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비웃기

마가복음 2011. 8. 13. 10:56

십자가 비웃기 (예수님 비웃기)

2011년 8월 8일 월요일 오전 12:02:42  김대식


예수님의 믿음과 인간의 행함은 절대로 절대로 이빨이 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이고 인간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 맞물려서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고 제대로 단 한번이라도 소통이 되면 참 좋겠는데

아예 접속 자체가 불가능한 단절 뿐입니다.

믿음의 달인인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면 뭔가 소통이 되는 것이 이루워 질 줄 알았는데

뭐여? 하나도 맞지를 않아 안 기쁜데 주님 혼자만 기쁜 것만 이루시는 겁니다.
거기에 억수로 비웃을 수 밖에 없는 모습을 안 보이고 싶어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나도 모르게 톡 하고 튀어나오는 겁니다.

100살이 넘었고, 마누라도 이미 죽은태가 된지 머~언 오래일진데?

꼭 비웃지 않고는 못 배기는 소리를 하니 안 비웃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아이(약속)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아니 그런 소릴 할까봐 미리 [행함으로] 이룬 자식이 있습니다. 이스마엘)

너무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차서
얼떨결에 몸뚱아리가 반사적으로 피식 거리면서 새는 발음으로 들켜 버렸습니다.
육체이니 어쩔수가 없는가 봅니다.

왕 앞에서 감히 웃었으니 말이죠 감히 몸둘바를 모르겠지만

그래도 웃기는 것은 웃기는 겁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몸뚱아리가 지가 알아서 비웃었으니 어쩔수 없습니다.
죽이실려면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웃어버린 마당이고
비웃어 버렸으니 어쩔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비웃었기 때문에 웃음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특이하고도 별희한한 소리를 다 하시는 겁니다.
당채 저런 뻔뻔스러운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도리어 미래에서 소급해서 쳐들어 오는 생명(이삭) 때문에 졸지에 그 심각했던 문제꺼리는 하나도 심각하지 않게 됩니다.

정작 진짜 심각한 문제는 뭔고 하니
웃음을 주겠다는 겁니다.
나의 비웃음을 훨씬 능가해버리는 특이한 소리 입니다.

더 기가막히고 코가막힙니다. 비웃었는데 웃음을 주겠다니요?

내가 예수님을 죽였는데 내 손에 죽은 예수님이 도리어 나에게 생명을 주시겠다니요?

주님 농담 하십니까?

주님은 죽었습니다. 저는 살았습니다.
죽은 자는 죽었고 산 자는 살았기에
죽은 자 예수님은, 살아 있는 나를 살릴수 없고,
나는 살아 있기에 원래 살았으니, 내 손에 죽은 예수님의 말은 죽은자의 음성일 뿐입니다.

즉 농담일 뿐입니다. 비웃음꺼리일 뿐인 웃사꺼리입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합니까?

어 어 어 그런데
졸지에 내가 비웃었던 죽어버린 자의 음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이 되고

내가 나를 아무리 만져봐도 분명히 살아 있고 생존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지금 다시 꼬집어 보면서 꿈이 아님을 분명히 살아 있는데

졸지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 때문에
나는 졸지에 죽은자가 되어 버려야만 하고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 버려야만 하고
그 십자가의 피 때문에 매일 매일 용서 받아야 할 자가 되어야만 하니

졸지에 살아있었던 나는 어디로 날라가버렸는지?
이제는 7번 용서하는 자는, 용서 할수 있는 자는
휭 하고 날라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7에 70을 곱하는 무한대의 용서만을 받아야만 하는

정말로 정말로 되기 싫은, 존심 상하는 일을 이루시니, 죄인 중의 괴수로 새로 나를 만드시니,

그 죄인을  비로소 십자가가 핏덩어리로 해산하여 잉태해 낳으셨습니다.

우짜스까잉 ~~~~~~~~


웃음아 웃음아 부를 때 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은 웬수 군요잉

(눅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9, 개역)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눅 20:40, 개역)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이런 죄인 중의 괴수도 용서하시니 얼마나 행복한지요잉 !
다윗이 말한 고백이 이거 맞지예?

맞다카이 맞다카이 아니 이것 때문에 일부러 다 속이시다니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데도
불러본적도 없는데도
아예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5:9, 개역)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주라는 이름의 값을 높이고자

그 더럽고 더러운 창녀같은 이방인도 깨끗게 하셨으니
다윗은 도리어 그 통로
즉 이스라엘 조차도 없었던 그 처음자리의 통로를 다시 유턴해서 맹글어 버리시니

회개 금식 눈물의 기도는 처음자리가 아니였고
여디디야 가 처음자리였음을
처음자리에서 나온 꺽으신 뼈 상한심령 이라는 비웃음 꺼리, 싫어버린바 된 것들을 동원해서
처음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참 뻔뻔스럽게도
베드로는 자기가 분명히 1 나는 저 사람 모른다.
2 알지도 못한다.
3 내가 저 사람 알면 내 손에 장 지진다. 라고

