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 차단 - 구원을 차단하는 십자가 (부자청년을 생각하면서)

2011년 7월 30일 토요일 오후 2:42:51  김대식

트라우마(어릴적 감당할수 없는 정신적 충격)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잠재된 그 충격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즐겨라 라고 하는 것이다.

가난이 어릴적의 충격이 되면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빈털터리로 마음한번 부요롭게 살지 못하다가 죽는다.

대부분의 결핍성 즉 상대적인 결핍성이다. 그 결핍이 우스께처럼 비웃음꺼리가 되었을 때 그 상처는 계속 계속 연달아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할때마다 상처의 골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히스테리는 더더욱 사랑의 부재를 불러일으킨다. 결핍채우기다. 이것은 곧 일치성을 추구한다. 종교가 그래서 탄생한다. 흡집내기로 인한 상처 곧 노아언약으로 인해 심판의 땅은 처음당한 심판으로 인해 결핍의 상처를 자발적으로 맥구어넣는 작업이 처음 시도된다. 그 사람의 일이 바로 바벨탑 건립이다. 가인의 제사가 사라질 리가 없다. 반드시 국가가 되고 종교가 되고 사회가 되고 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잠재성을 끄집어 내신다. 살짝 살짝 긁으면 긁을수록 주님께서 심으신 그 강퍅은 주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라도 등장해야만 하기 떄문이다. 쌓고 쌓고 그 무질없는 무의미한 의미 없는 짖을 하고 하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는 그 발버둥이
지금의 자신의 위치 사회적 위치를 만드는 셈이다.

아니 이제는 반대로 그 자리를 탈주하고자
트라우마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극복으로 긍정의 삶을 추구해 보지만
그 바닥은 쉽게 뜯겨지지 않는다.

부자청년은 어쩌면 어릴적부터의 충격 곧 유대인 선조들의 멸망 이야기를 수도없이 철두철미하게 교육받고 자라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육으로 인한 뛰어난 실천가로써 유대인의 자랑이 될만한 수제의 인물이다. 마치 사울왕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수치를 자신들 스스로가 가리고자 한
트라우마를 극복키 위한 사울왕이라는 무화과나뭇잎 가리개일 뿐이다.

문제는 피를 흘릴수가 없다.

피를 흘릴 수 없는 가리개 이기 때문에 타인의 허물을 덮을 수가 없다.

내부의 물로써 자신도 가리지 못하고 남도 가리지 못하는 말라버리는 물일 뿐이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가리개는 모든 허물을 다 가린다.
그것이 사울왕과 대조를 이루는 다윗왕이라는 가리개다. 곧 다윗언약이다.
피로써 세운 언약이다.
그 피는 다윗도 가리움 곧 허물이 덮여졌는데
이런 죄인 중의 괴수도 죄도 덮으셨는데
너희들 죄 쯤이냐? 라는 뻔뻔스럽고 당당한 믿음이다.

다윗은 그 피 앞에서 자신의 행함으로 시도한 구원이 박살이 난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나를 깨끗게 하십니다.

사울 왕에게서는 도저히 나올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의 고백이다. 피가 덮으니
피로 덮임을 당해서 나오는 소리 곧 외칠 수밖에 없는 소리다.

이 허물을 덮는 피가 외부에서 늘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수다.

이 피를 다윗은 뻔뻔하게 외부에서 흐르는 물입니다 라고 외친다.

자 멀쩡하고 반듯하고 정말로 이성적인 인물이였던 사울왕을 마귀로 만들줄 모르는 언약이라면 가짜다. (맏아들, 에서)

반대로 죄인 중의 괴수인 괴물을 양같이 정결하고 깨끗하게 할 줄 모르는 언약도 가짜다. (탕자, 야곱)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다윗을 사랑하신다면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신다. 그래야 외부에서 공급되는 물을 다윗은 보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공급한 물이 아니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 생명수는 외부에서 흐르는 물이다.

