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베인 인자

마가복음 2012. 1. 2. 09:58

목베인 인자의 주 되기 (피 되기, 처음되기. 빈자리 되기)

목베인 메시아의 주 되심

2011년 11월 1일 화요일 오후 3:27:35   김대식


마가복음 43. 원수와 오른편 자리 : 목베인 예수님의 주 되심

스스로 버리시는 권세와 스스로 되찾으시는 권세 (두 잉여 점 찍기)


(막 16:1, 개역)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개역)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개역)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개역)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막 16:5, 개역)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막 16:6, 개역)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7, 개역)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막 16:8, 개역)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막 16:9, 개역)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 16:10, 개역)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막 16:11, 개역)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2, 개역)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3, 개역)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4, 개역)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막 16:15,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6, 개역)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7, 개역)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개역)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9, 개역)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20, 개역)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습니다.
왜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냐 하면 유대인에게는 기적이라는 잉여를 치는,
즉 단절시키는 또 다른 잉여로써의 잉여라는 기적으로써의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임마누엘이 그러합니다.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두 하나님으로 쪼개어지는 겁니다. 기존의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성전의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새성전의 완료 때문에 기존의 하나님을 목짜르듯이 칩니다. 누가? 새성전의 하나님이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할례 하는 겁니다. 인간의 손할례가 거짓으로 밝혀지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성전, 바닥의 바닥을 친 성전, 곧 인간 손으로 짖지 못하는 예수님 자신이 친히 손수 지으신 참성전인 어린양되신 예수님이 참성전인 겁니다. 이 참성전에 어떻게 참예 곧 세례 할례 연합케 되는고 하는 원수됨으로써 참예 되는 겁니다. 곧 죄인입니다. 어린양 되신 참성전이신 예수님은 죄인을 찾는 겁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예수님이 새롭게 만든 새피조물입니다.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죄인이 아닙니다. 새피조물로써의 죄인이란 처음자리 곧 첫사랑을(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써 매일 매일 첫사랑(처음자리:잉여) 속에, 용서로만 사는 자로써 참예당한 자입니다. 이 새피조물은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피만을 증거할 수밖에 없어서 죄인의 자리에만 놓여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시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입니다. 마귀보란 듯이 행하시는 성령의 소욕 때문입니다. 곧 성도란 마치 십자가처럼 인간의 구원탐욕으로 십자가를 찾듯이 도리어 그 십자가가 저주의 작용으로써 피만 남기고 인간의 무시하는 포획장치로써 성도 또한 미끼로써 십자가의 운명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인간 좋으라고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솜씨 자랑 그것도 마귀 보란 듯이 자신의 용서 솜씨를 뽐내기 위해서 성도는 이 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퍼지듯이 포획장치로써 활용되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두 하나님이 갈라지고 쪼개지는 상황입니다. 마치 욥의 세친구의 하나님 속에서 욥을 빼내시고 욥을 마귀와의 내기 속에서 뽐내시고 과시 자랑하듯이 펼치시는 피 되기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할례하듯이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하나님으로 재편성하는 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결국 이 싸움에 인간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 부인이 바로 치는 겁니다. 단절시키는 할례하듯이 목을 짤라버리는 겁니다.

짤라보니 그 속에서 새 하나님이 나오는 겁니다. 새성전입니다.

이 단절성을 유대인을 넘지를 못하는 겁니다. 기적을 치는 기적을, 즉 기적의 이중분절인, 기적의 기적 스스로의 부인을 못믿는 겁니다. 믿을려면 앞의 믿음을 부정해야 하기 떄문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부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원수됨 악마됨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란 죄를 부정해서 추구하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율법을 성취한 그 자신마저도 부정해야 합니다. 이중부정입니다. 이중분절입니다. 결국 그 어떤 “나” 이든, 즉 자아 이든 무조건 자아를 부정하는 겁니다. 성화 되었든 말든,

