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성도인줄 알았다.

이강진


각자 받은 달란트대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라, 전도대상자를 마음에 품고하는 특별기도전도집회, 교회사업 위해 작정헌금약정서 써내기, 신년맞이 특별새벽기도 참석하기, 고난주간(사순절)행사, 부활절 불우이웃돕기 바자회, 성지순례특별체험하기, 여름성경학교선교여행, 추수감사절 특별바자회, 등등 성도를 쉬지 못하게 돌려버린다. 거기다가 매주 구역장공부, 구역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예배, 그리고 주일예배, 주일예배준비자들은 토요일 연습까지 성도는 쉴 틈이 없다. 이일에 원수마귀 틈타지 못하게 기도하며 단단하게 예수님이름으로 못까지 박아 놓는다.

이런 성도의 일은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이나 백수들에게 제격이다. 늘 교회에서 살아야 하는 교회폐인들이다. 여기는 딱 두가지다. 시간쓰기와 돈쓰기, 그리고나서 서로 덕담하기인데 결국 자기 자랑질이다. 이것이 없으면 이런 모임에 나 갈수가 없다. 여기에 지친(시간부족, 돈 부족) 눈치 빠른 자들은 대형교회로 숨어든다. 대형교회 교인이라는 회원증을 하나 받아들고서 주일성수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꿈을 꾼다. 언젠가는 그 모임에 나가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잃었던 자존심을 찾으리라. 이런 모임의 클럽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나는 내가 성도인줄 알았다.

창세전 택함 받은 자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에 한없이 고마워했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으면 성도되게 하신분의 뜻에 따라 성도답게 살아야하는 성도의 삶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성경공부도 해 본다. 성경이 수면제인줄 몰랐다. 자기말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고, 사막으로 끌고 다니는데 목이타고 배고프고 지쳐서 하는 소리를 불평한다고 죽이고 지키지도 못할 법을 정해 놓고 지키라하고 안 지키면 죽이고, 죽기 싫으면 제사를 드리라하고, 툭하면 다 망한다고 하고, 그러다가 구원해 준다고 하고, 이런 이야기에 몇 장 읽으면 여지없이 말씀은 나를 재우신다. 엄마가 아기를 재워놓고 일을 하듯이 말이다. 말씀은 그렇게 일하시는가 보다.

그런데 성도들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분이 계시는데 사도라는 분이다. 이제야 성도의 삶을 찾을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다.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았다. 너희는 하나님아들의 영을 받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요 등 좋은 말은 다 있다. 성도가 얼마나 좋은지 천사들도 부러워한단다. 그리고 성도의 자세와 성도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세세히 알려주신다. 그렇지 나는 성도로 구별 받았으니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지.

그래서 그렇게 살아 보려 하는데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이론만 알고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 해서 행해보려 결심을 하고 성경도 읽고 성가대로 찬양하면서 봉사하고 하지만, 성경의 뜻은 그런게 아니라하고(요5:39), 찬양을 왜 그렇게 하느냐 욕먹고, 담임목사 설교 내용과 찬양곡이 안 맞는다고 욕먹고, 교인들이 다른 성가대와 비교하여 은혜가 덜 된다고 비교당하고, 어쩌다 좋았다고 하면 나름 체면은 섰다고 하면서 서로서로 세워주고 보람으로 붙잡아주고, 결국 내 행함의 결과는 자기에게 남는 것 밖에는 없다.

나는 내가 성도인줄 알았다.

나는 창세전에 주님이 성도를 택했다고 해서 나를 택한 줄 알았다. 왜냐면 나도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 내 뒤통수를 몽둥이로 내려치시는데 나는 그만 정신을 읽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그 몽둥이를 보니 성도의 이중성이었다. “이놈아 너는 죄인이야” 그 순간 나는 성도가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선악과를 먹어서 내가 죄인인 줄 알았다. 그래서 선악과 먹고 죽은 나를 주께서 십자가피로 구원해 주신 줄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렇지 “나는 죽었고 죽은 나를 주가 살리셨으니 주의 생명이 내 속에 있다. 그러니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가 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서는 나오는 것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행함이 은사로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로 행위는 내가 했지만 그 주체가 성령이시므로 그 행함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행함은 성령의 은사임으로 믿음 있는 행함이다.” 횡설수설하는 이 생각이 성도의 이중성이라는 몽둥이에 날아가 버렸다.

