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0. 매일 매일 들이닥치는 피 잔치(유월절 축제)

매일 펑 펑 펑 터지는 피 용서 잔치 (넘어오시는 사랑 : 간격벌리기 꼬끼오 3)

2011년 10월 8일 토요일 오전 10:44:49  김대식


(막 14:27,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막 14:28, 개역)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9, 개역)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막 14:3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막 14:31, 개역)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잔치란 완료성입니다.
그 완료성을 인간들은 쳐다보기를 싫어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의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서서
늘 죄의 소원을 넘어설려고 신체를 법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오로지 신이 되어 버린 자기 신체에만 미쳐있습니다. 갇혀버렸습니다.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는 이들의 허상들을 깨뜨립니다. 그 신체를 쳐 버립니다.
가짜 하나님이 날라가 버립니다.
선 이고 팠는데, 악 일 수밖에 없는 또렷한 현실을
그들은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피 잔치를 통해서
더욱더 또렷한 현실로써 부인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장대 높이 달린 그 인자를 얼마나 쳐다보기를 싫어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완료성을 철저하게 차이내기 간격두기로써
자신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선악의 모호함 흐릿함 의문성을 더더욱 거짓임을 드러내기 위해
완료된 것에 상대적인 철저한 폐허로 종말로 심판으로 몰아가는 것이 인자의 주 되심 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면 둘수록 그 폐허의 상실감은 커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두면 둘수록 그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지는 현장을
잔치 속의 폭죽처럼 불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하늘의 소망을 두는 자는 없습니다. 땅의 소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이상 하늘을 쳐다볼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긴자만이 보게되는 것이지 자력으로 볼 자는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인해 곧은 목을 꺽으심으로써 보게될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증거궤에 원망만 담길 뿐입니다.)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은 그 현장이 종말의 장소가 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같은 현장이라도 아름다운 잔치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일 매일 덮쳐오는 유월절 잔치입니다.
피 잔치입니다.
피의 불꽃놀이 파티 화~~리 페스티발 축제입니다.
깜깜한 검은 하늘에 불꽃하나가 피융하고 쏟구쳐 올라갈 때 뻥 하는 소리에
화나비 Hanabi 花火 불나비가 피어납니다.
누구에게는 소음이요 전쟁의 대포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비로소 박수 소리가 고용한 밤하늘의 화나비에 화답을 하듯이
우와 우와 라고 할 말을 잊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 검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생명의 빛처럼
검은 도화지에 흰색의 구멍을 뚫는 것처럼

이제 인자 자체가 그 구멍을 뻥뻥 뚫는 자로써
원수의 문을 벌컥 벌컥 열어재끼는 자로써

임계점을 찍습니다.

생명의 피는 무한질주로써 분절에 분절을 거듭하기에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 흐름을 하늘을 날라 오르는 요술 양탄자에 몸을 실 듯이 맡길뿐입니다.
그 흐름의 소용돌이에 다이나믹한 스릴을 느낄 뿐이지
사적인 개인의 스토리 신화는 아무 의미없이 사라집니다.
의문덩어리는 이제 없습니다.

피가 피로 몰입케 하는 그 구멍에 그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홀로코스트를 탈 뿐입니다.

매일 매일 덮쳐오는 피 잔치를 누릴 뿐입니다.

피가 피 되게 하는 그 십자가의 영광에 온 몸을 뻥뻥 구멍이 뚫혀버림을 누릴 뿐입니다.

땅은 강퍅으로 가득합니다.
이 유월절 잔치를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는
마르다처럼 여러 가지 일로 바쁩니다.
싸가지 없는 마리아는 말씀을 먹고 마시는데 정신없습니다.

잡족 히브리인들을 죽이기에 애굽왕 바로는 분주하게 바쁩니다.
반면에 언약의 백성은 유월절 잔치의 어린양 살과 피를 뜯어 먹고 마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두 살 밑으로 죽이기 바쁩니다.
반면에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는 시므온의 노래가 흘러넘칩니다.

