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 와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앙띠 오이디푸스


머리 없는 신체 (기관 없는 신체 ? 빈자리로써의 십자가가 머리 되기)

김대식  2011-10-18 22:56  


기존의 교회론이 머리를 위한 유기체적인 신체론으로 교리를 형성하다 보니 그 머리의 자리에 결국 보이는 교회를 머리로 둠으로써 교회를 건드리는 놈들은 다 치리 대상이 되는
그럼으로써 교회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명목으로써 교회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교회란 머리 없는 교회다. 예수님의 신체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마치 머리 짤린 그 십자가가 비어있는 머리로써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십자가를 머리로써 둠으로써 성도 개개인이 머리가 짤려야 함을 마땅함을 보여준다. 목사가 마치 최고의 지위로 보이는 그 유기체적 조직관에서 정작 목사는 목사로써 머리가 짤려야할 머리 없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내 머리 주님이 짤랐어요 라고 외치는 목사로써 머리 짤려야 머리를 외칠수 있다는 것이다. 머리 짤리지 않은 목사는 자신의 머리를 짜른 분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목사는 삯꾼이다.

남자 여자 개념도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도, 머리 짤린 신체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다.
남이 아닌 내 손으로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머리를 짤라버렸기 때문이다.
남자의 머리도 동일하다.
그런 죄인끼리 만나서 그분의 머리 짤림을 서로 서로에게 외치라고 한 몸 되게 하신 것이다.
머리 없는 신체로써 한 몸 된 것이다. 마치 신랑된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가 한 몸 되었듯이 말이다. (의인을 부르러, 의인을 신부 삼으러 오신게 아니라. 죄인을 신부 삼으러 왔다. 주변에서 얼마나 비웃을 준비를 할까? 그것을 미리 아시고 도리어 누가 미끄러지는지를 염두하고 신부 삼으러 왔다. 아가서에서의 사랑은 질투를 동반하고 죽음을 동반한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런 확장성이 교회에서 집단화로 보여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서로 서로 싸움을 붙여서 자신의 머리가 짤려나감으로써
내 자신이 예수님의 머리를 짤라버린 그 사건을 또 새록 새록 현실화 시킴으로써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과 긍휼함을 느끼는 인간으로써 그 사이에 또 머리 되신 주님이
그 갈라진 틈사이로 횃불이 지나가듯이 거룩을 펼치시는 것이다.

매일 매일 해쳐모여 하듯이 교회에서는 떨어져 나가버리는 자와
주님께서 또 다시 새롭게 끌어 모으시는 자로써 늘 교체작업이 벌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머리 되심 외에는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머리 되기의 비밀을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덮쳐온다.

포착되지도 않는 머리. 보이지도 않는 머리.
그러나 그 빈자리는 그 빈자리에 누가 앉음으로써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누가 그 빈자리에 앉아서 미끄러지고 누락시켜버리고 자빠져서 탈락 시킬때에
그 빈자리는 분명 없는데 그 없음이 생생하게 실제상황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녀 부부 사이에서의 이 머리없는 신체로써의 머리가 (확대 확장 증식되어)
이제는 교회라는 한 몸으로써 머리 없는 신체로써의 머리로 생생하게 자리잡음으로써
이 보이지도 않는 머리
잡히지도 않는 머리를 무시했다가
빈자리 라는 이유로 무시했다가
된통 굴욕을 당할때에
머리(빈자리 : 십자가)는 그때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모세는 괜히 두 번 지팡이를 바위에 치다가 누락 되었다.
누락 당함으로써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서는 변화산상에서 빨리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별세해 주소서
머리 되소서
나의 주가 되옵소서 라고 외친다.
제가 된통 당해 봤잖습니까?
괜히 빈자리에 앉다가 쭈우욱 미끄러져자빠졌잖습니까?
모든 인간들을 주우욱 미끄러져 자빠지도록
십자가를 이루소서

다 이루심으로써 주가 되심으로써 머리가 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들은 미끄러져야 한다.
교회란 미리 이 미끄러뜨리시는 머리 되심을
미끄러져 자빠짐으로써 아 머리가 참 주님 이셨지 라고 알게 하신다.
베드로를 물 위에서 만나시지 않고
물 속에 빠뜨리심으로써
예수님이 왜 머리 되심인지?
내 머리를 물 속에 죽음에 쳐박으심으로써
내 머리를 짤라버리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알게 하신다.
(마치 할례하듯이 내 신체의 머리를 짤라버리듯이 단절이라는 성령의 소욕을 십자가로써 이루신다. 교회란 자신의 머리가 짤린자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할례당한자들이다. 자신의 머리가 짤리지 않은 자는 십자가에 못박혀 짤리던가? 아니면 저절로 밀려나감을 당하는 미끄러뜨리는 실족케 하는 빈자리의 위력을 생생하게 격던가? 당해서라도 주의 주 되심, 머리 되심을 주님 스스로 머리 스스로 증거하신다.우물가의 여인이 비로서 남편 다 날 버리고 갔는데 비로소 머리 만났다 라고 외친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내 죄를 아는 자가 떳어요 떳어.)

그리고서는 외친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주께서 저를 순결케 하셨나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짤려진 내 머리를 보고서는 세상에나 마귀머리였네 라고
(그것도 모르고 저 머리를 지킬려고 주님의 머리를 짤라버렸으니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어찌할꼬 내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 어찌할꼬. 그러나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구나 보라 이전 머리를 짤려버렸으니 보라 새 머리가 오셨도다.)

비로소 바지 벗겨지라고 막춤추고 빠아  빠 빠 빠빠빠빠
막마시고 막먹고 잔치를 벌릴 것이다.

그 빈자리라는 처음자리를 다시 되찾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죽음의 자리(십자가)를 찾은 그 기쁨에 넘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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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본문 말씀: 누가복음 15:11-13 2011년 10월 2일

(눅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사람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시작됩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처럼 오늘 본문은 ‘탕자’ 이야기로서 하늘의 뜻을 전하십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창작해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르니 인간들의 모든 생각도 다 틀린 것이 됩니다.

따라서 틀린 생각을 바른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틀린 생각의 모델은 오늘 본문에서 ‘큰 아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른 생각의 모델은 ‘탕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큰 아들, 탕자 두 사람이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데 있는 겁니다. 잘못된 하나님관은 큰 아들이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잘 봉양해 왔는데 둘째는 아버지의 귀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성품상 당연히 그 둘째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큰 아들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둘 다 아버지의 생각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전부라는 생각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 곁은 떠나야 비로소 제대로 ‘나는 전부다’가 가시화된다고 믿었던 것이 탕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큰 아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곁에 말 잘 듣는 아들로 남아 있어야 전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요?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거짓말 하지 말고 당장 탕자로 살아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이 재산달래서 가출하겠다는 아들을 후원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네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바를 속히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쉽게 “실컷 탕자 되어라”는 말이요, “막 살아라”는 말이 됩니다. 왜 가출을 허용했을까요? 마음 속과 겉이 차이나면 아버지도 괴롭고 주인공 아들도 괴로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세계란 하나님과 인간이 감안한 하나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맏아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한 조치로 가출을 허락하신 겁니다. “맏아들은 거룩한채 해도 너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혹은 “너의 가출로 인하여 맏아들의 가출성 부모 보양이 얼마나 큰 위선인가를 폭로시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탕자는 본인의 결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로서 탕자는 비로소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서 죄를 얻게 됩니다. 즉 ‘죄’라는 개념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단독적인 자기 행위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탕자의 노선 위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면서도 죄가 죄답게 드러나는 경우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탕자라고 규정할 때, 그것 뿐입니다.

이 죄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전부가 되어 스스로 거룩하게 될 때에는 나타나지 않는 죄입니다. 자신이 결코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부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그것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탕자되게 하시는 전략 안에서 비로소 죄가 죄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탕자가 밖에 나가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즉 나 자신으로서 전부나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나 전체는 오로지 아버지의 집 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탕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그 시대에서 탕자처럼 대우받고 돌아가신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자칭 맏아들입니다.

그러나 진정 참 맏이는 예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눈에 탕자처럼 이해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모든 것에서 버림받은 모습의 아들로 살아가시는 겁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아갑니다. 그것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획득하리라고 여기고 있는 버니다.