왜? 완료는 예수님으로 족하다 라는 겁니다. 철저한 인간 배제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버리는 마당에
인간은 그저 선택 선민 구원을 운운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자를 버리심을 욥이 비로소 보고나니
마치 도마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지 않고서는 안믿어버리겠다는 그 버리심을 진짜로 확인하게 되니 입을 막고 재를 뒤짚어 쓰며 비로소 죄인입니다 라는 성령의 고백이 나오듯이 인간의 믿음을 짜내는 방식의 철저한 단절과 오로지 주님 쪽에서의 불쌍히 여겨 믿음을 부어주심 성령의 부어주심으로만 그 십자가의 완료 다 이루었도다를 비로소 알고 인간배제 인간단절에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느끼는 겁니다.
어설픈 성전짖기, 어설픈 율법지키기, 모호한 믿어대기, 의문의 교회봉사, 미흡한 기도, 꼼수 로 가득한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이제 더 이상 안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 옛사람이 하는 짖이 아니라 막살아나신 주님의 삶이 덮쳐서
완벽한 성전되기, 완성된 율법, 믿음으로 믿음이 오심, 감사함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교회되기, 채워달라 기도했는데 이미 넘쳐버린 잔을 누리는 기도되기 곧 기도인간임을 누리기. 꼼수가 가득한 십일조와 주일성수가 아니라 내 자신이 십일조 되신 예수님의 형상이 덮쳐서 안싱을 누리는 예수 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벗어나고 싶어도 못벗어나는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결국 이런 성령을 부어주심이 아니면, 첫사랑 처음자리(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빈자리)가 아니면
율법 지킨 나, 십자가를 믿는 나를 배제하면 나 조차도 남지 못하는 그 배제성을 인간 스스로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배제시켜버리고 단절시켜버리는 성령의 일을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내는 육의 소욕을 들통나는 겁니다.

여기서 성령의 개입이 의미가 있지 자기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개입의 의미를 추구해 버리면 그 성령은 어디까지나 나 라는 인간의 시다바리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나를 부정해 버린 상태에서, 머리 짤라버린 상태에서, 물에 빠뜨려 죽인 상태에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뭐를 하든지 간에 다 죄이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돌 문턱을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걸려서 탁 막혀 단절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마치 죄의 소원처럼 말이죠.
(여기서 가인의 제사인 자신만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인 더 나은 제사가 분리 됩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포획하고자 자신들의 제사인 가인의 제사를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의 제사에 아벨의 제사 곧 피 되기를 외치자 무슨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의 소욕으로써 서로를 포획하고자 충돌하게 되는 겁니다. 두 기적 곧 유대인이 구하는 악한세대의 기적과 요나의 표적이 있듯이 두 잉여 곧 두 포획장치로써 유대인은 예수님에게 가이사에게냐 하나님에게냐 라고 포획할려고 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인자의 살과 피로써 곧 십자가로써 포획함에 있어서 서로가 절대로 양보못하고 물러설수 없는 두 하나님의 충돌을 지층화로 표출 시키는 겁니다. 누가 더 나은 제사일까요? 인간 곧 유대인의 이런 가짜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왜 원수로 삼는지 알길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넘어선자를 통해서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넘어서서 넘어선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셔서 넘어갈 필요조차 없이 넘어서버린 결과물을
원인 없이 무시험 합격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 무시험 합격이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입니다.
아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네 라고 쉽게 생각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것이 내 좋으라는 생각으로 빠지게 되니 오히려 그것이 행함이죠.
안하겠다 하지말지 뭐 라는 행함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행함인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롬 4장) 이란 진짜로 손가락 까닥하지 않는
아무것도 안하는게 아니라 (그게 불가능하고 힘듭니다. 역으로 남들의 손가락질에 못견딥니다. 욕하거든요)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란 무지 무지 내 따나 이게 옳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놀랍게도 원수짖이라는 죄 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 뿐이였다는 겁니다. 아벨의 제사가 아니였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의 제사인 피 되기가 가인의 제사 뿐인 그 제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수가 없는 갇혀버린 상황에서 뒤로 빼돌리기 하는, 욥을 세 친구 속에서 빼내기를 하시는, 빼내기를 당하고 보니 그 제사가 세상에나 세상에나 가인의 제사였다 라는 불가능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것에서 로마서 4장에서 다윗을 언급하면서 사도바울 자신이 그렇게 당했고 성령을 받은 자는 그런 행함 속에서 빼내임을 당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피 무조건적인 용서 라는 겁니다. 결국 원수 되기입니다.)