마치 비언약(미흡함)은 완료에게 팔아넘기듯이 이 땅에서 발모가지를 짤라서
그 어떤 영역의 소욕도 못 소유하도록 쫏아내는 방식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위해 서로 서로가 팔아넘깁니다. 어차피 먼저 팔린자의 뒤를 따라 팔려야 할 판국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팔아넘긴 사도바울은 뒤따라 스데반이 간 예수님의 길로 팔려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발판이 되어서 이 땅을 유유하게 떠나는 나그네처럼
벤또(도시락) 옆구리에 차고(되새김질), 지팡이 짚고(뛰는 뒷다리, 나그네, 왕이 없는데 왕이 있는 듯이 행동하는), 허리에 띠 띠고(갈라진 발굽, 신체에 땅과의 분리성이 담겨진)
누군가가 시킨것도 아닌데 마치 임금이 있는냥 대광경의 군무를 이루며 떠나는 메뚜기처럼
이 땅의 머리를 무시하듯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임금을 향해 뒷다리 힘차게 뛰어
놀리는냥 너거들 머리 가짜지롱이라는 약올리는 식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잠행자처럼 사라집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단절성의 극대화 입니다. 무조건 열매 맺는 주님쪽에서 건너오심과 즉 3일 간격벌리기와
정반대로 한가지도 3가지 충족 요건에 모자라는 길가에 가시밭에 돌짝밭에 뿌려짐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길가는 마귀로 부터의 잠식상태이니 출애굽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유월절 어린양을 먹을 이유. 쳐다볼 이유가.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돌밭은 출애굽했으나 뿌리는 내릴수가 없습니다. 잠시 기뻐했지만 환란이나 근심이 넘어뜨립니다. 원망으로 몰아가는 그 하나님에게 시험듭니다. 즉 매일 매일 외부에게 공급해 주는 벤또가, 긍휼이, 용서가 없습니다. 가시밭은 세상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혀 그 기운을 빼앗겨 버립니다. 허리에 띠 띠우는 분리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떠날 마음이 없이 정체되어 버립니다. 이 땅이 더 좋기 때문에 주님이 벌려놓은 3일이라는 간격벌리기에 막혀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은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으로 무조건 열매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피가 벌리는 잔치로써 이 땅에 흔적을 남기는 십자가 입니다. 곧 예수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벌리는 잔치입니다. 십자가의 죽음만을 앞장세우시는 주 되심입니다.)

뭐야 뭐야 뭐가 지나간 거야? 라고 땅에는 바람이 지나간 흔적만을 남기고 또 다시 새로운 판대기로써 또 매일 매일 피잔치의 어린양 파티축제인 마당놀이 판을 벌립니다. 땅은 이 피 잔치의 독무대에 하루도 쉴 틈이 없습니다.

하루도 피가 마를새가 없습니다. 무한 리필이요 무한공급입니다.
온 대지는 이 인자의 생명의 피에 정복당하고 다스림을 받고 충만케 됩니다.

구석 구석 빈틈없이 촘촘하게 빽빽하게 막힘없이 그 어린양의 피로써 충만합니다.

하늘에는 하나비의 불꽃놀이로 샛별이 만개하여 수를 놓듯
펑 펑 구멍뚫듯이 점을 찍듯이 반짝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영광스런 나비로 샛별이 떳고

땅에는 십자가의 피로 흥건히 촉촉이 살며시 구석 구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빠뜨리지 않고 충만하게 스며듭니다. 모든 어두움은 내어 쫏겨나고. 죄는 말갛게 씻겨집니다.

(눅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오늘 본문에 너희는 다 나를 버린다 라고 유월절 잔칫날에 떡과 포도주
즉 인자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이런 말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가룟유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모두 다 나를 버린다 라고 모두 다 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즉 제자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취소 될 수 있는 말씀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이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말씀에 기록된 바 대로 말씀하시고
기록된 바 대로만 행동하십니다.

여기에 인간만은 말씀에 무관하게 개인적인 의견을 나열하게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바가 아니기 때문에 그 차이로
기록되지 않은 바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말씀에 기록된 바는 더욱더 또렷해 집니다.

왜 인간의 공통적인 의견은 무시하는 것일까요?

너희는 모두 다 나를 버린다.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이 흩어지리라를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리라 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두 점을 찍기 위함입니다. 누구 보란 듯이 바로 마귀 보란 듯이 입니다.
지금 주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합니다. 인간 상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락이요 배제입니다.

마귀 보란 듯이 두 점을 찍기 위함입니다.
목자를 치는 지점 곧 목자를 침으로써 양들이 흩어지는 지점을 찍고
그리고 내가 다시 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리라 라는 갈릴리 점을 찍는 겁니다.

이 간격을 벌려 놓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3일이라는 간격을 벌리듯이 십자가는 어떤 누구도 이 간격을 좁힐수 없도록 한다는 겁니다.

