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2.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짖는자여] 와 [성소 휘장이 둘로 찢겨 갈라짐]


마귀가 만들어낸 착한 인간(선악인간,가룟유다)

                                          vs 예수님이 새창조한 단절인간(십자가인간,종말인간)



(막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막 15:30, 개역)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막 15:38,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4:72, 개역)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막 15:1, 개역)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막 15:2, 개역)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막 15:3, 개역)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막 15:4, 개역)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막 15:5, 개역)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막 15:6, 개역)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막 15:7, 개역)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막 15:8, 개역)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막 15:9, 개역)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막 15:10, 개역)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막 15:11, 개역)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막 15:12, 개역)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막 15:13, 개역)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막 15:14,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 15:15, 개역)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막 15:16, 개역)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막 15:17, 개역)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막 15:18, 개역)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막 15:19, 개역)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막 15:20, 개역)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막 15:21, 개역)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22, 개역)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 15:23, 개역)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막 15:24, 개역)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막 15:25, 개역)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막 15:26, 개역)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막 15:27, 개역)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 15:28, 개역) 『(없음)』
(막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막 15:30, 개역)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막 15:3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2, 개역)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막 15:33, 개역)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막 15:34, 개역)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5, 개역)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막 15:36, 개역)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막 15:37,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 15:38,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9, 개역)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40, 개역)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막 15:41, 개역)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막 15:42, 개역)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막 15:43, 개역)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막 15:44, 개역)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막 15:45, 개역)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주는지라』
(막 15:46, 개역)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 15:47, 개역)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지난 시간에 피 되기 라는 제목으로 예수님 께서 피 되기를 실행하시고자 십자가로 달려가십니다. 여기에 인간은 그 피 되기를 하시는 예수님을 붙잡을수 없습니다. 또 그리고 따라 갈수도 없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주시기 전 까지는 절대 따라갈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피 되기란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 간격을 좁힐수 없는
그 어떤 인간의 종교의 신앙심으로도 넘을수 없는 3일 이라는 간격을 좁힐수 없도록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피 되기입니다.

피 되기란 결국 죽음 되기입니다. 종말 되기입니다. 심판 되기입니다.
그 죽음되기가 곧 생명 되기입니다.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으시고 스스로 되찾을 권세가 있으십니다.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이 피 되기에 인간은 피 되기는커녕 즉 믿음은커녕 행함만 주장합니다. 피 하기를 추구하는 겁니다. 나도 따라 죽지 뭐 !!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판사판이다. 바로 이것이 행함입니다. 순교도 행함이고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것도 행함입니다. 곧 죄입니다. 뭐든지 죄입니다.

(요 11:3, 개역)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개역)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개역)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개역)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개역)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 1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1:10, 개역)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 11:11,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개역)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개역)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개역)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개역)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16, 개역)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 11:17, 개역)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제가 지금 요한복음 10장과 11장을 올렸습니다. 10장에 올린 구절 마지막에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즉 단절이요 소통불가이며 차단입니다. 그러니 화합은커녕 분쟁이 더욱더 심해 집니다. 뭣땀시? 바로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음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11장에는 올린 구절 마지막 부분에 디두모 라는 도마 가 함께 죽자 라는 식으로 나올 때 그 함께함이라는 일치성은 즉 동행은 예수님 입장에서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항상 청개구리처럼 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주님은 함께 죽음으로 인해 즉 도마와 함께 죽음으로써 인해 간격을 좁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어버렸고 나흘이나 지난 죽음을 죽음이 아니라고 반대로 도리어 얻고자 하는 간격벌리기 로써 되찾으러 가시는 겁니다.

(요 11:4,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도마는 자신의 죽음 자신의 순교로 간격을 좁힐려고 했던 것이 들통나는 셈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음을 지난시간에 살펴봤습니다.

어떤 누구도 예외 없이 간격을 좁힐려는 시도에 즉 동행 동참 함께함에 있어서 무조건 반대로 간격을 벌리시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유인즉슨 인간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육이란 말씀에 예정된 바가 아닙니다.
육은 예정 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은 원인 결과의 순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육적인 안목으로써만 행동합니다. 예정된 것을 볼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함에 집착합니다. 그것도 자기 행함이지 남의 행함이 아닙니다. 자기 행함에만 집착합니다. 도마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라는 사고방식은 주님과 자신은 간격이 좁혀진 함께 동행함 곧 일치함이지만 수준 낮은 너거들과는 거리를 벌리겠다는 취지입니다. 항상 반대급부가 인간에게는 있기 마련입니다. 도마를 욕할 입장이 못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단해야만 하는 겁니다. 도마의 안목을 비켜가야 하는 겁니다.

죽기는커녕 되찾아야 하는 겁니다.

남들이 다 죽었다고 하는 그 나사로를 되찾는 겁니다.
여기서 누이도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같이 어울리고 정을 함께 베풀고 나누었던 동네사람들도 절대로 죽은 나사로를 되찾을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예수 너가 사랑했다메? 사랑했다면서? 그래? 뻔히 죽도록 방치했냐? 라고 너도 별수 없지 않느냐? 라는 배신감을 펼치는 겁니다.