맏이에게는 탕자 경험이 없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죄’가 뭔지를 모르게 됩니다. 반면에 탕자는 가출과 되돌아옴을 통해서 죄와 의를 알게 됩니다. 로마서 8:28-29에 보면, 이 계획이 다음과 같이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맏이’란 버림받은 자리에서만 알게 됩니다. 출애굽기 13:2에 보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즉 이스라엘민들은 사실상 다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겁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에게는 가락지와 좋은 옷과 소를 잡는 잔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기쁨에 가담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곧 그가 맏아들입니다. 맏아들 입장에서는 탕자에게 주는 아버지의 호의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착실성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차이납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자신의 것으로 전체와 전부를 장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탕자에게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라는 것을 구축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집만이 전체요, 자신은 그 전체의 일부로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가락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고 나가면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공로성을 따로 마련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아십니다. 따라서 그런 예수님을 살해하고 없애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맏이라고 자처하는 세력에 의해서 세상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함을 강조받게 됩니다. 탕자는 임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허락해야 될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탕자와의 관계가 의로움이요 구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6강-눅15장11-13(탕자)1110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5:11-13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방금 읽은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에 오신 분으로 다 여러분이 인정하지요. 하늘에 계신 분이 땅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왔으면 이야기를 하실 때 그냥 편하게 ‘네 최선 다해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하는 식으로, 별 부담 주지 않고 ‘그저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의 착함을 인정할 것이다.’라고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지난 주에는 ‘잃어버린 양’ 지난주에는 ‘잃어버린 은전’ 오늘에는 ‘탕자, 재산을 줬더니 허랑방탕해서 다 날렸다는 이야기.’ 왜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보내려는 좋의 뜻과 취지가 있다면 편하게 우리에게 다가서고 편하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잃어버린 양, 은전, 탕자의 이야기, 허랑방탕하고 기생과 더불어 마시고 재산을 다 다 날렸다.’ 하는 심각한 조의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 말입니다.

교회 처음 왔다, 성경 아무것도 모른다, 교회 가면 천국 갈 줄 알고 교회 온 사람에게 목사가 ‘인생살이 고생 많이 하셨지요? 하나님 찾으러 오셨어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원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그것이 듣기 좋은 이야기고 그런 이야기만 해 줘도 얼마든지 순하게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 생활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탕자지요?’ 그렇게 나온다면 교회를 오라는 것인지 오지 말라는 것인지, ‘잃어버린 양입니다.’ 하는 이것은 왜냐, 지상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하나님은 KFC 할아버지처럼 인자하신 분으로 보이는데 하늘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인간들이 정상이 아닙니다. 괴물이에요. 도가니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아버지(하나님)를 알아요.

예수님만 아들이고 예수님만 성도에요. 다른 사람은 성도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아들도 아닙니다. 아버지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왔을 때 무엇부터 박살나서 깨져야 되느냐하면, 우리가 편하게 ‘하나님은 어진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우리가 갖고 있던 하나님 관이 다 완전히 깨져야 합니다. 그것을 깨면서 진짜 예수님만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를 시켜주는 겁니다.

‘나만 알고 있다.’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와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사실은 마귀의 모습이다. 어질고 자비하고 전능하다는 그것이 다 마귀다.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서 하나님을 불러도 그것은 다 네가 조작한 것이고 진짜 하나님은 나만 알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아까 교독문(42번 마태복음5장) 읽을 때 이런 구절이 있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 다음 구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나를 인하여 핍박하고 나를 인하여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 나를 인하여, 예수님(나)를 위하여.’

무슨 말이냐, ‘나만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하는 거예요. ‘나만 진짜 하나님을 알고 나 빼놓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만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라고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주변에서 악하다는 소리를 듣고 고난 받고 핍박받을 때 오히려 즐거워해라. 너도 나와 같이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얼마나 잘못된 하나님인가, 그것을 찢고 뭉갤 마음의 준비를 해야 돼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다 나 좋으라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의 기도내용처럼 내 행복을 위해서 있는 하나님이잖아요. 그런 하나님을 부순다는 것은 내 행복이 우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이 에서 복 아서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그것은 마귀가 가짜 하나님을 고수하라고 의도적으로 부추긴 것이고, 진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핍박받고 고난 받는,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라고 우기다가 주변으로부터 외로움당하고 설움당하는 그것이 진정한 하늘의 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 말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세상을 따로 만들고 구축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 나라와 그 의가 임한다는 뜻이 그런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하나님, 내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있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하나님을 뭉개버리고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진짜 아버지, 진짜 천국을 어떤 식으로 바꿔치기 하느냐, 그것이 관건입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모르지요. 우리는 모르는데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실시하는 방법 중에 지지난주에는 ‘잃어버린 양’이야기를 했고 지난주에는 ‘잃어버린 은전’ 오늘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탕자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탕자 이야기를 해서 ‘빨리 바꿔치기를 해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바꿔치기’를 할 때 어떤 사고방식에서 어떤 사고로 바꿔치기를 해야 됩니까, 라고 궁금해 하지요. 그런데 친절한 예수님께서 잘못된 하나님 생각을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맏아들이에요. 우리가 그 맏아들 사고방식을 버려야 되고 탕자의 사고방식으로 바뀌게 되면 진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자 하는 취지를 한껏 보여주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아버지에게 자식이 둘이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슨 힌트를 주느냐, 버려야 될 사고방식과 새롭게 예수님에게 얻어야 될 사고방식의 구별, 차이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아, 이런 것이 잘못되었고 버려야 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맏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탕자가 되어라. 탕자가 되지 않으면 너는 지옥 다.’ 그런 이야기가 는 겁니다.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들이 둘 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요구를 합니다. 나중에 받을 재산을 미리 당겨서 주세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합니다. 왜 장차 받을 재산을 미리 당겨서 달라고 할까요? 그것은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이 점이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전부라고, 전체라고 여겨요. 자기 자신이 전체인데 이 자기 자신이 전부가 될 때 자기는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거예요.

여기서 자기 자신이 전체가 되고 전부가 되는데 무엇이 방해가 되느냐하면, 아버지가 있다는 이것이 방해거리라는 거예요. 나중에 탕자가 돌아올 때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내가 아버지와 하나님께 죄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있다는 것, 이것은 곧 하나님이 있다는 것인데 나한테 하나님이 있다는 이것이 나한테 나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이것에 방해를 한다는 생각을 모든 인간이 다 갖게 되는 겁니다.

내가 교회만 안 나갔어도, 하나님만 안 믿었어도 이런 짓을 한다, 결국 하나님과 교회라는 것이 우리 인생을 마음껏 자기 뜻을 펼치는 자유, 자율을 발휘하는데 부담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없는 곳으로 내빼고 싶은 충동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되는데 재산을 달라? 왜? 아버지 곁을 떠나가기 위해서.

나만의 것으로 누리기 위해서. 왜? 나는 나니까. 조그만 꼬맹이부터, 아니 엄마 뱃속에 임신되었을 때부터 엄마 배를 발로 차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는 자기세계의 전부에요. 나는 나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굽신굽신거릴 위인들이 아니거든요. 보이는 인간한테도 눈치껏 사는데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눈치를 볼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내 뜻을 펼치는데 있어서 방해된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전체의 면면과 실상을 다 까발리는 투로 말씀하신 거예요. 재산을 달라고 할 때 아버지께서 재산을 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제발 탕자가 되어다오, 그런 뜻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 사랑하는 척 하지 말고 네 본색을 활짝 펴라.’ 네 꿈을 펼쳐라, 하는 식으로 활짝 펴라는 거예요. 요새 말로 하면 제발 좀 교회에서 나가라는 말이에요. 교회 다니기 싫잖아요. 대전의 어떤 분이 그랬어요. ‘신앙이 지겹다고.’ 대전만 그렇겠습니까? 대구는 안 그렇겠습니까? 좀 교회 좀 나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억지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멘을 하셔야 하는데 지금 아멘, 하시는 분이 서울에 가셔서 아멘이 안 나오는데. 제발 좀 교회 좀 나오지 말고 피고하거든 소파에 드러누워 자라는 말입니다. 나오기 싫은데 억지로 나오려면 씻어야지, 찍어 발라야지 시간 걸리고 귀찮잖아요. 와서 후딱 가버릴 것을 뭐하려고 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원하는 천국, 인간들이 원하는 영생, 인간들이 원하는 진리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천국과 지옥과 죄와 선과 악과 율법과 성경,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엉터리 같은 마음들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언젠가는 이런 것들을 소지하고 내 안에 담아서 하나님 없이도 나 혼자 살 수 있는, 나 혼자 버텨도 저주 안 받고 복 받는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겠다.’는 이 심보인데 이 심보로 교회 백날 나와야 소용없는 겁니다.

목사는 속아 넘어가고 장로나 집사는 다 속아 넘어가지만 우리 하나님한테는 어림도 없거든요. 성경을 연구해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약부터 그런데 절대로 사람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눈에 띄는 큰 길로 다니시는 것이 아니고 꼭 뒷골목으로 다녀요.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겁니다. 사람이 ‘잡았다!’ 하면 거기서 피해 버려요.