에이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나도 나도 나도 하지뭐 라고 또 행함을 무의식 중에 펼치게 되면
또 걸림돌이라는 십자가 즉 기적을 부정해 버리는 표적을 거꾸로 기적 취급하듯이 유대인들이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악한세대가 기적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다른말로 하면 악한세대가 성전을, 축복을, 천국을 요구한다 라는 식입니다.

왜? 요구하면 안되는데?
정 요구하고 싶으면 이 걸림돌 넘어서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 라는 표적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 라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인이 되면 누구라도 가지게 되는 소망 바램 기대가 모조리 이 십자가로 인해
박살이 나는 겁니다. 가루가 됩니다. 가루,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눅 20:16, 개역)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눅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눅 20:18, 개역)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은 유대인 누가복음은 이방인 두 쪽 다 이 돌에 대해서 예외없이 적용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해서 넘어서게 되었는가? 넘어설 필요가 없이 주님 쪽에서 넘어왔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 쪽에서는 단절성을 보여주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쪽에서 넘어왔다는 것은 인간 숙제가 아닌 예수님의 숙제로써의 불쌍히 여기심 뿐이다는 겁니다.

넘어설려고 하지 마세요. 막사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차단 당하세요
걸림돌에 넘어지세요.
꼬끼오 꼬기오 꼬끼오 당하세요.
바리새인들에게 바리켸이트 당하세요.
제발 제발 막사시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이 두 점을 찍음으로써 이 두 모순의 점을 찍음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이제 스캔하기 시작합니다. 복사기에 다윗언약을 넣고서 이스라엘 전체를 스캔하여 쭈우욱 빛들이 엠알 시티 촬영하듯이 몸 전체 구석 구석을 다 스캔 촬영을 해 보니 웃기게도 행함 행함 주장해도 행한 것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정작 멸망받아도 할말 없이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새로운 기준에 의해서 몸 전체를 촬영 투시 스캔하듯이 이스라엘 전체를 스캔하면 새로운 기준인 십자가 즉 다윗언약에서는 새성전이지요 완료된 미래의 성전을 기준으로 해서 참선지자라는 스캔기계로 완료성을 알려주면 옮겨야 할텐데, 기존의 것을 버릴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판의 할례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양쪽다 쥘수가 없거든요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혼합 짬뽕 썩어버리면 부대가 찢어집니다.

결국 다윗 자체의 몸 뚱아리가 둘로 갈라져서 그 쪼개진 사이로 여호와의 긍휼이 횃불처럼 지나감으로써 다윗의 몸 자체는 예수님의 몸과 연결 연합성을 보여주고 즉 쪼개어짐(짤라내는 할례 : 단절, 심판)으로써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십자가에 달려죽음으로써 새몸을 이루시는 여디디야를 용서의 증거로써 화해로써 새잉여로써 주어지는 겁니다.