자 이게 중요합니다. 결국 인간의 신앙도 믿음도 결국 행함인데
이 행함은 그 뿌리가 육입니다. 육은 결국 비아냥입니다.

비웃기입니다.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사고방식에서는 예정된바는 비웃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비웃기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신앙심은 곧 믿음은 복수심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은 절대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입니다. 하나님은 어차피 안 보이는 부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지 아니면 같은지 알길이 없습니다. 다만 눈에 지금 보이는 예수 만큼은 이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복수심을 펼칠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곧 예수님의 믿음은 바로 이 복수심을 끄집어 내는 겁니다.

자 피 되기는 결국 뭡니까? 인간의 신앙심이 복수심이였다는 껍데기를 벗겨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되기 곧 피 되기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거다 라는 겁니다.

헬라인 이방에게는 유대인과 예수님과 같은 동족끼리 저거들끼리 싸우는 꼬라지를 보니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는 겁니다. 어차피 둘다 지혜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아니다 라는 이유로 또 복수심을 펼치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를 박살내는 것이 십자가 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왜 간격을 벌리는 겁니까?
성령이 아니고서는 넘지못하도록 차단함으로써
인간의 신앙심이든
인간의 지혜든
결국 육이란 복수심 뿐이다는 겁니다.
이 육의 뚜껑을 안열어서 그렇지 열기만 하면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 뚜겅을 여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의 영을 받은자가 그러합니다.

없던 복수심이 살인의지가 졸지에 생겨나서 펼쳐집니다.

상상도 못했던 겁니다.

최근에 어떤 신간이 나왔는데 제목이 10초만에 살인이 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제목입니다. 심리학자가 괜히 연구한게 아닙니다. 착하다 정당하다 나는 나다 라는 그것이 오히려 더 부추기는 식으로 10초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살인이 자신도 모르게 욱하고 나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지금 예수님이 유발케 하듯이 툭툭 건드리는 겁니다.

너희들은 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육이야 라는 겁니다.
뭐 같이 따라 죽겠다고 함께 죽겠다고? 꼬끼오 꼬끼오 다.

그건 예정에 없어

예정은 오로지 성령 뿐이야

이 성령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시는 겁니다.

약속한 즉 예정된 십자가의 영을 받게 되면
내가 죽으러 할 필요가 없이
즉 주와 함께 죽겠다고 꼬끼오 세 번을 타 넘어서 건너가서 3일의 간격을 좁혀서 십자가의 일치성으로 죽을 필요가 없이 (허상)

도리어 이게 더 실감납니다. 위의 것은 허상입니다. 상상계입니다.
십자가의 영이 꼬끼오 세 번인 3일의 간격을 타 넘어와서 나에게로 오는 겁니다.
오시면 이미 죽은자로써 죽음하기가 아니라 죽음되기로써
종말의 인간이 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반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함이라는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령 조차도 소욕할려는 자신의 숙제인냥 성령 소유하기로 빠지게 되지요. 이 개 버릇 못 고칩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고맙게도 성령은 우리 육의 소욕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소욕에 반대되는 양상으로써 위의 간격벌리기처럼 일부러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모습으로써 무조건 반대하시는 모습으로써 성령이 주도권을 단 한번도 빼앗긴적 없이 행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육 또한 만만치 않게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베드로의 예나, 아무리 수제자인들, 가장 믿음 좋은자인들 별수 없습니다. 육은 육입니다.
성령은 일체 양보 없습니다. 안 속습니다. 도마의 예나, 나사로의 누이 동생들의 예나, 모조리 다 뚜껑을 엽니다. 일치성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일치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해 주십니다.
오히려 일치성을 갖추었다는 것이 더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성화론자들이 위험한 겁니다.

그럼 일치 안되게 3일이라는 간격 또는 스스로 버리시고 또 스스로 되찾으시는 그 사이의 간격을 벌려서 그 간격 사이에 무엇을 채우는 고 하니 우리의 원망을 채우는 겁니다.

원망을 해서 원망이 아니라. 어쩔수 없는 인간의 육의 한계를 채우는 겁니다. 그거 안들통나면 이 간격을 왜 벌리시는지 모르는 겁니다. 주님이 수셔대시면서 단 하나도 일치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오로지 나오는 것은 주님을 배신한 꼬끼오 뿐이였음을 그것을 도리어 예수님께 꼬투리 잡혀서 그 3일이라는 간격의 박스 안에 담아서, 광야에서 원망을 담아서 그 박스 위에 피를 뿌리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성도 되기가 아니라. 주님의 약속한 성령을 주셔서 만드시는 성령의 전 곧 성도입니다. 피로써 낳은 겁니다. 행함이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는 분이 죽는 마당에 줄게 뭐가 있습니까?
죽는자가 준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더군다나 이 십자가란 남이 아닌 내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라는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내 손으로 죽인 판국에 어떻게 받을수 있다는 겁니까?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말씀을 우리는 헛되게 본 겁니다. 유대인식으로 본 겁니다. 유대인이라는 인간의 대표성입니다. 즉 우리도 유대인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는 사고방식임을 단 한발자욱도 벗어날수가 없는 사고방식임을 지적받는 겁니다.