가까이 가면 저만치 멀어져 버려요. 절대로 사람 손에 잡히는 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무슨 말씀이냐,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너를 알지 너는 나를 모른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손에 잡아보려고 신학을 만들고 교회를 만들어서 그저 ‘우리교회 오시옵소서, 우리 가정에 오시옵소서, 이번에 찬양집회와 선교집회를 다 했으니 오셔서 성령이나 듬뿍 주시면 됩니다.’ 백날 초대하고 초청해도 주께서는 뒷골목으로 빠져버려요. 사람 손에 절대로 안 잡힙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잡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모여든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곧 미신의 집합체에요.

잘못된 신앙의 집합체에요. 있지도 않는 예수,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난리입니다. 파이프오르간 눌러 가면서. 쇼를 벌리는 거예요. 패키지 이벤트를 벌여요. 1부는 예배, 2부는 간증, 3부는 헌금, 4부는 찬양, 온갖 쇼를 한다고요. 저희끼리 좋아요. 주님은 ‘볼일들 잘 봐라.’ 하고 벌써 빠져버렸는데. 주님이 우리를 잡아야지 우리가 주님을 잡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학을 깊이해도 그 신학에 주님은 말려들지 않습니다. 신학에 주님이 포착되든지 잡히지를 않아요. 사람 손에 잡히는 그런 예수님 없습니다. 구약전체가 그래요. ‘율법 지키면 하나님이 계시겠지.’ 하는데 율법 지켜도 하나님은 빠져나가 버려요. ‘기드온을 우리가 왕으로 신봉하면 되겠지.’ 해도 하나님은 빠져버려요. 이번에는 ‘왕을 삼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지.’ 하고 사울을 왕으로 삼으면 또 주께서 ‘너희끼리 잘해봐라.’ 하고 빠져버리고 ‘주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했으니 성전 지으면 성전에는 계시겠지.’ 해서 성전을 지으면 또 주께서는 빠져버리고.

사람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왜, 우리는 생각을 엉뚱하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필드, 나만의 세계, 나의 세상, 내가 주인공이 된 세상,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외면해 버려요. 내 위주로 돌아가는 나만의 세상, 이것만 꽉 잡고 있으니까 ‘아이고, 탕자야. 이 아버지 생각하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한 번 살아봐라.’ 하고 아버지가 허락해서 재산분배해 주면서 나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탕자 되게 하신 것은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더 깊이 이야기해서 ‘둘째 아들아, 제발 탕자 되어서 맏이 같이는 되지 말거라.’ 맏이는 어떤 인간이냐하면, 25절에 보면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이야기를 하지요.

29절에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다고 맏이가 아버지께 나오지요. ‘아버지의 말도 잘 듣고 아버지의 곁을 떠날 생각도 안하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아버지를 봉양한 나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준적도 없으면서 아버지 재산 허랑방탕 기생과 노느라고 다 날리고 술이나 퍼마시고 돌아온 인간에게는 왜 소를 잡아주십니까?’ 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 애는 탕자고 너는 탕자가 아니거든. 너는 대단히 거룩하고 훌륭하고 그 애는 완전히 엉망진창이거든. 내가 엉망진창을 구원시키러 왔지 너 같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구세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발 착하지 마세요. 착하지 마시고 거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화하지 마시고 좀 막사세요.

탕자가 자기 세계를 사랑해서 아버지의 세계에서 독립할 때 탕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그리고 복음은 ‘오직 자기생각만 했다.’ 하는 거예요. 이것이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에요. 오직 자기생각만 하는 것.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교회 나와 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나와 줬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자기 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동냥하는 겁니까? ‘옜다, 드세요.’ 어버이날 하루 날 잡아서 어버이 찾아가는 것이 어버이 섬기는 겁니까? 그냥 내가 봐준다는 식이지요. 얼마나 인간이 자기생각밖에 없는지 일주일 중에서 교회 하루 나가준다는 식으로 나머지 일주일을 챙기려고 드는 거예요.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그 방식으로 내 돈은 내 것이라는 것을 확고히 하고 싶은 겁니다.

얼마나 못 됐습니까? 맏이죠, 맏이. 차라리 아예 24시간 종일 네 생각만 하라는 겁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동안 부모 밑에서 포근하게 살다가 군대에 가게 되면 훈련소에서 편지를 써서 집에 보냅니다. 다른 애들은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써서 보내는데 그 애는 딱 다섯 글자를 썼어요. ‘엄만, 살려줘.’

영어로 하면 'Help me!' 복음적으로 한다면 ‘구원해 주세요. 주님이여, 구원해 주세요.’ 이 땅에서는 군대보다 더 독한 겁니다. 완전히 도가니입니다. 군대보다 더 독해요. 그 애가 지금까지 20년간 살면서 못 느낀 것을 군대 가서 느낀 것이 뭐냐, 군대 가면 시키는 대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군 당국에서 자주 하는 소리가 ‘군대 식사는 반찬 가지 수를 늘리고 잠자리는 어떻게 개선한다.’ 그런 소리들을 하지요.

막상 군에 가면 초코파이 하나 더 주고 덜 주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에요. 내 인생을 왜 국방부에서 일일이 정하는 식으로 개입하느냐, 그겁니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밤에 몇 시에 자고, ‘내 인생에 네가 왜 개입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게 화가 나는 거예요. 여자들 시집갈 때 밥 못 먹어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시집살이 고춧가루보다 맵다고 하는데 다른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 네가 뭔데 아침에 늦게까지 퍼질러 자든 말든 왜 내 인생에 간섭하느냐.’ 하는 겁니다.

새벽 4시 반에 ‘얘야, 일어나서 아침 지어라.’ ‘나는 오전 10시까지 자는 것이 처녀 때 습관인데, 10시에 일어나서 창문가에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그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인데 4시 반에 일어나서 밥을 하라니 내가 식모도 아니고 …….’ 식모라는 이 표현은 참 오랜만에 해 봅니다. 매우 정든 용어지요. 가정부라는 용어보다 훨씬 나아보입니다.

사회라는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사회가 나보고 건방지게 지시를 한다는 것에 대한 느낌입니다. 회사 처음 입사한 사원들도 그렇고……, 자기 주관이 있고 자기인생이 있는데 이것을 깡그리 짓밟고 모독하고, 자기가 과장이면 과장이지 자기 맘대로 스케줄 만들어서 하나하나 지시하고 뭐든지 내 맘대로는 못하고 일일이 간섭을 당하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사회에 나가서 취직하고 일하려 하니 힘들고 사표 내고 집에 가 있으려니 심심해서 힘들고, 심심해서 나가 일하려니 그것도 또 힘들고, 힘드니까 놀려니까 심심하고……, 내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한 공포, 지배하는 도가니 같은, 위협과 두려움과 공포, 하여튼 이 세상이 이상한 동네에요. 가정에 있을 때는 그것을 몰랐는데 찬바람 부는 바깥에만 나오면 그 때부터 말에다가 말굴레를 뒤집어씌우는 것처럼 나라는 것을 가지고 종 부리듯이 부리면서 ‘시키는 대로 해.’라고 하는 냉혹한 사회, 그런 시대.

그래서 그것이 싫다가 때려치우고 개인 사업을 하거든요.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짜증스러웠는데 개인 사업을 하게 되면 이번에는 세상이 ‘내 마음대로’가 또 안 되네요. 경쟁이 만만치 않지요. 길 건너편에 새로 생긴 가게가 더 훌륭한 인테리어를 해서 오는 손님 다 빨아가 버리고, 뭐든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어요. 집에서 그냥 노는 것이 제일 좋은데 놀다 보면 그것도 지겹고 권태를 못 견뎌 하지요.

