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마을에 개가 살지 않는다.

생명나무와 십자가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오전 7:40:51 김대식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어제 밤에 도그빌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어서 인지
마을 전체가 하나의 대표성으로써 선악과 나무 곧 에덴동산의 모습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선악나무를 따먹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올무였듯이

요즘 예루살렘 부분을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에서
마치 예수님은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십자가를
혼자만이 심각하게 의식하면서 예루살렘 공간을 중심으로 자신의 활동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스쳐지나간 생각이 뭔고 하니
이런 예루살렘이 마치 선악과 나무처럼
선지자를 죽인 원수의 성문이자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몸을 먹이게 하는 십자가의 장소라는 점입니다.
즉 에덴동산에서 선악나무를 의식하는 것은 마귀 뿐입니다.
기여이 따먹지 아니하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 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고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에덴동산을 철수가 됩니다.

지금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그때의 마귀처럼 따먹으라는 식으로 혼자만 의식하고 있습니다.
안 따먹고는 못배길걸 라는 식이지요.
기여이 따먹도록 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모습이 뱀이랑 너무 똑같습니다.

마귀다 라는 게 아니라 방식이 말입니다. 기능이 말입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던 방식 그대로 생명나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시는 방식이 그렇게 비슷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성도의 칼럼에 올라온 글 제목이 [교묘하고 은밀한 구원]이라고 이근호목사님이 올렸는데 저는 그때 더 오바를 한 제목을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교활하고 음탕한 구원이라고 말이죠. 왜 그런 오바의 제목이 생각났는고 하니
교활이라는 표현이 교묘하다는 표현에 비해 자극적이고

은밀함을 음탕함이라고 한 것은 다윗이 생각 나서입니다.
밧세바를 취하는 것은 마치 인간의 모든 도덕관 특히 율법관을 정면적으로
아주 아주 대범하게 정면적으로 충돌하는 겁니다.

심지어 우리아 장군을 교활하게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구요

또 이름없는 아기의 죽음 그 어떤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뉘우침이 일체 먹혀들지 않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완전히 극으로 치닫는 겁니다.

이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완전히 음탕한 세계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만 범죄했다고 합니다.

세 사람의 생명을 무참히 짖밟아버릴 때는 언제고 말이죠.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이 마치 다윗처럼 그럼 범죄를 다시 재현하고 있습니다.
또 동시에 예수님은 빨리 따먹어라 따먹어라 안따먹고는 못배기지롱 이라고
아예 죽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남의 죽음이 아닌 바로 자기자신의 죽음을 말이지요.

놀랍게도 선악과를 또 따먹는 방식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생명나무를 따먹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인간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그저 블랙에서처럼 헬렌켈러 같이 짐승일 뿐입니다.

과실을 제공하는 쪽에 달린 문제입니다. 
인간을 만드는 쪽은 창조주 자신의 숙제에 달린 문제입니다.
냉혹하게 기다렸다는 듯이 철거해 버린 그 생명나무를
언제는 절대로 안 주겠다는 식으로 휙 다 철거할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반드시 주겠다는 식으로 그것도 교활하고 음탕하기 짝이 없는 방식
곧 다말처럼 창녀 옷을 입어서라도 시아버지를 반드시 구원시키겠다는 그 약속을
반드시 필히 결단코 이루겠다는 듯이
생명나무를 먹이시겠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적극적입니다.
선악과실 사건에서는 마귀만의 독단적 무대처럼 주인공 되듯이 우세하게 보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예수님 자신만의 독단적인 혼자만의 독주 무대입니다.

생명나무는 그렇게 거리끼는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활짝 피어 온세상을 피로 물들여 버립니다.

먹보다 더 검은 죄를 마귀의 독단적 무대 활동으로 어두움으로 장악시켜버릴때는 언제고
(모세가 생각나네요 왜 그때는 안 도와 줬느냐? 말리든지? 아니면 마귀를 쳐 버리든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허용하고 있고, 인간의 되도않는 정의감을 막기는커녕 더욱더 펼치라고 독자적인 무대를 제공하듯이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왜 이제 와서? 뭣땀시?)

그런 우리의 죄악이 분홍빛 같이 붉을 지라도 온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흰눈과 같이 하얗게 뒤 덮고도 남는 빛을 순결을 일방적으로 퍼붓겠다는 그 하얗고 하얗 깨끗하고 거룩함의 폭력?