반대로 외부에서 흐르는 물이 없기 때문에 그저 보이는 것으로 때운다. 곧 행함이요 율법이라는 법이 보이는 것으로서 전부이기 때문에 행함 외에는 답이 없다.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를 차단하는 영생을 차단하는 것은 외부의 공급 밖에 없다.
그래서 행함은 믿음에 의해서 차단당하는 것이다.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행함이 차단 당한 자는 행복하다. 외부에서 공급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공급하는 것이 없는 자는 행함이 전부이다. 자기 스스로 차단해도 결국 스스로 차단했다는 그 자체가 행함의 법 이라는 굴레 아래에서 벌어지는 시치프스의 신화의 이야기처럼 챗바퀴 돌 듯이 죄 아래 갇힌 것이다.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내가 주께만 범죄 했는데 내 죄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심히 이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함을 다윗은 외친다.

그것도 이스라엘 전부로부터 목배임을 당하는 상황으로 도망치는 가운데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다윗은 행복을 외친다.
그 노래가 그 감사가 그 찬양과 그 찬송이 행함의 율법 노선이 아닌 지혜노선인 시편이다.

행함 아니요 지혜가 옳았습니다.
내부의 고인 물이 아니요 외부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물입니다.

자 이렇게 외부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물을 공급받는 자는 어떤 삶일까?
자신의 삶은 없고 예수님의 삶만 나온다.

곧 죽는 길로만 골라 다닌다. 죽어도 상관없기 때문에
죽음의 점을 점 점 점 찍고 다닌다.
어차피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함노선의 율법의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거리끼는 부딧히는 소리가 아닐수 없다.

죽을 곳으로만 골라 골라 골라다닌다.
충돌의 사건만 소동만 골라 골라 펼친다. 십자가의 죽음만 외치면 되기 때문이다.

자칭 의인이 모였다는 곳이면 곳일수록 그 소동은 더욱더 커진다.
자칭 행함이 모인 곳이면 곳일수록
왜? 행함이야 말로 인간들의 유비쿼터 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오로지 행함이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가치를 매기고 그 보상으로 칭찬과 격려와 자랑이 되는 기념비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소통이 안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소통이 된다면 모든 인간의 행함은 곧 인간 그 자체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 곧 살인의지를 본격적으로 불태운다.
어차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애 버려도 상관 없다는 것이
보인다는 이유로 인간은 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법이다. 짐이 곧 국가다처럼 짐이 곧 하나님이다 라는 이유 없는
죄악에 잠식당한 상태이기 떄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만 예수님은 소통하신다. 성령으로만 일하신다.

영생을 차단하는 그 섬기심 온유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쳐다보는 눈에서 뗄수 없다.

부자청년이 들고 온 것 예수님은 다 쓰레기 배설물로 취급해 버리신다.

십자가가 밝히 있는데 감히 사람의 일을 잔뜩 보물이다 라고 가지고 오니
그 똥 치우라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에 양보 없으신 그 믿음이 아니다면
우리는 아무리 봐도 보이는 것을 내미는 것을 거둘 생각이 없다.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가지고 오겠냐는 투 다.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주님 쪽에서 가지고 오시겠다는 것이다.

뿔 쌍히 여기심 ~~~~ 이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분이 나빠 드디어 화가 하늘에까지 치밀어 오른다. 바벨탑 뿔이 쏟아난다.

내가 왜 불쌍하냐고? ~~~~~~~~~~~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다.

가장 잘 믿는다고 공인이 된 자들이 죽인다.
이래도 내가 불쌍하냐?

너가 더 불쌍하지 제발 날 살려주세요 라는 소리를 하면 내가 풀어주겠다

이것이 인간이 눈에 보이는 힘을 가진 속내가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영생의 길, 구원의 길, 곧 영생을 차단하는 십자가가 아니다면 인간의 가면은 벗겨질수가 없다.

트라우마를 자기 스스로가 가릴려다가 결국 악마의 얼굴을 발견하고서는 그 가면을 벗겨버린

예수님을 죽여버린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얼굴을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운다.

고운 모양도 없도록
사람들에게 고개 돌려버리는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 되도록
병들고 세상 모든 고통과 질병을 짊어진 얼굴이 되도록

온갖 저주의 저주를 다 퍼부어서라도

자신의 가면을 벗겨버린 그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 두 소욕의 싸움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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