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2. 다윗의 자손과 호산나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오전 8:17:02  김대식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막 11:1,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막 11:2, 개역)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막 11:3, 개역)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막 11:4, 개역)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막 11:5, 개역)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막 11:6, 개역)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막 11:7, 개역)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막 11:8, 개역)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막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막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 11: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성경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모든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래 살아라 저래 하지 말아라 등등. 그런데 이상하리 만큼 성경말씀은 일체 인간의 삶이 언급되어 있거나,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둥의 말은 일체 없고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삶만이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을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미리 앞당겨 보여준 자들이 구약에 있고
그 다음 앞으로도 예수님의 삶을 보여줄 자들이 신약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곧 종말 때 에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자들이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 요한의 우편 좌편에 대한 언급과
거기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이 분노를 펼치는 것은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추구하고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게 뭐가 나쁩니까? 아주 아주 당연한 것이지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 바쳐서 일했다면 거기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미리 보상에 대한 확답을 들으면 더더욱 박차를 다해서 열심히 충성할 것 아닙니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들도 동일한 마음이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친것에 대해서 기분 나빳던 겁니다. 자기가 먼저 말할려고 했는데 예의상 ~~~ 그 놈의 예의 따지다가 선수 빼앗긴 것이지요. 넌 왜 예의도 없냐? 나봐 나는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고 있잖아?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삶과 무관한 인간의 삶이요 사람의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눈에 보기에도 이상한 존재 기이한 부정으로 가득한 자를 주님이 앞장세우십니다. 예수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캬 이 표현이 이미 제자들에게서 차이나는 표현입니다.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막 12:35,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막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롬 16:20, 개역)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7, 개역)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히 1:13, 개역)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다윗의 자손이란 홀로 북치고 장구치듯 혼자 전쟁을 펼치고 전쟁의 승리물인 전리품 곧 노략물을 빼앗는 자입니다. 그 다윗의 자손만이 나를 빼앗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죽었던 모세가 다시 일어나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이 별세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음도 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가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의 죽음을 요청하겠습니까? 그것은 엘리야의 승천의 의미도 그림자일 뿐 실체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기를 바라는 창세전의 예정된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변화산에서의 세 사람의 대화이듯이 곧 예수님의 삶이듯이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삶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이 들어난 마당에 허용할 수가 없습니다.
가로막고 꾸짖으며 조용하게 떠들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런다고 막힐 예수님의 삶이 아닙니다. 그 꼭두각시는 외쳐야 합니다.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 갇혔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빨리 이 원수를 파하시고 저를 빼내주시옵소서. 눈먼 저를 고쳐주시옵소서

이게 무슨 소리 입니까?

이것은 마치 지금 자신이 귀신이 들렸다는 소리와 같습니다.
귀신에게 장악당한 저가 되었으니 저를 이기시사
저를 빼내주세요.

나를 이기시고 나를 빼내주세요? 말이 됩니까? 정신병자같은 소리 아닙니까?
나를 이기시고 나를 빼내 달라니?

이것은 자신이 전쟁 속에 있다는 겁니다. 마귀와 예수님의 전쟁에 내기장기에 중간에 낑긴 새우신세 라는 겁니다.

성경전체는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이 있는 곳도 있고 전쟁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만이 홀로 전쟁을 펼칩니다. 호산나.

여리고성을 어떻게 도는고 하니 나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원수된 증거가 여기 언약궤에 증거로써 담겨졌습니다. 이렇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포로되어 버렸습니다. 빨리 항복하세요.

이것이 바로 발등상입니다. 교회란 움직이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부동의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움직인다고 하니까 또 행함론자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포착이 가능하니까 기념비화 하고 - 즉 자랑을 하고, 보상을 받고파 자꾸 들이댈수가 있습니다. 보상 안해주면 삐치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자기가 자기에게 보상해 버립니다.)