이리 뒹굴 세 번, 저리 뒹굴 세 번, 하루 종일 그 짓하다 보면 그것도 할 짓이 못되지요. 하여튼 세상이라는 것이 참 이상한 동네에요. 그렇다고 밥을 안 먹을 수도 없고 돈 안 벌수도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고 안 빠져나가자니 힘이 들고, 원인도 모르고 그렇게 되는 이유도 모르고, 그저 그 탕자는 자기 돈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30절에 보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질적으로 맏이인 내가 집나간 탕자 아들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이것을 반대로 생각합니까?’ 그것이 맏이의 항변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담긴 예수님의 취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인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사람은 스스로 죄인 되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는 탕자 됨을 허락합니다. ‘제발 탕자가 되어서 돌아와 다오. 재산을 다 날려서 없어질 때 돌아오겠지.’ 그리고는 아들이 언제 돌아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안 풀려서 나중에는 아예 비참하게 되었어요. 돈 떨어지니 친구고 뭐고 다 떨어지지요. 그럴 때 이 둘째 아들이 16절부터 보면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오늘 본문해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죄를 풍부하게 넉넉하게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할 때 죄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개념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왜냐, 그것은 맏이가 생각하는 죄 개념이에요. 지옥 갈 맏이, 구원 못 받을 맏이, 아버지의 사랑을 얻지 못할 맏이가 생각하는 죄 개념이 뭐냐, ‘내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쉽게 요새말로 하면 ‘제가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성실하게 아버지 시키는 대로 눈치껏 다 해드렸습니다.’ 라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이런 것은 본인이, 주님이 찾아오기 전에 인간들이 ‘아마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이런 종류일 것이다. 말씀을 안 지키는 것이 죄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둘째 아들, 탕자에게서 새롭게 발견되는 죄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모르는 그것이 궁극적인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사실에 동의하지 못하는 그것, 그 사실에 동감하지 못하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탕자는 ‘나는 내 입장만 생각했구나.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 못했구나.’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죄를 얻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거예요.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되어 있었던 야곱도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이유는 야곱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죄가 뭔지를 그득하게 품은채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 죄는 예수님과 관계 끊어진 상태의 죄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피의 의미,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생산되는 그 죄가 꾸준히 만들어지는 사람의 그런 관계, 그 예수님과 탕자의 관계가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 애초부터 내 인생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집나갈 때의 그 탕자는 ‘나는 나에게 나의 전부’라는 거예요. 그런데 탕자 되고 난 뒤에 보니까 아버지 집이 전부인 것을……, 아버지 집이! 아버지 집이 전부에요. 내 인생, 나만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아버지 집이 전부인데 그동안 이 두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를 같이 받으면서 평생을 살아와도 아버지 집이 전부라는 것을 못 느꼈습니다.

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두 아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어도 함께 있은 것이 아니에요. 각자 따로 따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 제발 우리 교인들이 탕자가 되어야 될 것인데 어떻게 탕자가 될 수 있습니까? 탕자가 되는 무슨 법이 있나, 내가 탕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이것이 지금 관건이거든요.

탕자가 되면 지옥에 가니까 이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탕자가 되라는 말은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나’가 따로 있는데 나는 따로 내가 생각하는 내가 전부라고 여기는 내가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탕자가 되려면 그 둘 사이가 갈라져야 되고 분리되어야 되거든요.

아버지가 생각하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나인데 내가 생각하는 나는 십자가 피 이용해서 나 구원되기 위한, 그래서 ‘나 구원 받았다.’고 까불어대고 촐랑대는 나만의 세계를 옹호하는, 구원받은 나를 내가 소유하고 싶은, 그 내 세계가 따로 있거든요.

이 둘을 날카롭게 찢어야 되고 갈라놓아야 될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 갈라지면, 그것이 섞여 있으면 맏아들 되어버려요. 백날 해도 자기 잘못 모릅니다. 당신이 죄인이라고 하면, 당신이 헌금해도 죄인이라고 하면 기를 쓰고 달려들어요. ‘당신이 목사로서 설교하는 것도 죄’라고 하면 기를 쓰고 달려들어요.

당신이 선교사로 아프칸에 가는 그것도 죄입니다, 하면 기를 쓰고 달려들어요. 백날 몸 아파서 골골하고 백날 재산 날려도 사람은 자기의 잃어버린 과거를 보상하려고 들지 절대로 주님이 생각하는 내 몸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안하는 거예요. 나는 주님이 전부고 그 주님이 전부임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일부인데 우리는 내가 전부이고 예수님은 나의 일부로서 집어넣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그것을 좀 잘라내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탕자의 모습과 잘난 체 하는 맏아들의 모습은 무엇과 무엇의 대비가 되느냐, 잃어버린 탕자의 모습을 예수님 본인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잘 지켰으니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맏아들을 예수님을 핍박하는 유대인과 사두개인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유대인들은 자기가 맏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난 예수님만 맏아들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맏아들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너희들은 맏아들이 아니고 내가 진짜 아버지를 아는 맏아들이야. 진짜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은 나라는 존재야.’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 이야기를 끄집어 내신 겁니다.

로마서 8장 28절, 29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성경에서 맏아들이라는 것은 모든 복을 다 홀로 받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이라는 것은 자기 딴엔 말씀 잘 지키고 여호와 섬기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그것으로 맏아들이 되는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번 거치고 오너라.’ 하지요.

‘뭘요?’ ‘탕자 되어서 버림받고 오너라. 탕자 요소가 없으면 맏아들이 될 수 없다.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이 세상, 소위 내가 착실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다는 그것을 충만한 이 세상에서 도리어 뒷골목으로 버림받은, 그래서 그들 눈에 오히려 탕자처럼 보이고 허랑방탕하고 나쁜 아들로 보이는, 저건 아들도 아니고 나쁜 아들이라고 취급받는 그 코스를 밟아오지 아니하면 정말 하나님이 반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이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고 거기에 장자, 맏아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된 거예요. 그러면 맏아들은 그냥 태어났다고 해서 맏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로를 거쳐야 되요. 그 경로가 어떤 경로냐 하면, 유월절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려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도가니라는 글을 썼는데 광주의 어느 장애인 학교를 다룬 <도가니>라는 소설이 영화화 되면서 사회의 이슈로 떠올랐잖아요.

거기서 시민단체나 많은 사람들이 ‘저 교장이라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니 죽여야 된다.’고 달려드는데 제가 보기에 진짜 죄가 들끓는 도가니는 나의 가치를 추종하는 그 세계가 도가니입니다. 그 교회가 도가니에요 목사는 목사의 가치, 장로는 장로의 가치, 집사는 집사의 가치, 내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그것을 사수하고자 하는 것이 도가니에요.

노아홍수를 보세요. 하나님보시기에 온 세상이 다 도가니입니다.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나머지는 다 죽이잖아요. 전에는 물로 심판했지만 앞으로는 불로 심판합니다. 모든 세상이 다 도가니에요. 불로서 심판받아야 될 마땅한 세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관점이고 예수님 관점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인이 되었다고 못난 죄인을 자기가 정죄합니까? 인간의 가치는 그 앞에 있으면 안 됩니다.

유월절 날 애굽에 찾아온 죽음의 사자가 온 애굽나라를 다 죽였습니다. 옥에 갇힌 아들도 죽이고 왕궁에 갇힌 아들도 죽이고 판사 아들도 죽이고 심지어 구원받아야 될 이스라엘 가족도 다 죽였습니다. 다 죽였는데 다만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어떤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은 뭐냐, 대신 죽임을 당한……, 대신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죽인다는 그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원칙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가 없어요. 다만 산 사람은 그 원칙이 바뀌어서 산 것이 아니고 그 원칙, ‘너희들 다 죽인다.’는 그 원칙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대신 저를 죽이세요.’ 라고 나서는 어린양 때문에 사는 겁니다. 큰일 날 뻔 했어요. 예수님 피 아니면 큰일 날 뻔 했다니까요. 내 행위, 내 행함으로서 구원받을 조건을 따로 챙기지 마세요.

그것을 만들지 마세요. 그것이 가짜고 그것은 교회에서 만들어낸 미신입니다. 오직 피 밖에 없어요. 피만 쥐면 나중에 치매 걸려도 구원받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죽일 때 주께서 (손 털면서) ‘천사야, 다 죽은 것 맞지?’ ‘다 죽였습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죽였습니다.’ ‘잘했어.’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는데 꾸물꾸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의 아들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맏아들, 어린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난 맏아들,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맏아들은 반드시 대속에 의해서 맏아들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진짜 뜻이에요. 탕자가 집에 와서 혜택을 받는 것은 탕자를 보고서 주는 혜택이 아닙니다. 아버지 자신의 자비와 사랑을 넘치는 증거로서 탕자에게 계속 주는 거예요. 탕자가 돌아와서 언제 가락지를 원했습니까? ‘아빠, 나 들어왔는데 가락지는 하나 줘야지.’ 그런 것을 요구한 적 없습니다. 가락지, 좋은 옷 다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요즘 한우가 얼마나 비쌉니까? 한우등심, 안심고기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어요. 그저 너는 내 재산 다 날린,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린,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못 드는 그런 인간으로 계속 있으면 돼요. 거기에다가 가락지를 끼우고 옷 입히고 잔치를 벌이는 거예요. 그러면 가락지 끼고 좋은 입고 동네에서 사람들 만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 가락지가 끝내준다. 이게 웬 것이냐?’ 하면 ‘아버지께서 그냥 줬어요.’ ‘오, 네가 탕자 되어서 수고했다고?’ ‘그게 아니고 그냥 주셨습니다. 가락지뿐만이 아니고 이 옷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냥 주신 겁니다.’ 여러분이 집에 있는 손톱깍기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그냥 준 것이고 여러분의 서랍에 있는 속옷도 양말짝도 그냥 사랑으로 준 겁니다.

