸을 만든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뻔 한 몸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기록된대로 가는 몸으로써
다윗을 그 선악의 몸인 다윗을 교체시키고자 기도 금식 회개를 가로막아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겁니다. 3가지 도저히 좁힐수 없는 간격을 벌리면서 말입니다.
즉 3명의 죽음입니다. 그 어떤 죄책감도 넘어설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 죄책감이 거짓입니다. 도저히 이겨낼수 없는 죄책감을 주님이 삭제시키고자 넘어오심입니다. 3일의 죽음의 간격은 그런 이유입니다. 십자가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막 춤춥니다. 막 노래합니다. 막먹고 막마십니다.
갑자기 뚱딴지 같이 잔치를 벌립니다. 잔치 페스티발

나의 회개 나의 눈물 나의 금식 나의 기도 그 어떤것으로도 그 3초의 죽음을 좁힐수 없다는 것이 도리어 기뻐서 감사해서 감격스러워서 춤춥니다.

매매 종식, 거래 종식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과의 거래 매매는 배제 누락 됩니다.

그리고 받아 먹으라 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시라 하십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라고 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매매하고 거래하듯이 사고 팔고 하는 세계의 모호한 의문의 미흡한 세계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는 완료된 세계 곧 페스티발 축제 잔치에

그 언약의 피 잔치를 우리는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써 누리는 겁니다.


내가 나를 더 이상 챙길 필요가 없어서 더 이상 매매하거나 거래할 필요가 없는

인자의 세계에

예수님은 한 쪽은 충만함(완료)으로 인해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인자의 세계를

다른 한 쪽인 선악의 세계 즉 매매의 세계, 행함의 세계와 대조시키면서

기록된 인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거부해도 소용없습니다. 기록된 대로 인자의 세계는 충만 증식 정복 다스리스고

행함의 세계는 쫏겨나며 울며 이빨을 갈게 되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응하게 되는 겁니다.

(마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주님 감사합니다. 그 기록된 대로 응하셨듯이
그 응함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