어제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일만달란트 빚진자 4조 몇천억원을 빚진자가 임금으로부터 탕감을 받습니다.
16만년을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보통 중간층 평균치 인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탕감으로써 일만달란트 탕감으로써 용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가 도리어 앞의 이야기를 뒤엎어버리는 전복이 일어납니다. 역전이죠.
일부러 눈앞에 백데나리온 1데다리온을 7만원으로 잡으면 7백만원 입니다.
향유 깨뜨린 여인은 삼백데나리온이니 2천만원 정도를 땅에 한순간 몇초 3초만에 다 허무하게 땅바닥에 쏟아버린다. 결국 둘다 나름대로 큰 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4조억원에 비하면 세발에 피입니다.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하필이면 바로 코앞에 눈앞에 일부러 내 돈 띠먹고 달아난 7백만원 도둑놈을 만나서 잡습니다.
과연 그 내 돈 띠 먹고 달아난 놈 앞에서 나 있잖아 4조억원 탕감 받았데이 너 4조원 탕감받은적 없지? 나 봐 용서 받았잖아 라고 마치 자신의 수치를 그대로 노출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탕감한 임금이 바로 자작극으로써 내 돈 띠먹고 달아난 자 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4조 몇천억 원의 탕감을 도대체 누가 일방적으로 해놓고서는 동시에 그 탕감의 용서를 누가 날려버리는 것일까요? (이 간격을 무슨 수로 좁히겠습니까? 시아버지 유다가 아니면 요셉의 수수께끼는 풀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내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너는 나 보다 옳도다 라는 사랑 말입니다. 인간 사랑 말고요 주님께서 부정한 3가지로 잡은 그 사랑의 열매 말입니다. 그거 아니면 패쓰 안 됩니다.)

십자가의 용서로 죽음의 점을 찍고 3일의 간격을 벌려서 다시 되살아나는 부활의 생명의 점을 찍었을 때

어떤 누가 그것을 딴 종교에서 말하는 희생과 용서와 자비의 사랑
그리고 부활의 생명을 믿듯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두 점 찍기를 같은 식으로 믿을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것이 바로 욥에게 나타난 여호와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부요함을 줘서 복받아서 잘 믿도록 해 줘 놓고서는
그 부요함과 복을 한순간에 다 날려버리는 또 다른 하나님을 줬다고

그래서 세친구들은 그 앞의 엘로힘 하나님 입장에서 욥을 다구칠때에
욥에게는 딴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을 새로 만나는 입장에서 엘로힘 하나님을 날려버림 당하는 주께서 내 주께를 격게 된다고
그래서 나는 매일 가짜입니다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완료의 하나님 곧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서 재를 뒤짚어 씌고 머리를 쳐박고 그 완료 앞에서 입을 막아버린다고

이것이 엘로힘 하나님에게서 빼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믿는 하나님을
개같은 이방인 여자인 다말이 믿는 하나님이 쳐 버리는 식입니다.

두 하나님의 충돌입니다.
선악의 하나님을 생명나무의 하나님이 쳐 버리는 식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인자의 의미입니다.
쌍둥이 개념이 인자 라고 했습니다.

쌍둥이란 분절의 의미입니다. 갈라진다 라는 겁니다.
분명 이삭은 쌍둥이 두 아들로 인해서 약속이 헷갈릴 수밖에 없지만
나름대로 분별방식을 습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명 에서에게 축복했습니다.
분명히 에서에게 축복했고 이미 완료 해 버렸습니다.
어 그런데 그 에서가 야곱이였습니다.
속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속았습니다.
속이시는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에서만 쪼다가 된 겁니다.
결국 속이신 것을 에서에게 뒤짚어 씌우는 식입니다.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고 팥죽한그릇에 판 협의를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마치 일만달란트 용서 해 놓고서는 다시 백데나리온으로 알리바이를 형성해
일만달란트의 용서를 소홀이 여겼다고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두 점을 찍어서 간격을 벌려 보니
애초부터 약속의 자식이 아니였다는 것을 이런식으로 밝혀내시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이 간격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 간격을 벌리시지 않으면
즉 두 점을 찍지 않으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점 찍고 / 다시 살아나셔서 갈릴리에 먼저 가 계심으로, 점 찍고
이 두 점의 간격사이에서 제자들의 죄악과 모든 것의 원수성이 밝혀지지 않게 되는 겁니다.

나의 원수성을 담지 못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거짓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일부러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해서 원망을 언약궤 곧 증거궤에 담지 않으면
백날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이성을 이겨야 하니까 오히려 작은 숫자의 적군을 몇배나 많은 아군의 숫자로 싸워도 이기질 못하는 겁니다.