우리는 다윗을 봐야 합니다.

다윗이 왜 율법을 단 하나도 못 지켯고 도리어 불법을 행하고도
사하심을 받은자는 얼마나 땡잡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다윗이 죽였는줄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다윗이 죽인게 맞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버릴권세와 스스로 되찾을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이 성령 곧 정직한 영의 일하심 앞에서

다윗은 자신이 넘어가야하는 것이 아님을 도리어 철저하게 단절이 되어서
사울왕과 별 다를 바 없는 자임을 곧 살인자 임을 복수심 곧 율법 지키겠다. 성전을 주를 위하여 짖겠다 라는 것이 살인임을 마귀에게서 나온 것임을 지적받기 위해서
단절을 격어야 하는 겁니다. 그 단절이 바로 희생 3 안타입니다. 우리야 장군의 죽음, 밧세바를 취한 간음, 이름없는 아이를 꺽은 뼈로 만드심의 그 철저한 단절을 격어야 하는 겁니다.
회개 기도 금식 눈물로써 막아보고자 애를 쓰지만 그것은 예정된게 아닙니다.

예정이란 바로 이런 죄인 중의 괴수로써 비로써 들통난 다윗(남들은 지적받지 않아 내버려둔 사생아 이지만 사랑하기에 지적받음)을 이제 박스 곧 간격이 벌어진 그 사이에서 다윗의 죄악을 담아서 그 위에 피를 뿌리니 뿌뿌뿌 해방이 펼쳐지는 되찾음의 선물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여디디야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베드로에게 찾아오심입니다.

단순한 용서가 아닙니다. 단순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딴 사람에게는 그 간격이 벌어진적이 없는
다윗에게만
베드로에게만 찾아서 넘어오신 간격입니다.

왜냐? 둘이가 특별히 자기 쪽에서 넘어가볼려고 누구보다더 가까이 갖던 가장 가차이 근접한 자들이요 가장 멀리 튕겨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책감 그 간격은 인간의 육으로는 좁힐 길이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흑암의 백성인 저주받은 지옥백성이요
개같은 이방인으로써 그야말로 주인없는 자 취급받는 보호자 기업무를자 고엘이 없는 자 취급당하는 모습입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자신 쪽에서 행했던 믿음이나 신앙이
주님이 벌려놓으신 그 간격을 좁힐길이 없다는 겁니다.

물 위를 함께 걸었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도리어 물에 빠뜨려서 건져주지 않는 예수님입니다.

비로소 마귀가 박수를 치고
참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 답습니다 라고 원수들이 비웃고
잘 죽였습니다. 잘 죽였습니다. 저런 놈은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모든 자들이 비웃을 때에

왕의 지혜는 두 조각난 아이의 시체 사이로 횃불처럼 지나가듯이 선이 분명해졌고
모호하던 경계가 또렷해졌을때에 이미 죽어버린 어미의 썩어뭉개진 마음인 상한심령과 아이의 죽음을 팔을 어긋맞듯이 생명으로 옮기우시는 겁니다.

바로 이 어리석은 솔로몬 왕의 지혜인 십자가의 지혜 때문에
우리는 단절 되어야 하고 버리운바 되어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주도권이 있지 우리가 미리 눈치 채 본들 어차피 우리는 원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를 철저하게 베드로가 단 한번도 본적없는 또 어떤 누구도 마귀를 단 한번도 본적 없는 그 마귀를 보란 듯이 십자가를 이루시고

약속한 성령 대로만 일하시는 겁니다.

예정은 십자가의 영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육이란 이미 마귀에게 장악 당한 상태에서
일치성 동참 함께한다는 동행이란 어디까지나 자기도취요 신념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천억만분의 1의 고난만으로도 톡하고 건드리면 그 신념은 안개처럼 사라지듯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몸을 투사 시킨 눈에 보이는 성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피로 세우셨음으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자 음부 곧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니까
억지로 참고 견디고 인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은 말씀이지 우리의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실 숙제입니다.
우리는 허물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으키는 분이 주님이다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인지 아닌지 죽여보면 압니다.
죽었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 의인이 아닌 겁니다. 고로 우리들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간격을 벌리신 주님이 우리의 허물을 그 간격을 벌리신 공간에 3일이라는 공간
꼬끼오 세 번 울음이라는 공간 물론 우리가 무시했던 꼬끼오 미물입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세가지 물건이라는 공간에 우리의 허물을 담아서
그 위에 의인의 피를 뿌려서