결국 율법을 준 이유는 죄를 거쳐오라는 겁니다. 죄를 거쳐오면 내 쪽에서는 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이 상한심령이고 자기부인 곧 회개인데 자신의 신체가 쪼개진 그 틈사이로 죽음의 간격 그 사이로 긍휼의 횃불 죄사함이(죄가 있어야 죄를 사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듯이) 지나가서 새잉여인 여디디야 라는 용서 즉 사랑을 주심으로써 이 잉여 새 잉여를 기준으로 해서 다윗개인의 사건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시켜서 선지자는 이 다윗언약을 기준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스캔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래서 두 조각이 납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 즉 사건이 가시화 되었다는 겁니다. 참성전인 완료된 성전이 가시화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자 성전 곧 인간의 손으로 짖는 성전, 손할례는 왜 비언약이며 악마적인지? 헌술인지? 그 값어치의 가치를 톡톡히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걸림돌로써 가씨로써 푹 수셔놓은 포획장치로써 다윗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됩니다. 동일하게 이스라엘 전체를 바벨론 포로 당하도록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망해도 상관없는 멸망자체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땅은 정결케 하고 인간의 성전이 의미 없다는 것을 일부러 줬다가 뺏다가 줬다가 뱃다가 애달케 만들어서 완료성의 참성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막사는 참선지자를 보내니, 막살지 않는 거짓선지자의 말에 꾀임에 빠져서 괜히 의문의 성전을 꼭 붙잡고 있다가 줘 터지는 겁니다. 손놓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이미 완료 된 언약 곧 약속을(눈에 보이지 않는) 안쳐다보는 자는 안덮쳐지는 자는, 그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전부이기 때문에, 나무 위에 달린 인자(완료된 성전)를 못쳐다보는 겁니다. 막사는자 곧 죄인, 죄인만이 쳐다보는 겁니다. 죄인이 아닌자는 쳐다볼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의인인데 쳐다볼 이유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의 오른편 에 서심이 일방적으로 원수를 만들어 내는데 그 원수가 바로 “나” 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원수 짖을 해서 원수가 아니라. 원수로 처음부터 태어났다는 겁니다.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원수 됨이 바로 주님의 오른편 서심 때문에 비로소 또렷이 톡톡히 드러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막삽니다. 그 막삶이 사실상 놀랍게도 핍박받기입니다. 그것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핍박받기입니다. 도망치고 다닙니다. 얼마나 막살았으면 도망치면서 살아갈까요. 완료 때문입니다. 빈자리(십자가) 떄문입니다. 막살지 않고 율법 제대로 지키고 이스라엘 왕으로써 잘했으면 절대로 핍박받을 이유가 없겠지요. 거짖선지자들이 주장하는 삶과 같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요 주님이 왕입니다. 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왕 되심을 눈에 보이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에게서 돌삐맞아죽을 소리를 하니 비로소 조용한 나라가 졸지에 시끄럽게 소동이 벌어지면서 그 시점으로 이스라엘이 두 조각 납니다. 할례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 막 사는 삶이 졸지에 예수님이 오시는 노선이 되는 겁니다. 노아가 술먹고 발가벗고 자게 되니, 졸지에 함이 그 수치를 비웃었고, 가만히 있던 가나안은 졸지에 저주 받게 됩니다. 이런 인간 자체가 땅이 되어서 함 땅(애굽)과 가나안 땅(여부스 : 예루살렘)이 원수로써 여호와의 전쟁에 일방적으로 배치되면서 정복대상이 되는 겁니다. 약속이 어떻게 구체화 되는가? 성령의 소욕이 어떻게 육의 소욕 육의 비웃음을 심판하는가 라는 원수성을 밝히듯이 주의 주 되심의 약속완성을 위해 배치되는 겁니다. 인간 인격은 처음부터 무시합니다. 우짜다가 실수로 원수가 된게 아니라. 처음부터 원수로 태어났다고, 처음부터 막살았다고 다윗이 말했듯이 말입니다. 어떻게 나를 이기셨는가를 보는 것이 완료된 약속을 보는 입장이지, 자신의 행함 밖에 안보이는 자는 약속이 관심사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구원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이 두 쪼개짐을 이스라엘을 실제로 쪼개면서 내부전쟁으로써 늘 수시로 펼치시는 겁니다. 망해도 실패해도 상관없는 완료를 보느냐? 나는 실패하면 안돼 난 반드시 구원받아야 돼 라는 자기 외에는 희망이 없는 자는 예수든 하나님이든 십자가든 성화든 뭐든지 이용하는데 이유도 없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긍휼을 바라는 것 뿐인데