목사님,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모든 범사에 대해서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이것이 뭐냐, 내가 나의 것이 전부가 아니고 아버지의 것이 전부인데 아버지의 것이 전부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일부로 거기에 가입된 거예요. 개입된 것이고 거기에 아버지의 것에 포함이 된 겁니다.

그런데 맏이를 보세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었는데 나한테는 아버지가 염소새끼 하나를 삶아준 일이 있었는가?’라고 나오지요. 그 큰아들의 문제는 그 속에 탕자의 요소가 없다는 거예요.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는, 나는 잃어진 자 맞습니다, 라는 그 요소가 없어요. 미국으로 이민가면 이름을 에드워드 김,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잖아요. 이름을 그렇게 바꾸세요. 잃어버린 권, 잃어버린 리, 이렇게 잃어버린 요소가 있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잃어버렸다는 그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착하다고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 잃어버린 놈이었습니다.’ 어떻게 잃어버렸는가? 아버지께서 찾아주니까 비로소 잃어버림의 그 잃어버림을 알게 된 거지요. 잃어버렸으니까 다시 구원받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잃어버렸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잃어버렸다는 의식이 드는 거예요.

‘제가 주님께 죄를 얻었습니다.’ 이 말도 나쁜 짓 많이 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되기 위해서 죄인 되어야 하기에 죄를 얻어 챙기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탕자에서 돌아와서 도로 맏아들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큰일 납니다. 한때는 탕자였지만 이제는 돌아왔으니 맏아들을 잘 섬겨야지, 이러면 안 됩니다.

그것도 맏아들 꼴 나는 거예요. 아버지 집에서는 계속 우리 자신이 전부가 되면 안돼요. 독자적으로 우리가 나만의 것으로 전부가 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 방법은 매일같이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 눈앞에 보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래, 나는 나 자체로서 전부가 아니야. 그래, 나는 예수님의 것의 일부야. 그래, 나는 내 독자적으로 전부가 될 수가 없어.’ 바로 그것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한 나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을 늘 상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탕자로서 탕자 아닌 척 한 것이 얼마나 큰 위선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희들 우리 본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되찾게 해주시고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날마다 살려주시는 능력을, 모든 것이 십자가의 피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원천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증명하고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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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은 청지기

본문 말씀:누가복음 16:1-4 2011년 10월 9일                            

(눅 16:1, 개역)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 16:2, 개역)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눅 16:3, 개역)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눅 16:4, 개역)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눅 16:5, 개역)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눅 16:6, 개역)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눅 16:7, 개역)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피해 받은 사장님이 자기 돈을 훔쳐간 부하 직원을 도리어 칭찬합니다. 이 세상의 도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이유없이 살아갑니다. 그저 묵묵히 기계적으로 자기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위기가 왔을 때, 자신의 기능과 상관없이 자기 본색과 관련지어서 반응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의 꼬긱꼬긱 숨겨놓은 자기 본색을 들추어내면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죽음과 상관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성립하기 위해서는 ‘죄인’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란, 한때 죄를 지었던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무슨 일에 종사해도 죄가 되는 그런 죄인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발걸음으로 도심의 화려함에 매료되어서 그 화려함의 일부가 되어서 길을 걷다가 갑자기 열어놓은 맨홀에 빠지면 갑자가 자기 주변과 자기 신체가 처량하게 변합니다. 이처럼 아무리 분주한 일상에서 매여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 “나는 뭘해도 예수님 피 앞에서 죄인맞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사람은 영적 구조가 만들어놓은 맨홀에 빠진 것입니다. 그 안에는 참으로 기이하고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이런 경우가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심하게 홀로 죽어버리자 남은 자들은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따라 뿔뿔히 헤어지는 파장 분위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 3자의 모습으로 끼어드셨습니다. 예수님의 허무한 마지막 인생길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성경 말씀이란 반드시 성취되는 겁니다. 메시아는 죽어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납니다”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숙소에서 그 두 제자들과 함께 식사 중에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아채게 됩니다.

제자들을 경악과 더불어 말씀을 더디 믿는 자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이론에 불과하고 원칙에 불과하고 실제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개입하는 인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인간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기적적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처럼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모습은 이 세상에 성도가 존재해야 될 이유를 말해주는 겁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찾아들지를 않는 자들은 기존의 인간들이 사고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의하면 지옥간다”는 주장입니다. “불의한 자를 칭찬해주는 그런 메시아는 있을 수 없다”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예수님을 뒤엎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이유는, 사람이 다급하면 “살고보자” 정신이 도출된다는 점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는 확보하려는 재물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것이 아닌 주인님의 것으로 자기 것을 삼아 버텨보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님이 원래 의도했던 예상 통로가 됩니다. 이 통로를 따라 주인님의 피가 관통하게 됩니다. 즉 사람은 원래 자기만 살고자 하면서 남이야 손해 보던 죽던 상관없습니다. 이 인간성을 불의한 청지기는 충분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바로 그런 것을 ‘불의한 자’로 분류시켜서 이런 불의자들이 지옥가주므로서 그렇지 않는 자들이 천국갈 수 있는 정당성을 자체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지상에서 의로운 실적들을 많이 적체시켜놓는 일들이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구원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면에 천국갈 사람은 이 지상에 자기 몫의 의로움을 전혀 남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열심히 일할 때는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넘쳐날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청지기는 주인님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주인님의 현존 앞에서 그 청지가는 졸지에 불의한 청지기로 내몰릴 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코 자신에게도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죄 속에서 주인님의 일방적 칭찬으로 인해서 새로운 의로움과 올바름이 탄생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는 도리어 ‘칭찬받을 지혜’라고 규정해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에게 있어 자신의 삶이란 이미 들이닥친 종말을 보여주는 몸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의한 청지기를 앞장 세워서 거만한 바리새인들의 시대 판단과는 너무나 차이나고 대비가 되는 진실된 천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 지게 만드는 세상에서 종말의 의미를 아는 참된 지혜란 바로 불의한 청지기가 적합하다고 보신 겁니다. 그는 “내가 살기 위해서 무슨 수도 다 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님의 재산을 가지고 사는 그 모습이 바로 이 종말의 악한 세대에서 성도가 취한 바른 태도라는 겁니다. 주인님의 재산 속에 불의한 청지가가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 속에 자기 백성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자기 십자가가 곧 예수님의 십자가임이 드러나는 매개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악함 속에서도 의로움을 도출해 내시는 예수님을 친구로 여겨라 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대에서의 악한 자가 소위 선함을 추구하는 자들보다 더 진리를 이해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선한다고 여기는 자들만 구원된다고 가르칩니다. 즉 인간 스스로 선함과 악함을 따지고 본다면 결국 예수님께서 내세우는 ‘불의한 청지기’는 당연히 지옥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들이 구원받는다면 결국 예수님의 뜻이란 자신의 죄악된 본색 속에서 십자가 의로움을 발췌하겠다는 작전을 보여주시는 바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된 세상에 부합된 윤리관을 버리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97강-눅16장 1절-8절(칭찬받은 청지기)1110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6:1-8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 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8절에 보면 나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 하였으니”라는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기 돈을 도둑질 해간 자기 밑의 직원을 주인이 칭찬을 해주는 겁니다. 불의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을 칭찬한 거예요. 불의한 행동이 의로운 행동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불의한 행동을 한 그 속에서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구원받을 수 있는 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니 무슨 말이냐, ‘불의하세요.’ 그런 말이에요. ‘제발 나쁜 짓 좀 하세요.’ 그런 뜻이에요. ‘이 땅에서 옳게 살지 마시고 불의하게 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입니다. 별로 안 어렵지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아버지가 ‘네가 내 옆에 있어봐야 내가 너를 믿지 않는다. 빨리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서 자수성가해라. 빨리 나가라. 괜히 교회 왔다 갔다 하지 말로 빨리 나가란 말이다. 너 원래 나 안 좋아 하잖아. 안 좋아 하는데 왜 자꾸 교회를 오느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교회를 와? 네가 나 안 좋아하는 것 다 알거든. 옆에 붙어 있다고 해서 구원 안 돼. 멋대로 나가서 나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본때, 본색을 좀 팍팍 발휘를 좀 하란 말이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지 말고 교회 좀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좀 교회 오기 싫으면 오지 마!’ 하는 그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제발 좀 착하게 살지 마라. 인간이 착하게 산다는 것을 보니 참 가관이다. 가관이야. 제발 나쁜 짓 좀 해라. 네가 하는 나쁜 짓 속에서 내가 너를 구원하는 의로움을 내가 너에게 평가해줄게. 악하게 살았느냐?’ ‘예’ ‘지혜롭게 살았구먼. 구원받아라.’ 이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해당 안 되지만 기존교회, 교회에 놀러간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 교회를 주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천국에 가서 살지도 못할 사람을 어떻게 천국 보내주겠습니까? 이 지상에서도 천국생활 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죽어서 천국 가는 이것이 논리상 하자 없는 당연한 것인데 이 땅에서는 천국생활 안하고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립니까? 안되지요.