심판이 패쓰 하는 겁니다. 심판 안 받는 것이 아니라. 피 보고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 피를 우리가 바를려고 아무리 지혜를 짜내봤자 신앙 믿음 행함 충성 봉사를 짜내봤자
한순간에 허물어 집니다.
주님 쪽에서 피를 발려 주실려고 스스로 버리심으로써 피를 우리에게 발라 주시러 넘어오시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막을려고 했던 겁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안 버리겠습니다 라는 신념은 한순간에 허물에 져야 합니다.
남들은 어떨는지 몰라도 저는 제일 먼저 주님을 버리는 놈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의 괴수 로소이다 아예 저에게 기대를 하지 말아주소서 저도 저에게 기대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라고 반전을 노리는게 아니라. 썩어 상한 심령으로 심판에서 저주에서 죄악에서 율법에서 마귀에게서 단 한발자욱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보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단절이다 라는 겁니다. 내 힘으로는 그 간격을 좁힐수가 없다는 겁니다. 회개로 눈물로 금식으로 기도로 아무리 해도 꺽으신 뼈를 살릴수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꺽으신 뼈로 기뻐 노래하면 춤추며 잔치를 벌려야 하는 것에서
모든 것이 주객전도가 되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과 타인의 욕망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 다움
하나님의 백성 다움을
껍데기로 그럴싸 하게 갖추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안 먹혀들고
홀라당 발가벗겨지는 겁니다.

어딜 니 똥 싼 것을 니가 치울려고?

어딜 감히 모래 뒤로 싹 감출려고?

주의 목전에 항상 죄가 있음을 주님은 기뻐하시는 겁니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주님이 해결하시겠다는 겁니다.
선악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것을
선악이라는 머리를 할례하듯이 짤라서
생명이라는 머리로 교체 당하고 보니
주의 목전에 항상 악을 행할 뿐인데 주께서 말씀하실때에 의로우시다, 판단하실 때 순전하시다 라고 미리 종말을 맞이하고 미리 끝을 맞이하는 모습이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받듯이
순전하시다 의로우시다 라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불법을 행하고서도 의로우시다 순전하시다 칭찬으로 더 지혜롭다 함을 여기심을 받는 자는 행복하다 라고 로마서에서 증거합니다. 바울 자신이 그랫거든요.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즉 이 말은 상대적으로 예수 안은 선악법 체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만약 법 체제이다 라면 ㅣ편 51편은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거짓이 아니라. 다윗은 원래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으니까 거짓이고, 시편이라는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겁니다.

선악 체제에서는 거짓이지요. 결국 인간의 육의 시선에서 아무리 말씀을 들따 봐도
성경 전체가 하라 하지 말라 라는 법 체제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은 자꾸 주님 쪽으로 일치할려고 바리새인도 넘고 마귀도 넘고 자기자신도 넘고
심지어 예수님도 넘고
십자가도 타 넘어서 하나님께 나아갈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복수심이라는 인간의 믿음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탐욕입니다.

십자가는 그 반대입니다. 차단 단절 시켜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넘어오시겠다는 방식이 간격벌리기의 십자가 방식 뿐이니까
인간들은 반발하는 겁니다. 그 방식만큼은 싫타 라는 겁니다.
꼭 마귀의 반응과 동일하게 반응합니다.
도리어 십자가의 방식만큼은 마귀 취급해 버립니다.
캬 이게 기가막힌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의 방식만 추구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발똥을 합니다. 바알세불 걸렸다는 둥
십자가의 방식만 안 취하면 바리새인은 예수님과 어떻게 해서든 화합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차단합니다. 마귀자식이라고
아니 예수님과 친하게 할려고 하는 것도 마귀취급해 버리다니?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지금의 행동을 보는게 아니라.
아예 수직적으로 창세전의 예정인지 아닌지로 따지는 겁니다.
스스로 버릴권세 스스로 되찾을 권세의 간격벌리로 허물이 덮혀진 십자가의 피 라는 예정만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하시지 지금 인간들의 온정과 연합과 함께 하겠다는 열심 또는 신앙심, 또는 충성 봉사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목숨버리는 결단과는 상대안하고 휙 간격을 쭉쭉 더 벌려버리는 겁니다.

어딜 감히 그런 쓰레기로 주님께 다가오겠다는 겁니까?
기적 따위를 바라는 것이 악한세대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바로 기적을 바라는 그 기적을 확 잡아 찢어 죽여 무참히 짖밟아 버리는 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주님 쪽에서 마련한 기적인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써만 넘어오시겠다는 겁니다.

바로 그 십자가가 싫타 라는 겁니다.
육은 기겁을 하면서 온 발악과 발동을 하면서 십자가가 다가올까봐
하나님의 버리심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가 다가올까봐
선악의 몸은 기겁을 합니다.
그러나 그 머리를 댕캉 짤리지 않는 이상
마음 판에 할례
상한심령이 되지 않는 이상은
십자가를 이해 할 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믿음도 안 통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로지 예정된 대로만 실행하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선악의 몸으로 구성된 머리를 짜르셔서
생명의 몸으로써 머리가 되시지 않으면
나를 이기지 않으면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나의 머리를 치시지 않으면
내가 내 몸에 갇혀서 마귀에게 갈기 갈기 찢길 뿐입니다.