도통 무슨 심뽀인지 완전히 마귀랑 예수님이랑 이 두 권세에
사망과 생명의 권세에 농락 당하는 기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아주 정면돌파의 식으로 성적인 음탕함 곧 우리 스스로 가리운 수치를 아예 노골적으로 발가벗겨 버리는 겁니다.

그런 도덕
그런 양심
그런 율법
그런 선한행실과

비교도 안되는 자신의 살과 피를

직접적으로 들이대면서

미리 갖추어 놓은 모든 가리개를 다 벗겨버리는 겁니다.
이미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무화과 나뭇잎의 옷이 있는데
뭣땀시 새옷이 필요하겠습니까?

전혀 믿기지도 않는 옷을
가장 믿음직 스러운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서 새로 입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새옷 여디디야 옷은
회개도 눈물도 금식도 아예 불에 다 태워버리니
누가 선뜻 그 고귀한 옷을 다 버리고 여디디야 옷으로 갈아입고자 하겠나요?

그러나 새옷을 입히시는 방식은 그 방식 뿐입니다.(마귀가 입힌 옷을 벗겨버리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보란 듯이 더 이상의 마귀의 송사가 먹혀들지 않는 옷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나타난 대제사장의 옷 보다 더 나은 옷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우리들의 손으로 지은
모든 수치를 가리울것이다고 마귀에게 속아서 만든 옷을
모조리 불태우는 옷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발가벗겨버리듯이 할례처럼 짤라냅니다.
모든 남자들이 비웃습니다.

남자의 성기를 통하지 않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비웃음을 거쳐서 남자의 성기를 통하지도 않는 생명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쫏아서 난 십자가의 방식 때문에
육이 아닌 행함이 아닌
믿음 때문에 졸지에 모든 선악은 이 십자가라는 생명 때문에
발가벗겨져야할 상황에 놓여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발가벗겨 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라고

인간의 몸이라는 선악의 성전을 뺑뺑이 돕니다.

고창병 걸렸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저주의 몸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자입니다 라고 뺑뺑이 돌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멋대로 일방적으로
일곱째 안식일 날 뿌뿌뿌 라고 깨끗해 졌지롱 깨끗해 졌지롱
그 증거가 이 언약궤 이지롱 이라고
말도 안되는 자기들의 이상한 의식에 의해

더더 말도 안되게 모든 육체가 허물어 지는 겁니다.

십자가는 모든 육체와 그 정과 탐심을 허물고자 온 선악이 장악한 방식 그대로
교활하고 음탕하기 짝이 없는 생명나무로 온 겁니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거룩하고 순결하게 왔다면 지나개나 다 생명나무를 영접했겠지요.

그러나 도저히 넘어갈수 없는 방식 뿐입니다.
꼬끼오 뿐입니다.

예수님이 넘어서 오겠다는 방식
그래서 아무도 그 방식이 껄끄럽고 부끄러워서
싫어함이 된 바인 십자가를 믿기는커녕
그 어떤 인간의 믿음도 안 먹혀들도록 하시는 겁니다.


ps

여기까지 적고 부랴 부랴 아침식사 약속땜에 동규씨랑 하고 나서
마지막 챕터 부분의 도그빌 개마을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이 완벽한 반전이였습니다.
마치 마가복음 부분이 그대로 타이밍 기가막히게 딱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막 12:1, 개역)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 12:2, 개역)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막 12:3, 개역)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막 12:4, 개역)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막 12:5, 개역)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막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막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막 12:8, 개역)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막 12:9, 개역)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막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막 12:11, 개역)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어쩌면 영화의 제일 마지막 부분이 이 본문이랑 그대로인지

유일하게 그 심판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개 뿐입니다.

인간인척 하는 자들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개 만이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멍멍 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눈물을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나는 절대로 개가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라고 사람 흉내 낸 자들은 모조리 심판 받았습니다.

개만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아예 인간이 아니다고 인간 흉내를 내지 않았더라면 심판이 넘어오질 않았을텐데

아무도 인간 아닙니다. 저 개입니다. 라고 하는 자가 없어서 망해버린 예루살렘처럼

도그빌은 개가 없어서 망해버린 곳입니다.

(동규씨랑 대화를 하면서 주님의 발가벗기심이 아니면 정말 정말 내 죄를 알길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은혜의 시간을 나누면서 하루를 누렸습니다. 성경말씀이 정말 냉혹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을 나열하신 이유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감히 그 어떤 행함도 안됩니다. 오로지 십자가로만 나타날 뿐입니다. 실상은 십자가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조리 그림자인 모형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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