분명히 비웃어 놓고 (거부 거부 거부, 부정 부정 부정, 부인 부인 부인)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로 인해 역여져서

(부정한 십자가가 아니면 역이는 방법이 없습니다. 역이는 방법은 십자가라는 걸림돌 거리낌 싫어버린바 되는 비웃음의 방법 뿐입니다. 누가 감히 예수님을 비웃을수 있을까요? 아무도 안 비웃습니다. 그러나 3번 비웃는다고 주님은 반드시 역겠다고 하십니다. 아이고 주님 우리를 그렇게 못 믿겠습니까? 그래 안 믿는다. 어 심각하게 댓구 하시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비웃었습니다. 캬 주님이 옳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마귀를 상대하시기에
예수님만 심각하십니다. 아무도 안 심각합니다. 비웃을 뿐입니다. 마귀에게 갇혔기에 말이죠.)

뻔뻔스럽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 아닙니꺼
어허 내가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줄 주님이 무지 잘 아십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주님이 절 깨끗게 하셨군요. 아이 행복해라)

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누가 봐도 거짓말인 그 거짓말을

참 말 되게 하시는 것은

역시 주님이 흘리신 피 (웃음:긍휼) 뿐이였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분의 주특기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뻔뻔스러운 인간을 동원해서 말이죠. 비웃는 인간들만 골라 골라서 말입니다.

그만큼 역인 겁니다.

안 역일려고 하는 짖거리가 말씀지키기로 행하는 것이
도리어 휭하고 날라가 버리니

역일 수밖에 없는 비웃음만으로만

꼭 우리의 선악을 건드리(야 서울말 : 부딧치) 가면서
우리가 비웃고 껄끄러워하고 부정스러워 하는 것으로만
자신의 피의 영광을 높이십니다. 참 고약한 취미입니다.

그래야 우리(육)의 행함이 일체 접촉점이 단 하나도 없도록 하시는
오로지 육의 소욕에 무조건 반대의 반대를 추구하는 영의 소욕으로만
십자가의 소욕으로만
부정(비웃음)의 소욕으로만

기쁨을 이루시는 겁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부조리가 옳았음을 !!!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요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요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 12:39, 개역)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 12:40, 개역)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 12:41, 개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 유명한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은
눈이 있어도 못 보도록 하기 위함이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혹시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으면 안되도록 억수로 걱정이 되기에

아예 인간 쪽의 믿음은 모조리 차단하는 방식만으로만 비웃을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만
일하시는 그 영광인 십자가만 펼치시겠다는 겁니다. 이 상한심령만을 앞장세우시겠다는 겁니다. 밀어붙입니다. 다른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게 아닙니다.
(비웃음을 딴 말로 하면 [도저히 안믿겨지는], 또는 [그것만큼은 거부하는] , 결국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그 이삭제물 바치기 [찢어지는 아버지의 마음], 독생자를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상한심령)


그러니 십자가 만이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고
인간의 구원 따위는 창세전에 예정 될 리가 없지요.

그 계산 조차도 역사로, 시간으로 따지는 창세전이니 역시나 시간에 갇힌 인간이 창세전을 해석하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숫자가 인간을 수에 칠 가치로 여기지 않는데, 인간은 숫자를 도리어 가지고 놀겠다고 하니 웃기는 소리입니다.)

(사 2:22, 개역)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졸지에 다윗은 그 창세전이 지금 눈 앞에 펼쳐지니
시간과 공간에서 추구한 모든 것을 손 놓아도 되는 겁니다.
(아니 시간 공간이 다 타버려서 사라진것같습니다. 묵시가 더더욱 생생합니다. 꺽으신 뼈가, 상한심령이 펄떡 펄떡 살아서 꿈뜰거리면서 뺨을 때리고 온 몸을 멍들게 합니다. 얼마나 펄떡 펄떡 뛰는지 힘이 장사입니다. 다윗보다 강합니다. 나보다 강합니다. 펄떡 펄떡 뛰는 꺽으신 뼈가 말이죠. 썩어서 상해버린 냄새가 온 동네 진동하는 그 마음이 팔팔하게 뛰놉니다.)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행복합니다.

괜히 붙잡은 겁니다.


웃음만이 이삭만이 창세전에 예정되었고
그 이삭(약속=육의 통로가 아예 없는 고자와 불임여성 속에서)이, (분명히 비웃었는데)

그 십자가가(분명 못 박아 죽였는데) 도리어 나를 웃게 하는 사랑인 겁니다.

다른 웃음은 없습니다. 다른 약속 다른 언약은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얄궂게도 십자가를 비웃는 방식으로만 일하십니다.
모든 육의 행함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영의 소욕은 오로지 창세전에 예정된 단 하나 십자가로만 다 이루신 그 완료만을 밀어붙이십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펄떡 펄떡 뛰어 생생하게 밀어붙이는데) 누가 꾀더냐?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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