원망을 담아야 원수성을 담아야 여리고성이라는 가나안의 최고의 성 최신의 무기 최신정예부대의 몇배나 넘는 숫자의 적군을

오로지 나팔소리로 손 하나 까딱 안하고 허물어 버릴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육의 싸움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 싸움 곧 여호와의 전쟁이지 인간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인간의 육은 아무리 약속의 땅에 살아도 이 간격벌리기를 무시하니까
도리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민족을 다름아닌 약속이 쫏아냅니다.

과연 배신 때리기 입니까?
누가 배신 한 겁니까?

누가 속인 겁니까?

인간이 속인 것을 역으로 속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밝혀낼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말이 그 물증을 잡는 겁니다. 3가지 물증 그 부정적인 물증을 잡아야
유다가 사는 겁니다. 유다가 죄인 중의 괴수임의 증거로 물증이 잡혀야
피가 발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의 뺑뺑이 간첩으로 몰아세우기에서 그 부정적인 물증에 충성함으로써 낳은 쌍둥이를 바침으로써 패쓰 넘어가는 겁니다. 심판이 말입니다.
나 이런 이런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이런 죄도 용서 받았습니다.
나 보다 더 용서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세요 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요셉이라는 애굽의 주인에게 내놓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내어 놓으라고 간첩으로 몬 겁니다. 일부러 뺑뺑이 돌린 겁니다. 안 그러면 육의 소욕을 내놓습니다. 마치 오늘날 성화론자처럼 말입니다.

간격 벌려서 부정적인 3가지 물증이 아닌 딴 것들을 육의 자랑들을 내어놓으니 지옥가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이 아닌겁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오셔서 주신 것이 바로
요셉이 내어놓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면 패쓰 못합니다.

레인보우라는 영화를 아직 못봤습니다만
그 영어 제목이 패쓰 뭐뭐 이렇게 되어 있어서
무지개 라는 뜻이 넘어가다 패쓰 지나가는 사람
(영화 레인보우 Passerby #3  신수원 감독, 박현영, 백소명 출연)
이렇게 적혀있는 겁니다.

저는 얼마전에 리만가설을 다룬 일본다큐를 봤습니다. 수학다큐인데
소수점 즉 분절이 되지 않는 것에 삘이 꼿힌 사람이 뭔가 진리가 있지 않나 싶어서 파 들어가보니 그것이 무지개의 배열과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의 배열공식은 양자학과 원자학의 공식과 같다는 우연성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이 소수점은 분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패쓰워드의 비밀번호로 사용됩니다.
카드에서 비밀번호가 다 소수로 이루어지는 이유가 이런 겁니다.
분절이 되면 비밀번호가 풀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죠.
이런 내용을 짧게 페이스 북에 올려봤습니다.
우연찮게 이 리만가설의 다큐를 보고 난 뒤에 한 참 뒤에
이 원리를 들뢰즈 철학자가 또 다루는 것을 봤습니다.

아 그래서 바닥의 바닥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뜯기가 바로 두 점을 찍는 주님의 열심히라는 겁니다.
(비언약의 사람들은 힌트 줄 것 다 주고 정작 그들은 줘도 못먹고 언약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주워 먹기만 하면 되고 참으로 누리는 것 밖에 없으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고통도 참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감사일 뿐이고 모든 것이 누리는 것 뿐입니다. 흘러 흘러 넘치는 은혜에 일방적으로 밀려나는 기쁨이니 말입니다.)

주님의 용서 라는 겁니다.

죄와 피의 만남
여기에 마귀의 고소는 속수무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 피 잔치의 자작극에 마귀는 말려들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그래서 마귀는 싫어하는 겁니다.
더 이상 좁히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고소가 밀까부듯이 초정밀조사한 율법수사가 피 앞에서는 그야말로 의문의 증서인 찢겨지는 고소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 제자들은 기록된 말씀보다
도리어 그 말씀이 이루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을 더 이상 나쁘지 않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의 해석인데 자기 쪽에서 절대로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겠다는 겁니다.
절대로 주님 안 버리겠습니다.

바로 이 선악을 허물어 뜨리지 못하면 제자들은 마귀의 고소에 넘어가는 겁니다.
주님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만을 상대로 하십니다.