지옥 가지 전까지는 마귀가 애지중지 하기에 다 속는 겁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머리 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결국 자기가 자기 머리 사수일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미운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기 때문에 배신감과 비웃음의 굴욕이 서로 서로를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5장 전체를 올렸습니다.
14장 72절의 베드로의 부인으로 닭이 세 번 우는 사건에 이어서 이제 예수님이 세가지 죄목으로 고소 당하고 빌라도에게 심문 받고 유대인과 로마인의 연합으로 인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막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막 15:30, 개역)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막 15:3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짖는 자여 라는 구절과

(막 15:37,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 15:38,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9, 개역)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라는 구절로 제목을 삼았기에

이 부분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성전을 헐기는 헐었는데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면 거짓이 됩니다.
문제는 다시 세워질 방도가 인간 쪽에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성전을 헐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언약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 중심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멸망을 합니다.
성전 허물기입니다.
이 성전을 건드리기 시작하니까
아니 성전 스스로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듯이
성전 중심으로 왕위 쟁탈전의 본격적인 탐심을 주의 전을 위한 열심히 주님을 삼키듯이 본격적으로 벌어집니다.
결국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라 성전에 의해서 놀아나는 장난감으로써 배치가 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목숨걸고 빼앗을려고 하고 목숨걸고 쟁탈전이 벌어지는 겁니다.
왕의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미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성전이 인간의 육을 툭툭 건드린 거죠. 성전 허물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없는데. 인간 육 허물어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튼 성전이 인간을 툭툭 건드리는 것을 마치 인간이 성전을 건드리는냥 보이도록 사건이 벌어지니까 여기서부터 이중분절이 일어나는 겁니다.
바로 그 성전으로부터 거짓선지자가 출현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두 주님의 이중분절로 인해서 보이는 성전 곧 교회 보이는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주께서 내 주께로 인해 참선지자가 아다리 되겠끔 맞수로써 거짓선지자와 동시적으로 출현합니다. 언약 곧 약속이 드러날려면 반드시 비언약이 동반수행을 하는 겁니다. 빛은 그래서 어두움을 수반해서 자신을 나타냅니다.

결국 참선지자는 허물어진 성전을 토대로 인해 새성전을 미리 앞당겨서 증거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는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참성전이라는 겁니다. 미래의 성전이 완료 되었기에 지금 눈에 보이는 성전의 가치는 도리어 그 성전의 허물어 짐으로써 또렷하고 생생한 성전을 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이 말이 더욱더 씨알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말씀을 모른다면 처음부터 시작하는 식으로 새출발하면 말귀 알아먹지만

이미 말씀을 잘 안다고 하니까 더욱더 씨알이 먹혀들지 않는 이유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 여호와 하나님은 거짓의 하나님이요 배신때리기의 달인이 되는 식이니까
우리의 명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채통이 깍이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 하나님일 리가 없다는 겁니다. 완전히 앞의 언약들을 뒤엎어버리는 식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그런 하나님은 우리와도 상의하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알려주지도 않고 실행을 해 버리니까 앞뒤가 모순이 되고
또 문제는 너거들 참선지자라고 우기는 거짓선지자들이 무슨수로 그 모순을 극복했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선지자는 그런 거짓선지자들의 평강 평강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에
도리어 꼬장을 피우듯이 삐닥이로 행동합니다.

아니 완료 되었다는데 왜 모호하고 흐릿하는 것들을 잡고 우겨 쌈싸먹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으면서 사기칠래?

이런식으로 되받아치니까 서로가 서로를 물과 기름처럼 양분되어서 이중분절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오히려 이런 이중분절을 막고자 하는 쪽이 거짓선지자 쪽이요
이 양분의 이중분절이 안 나타날까봐 걱정하는 쪽이 참선지자로써 아무리 모든 백성이 저쪽에 섰어도 반드시 단 한명의 자신만큼은 그 반대의 자리에 서버립니다. 그래서 이중분절을 기정사실화 하는 겁니다. 그래야 통합되지 않는 나라를 이런 모호한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서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의 눈에는 참선지자가 그야말로 마귀입니다. 마귀.

자꾸 분열 시키니까 말입니다. 거짓선지자의 모든 말들은 통합입니다. 단결입니다. 일치성입니다.

참선지자는 오로지 여디디야 완료가 있으니까 막살자 라고만 외칩니다.
완료 때문에 저런 거짓선지자의 패거리들의 모호한 것을 붙드는 것에
상한심령이 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저들은 번제나 제사가 되는 것이고요.

반드시 상대적이지 독자적으로 혼자 툭 하고 떼어낼수 없습니다.
일부러 다가가서 얄밉게 반대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극을 이룹니다. 맞수를 이루지
제 3의 영역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전중심으로 벌어지는 갈라짐입니다.

