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준비 하세요 | 믿음의 글
 
박윤진 | 조회 22 |추천 0 |2011.09.27. 12:49

http://cafe.daum.net/holyyounger/EodA/137
 

저녁을 먹던 중, 큰 딸 아이가 다소 침통한 낯빛을 한 채 무거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빠...... 죽을 준비 하세요...”

그 순간 저녁을 함께 먹던 식구들의 표정은 잿빛으로 변했고, 나와 아내는 어리둥절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서로의 껌뻑이는 눈만 바라보았다.

이내, 큰 딸은 방긋 환희 웃으며 농담을 마무리 지었다.

“저는, 밥을 준비할께요^^”


죽을 준비하라는 말이 식탁위를 점령한 3초 혹은 영원한 시간 동안 나의 새까만 의식세계 속에는 3가지 정도의 개념들의 혜성처럼 출현했다가, 서로 충돌해서 화산재처럼 쌓였다.

제일 먼저 나타났던 혜성은 윤리였다. 죽을 준비라는 말은 딸이 아빠에게 직접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된 아이가 이제 막 마흔 살이 된 청년같은 아빠에게 말이다. 회사원에게 저녁시간이란 쓰디 쓴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은 즉후와 같다. 싫은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이제 좋은 것으로 넘어간 시간이다. 그 순간 딸이 죽을 준비를 하라니? 세상에서 가장 싫은 단어를 가장 달콤한 순간에 내 뱉다니! 밥이라는 단어가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면 난 아이에게 윤리가 부여해 준 권위로 한바탕 혼쭐을 내줄뻔 했다. 내 인내심의 한계가 바닥나기 전(3초) 밥이란 단어가 정말 맛있게 속에 들어 앉았다. 덕분에 나는 그 밥힘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농담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사실 그날 저녁이었던 국수는 내 눈에는 이미 철사처럼 변해 있었지만 말이다.

두 번째 생각났던 것은 나의 죽음 뒤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건강보험 가입자 중 65세 이상 노인인구수가 500만명이 넘었다는 기사를 1면 톱기사로 다룬 적이 있다. “오래 오래 사세요”라는 인사가 더 이상 덕담이 아닌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조심스로운 전망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노후조차 책임질 수 없다는 생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초등학생 아이 셋을 남겨두고 지금부터 죽을 준비를 하기에는 내 연봉이 너무도 적다. 한 아이에게 몰아주어도 많지 않은 교육비를 셋이서 나눠쓰고 있는데, 내 딸아 아빠가 죽어 버리면 너희들은 어떻게 하니? 도대체 넌 아빠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 알기는 아니? 무슨 생각으로 죽음을 입 밖으로 내 뱉었니? 갑자기 서러웠다. 그 짧은 순간 난 화를 냈다가 살짝 울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감정보다 더 간사한 것이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생각났지만 가장 길게 여운을 남긴 것은 성도라는 개념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타향살이요, 나는 나그네라서 늘 내 하늘 본향으로 돌아갈 날만 소망한다던 그 성도말이다. 십자가 피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던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던 그 성도말이다. 그 성도를 아무리 정교히 표현했더라도 죽을 준비를 하라는 직접적 육성에는 아멘이 되지 않더라. 죽음의 활화산이 폭발하니 세상윤리와 생계 걱정이라는 쓰레기만 쌓이고 쌓이더라. 성도는 내 속에 누울 자리가 없었다. 나는 성도가 아니었다. 성도는 죽음 속에서 그렇게 유쾌하게 웃지 못했다. 살기위해 음식이름 죽을 준비하라고 알아듣고서야 껄껄 웃더라.

한바탕 죽음의 소용돌이가 뇌 속을 처참히 만들고 난 후 십자가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진리, 사도바울이 고집불통처럼 융통성 없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지심만을 알기로 작정했다는 진리, 그리고 철저히 가두어 두심만이 긍휼하심을 뿜어낸다는 진리가 나의 존재와는 전혀 상관없이, 너무도 잘 이 세상에 적용되고 있기에 기쁘고, 또 기뻤다.

댓글 4

김대식 11.09.27. 23:21

하하하 아이가 완료된 미래를 3초 선물해 주네요
진짜 복된 소리를 던졌는데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사람흉내내는 인간은 어쩔수가 없네요.