예수님의 오신 것은 이겁니다. ‘이 땅에서 천국생활 하는 사람을 내가 천국에 보내주겠다.’ 아주 간단한 논리에요. 그런데 이 땅에서 천국생활 못한다, 그러면 죽어도 마찬가지지요. 그 인간이 여기 사나 저기 사나 마찬가지인데. ‘여기는 힘들게 살아도 죽어서는 좋은데 가겠다. 내 존재가 죽어서 천국 가는 존재가 되겠다.’ 이렇게 존재적으로 따지는 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서 천국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생활은 어떤가, 그것을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탕자, 연이어서 불의한 청지기, 보통 불의한 청지기라 하는데 오늘 제목은 ‘칭찬받은 청지기’ 다시 말하면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청지기가 곱게 사무볼 때는 전혀 칭찬이 없었는데 주인의 돈을 도둑질 할 때 비로소 칭찬을 받습니다.

‘네가 참 제대로 사는구나.’ 하고 칭찬을 해주는, 피해 입은 주인이 오히려 칭찬을 해 줌으로서 그 칭찬받은 자만 천국에 간다는 그 진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성경을 우리가 잘 안 봐서 그러는데 성경에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당나귀가 이야기하는 것도 충격이죠.

집에서 당나귀가 고양이를 십년 째 키워보세요. 그것들이 말을 하는지.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당나귀가 말을 하잖아요.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그런 충격가운데 하나가 누가복음 24장에 나와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런 주제의 이야기가 나와요. 제자들이 예수님 죽었다는 소식 듣고는 이제는 그 동네 살기 싫어서 ‘이제 별 볼일 없다. 가자.’ 해서 고향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어떤 아저씨 하나가 끼어들었어요.

같이 가면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우리는 원래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인데 예수님 따르던 제자들인데 예수님도 죽어버리고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여기 있을 이유도 없어서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지으려고 갑니다.’ 할 때 제 삼자로 끼어든 그 나그네 아저씨가 하는 말이 ‘성경 말씀에 다시 살아난다고 했는데요.’ 하니까 ‘그거야,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이론상이지요. 성경은 다 이론이고 실제는 그냥 죽었어요. 당신은 성경보고 그런 소리 하는 모양인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다 이론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래서 별 볼일 없어서 내려갑니다.’

가다가 저녁이 되어서 식사를 하는데 떡을 떼어줄 때 예수님께서 식사기도를 하니까 갑자기 눈이 열렸어요. 보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 제가 충격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 계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 일상에 끼어들어서 성경말씀이 이론이 아니고 실제라는 것으로 계속 끼어든다면 우리가 교회를 몇 년 다녔고 직분이 뭐고 목사니 장로니 이런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십일조를 얼마나 했으며 봉사를 얼마나 했는지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직업이 뭔지, 의사가 되었든지 박사가 되었든지 국회의원이 되었든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인생에 계속해서 끼어들어서 실제로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제 어느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돌아오면서 아주 섭섭했습니다. 속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속이 안 좋았어요.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죽 했어요. ‘저는 기존교회를 이단이라고 봅니다.’라고 했거든요. 그 분이 하는 이야기가 ‘교회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했어요.

그 소리 듣고는 속이 더 시렸어요. 뭐냐 하면, 왜 자꾸 교회를 쥐려고 하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성경말씀이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인생에 말씀으로 계속 집어넣고 끼워 넣는데 이것이면 충분한데 왜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자꾸 ‘적어도 우리교회는 성도가 있다’라는 존재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우리 교회는 건전해, 얼추 괜찮아.’라고 교회를 쥐고 있느냐 하는 그 말입니다. 왜 그런가!

왜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가? 시간이 없고 갈 길이 바빠서 더 말을 못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놀라운 뉴스거리를 보고 ‘아, 그거야!’ 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잘 들어보세요. 인터넷 뉴스에 들어가서 보니까 ‘박주용 두 골 넣은 것 말소’라고 나왔어요. ‘이 동국 국가대표 복귀전 말소.’ 이렇게 되어 있어요. 특히 여자분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얼마 전에 우리나라하고 폴란드하고 축구를 했는데 2대 2로 비겼습니다. 그 때 박 주영 선수가 두골을 넣어서 2대 2로 비겼는데 FIFA에서 그 경기는 말소 되었다, 없는 경기로 치는 거예요. 왜 없는 경기로 하느냐, 왜 무효로 치느냐, 선수를 6명까지 교체할 수 있는데 폴란드 감독하고 합의해서 7명을 교체했기 때문에 이 경기는 말소, 즉 기록에 남아서는 안 되는 경기가 되고 말았어요.

그것을 보고 제가 황당한 느낌을 받은 것은 뭐냐, 박 주영선수가 공을 안찼습니까? 이 동국선수가 경기에 참가 안했습니까? 분명히 축구경기를 했다는 그 사실은 남아 있는데 후대사람들은 축구경기의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생각 안하고 역사에 기록된 것만 인정하더라 그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박 주영이가 축구를 했든 말든 기록된 것을 보고 우리가 판단을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고 느낀 것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심판주가 누구입니까? 교회 목사입니까? 목사가 심판하고 장로가 심판합니까? 우리 자신의 신앙을 누구한테 평가받고 누구한테 심판받아야 돼요? 목사한테 심판받아야 돼요? 목사가 신앙 아니라고 하면 신앙 아닌 겁니까?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판단합니까? 개혁주의신학이 역사적이거든요. 역사에 남겨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데!

문제가 뭐냐, 내 신앙을 내가 판단하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 신앙을 내가 판단하면 자기잘난 것 밖에 안돼요. 내 신앙을 목사나 장로가 판단 못할뿐더러 내가 내 신앙도 판단 못해요. 내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판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 들어왔다 하면 그것은 아무리 교회 나와도 구원 못 받지요. 어떤 목사도 안돼요.

울산강의에서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가 평소처럼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나는 뭘 해도 죄인이다.’ 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맨홀에 확 빠져버린 거예요. 맨 홀에 빠져버리면 그 맨홀안의 세계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세계, 구원도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행사하고 지옥도 예수님이 자기 맘대로 보내는 세계, 예수님의 자기 맘대로의 세계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설거지를 하는데 밥풀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딸이 결혼식을 한다. 그래서 엄마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가지요. 그런데 예식장에 가기 위해서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나는 지금 운전을 하든 말든 딸을 시집보내든 말든 나는 주님 앞에 무조건 죄인 맞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를 타고 가다가 맨홀에 빠진 것과 똑같은 거예요. 쏙 빠진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제자들이 엠마오로 갑니다. 자기가 아는 상식을 다 동원해요. 예수님의 제자니 오죽 아는 것이 많겠습니까? 요새 말로 신학자죠. 성경에 박사들이고 예수님에게 잘 배웠고.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버리니 그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종교, 신앙, 삼위, 예수고 뭐고 다 소용없어. 하나님도 안보이니까 다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밥이나 먹고 살자.’ 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본문 식으로 하면 그 두 제자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자기본색을 그냥 마구잡이로 드러낸 거예요. 지난시간으로 하면 탕자입니다. ‘아버지 재산 주세요. 나는 아버지하고 있기가 싫어. 나한테는 내가 전부야. 예수고 뭐고 하여튼 내가 제일 중요해.’

그 자기본색을 마음껏 발휘하는 그 순간, 거기에 주님께서 ‘너는 뭘 해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 맞다. 왜, 나는 너 때문에 피 흘렸잖아. 내가 죽은 이유는 네 죄 때문에 죽은 거야. 네가 피 흘린 이유는 네가 죄인이라는 뜻이기에 너는 내 앞에서는 무조건 죄인이야. 그런데 이 피로 너는 무조건 죄인된 것처럼 너는 내 피만 믿으면 무조건 의인이야. 네가 착한 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판단하지 마. 내가 의인이라면 의인이야. 네가 왜 말이 많아. 네가 네 행동에 잔소리를 걸지 마. 네가 네 행동에 대해서 재판하지 마. 네가 네 행동에 대해서 판단하고 시비 걸지 마. 십자가 피가 몽땅 다 너를 의롭게 만들었어. 끝!’