제자들은 두 점을 찍지도 못할뿐더러
그 점을 다시 간격벌려서 좁히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쪽에서 주님을 사랑할려고 자기 쪽에서 다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쪽으로 넘어갈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바닥치게 만들어버립니다.
닭이 3번 울기전에 너는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 배반을 3번의 배반을 잡지 못하면
주님 쪽에서 넘어오신다는 알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님을 삼킨다는 말을 알리가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 대로만 되지
자신들의 으싸 으싸 힘씀으로써 되는게 아닙니다.
마귀도 사망도 못넘으면서 무슨 수로 의를 이룹니까?
차라리 빨리 바닥치라 라는 겁니다.
오히려 도저히 못넘어오도록 정반대의 극으로 치닫는 3번 저주의 원망을 들통나서 법궤에 담겨짐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즉 흘리시는 피 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으로써는 그 죄책감을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넘어오시는 겁니다.
선악을 죄의 소원을 인간은 못 넘어섭니다. 설사 그럴 리가 없지만
자기 착각에 오늘 넘어섰다고 착각해도 내일 되면 바로 무너지는 겁니다.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무슨 수로 이룰려고 합니까?
이루면 바로 육의 자랑만 나와서 그렇지 못한 사람의 기를 팍팍 죽여버리는데?
그래서 일부러 눈앞에 바로 코앞에 내 돈 띠먹고 도망친 도둑놈을 지나가도록 한 겁니다.
그래서 패쓰 비밀을 못풀도록 하는 겁니다. 용서란 인간에게서 풀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서 자체로써 용서 스스로가 빛을 빛나게 하는 겁니다.
용서 받는 인간은 이 용서의 가치를 빛낼수가 없습니다.
용서 스스로가 넘어오심만이 용서의 가치가 빛나는 겁니다.

그래서 닭 울기 전에 3번 너는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신 겁니다.
아예 너는 나에게 넘어오질 말라고 바리케이트를 치고서
내가 너에게 넘어가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간격벌리가가 아니면 내 사랑에 빠지지
주님의 사랑을 알 리가 없습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은 주님께 있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넘어오시는 사랑에만 소망둘 뿐입니다. 이것이 매일 매일 지적 받는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생아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 불태워서 사랑을 맹글어냅니다.

오늘 라인 업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디를 가나 또 유월절 피 잔치 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매일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 유태인이 죽어나가는 프랑스 영화입니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에 이런 영화가 자주 나오지만
정작 제가 보기에는 절대 절대 주님은 유월절 피 잔치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손에 이 잔치를 맡기지도 않고 말입니다.

오히려 작년에 이런 영화를 봤습니다.
페이트리스 Fateless, 2005
쉰들러 리스트 보다 훨씬 명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딴사람들의 평가는 별로다 라는 식이지만 저는 오히려 쉰들러 보다 더 낫다고 봤습니다. 보고 난 뒤에 노마니즘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이 영화를 다시금 떠 올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청소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활을 다루었는데 문제는 그것 조차도 이 청소년에게는 별거 아니다 라는 겁니다. 심각했냐? 물론 그 순간은 심각했지만 지나가는 것 보니 그것도 뭐 크게 큰 심각한 일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반대로 쉰들러 리스트는 전세계에 죄책감을 형성하는듯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우와 이게 진짜 명작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간격벌리기를 실제상황으로 현실로 실시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만이 현실입니다.
십자가를 인간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버린 기독교 성화론자나 개혁주의는 거짓이고
오히려 반대로 십자가가 인간의 대상으로 삼아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방식이
매일 매일 현실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꽁꽁 숨기고자 하는 그 원수성을 파고 파고 캐고 캐내는 그 일을
십자가는 기여이 나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 부정한 3가지 물증을 언약궤에 담고자 함입니다.
누구 보란 듯이 ?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에수님은 울어대십니다.

그것이 바로 피 잔치로써 매일 매일 펑펑 터트리시는 겁니다.
매일 매일 아우츠수용소로 어린아이들이 잡혀들어가는 유월절 잔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 어린양이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악을 들통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수치를 물러가도록 피를 바르는 겁니다.

선악의 인간은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소홀히 여깁니다.
우리 또한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체 양보 없습니다. 멈추지도 쉬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기여이 인자는 선악에서 빼내심으로써
마귀의 고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출애굽은 이미 완료로써 확장되고 있습니다.
지옥 탈출은 이 선악탈출은 은혜의 넉넉함 때문에 목베인영혼의 피잔치로써
실제상황으로써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넉넉한 사랑의 승리이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의 피 잔치는 매일 매일 하나비처럼 펑펑 불꽃놀이 잔치로써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주님 주님이 벌리신 이 피 잔치에 우리들의 초청해 주시고
이 피옷을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심으로써 지옥과의 간격을 벌려주시는 그 은혜를 감사하게 하소서

왜 선악과의 차이가 나는 십자가의 피 인지?

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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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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