오히려 그 원수 됨에 즉 오른편 서심에 반발하는 자들이
원수가 이중분절 되듯이 원수 속에서도 나 원수 아니야! 아니 내가 왜? 원수가 되어야 해? 주님의 오른편 되심 때문에 졸지에 내가 원수 되어야 한다고? 그럴수 없다는 그룹이 졸지에 생뚱맞게 우발적으로 새로 만들어 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도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십자가 상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두 강도가 있습니다. 그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두 패로 나누어 집니다. 한 쪽은 주님의 오른편 되심이 덮쳐져서 주의 주 되심을 외치는 강도와, 다른 한 쪽 강도는 놀고들 자빠졌네? 주의 주 되심을 비웃는 강도가 졸지에 예수님의 주 되심 때문에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둘은 그냥죽는 강도일 뿐이고, 그 어떤 차이성, 갈라지는 의견이 없이 그냥 분별이 없이 죽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기여이 예수님의 죽음이 둘의 차이성을 천국과 지옥으로 영원히 갈라버리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나사로를 영원히 건널수 없는 간격으로써 벌려 벌려 벌려놓듯이 말입니다.

이 일을 새잉여 새약속인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아무도 건널수 없는 간격을 본인조차도 못 건너는 간격을 주님께서의 불쌍히 여겨주심으로써 즉 넘어오심으로써 여디디야를 즉 성령의 소욕을 받은 겁니다.

세상을 사랑으로 용서로 긍휼로 은혜로 창조했지(더 나은 제사 : 십자가 ? 피 되기)
인과법칙의 원인의 결과로, 선악의 법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주님의 고집이요 소욕 욕망이 펼쳐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로마서 4장에 언급되었듯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의미가 강조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찾아오심 이전에서는 율법적 사고방식에서는 도저히 용납못하는 의미인데 도리어 자신이 율법의 반대자가 되어서 아무것이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도리어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다윗과 똑같이 예수님과 같은 운명처럼
가는 곳 마다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노선대로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노선 뿐입니다. 이것이 막살기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는 교회로부터 핍박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사람으로 부터는 당연하고요. 이것이 포획장치인 미끼로써의 성도입니다. 미끼가 고기보다 강할 리가 없습니다. 미끼로 달렸는데 강하면 누가 잡아먹겠습니까? 약하니까 잡아먹는 겁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보란 듯이 펼치시는 주님의 활동입니다.

행했냐 안행했냐 라는 개념에서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무관하게 즉 선악의 법칙과 무관하게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이 바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성령의 소욕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겁니다.
이 말을 율법을 여전히 염두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임마누엘 전쟁으로써 율법을 폐하시러 왔다고 표현해도 됩니다. 왜? 무조건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다르다 라는 자신만만하고 뻔번스러운 성령의 소욕을 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의 소욕이 보이면 아니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내 쪽에서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에서
흑암(지옥)의 백성
사망(지옥)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앉은뱅이
개같은 주인 없는 떠돌이 이방인 버림받은자

희년은 곧 복음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마지막 16장은 안식 후 첫날로 기록됨으로써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안식이라는 겁니다. 평안 샬롬 화평 화해 이다는 겁니다.
무엇이?

메시야의 목베임이 안식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문 제일 끝 부분에서는 기쁜소식으로써 전파하라고 합니다.

과연 기쁜소식이 될까요? 기쁜소식이라는 복음을 전할려면 자신이 이 내용이 기뻐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안 기쁜데 즉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니고 복된소리가 아닌데 어떻게 외칠수 있을까요?

목베인 메시야를 외치면
그 목베인 메시야의 주 되심을 외치면
그것이 무슨 주 되심이냐 라고 당장 따지면서 화해? 안식? 평안? 화평은커녕
소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같은 목베임의 운명이 졸지에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특징이 놀랍게도 “너희가 죽인 예수” 라고 조용한 동네에 괜히 벌집 수시듯이 벌통을 건드리는 겁니다. 사도들이 말입니다. 그 이후의 바울서신 모두가 그겁니다.