들켰네 들켰어 ㅋㅋㅋㅋ  


박윤진 11.09.28. 09:59

매일 현행범으로 들키면서 살면서도 안 그런 척... 참 힘들고 한 숨 나오더라구요... 있지도 않은 자가 고생이 많지요?^^


김대식 11.09.28. 10:59

무슨 말씀을!!! 고생은 믄 고생! ㅋㅋㅋㅋ

주의 목전(눈 앞에서)에서 항상 범죄하는 자 임을 들키는 것을

다윗은 비로소 행복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뭘(롬4장)

오히려 안들키는 것이 불행이요
가장 거룩한 행위로 자신을 자기 스스로가 가리는 것이 비거룩 즉 저주인걸요

발가벗겨버리는(할례) 이삭(약속) 같은 아이야 말로 십자가(정죄)가 약속이 준 선물이지요.

모든 것이 선물 아닌 것이 없네요.

부정적인 도구인 마귀도 그런 이유로 활동 할수 밖에 없으니 우리는 은혜에 포로된 자들 입니다.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정말로 벗어날수 없단 말인가? ㅋㅋㅋㅋ

(롬 4:6) ..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박윤진 11.09.28. 11:36

아 그렇군요...고생이 아니라 행복이네요. 제 뇌 속에 진치고 있는 행복과 꼭 반대말 같은 행복!!!


----------------

이능우 (IP:203.♡.124.203) 11-09-28 12:58  

주님은 한시도 인간을 죄 가운데서 풀어 놓은 적이 없군요.
인간의 생각과 삶과는 전혀 관계없이 주님 홀로 일하시고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긍휼로 말미암아 자기백성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차후적으로 성령을 통해 알게 하시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생각과 삶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는 죄를 어떤 형태로든 들통나게 하시는 같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없는 가운데서도 어떤 사건을 일으켜 수시로 자신 속에 들어있는 죄를 들추어 내어 고백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의 사랑인가 봅니다.
주를 위해 살라고 하시지만 날마다 자신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죄인.
저주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긍휼과 죄 사함의 용서로 다가오시는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그저 감사 할 것밖에 없습니다.
 

김대식 (IP:124.♡.86.13) 11-09-28 14:11  

3초를 영원으로부터 보호하라

약자로부터 강자를 보호하라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불교의 위대한 점은 더 이상 죄를 추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죄 죄 죄 카지 말라. 신과의 거리는 이제 없다. 하나 되었다. 일치성이다. 라고 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가 불교랑 똑같이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매일 매일 주의 목전에서 항상 죄를 발각당합니다.

이것을 다윗은 행복이라고 했고,
믿음이라고(할례=십자가)라고, 의 (외부에서 발가벗기는 거룩의 덮침) 이라고

행함(스스로 죄를 가리기 위해 손할례를 행하는 거룩에 접속을 시도하는 개방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증거합니다.
(불교는 발각당할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뭔지 모릅니다. 사생아 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매일 항상 매 순간 순간 그리스도의 죽음과 곧 십자가가와 즉 피와 맞딱드리게 됩니다.
간섭이요 매요 사생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회초리입니다. 독립이 불가능 합니다.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여디디야는 주님께서 넘어오신 겁니다.
인간이 이룬 사랑이 아닙니다. 독립성이 아닙니다. 개방성이 아닙니다.

(히 12:1, 개역)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2, 개역)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개역)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4, 개역)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5, 개역)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개역)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7, 개역)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니체는 신의 죽음을, 신의 자살을 언급하면서
특이성(부정성 단절성)을 보편성(개방성)으로부터 차이낼려고 합니다.

그래서 강자(특이성=젖먹이 보다 강한자는 없다)를 반대인 약자 노예(다 똑같다. 여러 과부 중에 한 과부, 이스라엘 여러 문둥이 중에 이방 수리아 사람 한 문둥이 나아만 장군 이라는 죄인 중의 괴수 곧 차단이라는 거룩은 무슨 개뿔 다 똑같지 뭐, 여호와가 누구관데?)로부터 보호하라고 주장합니다.