문제는 이 성전이 신약에서는 몸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몸과 곧 육과 예수님의 몸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의 몸이 구체적으로 못 박힌다는 것은
상대적인 인간의 몸이 예수님의 못 박힌 십자가에 반대편에 섰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몸도 반대편에 선 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몸이 다윗언약에서는 성전으로써 , 그 성전의 구체성이 신약에서는 몸으로써 표현된 겁니다.

몸을 모든 육체를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완료된 그리스도의 몸이 있기 때문에
허물어 져도 상관없는 몸(성전)이 참선지자가 주장하는 인자의 몸이고

인자의 몸이 안 보이는 자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성전(교회) 곧 자신의 신체의 몸을 위해서
덕지 덕지 예수든 하나님이든 구원이든 모든 것을 덕지 덕지 붙여서 일치성 연합 함께 동행으로써 정당화 하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정작 참선지자가 갈기 갈기 찢겨버립니다.

예수님이 찢겨 버립니다.

원인과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님과 참선지자는 틀렸습니다.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육의 눈에 안보이는 세계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완료된 몸을 입었는지 다시 믿음으로 살아났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 도리어 모순적으로 볼 때
예수님과 참선지자는 도리어 죽음으로써 말하고 있습니다.

(골 1:22, 개역)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말도 안되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화목케 되었고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결국 예수님과 아니 예수님 빼고 인간인 참선지자들은 우리를 말려들게 해서 우리 손에 죽음으로써 도리어 우리를 용서하고 흠없게 하는 마치 비천한 미물인 꼬끼오 닭, 천박한 부정한 물건인 도장 도장끈 지팡이 곧 창녀의 몸 값, 또 밧세바 겁탈, 우리야 고의적으로 야비하게 죽이기, 이름 없는 아이 죽음. 등등이 참선지자의 모습으로써 우리에게 덮쳐오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보이는 성전, 보이는 이스라엘, 눈에 보이는 나 자신의 육체의 멸망에 너무 미련두지 말고 이미 완료된 그리스도의 몸을 보라는 겁니다.

안보이면 보이는 것만 사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보이면 참선지자의 부정화된 3이라는 간격벌리기에 물증박스 노선에
예수님이 동참하셨듯이
성령을 입은 자는 여기에 담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 라는 의미입니다. 회개란 눈물 흘리거나 또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거나 기도한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이 간격벌린 그 3일이라는 공간이 두 점을 찍어서 갈라짐으로써 두 패로 나누어졌을때에
그 사이에서 곧 죽음에서 태어난 즉 물 속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광야 속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없음]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가 바로 두 양쪽 갈라진 틈에서난 처음자리를 그 빈자리를 마련한 육의 방식의 반대인 성령으로 난 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회개하는 자가 아니라. 회개된자로 태어난 겁니다.

회개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입니다.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우기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런 모습이 상대방을 걸기 위한 역이기 위한 모습인 것이지
독자적인게 아니다는 겁니다.
회개할 필요조차 없다고 한다면 누가 이런 자들을 심판하러 나설까요?
당연히 회개하는 자들이 나서는 겁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심하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저 더러운 나라팔아먹어서 민족과 하나님을 배신하는 누가봐도 배신하는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은 자가 심판하러 나서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법을 쥐게 되는
결국 돌을 권력을 힘을 쥐게 되지
힘이 없게 되어 죽은자가 된게 아닌 겁니다.
상하고 썩어 문들어진 마음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얄밉게도 그 세리가 내 뭐 뭐 뭐 라고 달려들면 참으로 좋을텐데
도리어 위를 쳐다보고 머리를 팍 쑥여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여 마땅히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백번 지옥가도 마땅한 자입니다 라고 상한마음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자신을 쳐다봐도 의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마귀에게 갇혀서 한 발짝도 벗어날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제발 제발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성전에 두 사람의 졸지에 차이가 남으로써 성전이 쪼개지고
하나님이 둘로 쪼개지는

거룩이 펼쳐집니다.

휘장이 찢어지듯이 둘 로 갈라져서

누가 옳다 틀리다가 아니라.

두 패로 나눈 분이 바로 그 둘 사이에서 횃불이 갈라진 틈사이로 지나가듯이

하나님 자신이 갈라졌다는 겁니다. 썩어 뭉개진 마음이다는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인간의 믿음으로 믿기가 가능한 하나님을 쳐버리는 겁니다.
율법 지키기 할례 행하기 안식일 행하기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 본문에서 놀랍게도 치밀하게 안식일과 율법 등등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서로 자신의 손에 피를 안 묻히고
부정함을 타지 않기 위해서 빌라도를 이용하는 모습도 그렇고 빌라도는 안 말려들려고 자신의 지혜를 펼치는 것도 그렇고

지금 완료됨이 없기에 서로가 서로들이 모호한 그림자에 충실합니다.
즉 자신의 신체에만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충실합니다. 그래놓고 율법 지키고 있고 빌라도는 반란을 막고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들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갈기 갈기 찢기는 겁니다.