목베인 인자를 외치면 인간의 정으로 즉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인지
주님의 피 되심으로 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원수됨 죄인됨 막살기의 성전인지 즉 미끼 인지
목베인 인자를 외치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해체해 보면 알게 된다는 겁니다.
넘어뜨려 보면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일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오늘날 동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그겁니다.
소동이 일어나는 것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반복이 되게 됩니다.
역사로써 과거사로 취급되지 않고
실제 현실로써 지금 이 순간에 사건으로써 덮쳐져서 미래완료로써 땡기듯이
펼쳐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베인 메시아, 목베인 인자를 과연 인간의 힘으로 믿음으로 행함으로 외칠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냐 라는 겁니다.

불가능 합니다.

오죽 불가능하면 목베인 메시야로써의 마가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는 이 땅에서 단 한명도 없다는 겁니다. 복음증거자도 없습니다. 있어봤자 남이 아닌 교회가 그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은 살아서 여전히 활동하는 겁니다. 인간은 죽은 것으로 취급하면서 배치합니다. 가시화 되는 것은 마가복음의 사건이 여전히 생생하게 활동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인간이 배제 당한다는 것에서 말씀의 활동이지
둘다 살아서의 활동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두 점을 찍는 것도 아니요.
갈라짐으로써의 화평 평화도 아니다는 겁니다.

원수 됨으로써 이룬 화평입니다.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롬 5:10, 개역)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원수라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원수를 만들수가 없으니까 마치 조건갖추기인냥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원수라는 조건을 맞추어서 화평을 이루는 쪽은 주님 쪽에서의 숙제입니다.
주님이 아쉽지 우리가 아쉬운 것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원수를 만듬에 있어서 그 어떤 누구도 원수 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음은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원수를 졸지에 만드심으로써
그 원수를 발등상 되게 발등위에 두고자 주님이 우편에 서시는 겁니다.

창세전에 비밀이 천사에게 그만 누설이 됩니다.
바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신부로 삼는 겁니다.
여기에 천사는 반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자신이 신부가 되어야 할 자리에
말도 안되는 비천하고 거룩하지도 않은, 더러운, 나약한, 무식한, 아름다움이 단 하나도 없는 존재를 신부로 삼고자 함에 있어서
창조주는 심히 기뻣더라에 천사는 반발합니다.
일부러 누설한 그 기밀을 이제는 반발한 천사세력을 탕진하고자
지구를 만들어서 두 나무를 심어서
자신의 신부를 구출하여서 천국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그 내막을
비밀도 아닌 일부러 누설하여 공개된 비밀에
참여 동참은커녕 반발한 천사 곧 악마를 심판하고자 함은

마치 창조 자체가 마귀보란 듯이 펼쳐진 겁니다.
오로지 은혜입니다. 즉 은혜란 오로지 선악만이 분개하는 겁니다.
선악만이 이 은혜를 죽도록 싫어하는 겁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은혜로써 선하심으로써 일당을 주니까 놀랍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을 다 채운 맏아들 같은 선악의 인간들이 반발합니다. 악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탕자같은 딸랑 1시간? 30분 일한 자는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에게만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막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이 성도의 막살기가 바로 상대적인 포획장치로써 작용한 겁니다. 아벨의 죽음은 졸지에 아벨을 바쳐버리는 선악의 제사로 표출되고, 아벨의 죽음은 예수님의 삶과 졸지에 연합이 됨이 예수님의 마음대로로 인해, 막살기로 인해 연결되지만, 가인은 더 이상 그 제사 외에는 없는 겁니다. 그 제사가 정작 발가벗겨보니 살인입니다. 라멕이 그래서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영웅의 제사. 잉여공로설을 외치는 인간들 곧 사제나 신화를 이룬 인간들이 그런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는 연결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마귀의 방해는 그 은혜가 자신들에게는 심판이기에
그 은혜로 창조함을 선악의 법으로 취급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두 싸움의 가시화가 바로 시공간이라는 역사가 무대배경처럼
구조로써 배치되는 겁니다.