3초를 진짜 시간적인 공간적인 역사로 숫자로 보는 자가 비웃던데
우발성을 표현한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흡집내는 강자의 출현 곧 그리스도의 죽음인 십자가가 그 흡집이 난 틈 사이에서 스스로를 영광되게 하기 위한 간섭이요 매입니다. 즉 비웃음을 유발하는 고정성(필연:일치)에 고착된 자들로부터 반드시 싫어버린바 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십자가가 바로 3초 라는 겁니다. 3초를 영원으로부터 보호하라 ㅋㅋㅋ

막산다 라는 죄인 중의 괴수 라는 의미 곧 잃어버림의 의미는 실천가능하거나 행할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막살지 않겠다는 사생아의 독립성에 반대되는 처음부터 마련한 그 빈자리 곧 십자가의 죽음이 배태시킨 부정의 부정을 즉 음부의 권세가(부정) 이기지 못하는(부정) 교회를 두고 말합니다.(집단적 부정성 판대기)

이것을 사랑이라고 사생아가 아닌 증거라고 하는 겁니다.

자녀는 이 매를, 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 십자가를 안 외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비록 벙어리요 소경이요 문둥병자요 창녀요 세리 매국노요 죄인 중의 괴수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젖먹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9-28 15:02  

나사로 장례식장(요 11장) 따로 없군요 자아의 무게가 그토록 무겁다는 것을 알고 놀랐군요. 십자가는 늘 추상이 되어 달아나고, 눈 앞에 전개되는 가족의 저녁 식사는 달아난 십자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나를 믿는 자는 죽이 되어도 살겠고"


오용익 (IP:183.♡.212.7) 11-09-28 16:51  

감사합니다.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저녁식탁의 찰나를 순간포착 한 사진 한장,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아빠, 죽을 준비 하세요. 저는 관을 준비할게요.'
 
 
김영완 (IP:125.♡.245.62) 11-09-28 19:40  

제목의 낚시질...좋은? 내용에 어떻게 제목을 다느냐...중요하지 않을까? 제목도 막달기?
 
 
구득영 (IP:203.♡.97.243) 11-09-28 22:39  

어휴, 김영완님의 글을 읽고 나서야 바로소, ㅋㅋ
요즘 제게 화두는 '죽음도 과정이다' 인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죽을 준비하세요 !!
 
 
김영완 (IP:182.♡.99.217) 11-09-28 23:26 
 
요즘 불신자들과 뒤섞여 예배와? 성경공부를 함니다. 기막히게도 가끔 초롱초롱 또는 신기한듯 쳐다보는 모습에 저또한 놀라며...쫒겨 나는게? 두려워...도저히 먹혀들지 않을것 같은 복음의 낯설음에...그동안 저는 또 앞으로 행복한 고민을 하겠구나...생각됨니다.
 
 
김대식 (IP:124.♡.86.13) 11-09-28 23:32  

[나사로 장례식장] 이라는 표현을 보고 다시금 생각해 봤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의 진리요 길이요 생명되심 때문에
일부러 3일(3초)을 지체 합니다. 반드시 죽여버리는 겁니다. 개방이 아니라 단절입니다.
철저한 거리두기, 간격벌리기입니다. 어떤 인간도 좁힐수 없도록, 봉합할수 없도록 ...

인간의 길, 인간의 신앙, 인간의 십자가, 인간의 믿음, 인간의 행함, 인간의 진리추구 등등 모조리 차단해 버리는 겁니다.

간격 벌리기죠

그러나 인간의 부활신앙(개방성)인 간격좁히기의 보편성을 알아달라 먹혀들게 해달라고 때스면서 웁니다.

너가 나사로 사랑했다메? 동네사람들의 비아냥이 하늘을 찌를듯함과 동시에
그 울부짖음도 하늘을 찌르듯이 분노로 가득합니다.

그 우는 모습에 쪽팔려서 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간격벌리기인데(즉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들이대기 인데)
인간의 모든 종교의 부활은 보편성을 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자신의 몸의 일치를 접속시도합니다.

그래서 단절입니다.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매 달아 못박아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참사랑인데,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인데

십자가의 개방성이 일치성이 보편성이 참사랑이라고 하니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힙니다.

강자(미래 완료 =다 이루셨다) 이기 때문에 거리를 둡니다. 입을 닫아버립니다.
철저한 단절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배척이요 소외요 배제입니다. 버리심 입니다.

그러나 약자 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주장합니다.
너나 나나 뭐가 다를게 있냐고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개방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 어떤 선택이든 예정이든 자기자신을 일단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단절성은 있을 수 없지요.

바로 그런 보편성의 부활을 깨는 부활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부활입니다.

