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 되심 - 인자의 주 되심과 인자 생산 (잠행자 : 포착불가능한 해석불가능한 자 만들기 = 새피조물)

(요 1:51, 개역)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12:2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34, 개역)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요 13:31, 개역)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람 같은 이 곧 인자는 사람이다는 말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는 말인가?
사람이 아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닌데도 사람 같은 이로써 등장하게 된다면 누가 위기 의식을 느끼는 고 하니 바로 사람이라고 우기는 인간이 위기의식을 느낀다.

하늘에서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식 하늘 자녀 행세하는 것이 발각나버리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이 인자를 생산한다.

마치 인자야 라고 선지자를 배치하듯이
선지자의 노선인 그 흐름으로 인자 되신 예수님이 활동하신다.

주 되신 예수님 곧 인자되신 예수님이
어떻게 주로써 활동하는가? 바로 인자로써 활동하신다.

인간이 미리 주 라고 받들어 섬기는 그 행함을 모조리 단절시키고
자신이 주의 자리를 획득하고자
직접 인간들 속에서 주의 자리를 손수 직접 마련하신다.
여기서 모든 인간들은 미끄러진다.
인자로써 주의 자리를 획득하시기 때문이다.
곧 전쟁이다. 충돌이다. 걸림돌이다. 머릿돌 되심이다.

사람들 곧 건축자들이 아무 쓸모 없다고 여긴 성전건설에서
버림받은 돌맹이가 머릿돌이 되는 방식만이 인자의 방식이다.

어머니가 오늘 이사야에 대해서 물었다.
성경을 읽다보니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라고 약속을 하더라 라고 나에게 물었다. 어느 부분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답변했다.

어머니 그렇게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말했지만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망했잖아요? 그죠? 그렇지 망했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예 가지고 놀아요 놀아
거짓말의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인자야? 라는 의미를 나누었다.
인자야 라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등 선지자들에게 인자야 라고 하신다.


이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배태된 완료된 자식들이다.

그런 완료성에서 봐 버리는 시선에서는
지금 지상에서의 이스라엘은 졸지에 거짓이 된다.

그것도 남이 아닌 이사야가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참이고
눈에 보이는 율법, 성전, 이 모든 것이 참이다 라고 남이 아닌 이사야가 말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런 지식이 없는 자들은 그저 이사야가 말한 대로만 따를 뿐이다.

그런데 졸지에 이사야가 완료성(그것이 이미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은 십자가를 미래완료적으로 이미 체험되고 그 속에서 잉태되어 탄생되어버린 바 되니)에서 인자야 라고 배출 되면서

보이는 것 족족 다 거짓으로 취급해 버리니
그렇지 못한 백성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이사야를 따르는데 있어서
졸지에 단절 차단 삭제 부재 배제 소외 걸림돌 등등의 현상을 격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인자야 라는 존재가 이사야든 예레미야든 역사 속에서 등장하게 되니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 전에는 없었던 거짓선지자들도 똑같은 양상으로써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사야 에게 임하게 되니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속에서 여호와를 봤으니 나는 죽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구나 라고

분리 = 이중분절의 분리성을 격게 되는 겁니다. 거룩입니다. 부정으로 나누워 져야 함이 마땅한 부정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자 개념이다.

그런데 제단 숯불로 인해서 부정함이 제거 당함으로써
이 인자라는 이중분절성을 외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아주 건전하고 백성만을 위하고
이스라엘만을 위하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평화와
이스라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믿는
그런 노선(흐름)을 취하고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위해 전 인생을 걸어버린

그 멀쩡한 자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졸지에 악령을 집어넣어서
거짓선지자의 활동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유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단절성인 여호와의 영광이

주님 쪽에서 이사야에게 넘어가듯이
주님 쪽에서 넘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 거짓선지자들은 자신들 쪽에서 주님 쪽으로 향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한 자를
그야말로 주님 쪽에서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들은 반드시 그 진노성을 그 강퍅성을 집어넣음으로써 일관되게 활동케 만드는 것이다.

자신들 쪽에서 주님 쪽으로 넘어갈려는 것은 가득하지만
정작 주님 쪽에서 넘어오는 것이 없다 라는 이유로

그들은 반드시 거짓선지자의 활동을 눈에 보이는 것과 매치 시킬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인자야 라는 참선지자들의 노선은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은 거부한채 이미 완료성을 띔으로써 실족케 하는 시비를 걸게 되니

참으로 희한하게 [죽음]이라는 것이 창조가 된다.
즉 살인사건이 발생하더라 라는 것이다.

이런 노선으로 두 개의 노선이 쭉쭉 영원히 갈라지듯이 갭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한 쪽은 이스라엘 망하는 것이 구원이다 라는 식으로 외치고

또 다른 한 쪽은 이스라엘은 절대로 망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보장하신 약속이다 라고 외치는 것이

두 노선이 점점점 그 선이 또렷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참선지자 말은 허황하다.
오히려 거짓선지자의 말이 참되게만 들린다.

참선지자의 말은 아예 고침이나 눈뜸이나 귀들림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 반대다.
못고치도록 못보도록 안들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거짓선지자는 당연히 50% 먹고 들어가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로 훨씬 쉽게 대중을 사로잡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또 사실 과거에도 그러한 내용이기에 전혀 낯설지가 않다. 잇기의 방식이다.