또 찢겨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짖는자여?
라고 놀랍게도 저들의 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 입에서 수시로 외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너의 그런 간격벌리기가 우리에게는 안통한다 라고 비웃는 겁니다.
과연 비웃을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니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더 심합니다. 이 간격을 벌리는 십자가를 아주 아주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롱하고 비웃은 그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반드시 우리는 비웃음을 담을 수밖에 없는 원망을 십자가는 담습니다.
그리고 주님 쪽에서 넘어오신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 선악을 넘어선 선악의 법이 머리 짤리듯 짤려서
생명의 법으로 인해 순전케 깨끗해 했다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외칠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적도 없는 마귀를 보란 듯이 주님이 참으로 뻔번스럽게 자랑하는 자기사랑하는 신부입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본적이 없기에 보이는 존재에 의식을 하는 존재에 한풀이를 합니다. 그 대상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피 방식을 비웃는 자들과
십자가의 피 방식만이 옳습니다 라는 예수님과의 차이성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갈기 갈기 찢어야 할 분이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함께 서서, 예수님을 갈기 갈기 찢습니다.
얼마나 마귀적 입니까?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스스로 버린다 라고 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행동의 결과로 인한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휭 날려버리고 창세전 계획으로 말씀하십니다.

뒤의 구절이 바리새인들이 이 말 때문에 더더욱 격분 합니다.

자신들처럼 원인 있는 결과로써 대화를 언어로 주고 받고 해야 하는데
딴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쳤다 마귀들렸다 심지어 그 얽히고 설킨 대화로 인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는 나와 하나 이다 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니
바리새인들이 옷을 찢어가면서 참람하다고 공격하는 겁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육체를 찢는 금식회개기도입니다. 나는 더러우니 부정한 인간이니 부정함을 멀리 제거해 달라는 겁니다.
이 부정함이 바로 예수 라는 겁니다.
십자가 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똑같다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부정한데 예수님에게 다 뒤짚어 씌우고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예수님이 이것을 다 아시고 이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간격이 더 욱 더 벌어지는 겁니다.

마귀 보다 더 미운 짖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말이죠.
(마귀를 이미 설정한 선악적 사고방식이기에 성령도 이미 설정하고 다 설정했는데 결국 자기가 기준이 되는 하나님인데 그것을 벗어나버리니까? 배신감에 비로소 살인의지가 펼쳐지는 겁니다. 어떻게 되든 살인하게 되고 반대로 성령을 받은자는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완료가 있기 때문에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비록 겁도 나고 미리 걱정도 되겠지만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면 그 약속이 주도한 겁니다. 어차피 모호한 몸뚱아리인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누락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자에게는 이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겁니다.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모든 그 어떤 법에서도 나올수 없는 사랑을 제대로 펼치신
명료하고 또렷한 사랑인 겁니다.

그러니 감사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 간격은 좁힐수가 없습니다.
마치 천국과 지옥의 간격을 좁힐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모호한 그림자를 누락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실체는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흐릿한 그림자가 생생하면 실체는 마치 빛이 대낮에, 정오에 비추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완료가 또렷하기 때문에 도리어 모호한 그림자는 어차피 사라질 것 빨리 사라지는 것이 감지덕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모호한 것을, 안개를, 그림자를 지킬려고
실상을 죽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실상이 죽인다고 죽습니까?
그것은 허상들의 사고방식이요 그림자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모호한 의문의 법을 자꾸 손에 더 쥘려고 법 누가 누가 많이 지켰냐로 서열을 나누고
꼴에 그것을 성전에서 계급적으로 줄서기를 하는 겁니다.
아주 가관입니다.

누가 먼저 이 허상에서 빨리 빨리 누락되느냐에 관심을 둘리가 없습니다.

다음장

(막 16:1, 개역)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개역)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개역)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개역)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에 안식 후 첫날 돌문을 누가 굴러줄까 했는데 이미 굴려져 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분명 죽었고 죽은 것 다 봤고 피도 물도 흘리는 것 다 봤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가 멸망 누락 세상에 찌기
구경꺼리 되어도 상관없는 이유가 예수님의 노선이 바로 이런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 안식후 첫날 일까요?
그렇게 애지중지 안식이라는 모호한 의문의 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면서까지 예수님을 죽였는데?
사실상 그래야 예수님이 안식이다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비켜가는 안식일 피하는 인간들에게
얄밉게도 안식일을 반드시 역어서 일부러 안식일날 얄밉게 병고치듯이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역습니다. 역어.

정작 지키고 지킨 자들의 안식은 가짜였고
죽어도 안 죽는 것이 안식 그 자체인 안식의 실체 이다는 겁니다.
마치 휘장이 찢어져서 홍수가 터져서 생명의 물이 흘러 넘쳐 밀려나 푹 잠겨 물에 빠져 죽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안식의 댐이 터져서 안식이 넘어오는 겁니다. 쳐들어 오는 겁니다. 저절로 안식이 된 겁니다. 결국 내 쪽의 안식이 망해야 안식 제대로 완료입니다. 안식으로부터 제대로 밟혔다는 증거죠. 그렇기에 무덤이 없는 겁니다.