부활이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믿음이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맨날 국어문법에 틀렸다고 따지는 자들을 주님이 세울정도인데?
이레(안식)가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7이라는 숫자 날짜 요일이 무슨 인물이 됩니까?
십일조가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허리가 무슨 십일조가 되며 십의 일이 무슨 인물인가?
제사가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제사는 행위인데?
성전이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성전은 건물인데? 물건 인데. 사물인데.
길이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땅 바닥에 선을 그은 것처럼 사람들이 걷는 길인데?
문이 어떻게 인물이 됩니까? 들락날락하는 손으로 여닫는 문짝인데?
생명이 어떻게? 진리가 어떻게 인물이 되는 겁니까?

무조건 인간을 단절시키고 배제 소외 차단 시키겠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에 맞는 언어를 단절시키고 인간 외에 다른 딴 몸에 맞는 언어로 쳐들어와서 움직이는 언어가 되니 포착되는 언어가 될수 없고 의미를 부여할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없는 언어
혼과 영과 관절을 쪼갠다는 언어 이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그 언어가 인물이 되었다고 하니 더욱더 기가막히는 노릇입니다.

그 철저한 단절이 아니면

주님 께서 넘어 오심을 알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주께로 가는 행함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쪽에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까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막산자, 잃어버린자, 죄인 중의 괴수)
처음자리요 빈자리로써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미끄러지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미끄러짐을 당하는 그 굴욕 그 발가벗겨짐의 구경꺼리 됨이
육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에서 나온 죄인 찾기입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 만이
거룩이라는 두 패로 나누어짐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바로 창조가 실제상황으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허걱 거리면서 입이 열 개라도 말문이 막혀버리는
재를 뒤짚어 쓰고 머리를 쳐박고
쥐 소리 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잠잠케 되는
(영광을 봐 버렸기에 죽어도 할 말 없는)

간격벌리기가 (막살기 :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와 아세라선지자가 근육운동으로 또 개방성으로 더 크게 부르짖고 더 많이 기도할 때 엘리야는 일부러 물 뿌리는 막살기를 펼칩니다. 일부러 반대로 말입니다. 마치 똥물에 몸을 씻는 나아만 장군처럼 7번 씻기가 개방성이 아니라 단절성이라니?)

바로 그 참혹한 십자가의 저주의 죽음이니

감히 누가 입을 띨 수가 있겠습니까?

그 3초 라는 십자가를 ,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원하게 하는 예수님이 부활이심이

3초라는 십자가를 무시하고 십자가 플러스 부활이라는 접속을 꿈꾸는 보편적인 너의 부활이나 나의 부활이나 그게 그거다 별차이 없다 라는 그 부활의 차이없음을

쭉 쭉 간격벌리기로써
죽음을 삽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인간들의 부활신앙을 외면하고 죽어야만 했던 겁니다.

인간의 부활(간격좁히기-차이안내기)을 깨지 못하는 부활은 가짜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부활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개방성을 찢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부활(간격벌리기-차이내기)이, 십자가(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더 앞장세우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봉합술의 부활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봉합되지 않도록 도살장에 끌려가는 죽이시기로 작정된 미말에 쓰레기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 부활되신 예수님의 취지입니다.

마침 오늘 니체가 말하는 부활 개념이 인간의 보편성 즉 다를게 없다는 차이없음 개방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는 부분을 살펴 보다가
(강자는 거리를 두고 차이성을 나타냄 그리고 말이 없음 침묵,
그러나 약자는 보편성으로 차이없음을 차이없애기를 주장. 예수 너나 나 인간이나 별 다를바 없다. 그리고 가위 바위 보 제비뽑기로 나눠먹는 보상의 정의(최대한의 공평한 분배)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활관입니다. 나사로 빼고 나사로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다 이러합니다. 마치 개죽음 당한 아벨 빼고 가인은 이마표 받듯이 말이죠. 그 보편성 부활이 가득한 그 속에서 나사로를 빼내기 하신 겁니다. 차이내기 하신 겁니다.)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마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막 15:3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마 27:35, 개역)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막 15:24, 개역)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요 19:24, 개역)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 댓글 (나사로 장례식장) 을 보니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아래 주소에서 제일 끝 01을 02로 숫자 바꿔 가면서 14강까지 읽어보시면 됩니다.
니체의 사랑관 입니다.

http://www.artnstudy.com/PLecture_new/bkko01/01.htm

물론 니체는 십자가를 모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자도 이런 고민을 했으니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