여러분,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교회 와서 목사 눈치보고 그러지 맙시다. 우리교회 해당사항 없습니다만, 이근호가 십자가 달렸습니까? 제가 부활했어요? 나도 같은 입장인데, 나도 불의한 청지기고 나도 탕자입장인데 누가 누구 눈치를 봐요.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남겨진 기록된, 주위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해줘야 하나님도 구원시킬 것이라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그 세대에 대해서 주님께서 파격적인 전복, 완전히 거꾸로 되는 경우를 제시해버립니다. 그 이야기에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다. 안 지키면 나쁜 인간되어서 지옥 갑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그들이 만들어낸 종교분위기, 오늘날과 같은 교회 분위기, 신앙 분위기에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누구나 납득을 잘했어요. 왜, 교회 오기 전부터 평소에 품고 살아가던 신념과 인생관과 너무나 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들은 의문 없이 그냥 받아들인 겁니다. 그냥 받아들인 그것 때문에 그들은 누가 불의한 인간인지, 누가 지옥 갈 정도로 불의한 인간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작되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성공 못한 것은 나쁜 짓 많이 해서 저주받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분을 초청해서 간증집회를 하겠습니다. 이분은 평소에 막살고 제멋대로 산 사람인데 어느 날 성령 받고 말씀대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복 주셔서 미국의 상원의원 되었습니다.’ 이런 것, 요 옆 교회 초청받은 어느 상원의원.

누가 놀리겠습니까? 성령 안 받은 철학가들이 놀립니다. ‘너희들이 정치를 알아?’ 정치판에서 놀았다는 것은 (양아치나 조폭들같이) 침 탁탁 뱉으면서 어깨 으쓱거리면서 놀았다는 뜻이에요. 정치판에서 놀았다는 말은 속속들이 썩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서민들은 몰라요. 판사도 평판사로 살다가 평판사로 임기 끝냈다고 하면 사람 괜찮다고 봐줄 수 있어요.

그런데 판사인데 부장판사까지 올랐다? 썩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사도 평교사로 끝냈다? ‘아이고, 그래도 착실하게 사셨네요.’ 그런데 교감 지나 교장 되었다? 도가니입니다. 평 교인으로 집사하다가 죽었단다, 하면 모를까 목사하다 죽었단다, 하면 사기꾼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그동안 속여 왔던가요.

그래서 속여도속여도 속일 수 없는 인간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들이 대십니다. 누구냐, 불의한 청지기. ‘제발 좀 네 본성 따라 네 본색 따라 불의하게 좀 살아다오.’ 그 말입니다. ‘횡령 안하는 척 하지 말고 주인 돈 탐 안했다고 하지 말고 제발 자기 본모습을 확실하게 내 놓으라.’ 그 말입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수십 년 전부터 성경공부를 죽 해왔던 사람들이 있거든요. 처음에 성경공부 할 때 ‘어떻게 성경공부 참석하셨습니까?’ 하면 ‘직장생활 하면서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는 예수 믿고 복음대로 살아서 반듯하게 살아서, 인생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세계가 있으니 그 천국을 내다보면서 대비하려고 참석했습니다.’ 출발은 그렇게 해요.

한 10년 지나서 묻지요. ‘직장생활 어떻게 합니까?’ ‘직장도 주신 것은 하나님이고 직장생활 바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소명이니까 이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합니다.’ 또 한 20년 지나서 물어보지요. ‘직장생활 왜 합니까?’ ‘돈 벌려고 합니다.’ 진작 그러지. 사명이니 영광이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요. 괜히 가리고 있는 다고 표 안 나는 줄 압니까? 표 다 나는데. ‘목사 왜 하십니까?’ ‘돈 벌려고 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16장 1절부터 8절까지 읽었는데 1절부터 7절까지의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장님에게 평소에 착실한 직원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이 들려요. 돈관리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고 회계감사를 했지요. ‘돈 관리를 제대로 했는지 한 번 보자.’ 하니까 그 사람이 ‘사장님, 내일 하면 안 되겠습니까? 좀 준비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놓고는 집에 와서 연락 다 해서 ‘김 대리님이죠? 우리 회사에 납품 대금 미납금 얼마입니까?’ ‘10억인데요.’ ‘빨리 장부에 5억으로 하세요.’

그것도 ‘빨리’ 이것이 6절에 나옵니다. “말하되 기름 백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여기에 ‘빨리’가 나오지요. ‘내가 아직 이 자리에 있을 때 당신 빚 반으로 탕감해 줄게. 10억을 5억으로 해 줄 테니 나머지 5억 갈라먹기 합시다.’ 한 거예요. 그런 식으로 다른 대리점에 또 연락합니다. 그것이 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8절을 모른다 치고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신앙을 총동원해서 그 8절을 여러분이 적어 넣어 보세요. 힘드시면 객관식으로 해보세요. 1. 너는 죽었다. 너 같은 인간 지옥 안보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2. 네가 회개하고 횡령한 돈 다 갚으면 너는 천국 간다. 3. 나는 너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 보통 4번에 정답이 많아요. 4. 참 잘했어요.

몇 번입니까? 피해 입은 사장님인데 그 사장님 하는 소리가 ‘참 잘했어요.’ 왜 잘했다고 했을까요? 사장은 피해자인데 자기 돈을 횡령한 직원보고 참 잘했다고, 참 지혜롭다고 왜 칭찬을 했을까요? 이것은 우리 자신이 그동안 거짓되게 부활하신 주님의 침투 없이 스스로, 진짜 천국의 원리는 알지도 못한 채 좋은 나라 가려고, 죽어서 좋은 곳 차지하려고 스스로 자기가 거짓으로 끄집어낸, 착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조작해 낸 엉터리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주님이 준비해놓은 정답을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 시간 우리가 밝혀내야 합니다. 왜 천국의 주인공, 진짜 천국의 왕이시고 진짜 천국과 지옥이냐 하는 것을 심판할 수 있는 그 담당자, 최후의 책임자가 하시는 말씀인데 불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판사인데 판사로서 말한다. 참 잘했어요. 다른 소리는 듣지 마. 내가 너한테 참 잘했다고 하면 참 잘한 거야.’ 라고 할 때 그 판단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면 수십 년 교회 다녀도 다 헛것입니다. 횡령한 이 직원,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평소에 한 행동과 자기 자신의 본색과 일치성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참외 키울 때 거기서 인생을 논하지는 않지요. 촌에서 참외 우는 것은 그저 밥 먹고 살기위한 단순한 노동이니까 가볍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처럼 평소에 이 직원도 그냥 일을 할 뿐입니다.

돈 들어오면 장부에 기재하고 돈 나가면 나갔다고 기재하면서 평소에 하는 일일뿐이었어요. 진실로 자기본 모습과 자기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사장님이 자기행동에 대해서 시비 걸고 나올 때 비로소 자기다운 본색이 발동이 되는 겁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인간은 자기본색이 드러나는데 누가 죽던 말든 중요한 것은 누구다? 바로 이 세상에서 누가 뭐래도, 예수든 하나님이든 중요한 것은 누구밖에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바로 나 밖에 없다, 는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처음으로 접선하는 순간입니다.

살고 보자, 살고 보자! 집의 교훈 다 걷어치우세요. 다 걷어치우고 이것만 쓰세요. ‘살고 보자.’ 천국은 나중 문제에요. 지옥도 나중문제고, 이 땅에서 지금 쇠고랑 차게 되었는데 당장 중요한 것은 빨리 자기를 챙기는 거예요. 살고보자. 이것이 바로 지난시간에 아버지가 탕자보고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주인이 그 직원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빨리 네 본색을 드러내라. 쓸데없이 교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옳지! 그렇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살고 보자.’ 그 순간 그 사람은 뭐냐,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최초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이 세상 삶이라는 것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언제 생기는가, 남을 만날 때 이유가 생깁니다. 무슨 말만하면, 입만 떼면 늘 문제가 생겨서 이야기하기가 곤란한데……, 주의 말씀이라고 여기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우리가 결혼할 때는……, 우리라고 하니 주관적이라고 할지 싶은데 그냥 제 경우라고 하지요. 제 경우에 20대가 되니까 항상 빈자리가 있었어요. 그 빈자리란 어른들에게 배우기로는 ‘20대가 되면 결혼해야 된다.’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살면 안 되고 내 옆에 누가 있어야 돼요. 내 옆에 여자가 있어야 된다는 빈자리를 설정하고서 20대를 보낸 겁니다.