세상은 두 종류 인간 뿐입니다. 무덤이 있는 인간이냐 무덤이 없는 인간이냐?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무덤이 없는 인간에게는 무덤에 파 묻기이고
무덤이 있는 인간에게는 무덤으로부터 멀리 멀리 간격벌려 떨어뜨리기입니다.
불 속이 생명이고. 불 바깥이 허구인 선악의 세상입니다.

무덤이 없는 분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안식일을 지킨다고 안식일 피해가면서 예수님을 죽여 놓고서는 정작 예수님 좋게 해 줬으니 그들의 행함은 허사가 된 예수님 좋으라고 한 행동이 되는 겁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짖는자여? 라고 비웃는 저들의 말이 저들의 입에서 실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절대로 주님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라고 가로막는 예수님의 죽음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시선을 비켜가듯이 말이죠.

그리고 성소의 휘장을 찢어버림으로써 인간들의 간격두기가 다 허물어집니다.
마치 도마가 나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겠다 라고 장담하면서 사실상 타인의 행함보다 간격을 벌려서 자신만이 주님과 일치한다는 그 사고방식을, 이들 눈에 보이는 성전 중심의 사고방식의 사람들을 둘 로 쪼개버려서 일치는커녕 그렇게 생각하는 본인이 도리어 간격이 멀어짐으로써 무덤이 있는 자가 아니라 무덤이 없게 하시고자 한 차이의 간격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의 차이는 이제 없습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거룩이 생명의 물처럼 쳐들어 와서 덮쳐버립니다. 막을 길이 없습니다. 홍수나듯이 찢어진 휘장 사이로 하늘의 거룩이 넘쳐흘러 흘러 옵니다. 곧 성령을 선물로 주시듯이 십자가의 영을 받은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이 세상에 넘쳐 넘쳐 밀려옵니다. 이 인자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죽여도 또 나타나고 죽여도 또 나타나고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 멸망이 기정사실화 되듯이 이제는 이 세상의 멸망이 기정 사실화 됩니다. 아무리 죽여도 또 생기고 또 죽여도 또 생기고 ...)

아무리 미리 알고 이렇게 저렇게 방어전략을 구비해본들 성령은 비켜갑니다.

그리고 비켜감을 당함으로써 그 차이를 느낄떼
그 간격을 느낄 때
좁힐수 없는 그 누락성을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사랑임을 나와 도무지 일치 하지 않는데서 오는
감사함
기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료로써 여디디야 준비하신 그 사랑

비록 죽었지만 죽지만
무덤이 없다 라는 완료성

이 모순은 우리 보고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귀 보란듯이만 활동 하셨다는 사실
그래서 마귀에게 팔아넘기는 듯이
때리는 마귀 보다 말리는 더 얄미운 예수님이 더 지근 지근 밟는 겁니다.
안그러면 내가 마귀인줄 알 리가 없습니다.
솔로몬 재판때 고소고발하여 법에 청구한 옆의 기생보다
아이를 두 조각 내라는 솔로몬 왕의 판결이 더욱더 기가차서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당신 왕 맞어? 지혜 맞냐구?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내 만 남았는데. 기가찹니다.
기가차다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밟았다는 겁니다.
무덤이 없다 라는 것은 제대로 무덤에 파 묻었다는 겁니다.
(제대로 정곡을 찔렀기에 상한마음을 마치 자신이 심은 약속이라는 보석 찾듯이
제대로 콕콕 찔러서 쪼개어서 보석을 찾았다는 겁니다. 우리의 원망을 담았다는 것은 제대로 주님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빈자리를 마련하심으로써 그 자리에 아무도 앉을 수 없는 미끄러운 자리를 마련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 조각 찢어지는 휘장에 예수님이 뛰어드시니까
입이 쑥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부끄 부끄 부끄
상한 심령에 뛰어드는 겁니다. 아니 사실상 주님만이 상한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였습니다. 어미야 아이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 순간만 그랬던 것이지
그 우발성은 사실상 항상 상한심령이였던 예수님을 드러내는 하나의 샘플이였던 겁니다. 진정한 상한심령은 주님이였습니다.

아 내가 마귀 였구나 라고 가슴을 치며 상하고 통회함으로써
나와 일치점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고
철저하게 가로막고 차단하심으로써
3이라는 부정성에 발가벗겨버리시고
온갖 위선과 허물을 다 담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오시는 그 사랑

그 십자가의 피가 아니였다면 마귀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고
내 힘으로 넘어서볼려는 그 육의 소욕을
넉넉하게 이미 이겼다는 사실에
든든하고 안정감 있는 미쁘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또 나를 이기시고
무릎 꿇고 하시니
주님은 나보다 강하십니다.
모호하고 의문 덩어리인 안개같은 인간을 쳐다볼것이 아니라
흐릿하고 그림자인 허깨비인 나를 쳐다볼것이 아니라
생생하고 또렷하고 명료한 주님을 쳐다보게 곧은 목을 매일 꺽어 부러뜨려 주시옵소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호통을 매일 매일 지적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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