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상처받을 자격도 없다.


생명의 나무 라는 영화를 보고 평가한 글을 통해서도 말했지만
인간의 트라우마는 십자가 앞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다.

어딜 감히 트라우마 질이야
십자가 때에는 다 그랬다.
즉 집단 보편성이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나이다.

어딜 감히 열심히 특심질이야 !
과연 혼자 남았는지 댕겨 봤어? 댕겨봤냐구?

그래서 보편화 시켜버린다. 집단 부정적 보편성이다.
7천명을 남겨버렸다. 입이 쑥 들어가서 할 말이 없다.

7이라는 것은 단절성이다. 거리두기 간격벌리기이다.
즉 인자 라는 인물에 겨냥하도록 되어 있는 말인데
인간은 자꾸 자기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상처라는 트라우마도 결국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차단해야 한다.
부정성으로써 보편화 시켜야 한다.
너 보다 수준이 낮다고 하는 그 비천한 미물로써
천박스럽다고 남이 아닌 바로 너가 공개적으로 무시한 그 미물을 통해서
간격을 벌려 버린다. 예를들면 현장에서 검거한 간음하다 잡은 여인 말이다.

인간이 뭔가를 귀중하게 여기고
희소가치성으로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로 인해 천박스럽게 취급해 버렸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 생겨버린다.

예로서 율법을 귀하게 여겨버리는 마음이 들게 되면 상대적으로 율법과 무관한 이방인을 무시하게 된다.

율법 스스로가 무시하기도 전에 자신이 율법과 일치화 시켰기에
이방인을 무시해 버린다.

그런 마음에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흡집내듯이 홈을 파게 되면
졸지에 이방인을 무시하고 율법을 귀히 여기는 자신이 무시당하게 된다.
그 무시 당하는 방법은 더 나은 율법 완성 때문이다.

그러니 변명할 입장에 전혀 못되게 된다.
무시 받음이 도리어 감지덕지 황공무지로소이다 라고 할 입장이다.
자신이 친히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무시했듯이
거꾸로 이방인이 되어서 무시당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간격이 벌어진다.

왜 내가 무시 받아야 합니까?

요나 선지자
엘리야 선지자
등등

선지자란 바로 이 양쪽의 입장에 위치해 있으면서
동시에 완료 때문에 죄를 발각당해야 하고
동시에 완료 때문에 홈을 깊게 파서 간격을 벌리는 자들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불륜적인지?
도저히 좁힐수가 없기에 모순의 모순으로 극을 치닫게 된다.
더더욱 모순화 시킬려고 한다.
일관성을 거부한다.
모순화 시키는데 일관적이다.

모든 인간은 배타적이다.
법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상호소통하기 위해서 잠시 접을 뿐이지
틈만 나면 그 배타성은 더더욱 법까지 이용하면서 배타성에 극을 달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배타적이다. 그것을 감출 뿐이요 배려를 하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정치적인 계산에서만 즉 이익이 되는 입장에서만 할 뿐이다.
선을 추구하고파서가 아니라 선이 잠시 이윤이 되기에 선도 돈이 되기 때문에 할 뿐이다.

그런데 그런 소욕에 더 깊게 파고드는 또 다른 소욕이 있다.
더 나은 배타성이다.
피는 아예 아들만 인정하고 모두 거부해 버리는 배타성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벌리는 배타성이라는 장난에 상상도 못할 정도의 배타성이다.
욥은 그 배타성에 아예 희망 조차도 말소 당한다.
입을 가리우고 머리를 쳐박는다.
아 나는 죽어야 하는 구나
더 심한 단절 된 인간을 보고서는 할말을 잃어버린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기에 인간들의 믿음은 차단당한다.
예수님도 버림받는 입장 뿐이다.

저기서 무슨 우리의 상처니 트라우마니 고난이니 라고 운운한다는 자체가
사치스러움이요 가증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저 버림받음이
그저 심판이
그저 죽음이
그저 저주가
그저 십자가가

당연한 것이다.

이 단절을 거쳐서 넘어오심이
십자가만 영광 되게 하심이다.

십자가의 저주를 선물로 받지 못한자는
자기 상처를 자기가 스스로 자학하듯이
갇혀서 빠져나올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가 없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