정작 역사인 시공간은 껍데기 이고
실체는 묵시인 십자가의 피가 주체를 이루는 겁니다.
선악의 법과 은혜의 법의 충돌이 펼쳐짐으로써 모든 피조물은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삶이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삶만이 알파와 오메가로써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 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마저 조작해낸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만이 그런 유대인과 충돌하면서 드러난 완료성인 십자가의 피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종교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과의 충돌로써 완료성인 십자가의 피입니다.
가인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아벨의 제사입니다. 미래에서 이미완료로써 덮쳐온 소급된 제사입니다. 딸랑 30분 1시간 일하고서도 만땅일당을 받는 은혜는(더 나은 제사, 막살기)는 긍휼을 도출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 긍휼의 용서를 선악의 법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개하는 살인으로써 핍박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막살기가 핍박받을까요? 막살지 않기가 핍박받을까요? 성경은 이상하게도 동일하게 사건이 발생합니다. 참선지자 거짓선지자의 활동에서도 그랬고,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에서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결국 무슨 일을 하셔도 주님은 은혜를 은혜답게
믿음을 믿음답게 하시기 위함은 주님의 숙제로써
주님을 주님 답게 펼치시는데 있어서

항상 마귀를 동원해야 하는 겁니다.

마귀는 무조건 마귀 답게 그 은혜성을 파괴하는 일만 전력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을 통해서 내기를 하는 겁니다. 욥을 마귀에게 넘겨버리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일부러 가만히 있던 마귀를 살살 골려서 깨작 깨작 성질 돋우어서 내기까지 걸면서
사단의 가시를 욥의 몸에 박아넣습니다.

이것은 욥이 원하지도 않던 바요
주님의 자신만만한 믿음이였습니다.

결국 지혜란 말씀이란 마귀만을 상대로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배신의 배신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마귀 뜻대로 되는냥 일이 잘잘잘 풀리도록 하다가 막판에 뒤짚어 엎어버리면
비로소 악마는 가인처럼 안색이 변하여서 덤벼듭니다.
법이란 피조물끼리 치고박고 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오로지 창조주에게 달려들어야 법적효력이 발생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자녀에게는 법이 아닌 사랑으로 펼치시는데 일관하십니다.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은혜로 창조했지 선악으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작 행함의 법칙인 선악의 법칙은 마귀잡을려는 올무입니다.
쓸데없이 우리가 괜히 만지작 거리다가 말려들었는데
사실은 마귀만을 상대로한 나무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 시선은 딱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 쪽에서 사랑하는 행함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여디디야입니다. 즉 원수사랑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선은 행함 하라 하지말라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 곧 소욕을 가진 자는 성경 말씀이 하라 하지말라 로 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시선 곧 십자가의 시선으로 보게 된 자는
하라 하지 말라가 성경말씀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이 간격을 벌려 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못합니다.
주님이 벌려서 횃불 긋듯이 복사 약속 인증샷 도장 쿡쿡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라 하지말라로 성경말씀이 보이는 인간들에게는
목베인 메시아야가 자신들의 머리 곧 주로서의 주 되심이 안되기에
본인들이 목베인 영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목베인 영혼을 양산시키는 핍박자가 되는 겁니다. 본인이 목베인 영혼이 될려고 조건을 갖추는 원인있는 결과로 조작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마약입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죽으러 가자 라는 디두모 라는 도마는 죽음이라는 순교조차 마약처럼 타인과의 간격벌리기라는 조건으로써 갖추고자 했던 겁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무슨소리냐? 살리러 간다 라고 오른편 자리에 신경쓰고 있지 그런 인간들의 마약 조건을 옹호해 주지 않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덮쳐지는 상황이지 자신이 피한다고 또 반대로 일부러 타인을 살해하고 죽여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로 시인하게 되는 꼴이 되는 거죠.
이것도 마치 잉여와 같습니다. 기적과도 같습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 곧 유대인처럼 잉여처럼 덮쳐져왔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덮쳐지듯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럼 반대로 성경말씀이 하라 하지말라가 전혀 없고 오로지 은혜로만 보이는 자는
아벨의 운명인 예수님의 운명 뿐이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잉여로써 덮쳐지는 것입니다. 아들의 소원이 말입니다. 일부러 목베일려고 분위기를 조성했다면 주의 주 되심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조건을 갖춘셈이 되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피해가야 합니다.