먼저 빈자리를 만들어 놔요. 무슨 말이냐, ‘혼자 살면서 20대를 다 보내서는 안 된다. 적어도 30대에 진입할 때는 옆에 누가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혼자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을 보면 얼마든지 혼자 살아도 편하게 되는 세대가 되었어요. 그러면 결혼을 언제 하느냐, 누군가를 만날 때 ‘아, 저 여자 같으면 한평생 같이 살아도 되겠구나.’ 해서 부랴부랴 내 옆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내 옆에 계시렵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혼자 살아도 되는데, 필수가 아니고 선택의 문제인데 ‘아, 저 여자라면 같이 살아도 되겠다.’라고 해서 그 여자를 그 때 만나는 순간 내가 저 여자와 살아야 될 이유가 새롭게 발생되는 거예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같이 여자하고 살았는데 그 여자가 나에게 살아가는데 부담을 줄때는 같이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지면서 그 옆에 마련되었던 자리도 없어지면서 이혼이 되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요즘 혼자 살아도 혼자 사는 것 자체가 내가 사는 이유가 되어버렸어요. 같이 살 이유를 찾지를 못했으니까. 그래서 결혼하신 분들에게 이유를 묻게 되면 ‘해야 되기 때문에 한 것이지 무슨 그런 따위의 질문을 합니까? 당연히 결혼을 해야지요.’ 하는데 그것이 질문한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같이 태어나게 하지 혼자 살아도 아무 지장 없는데…….’

이게 뭐냐,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내가 누구냐를 전혀 몰라요. 그냥 혼자 살고 혼자에게 재미있는, 나는 나에게만 이유가 돼요. 그런데 어떤 위기가 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유를 이야기하지요.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이 없어요. 그러면 ‘나는 불의한 놈인데, 존대도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불의한 놈인데 불의한 자도 이 땅에서 칭찬받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라는 이유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부활의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 앞에 등장하시는 거예요.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나는 이 땅에서 살 이유도 모르면서 편하게 나 편한 대로만 사는 거예요. 제가 취미가 바둑인데요, 아마 6단에서 7단정도 돼요. 제가 바둑 두는 시간을 재보니까 한수 두는데 0.5초에서 0.7초 걸려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빠른지 잘 모를 거예요. 1초도 안 걸리니까요.

그런데 바둑을 하면서 제가 뭘 배우느냐 하면 제가 빨리 두면 상대방도 빨리 두곤 해요. 재미있는 것이 심리적으로 그렇습니다. 빨리빨리 두면 상대방이 정신없어서 막 화도 내는데 화를 내건 말건 저는 빨리 빨리 두는데, 바둑 3백 몇 점 다 둔 뒤에 다 쓸어버리면 바둑판만 남아요. 인생은 아무리 나만의 스타일이라고 하면서 환경운동이다 뭐다 백날을 해도 확 쓸어버리면 그 바닥, ‘역시 나는 나밖에 몰라.’ 라는 그 바닥, 불의한 청지기, 그것만 달랑 남는 거예요.

그것을 말끔하게 드러내게 되면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남이 접근해야 소용없습니다. 남들은 천국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을 쥐고 있고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는 분이 접근해서 우리를 칭찬해 줘야 됩니다. 그 칭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원칙에 준해야 되는데 그 원칙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따라서 그 죄인 항목에 우리를 집어넣을 수 있는 여건, 사태를 하나님께서 일으킵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켜서 맨홀에 빠진 것처럼, 설거지를 해도 나는 죄인이고 딸 시집을 보내도 나는 죄인이고 하늘의 별을 따도 등산을 해도 뭘 해도……, 이런 것은 다 바둑판의 배치요 조합에 불과한 것이거든요, 그것을 확 쓰레기로 완전히 치워버리면 남는 것은 누런 때 묻은 바둑판 외에 남는 것이 없지요.

그 위에 또 바둑을 놓지요. 그러면 또 쓸어버리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우리 동기들이 60가까이 되는데 얼마 전에 환갑지낸 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60이라 하지 말고 30을 두 번 산다고 하라고 이야기해요. 60을 30의 두 번이라고 하니까 바둑 두는 사람은 금방 알아요. 그게 바둑으로 치면 한판이 아니고 두 판을 둔다는 그 말이거든요.

두 판이든 세 판을 두든 나중에 백 살이 되어도 쓸어버리면 그 밑바닥에 남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인 덩어리만 남는 거예요. 그 위에 어떻게 아름답게 수놓았든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를 이용해서 이 시대,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조성해 놓은 세계, 착해야 구원된다는 그 세계보다도 네가 더 지혜롭다, 그 말입니다.

아, 어려워라! 주님께서 그렇게 어렵게 해요. 그렇다면 그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것,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잖아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 살고자 하는 이 모습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 예를 들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죄 값으로 죽었던 그 살과 피, 그 십자가를 이제는 예수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로 강탈하든지 빼앗는 그것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는 그 경과를 설명하시는 겁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다 보면 ‘내가 십자가 질게.’ 그 다음에 ‘그 나의 십자가가 너의 십자가가 돼야 돼.’ 그 다음에 ‘십자가를 졌다고 까불면 안 돼. 그러면 자기부인이 안되니까. 너의 십자가는 너의 십자가가 아니었었어. 예수님이 너의 죄를 진 나(예수님)의 십자가였어.’라는 그 경로를 설명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4장 31절부터 보면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주께서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으로 봐서 우리가 못 미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거룩의 수위, 착함의 수위, 올바름의 수위, 윤리도덕적의 수위를 하나님의 수준으로 이루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미리 항복하라!

자기가 갖고 있던 잘남, 자기가 갖고 있던 거룩, ‘이런 착함과 모든 교회 봉사 같은 것이 다 소용없습니다.’ 하고 다 포기하고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그 말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재산으로 전환시키고 이전해서 내 것으로 버티겠다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받을 자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그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되어서 그 불의한 청지기가 갖고 있는 그 지혜가 이 세상에서 자기혼자 착하다고 우기는 그 십자가 없는 인간들의 거룩함과 성화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 때문에 죽으시죠. 그 당시 사람들이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고 죽여 버리지요. 예수님의 이 미친 윤리, 예수님의 이 미친 세상 관, 이것이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만 머물지 말고 불의한 청지기가 되어서 예수님의 이 미친 사고방식과 십자가정신을 이제는 내 것으로 전환시키자,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밉상 받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실 때 모든 사람이 예수를 다 미워했어요. 그 미움을 우리가 나의 미움으로 가져올 때 우리가 구원받는다 그 말입니다. ‘너희들은 착해라. 나는 혼자 악할 게. 이런 소리하니까 내가 밉지? 그래, 미워하고 미워해라.’ 하고 그 미움 받음을 더 감사하라는 말이고 그것이 더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 8절 중간부터 보면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무슨 뜻입니까? 친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고 불의한 재물은 나밖에 모르는 나, 내가 쥐고 있는 나의 모든 죄 성, 죄 졌다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말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 말은 ‘천하의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저입니다.’ 하는 죄인의 입장에서 ‘저, 예수님 필요해요. 저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예수님이 최고의 보물이에요. 살길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고 사귀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의한 재물을 탐하는 자, 나는 나밖에 모르는 자, 돈을 사랑하고 돈에 미쳐있는 자, 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하지요.

얼마나 고맙습니다. 전부 다 창기 되고 세리 되기 싫어하는데 주님께서 우리보고 너는 세리고 창기라고 해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이 감사하는 일이 십자가마을을 통해서 전파 많이 되었었어요. 사실로! 돌아오는 것은 뭐냐, 욕만 돌아옵니다. ‘이것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죄인이래.’ 하면서 하는 소리가 ‘나도 십자가 믿는 착한 사람이다.’ 하는 거예요.

세상에 ‘나는 십자가 믿는 착한 사람’이라는 공식, ‘십자가 복음 아는 착한 사람’이라는 그런 공식에 어디 있습니까? 자꾸 자기신앙 업적을 기록하려고 해요. 그것은 항상 말소되어야 하는데. 제발 기록하지 마세요. 기록 안 해도 내일 되면 내일의 죄가 또 나옵니다. 넉넉합니다. 평생 넉넉하게 죄만 지으니까 아무걱정하지 마시고 매일 매일 하루치의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지어서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죄 속에서 주님의 칭찬을 끄집어내는 주님의 작품에 우리 자신을 재료로 맡깁시다.


기도합시다.

착함을 근거로 해서 이 의로 남은여생을 편하게 살아보려고 교회 왔던 우리들, 반듯하게 살면 복 준다는 소문 듣고 교회 왔던 우리들, 주님께 충성하면 30배, 60배, 100배의 보상으로 축복한다고 알고 있던 하나님, 그것이 다 거짓되었으며 우리가 만들어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악마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짓에서 맨홀로 빠져서 진짜 십자가지신 주님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동행하면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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