그 반대로 점을 찍는 겁니다. 마치 쥐신밟기처럼 이미 전쟁선포 자체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적은 졌구나 졌구나 나처럼 졌구나 라고 시작하고 시작하자마자 끝난겁니다.
(포착이 불가능합니다. 보이는 것 족족 삭제 당합니다. 자신도 삭제당할 판국에 보상은커녕 도리어 반납합니다. 가지고 있다가는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빨리 빨리 전가 시켜야 합니다. 폭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폭탄을 전가 시키는 겁니다. 뻥 터지기 전에 말이죠. 그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성전, 우발적인 발생론적 다이나믹 성전)

그래서 항상 다윗의 자손을 앞장세워야 하는데 졸지에 다윗의 자손의 전쟁이 아니라. 김의 전쟁처럼 인간의 전쟁이 되어버리면 그거야 의미없죠.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이미 승리한 전쟁을 도리어 패배가 됩니다. 아무리 적이 딸랑 한 명이고 아군이 천만명 이라고 해도 반드시 전쟁에서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내가 죽인 흔적인 담은 자입니다. 다윗이 원수로써 우리야 밧세바 이름없는 아기를 죽인 그 흔적을 담아서 그 위에 피를 뿌려 다시는 허물을 보지 않겠다는 그 흔적 그 증거를 담고서 이렇게 나 용서 받았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고 외치면서 전쟁벌리는 겁니다. 이 수수께끼 못 푸는 놈들 다 심판이다는 겁니다.)

구원은 내 소관 내 숙제가 일체 없습니다. 손 떼야 합니다. 당장 눈에 승리가 보이니까 눈에 보이기 전에는 의도적으로 뺄려고 했던 인간의 소욕이 이제는 참여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소욕을 그 속에서 뭔가를 챙기게 되자마자 제명이 되는 즉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간의 범죄가 그런 식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내 소욕으로 만들꺼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소욕꺼리를 선악나무처럼 보이도록 하십니다. 기드온의 승리가 기드온 조차도 내뺄려고 했는데 어쩔수 없이 붙잡혀서 참전했지 정작 다 도망쳤습니다. 재수없게 당첨되는 바람에 참여해서 돌아오니 그때부터 본격적인 악마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에봇이라는 제사장 옷이 우상화 되는 가시화 되는 겁니다.

(삼상 14:6, 개역)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대세의 흐름에 예수님의 삶이 인간의 삶처럼 좌우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부자청년은 그 당시 그 사회의 분위기인 율법지키기(바리새인이 조성한 삶의 법칙)에 운 좋게도 자신이 딱 맞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조금더 보완할 것을 역시 또한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그랬듯이 자신도 그러합니다. 보수 개혁 수정 보충 말입니다. 거기서 좀더 낮짝 뚜껍게 아예 미리 확답을 얻고자 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 요한과 버럭 화를 내를 다른 제자들 모조리 인간의 삶에 관심이 있지 예수님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예루살렘(구원의 장소라고 여기는)에서 죽임을 당하는 바벨탑의 실상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넘겨지고 넘겨지고 서로 손 씻겠다고 그러면서 피라는 살인은 마음속에 가득하면서 안들킬려고 하는 그 악마성을 그 원수성을 드러내면서 죽임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다시 사시는 그 예수님의 삶

그 어떤 누구도 이 두 점 즉 이것을 얼굴이라고 합니다. 풍경 배경 삶이라고 합니다.
즉 얼굴에 두 눈처럼 구멍을 뚫습니다. 블랙홀입니다. 검은구멍을 뚫음으로써(죽음의 점, 다시 사심의 점)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을 피할수 없도록 하십니다. 즉 심판 아래에 두심입니다. 인간이 그 얼굴을 회피하든, 예수님이 얼굴을 돌리든 모든 인간은 주의 발 아래에 놓여지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즉 원수 만들기입니다.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6, 개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7, 개역)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
누구의 삶을 쳐다보느냐로 갈라지는 겁니다.
한 쪽 강도는 예수님의 삶에 붙어버립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고전 15:19, 개역)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20, 개역)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개역)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에게 붙은 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사물 하나 하나 조차도 주의 발등상 아래에 두기 위함입니다.
원수삼기 원수만들기 죄인만들기 나처럼 원수된 자로써 용서함 받으라 라고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자
땅 하나 하나 발로 밟는 다는 것은

(롬 10:15, 개역)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소식을 즉 기쁜소식을, 희년을 외치는 겁니다. 나 이렇게 주님께 당했다.
왜? 나 봐라 죄수복을 입은 죄인이잖아? 그래 맞네 죄인이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나를 끄집어 내 주셨다.
어디 어디?
봐 피 도장 찍혔다. 특별 사면, 무시험 합격
맞네? 넌 좋겠다.
그럼 너 집으로 돌아가지 그래? 왜 감옥소로 다시 들어오니?
아냐 아냐? 이 기쁜소식을 전해야 해

라고 두 점을(십자가의 죽음점과 부활의 점) 발로 찍고 돌아댕기니 그것이 바로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소동케 됩니다. 예루살렘을 소동케 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탑처럼 구원의 문이 된 것을 허물어 뜨려서 원수의 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원수만들기입니다. 구원만들기 아닙니다.