아들의 소원은 아버지와 아들만의 약속입니다. 인간배제입니다. 아들 마음대로입니다.
그러나 죄의 소원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입니다. 선악법입니다. 그러니 막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구비해 놓는 조건을 갖추어야 만 합니다. 그러니 가인의 제사는 하면 할수록 트라우마가 되는 겁니다.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트라우마가 됩니다. 트라우마가 된다는 말은 상처가 된다는 의미로써 제가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배제요 처음부터 죄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을 수용못하겠다는 의도로써 남을 죽여버리는 살인이 되는 겁니다. 죄책감이 그런 겁니다. 죄책감이란 막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요 반성인데 그것 작심3초가 되어 넘어설수가 없는 겁니다. 도리어 그 죄책감은 얼마가지 않아 살인의지로 바뀌게 됩니다. 가인의 제사가 그런 겁니다. 내 제사를 안 받아주는 이상, 남이 아무리 자신 보다 잘 뛰어난 제사를 드려도 수용을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인정못하는 겁니다. 나를 안받아준 이상 말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소원인 막살기는 핍박받는 버림당함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빈자리 라는 십자가 곧 처음자리를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괜히 막살기로 제사 드리다가 개죽음 당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제사와 졸지에 연결시켜 버립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아들의 소원에 일방적으로 십자가의 지혜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이런 부정성은(마치 기생라합의 거짓말과 며느리 다말의 스캔들, 즉 행함과 차이나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기존에 인간들에게 고정화 된 의미들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구축된 것은 인간이 조립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의 부정인 임마누엘입니다.

그렇다고 막살기가 가능하냐? 아니 핍박받기(막살기: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빈자리 라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가 자기 혼자 가능하겠습니까? 짝이 있어야지요?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짝을 갖추기 위해서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이 안 드러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짝을 갖춘다고 하니 그 짝이 공로가 있느냐? 아니죠.
오히려 들러리가 되는 시다바리가 되는 겁니다.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두움은 시다바리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더 빛 답게 그 차이성을 제대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도록 확정되는 겁니다.
잠잠케 만드시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 앞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목베인 인자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성령님께서는 계속 반복해서 오늘날 현재까지 나 앞에 드러내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 앞에서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남이 아닌 나 앞에서만 매일 말입니다.


내가 죽인 예수님을 이제 증거하는 겁니다.
내가 죽인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라고
이제 졸지에 내 삶이 모조리 빼앗긴 상태에서 증거하면
그야말로 막살게 되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삭제 당해버려서
그 첫사랑만 증거하면

이미 기존에 마일리지를 쌓아놓고 있던 자들이 비로서 발악을 하고 반박을 하는 겁니다.
내 친구 내 가족 내 친척들이 욥의 세친구들처럼 반발하고 달려듭니다.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에게서 빼내시는 임마누엘 싸움입니다.

나도 저들의 하나님과 같이 믿고 같이 아무런 문제 없이 지냈는데
저들의 하나님 속에서 빼내시는 새로운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저들에게세 미움을 당하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는채 이 애매한 상황에
마귀와 하나님의 내기 속에서 새우등 터지면서
나보다 더 심하게 더 나은 새우등 터지는 새로운 분을 보고서

목베인 인자를 보고서
왜 빼내시는지? 그 차이성의 간격을 벌리시는지?
죽음 속에 놓이고
다시 살려내심 속에 놓여서

이 십자가의 피 속에서 피 의 완료를 피의 막살기를
성도에게 표출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가시화가 되는 현장이 바로 복음의 현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목베인 인자의 노선에 주님께서 아들의 소원대로 자신의 자녀들을 넣으심으로써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육의 소욕으로 인한 소망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 뜻대로
예수님 마음대로
예수님의 막살기로써
십자가의 현장이 어두운 구석 구석에 까지
양보없이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그 피의 현장에서 너희가 죽인 예수 외치는 성령의 음성으로써
내가 죽인 예수가 나의 주님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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