오로지 참선지자의 외침은 그 이전에 없었던 단절성의 이야기만 한다. (폐쇄성)

그러나 도저히 잇기가 불가능한 새로 믿고자 한다면 과거의 것은 모조리 부정해 버려야 하는 그 골치아프고 불가능한 수고로움을 구지 할 필요성 조차도 없는 것이다. (개방성)

몸에 배인대로 편한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설명을 했는고 하니

과거 옛날엣적의 전래동화를 예로 들었다. 인자야 라는 설명을 내 나름대로 각색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떤 양반댁 자녀 도령이 아주 못땠는데, 하인들을 그렇게 골탕 먹이는 재미로만 살고 있었다. 온 동네에 그 도령이 지나가면 다들 피할정도이니 오히려 이 도령을 그런 것을 더더욱 즐기는 것이다.

한번은 산신령이 지나가다가 이 도령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행실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서 그 도령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이유로 한번은 손톱을 깍았는데 그 손톱을 가지고서 쥐에게 먹이니 쥐가 뻥 하고서는 그 도령과 똑같이 생겼고 말투와 모든 생김새를 그대로 따라했다.
(쌍둥이 권법 = 인자)

그리고서는 그 도령이 놀러간 사이에 그 양반댁 도령의 집에 넣으니
그 도령의 행동을 반대로 하기 때문에 그 착하게 변한 도령의 마음씨에 하인들이 마음이 녹아서 그 동안 도련님을 미워했던 마음들을 다 털어 놓는 그 잉여성의 아우라의 광채에 매료 되어버렸다.

쥐가 도령으로 변한 그 가짜 도령은 그렇게 그 집에서 더 이상 하인들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잘 지내고 있는데

진짜 도령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라 자기랑 똑같이 생긴 쌍둥이 같은 녀석이 자기 행세를 하고 있어서 경찰서 관할에 재판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또는 고심 끝에 백성인 그 집 하인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물어보니
다들 갑작스럽게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가짜 도령이 진짜 도령이다 라고 변론했고

진짜 도령은 사또의 판결에 의해서 곤장을 몇 대 맞고 하옥 감옥에 쳐 넣게 된다.
(바벨론 포로로 인해 인자야 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이 비로소 옳았다는 것을 포로당함으로써 알게 된다. 결국 거짓선지자들의 달콤한 긍정적 개방성의 말들은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거짓임이 판명나고 그들은 다 사라진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인자야 노선으로 시작하게 되니 없던 눈에 가시화 되거나 표출화 되지 않았던 거짓선지자의 노선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 전래동화를 각색해서 인자에 대한 설명을 이야기 어머니에게 했다.

결국 십자가에 다 이루셨다 라는 것은 인자를 완성한게 아니라.
인자를 새롭게 양산한다는 것이다.
인자는 십자가를 외치기 위해서 못 박혀 죽는 모습만 띤다. 누구처럼?

인자는 들려야 한다.
들림으로써 곧 죽음으로써 역는다. 고리를 형성한다.
인자가 나무에 달림으로써
정작 내가 나무에 달려야 함인데 대신 달렸다는 의미에서

사람 같은 이 곧 나 같은 이, 나 죄인 같은 이가 대신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역어서 나도 달림으로써 또한 나 같은 이가 또 역이는 것이다.

예로 스데반이 달림으로써 사실상 사도바울이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또 달림으로써 사실상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난 교회가 달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역이는 것이다. 죄와 피의 결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재현의 확장 증식이다. 바톤 이어받기이다.

이것이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유일한 방식인 십자가 뿐이다.
얼마나 폐쇄적인가?

이 침공의 방식에 인간들의 대처방식은 개방성이다. 참희한하다. 똑같이 거짓선지자의 형식으로 또 따를 수 밖에 없도록 뒤짚어 씌임을 당하는 것이다.

폐쇄적인 십자가 방식이 아니고서는 고리로 역일 방식이 없다.

그래서 사도들은 너희가 죽인 예수 곧 십자가의 죽음 만을 외친다.
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패로 나누어지는 거룩이 등장한다.

이런 이중분절이 아니고서는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유기체를 연합할려는 시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인자의 방식 곧 이중분절의 방식은
예수님의 죽음인 목숨과 결부시키는 십자가다.

이 방식으로 인자는 주가 되셨다.

내 손으로 내가 못 밖아 죽인 그 인자가 졸지에 나를 건지는 남이 아닌 내가 죽였던 그 분이 주가 되는 방식만이 구원이다.

그래서 죽음 외에는 다른 것을 외칠 것이 없다.

죽음만이 예수님이 넘어오신 방식이다.

인자란 우리의 허물을 담고자 하는 그릇으로써
원수성을 반드시 담고야 하는 자다.

이 인자를 잉태 생산하여서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이다.
그리고 가는 곳 마다 이중분절의 사건이 무한대로 분절 에 또 분절 또 분절 되었는데도 또 갈라지는 분절 또 분저로써 가지가 쭉쭉 뻗어가는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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