반드시 원수였던 자가 나 하나님의 원수요 라고 언약궤 매고 뺑뺑이 도는 겁니다.
그래놓고 앞뒤 안맞게 모순 되게 나 용서 받았찌롱 라고 약올리듯이
나팔을 불면서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부끄 부끄 부끄 라고 나발을 부니까
여리고성(예루살렘 성: 힘(구원)의 결집: 부자청년의 구원조건 다 모은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이것이 호산나입니다. 정작 이 찬송을 죄인들이 불러야 하는데 이미 그들은 자신의 삶을 부자청년처럼 다 의의 옷으로 포장을 했으니 뭐가 아쉬워서 호산나 라고 찬양을 부르겠습니까?

그래서 기이한(특이한) 부정적인 존재들,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서 무시받는 부정적인 존재들이 갑자기 야단법석으로 찬송을 부르는 겁니다.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막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막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아이들이 시끄럽게 노래 부릅니다.
왕의 행차요
다윗의 자손이 이제야 우리를 눈먼 대서, 포로된대서, 갇힌대서
해방케 할 것이다.

광복이다 해방이다. 목이 터져라 외쳐댑니다.

과연 이 호산나 찬양을 누가 듣기 싫어할까요?
바로 그겁니다.

누구 일부러 들으라꼬 외치는 오바액션입니다.

한 쪽이 왕을 맞이했으면 또 다른 한쪽은 진노를 맞이한 겁니다.

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실까요? 왜 어린아이 젖먹이 찬양을 받으실까요?
맞습니다.

단절케 하기 위함입니다. 소통이 아닙니다. 흔히 음악은 소통케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찬양은 단절케 하기 위함입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고 찬양하는 것은

두 점을 찍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의 점 곧 죽이시러 왔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만이 죽으실수 있습니다.
또 부활의 점 다시 3일만에 다시 사시고자 왔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만이 다시 사십니다.

다른 이는 없습니다.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롬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개역)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 7:4, 개역)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두 점 찍기 외에는 율법의 죄 아래 갇힘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두 점 찍기를 예루살렘 입성하자마자 호산나 찬송으로 이미 전쟁승리했지롱 이라고
이미 승리를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 종사자들에게서 넘겨지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을 받고 죽임당하고 다시 3일 만에 다시 사는 예수님의 삶 외에는 우리는 쳐달 볼 것이 없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을 받게되어 성령의 소욕이 우리 속에 펼쳐지면 이 예수님의 삶의 무한반복 밖에 없습니다. 무한증식 밖에 없습니다.

숫자 개념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완료되었기에

미시적으로든 미약하게든 어찌되었든 나타났다는 자체가 말씀 자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고
천군천사들이 모두다 대동원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눈에 보이는 역사는 무의미한 자랑을 마음껏 쏟아내어봤자.
어차피 불타 없어질 것만 내어놓을 뿐이요.

그 속에서도 예수님의 삶을 임신한 교회는 그 불 속에서도 타지 않고서
도리어 호산나 라고 외치며

주의 이름이 나의 이름을 꺽으셨다고 기뻐하면서

(막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5:9, 개역)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모든 이름이 이 주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종말을 기뻐하면서

(엡 1:21, 개역)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이름을 미리 나팔을 승리로써 용서로써 넉넉한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써 외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곧 여디디야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마 3:17,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처음부터 이 이름 뿐이엿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십자가의 죽음에 장대 높이 달려야 할 이름

처음부터 이 이름의 삶 뿐이였습니다.

모든 원수를 파 하시고 그 원수의 손에서 꺼내실수 있는 이름은 단 하나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이름은 미시 즉 보이지도 않는 무가치한 특이한 부정인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라고 외치는 겁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막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막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

우리를 이 악마의 세계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이 포로됨 속에서 이 갇힘 속에서 이 눈먼 곳에서

하루 속히 건져주시옵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를 나의 죄악에서 건져주시옵소서

(마 6:12,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개역)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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