성도를 창세전에 선택한 것은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것이고, 성도는 단지 성부와 성자간의 약속 속에 들어있는 용어라는 것이고, 그 약속의 실행자는 예수님이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예수님과 그 약속의 실행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설명하기위해서 창세전이야기도 나오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게 다 설명서(성경)라는 것이고, 이 설명서를 다 주께서 말씀(가라사대)으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예수님이 예수님을 위하여 만드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이고.

그 설명서(말씀)속에 주님이 쓰시는 성도라는 용어도 들어있는데, 주께서 그 성도를 만드심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사용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어떻게 사용 하시는가 는 십자가사건에 동원하여 쓰신다는 것이고, 선악과와 율법을 죄가 이용하게 한 것도 인간을 죄 아래 두고자함이고, 이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쓰시고자 함이다.

처음부터 죄와 의의 구조라는 언약으로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끝이 십자가이다. 창세전 약속이 십자가사건이었다. 그 약속에 의하여 하나님은 자기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저주의 십자가에다 내어주셨다. 거기 죄 아래 있는 자들이 동원되어 하나님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죄와 의는 십자가에서 밝혀졌다. 의인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뿐이고 주님을 십자가에다 죽인 자들은 죄인으로 규정 되었다.

나는 내가 성도인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분이 내 뒤통수를 몽둥이로 내려치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구약에서는 나쁜 짓하면 벌을 받게 돼 있어요. 신약에는 재앙부터 일단 받고 난 뒤에 재앙 속에 들어와서 구원을 받게 돼 있습니다. 아~~!! 요거 아는데 애 먹었습니다.”(호13장15-16 / 큰 재앙/ 2011/07/24 이근호 목사 설교문에서) 라는 몽둥이였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죽인 죄인들 그렇게 인간 모두는 죄인이 되었다. 아니 주께서 그들을 다 죄인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을 진행하신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 대한 주의 영광과 찬송과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을 모두 보여주시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성도로 사용하실 자들을 죄인들 중에서 찾으신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으셔서 주의 영이신 성령님에게 맡기신다.

그들을 예수죽인 죄인임에도 성도로 부르심은 주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주의영광 앞에서는 다 죽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십자가 피를 보고, 죽었으니 법도 어쩔 수가 없고 그러니 죄도 없다. 이런 현상을 성도라 한다.

성도는 예수죽인자이다. 아직도 예수님 죽인 피가 그들 손에 묻어 있다. 거룩한 무리에다가 방점을 찍으면 안 된다. 단지 예수밖에 있는 죄인들과 쓰실 용도가 달라서 구별해 놓으셨다. 예수 밖은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여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심이 증거 되는 증거물로 쓰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죄의 종이니, 의의 종이니 하는 비유로 말씀을 하신다. 다만 죄의 종은 죄의 일을 하게 저주로 내버려두심이고, 의의 종은 의의 일을 보여주게 하기 위하여 죄인을 의로 덮어주심이다.

성도는 역할이다. 주님이 예수안에서 죄인이라는 역할을 주셨는데, 일단 주님이 자기를 죽인 죄인으로 만든 후에 그 죄인을 사도들이 말하는 성도라는 기준에 집어넣으신다. 성도는 이렇게 “해라, 하지마라”는 명령과 권면이 기준이 되는 즉, 죄인으로서는 해 낼 수가 없는 기준에다가 집어넣으신다. 그리고 그 말씀의 기준이 십자가 피로 이 죄인들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성도에게 주어진 “하라, 하지마라”는 말씀의 기준을 자꾸만 법으로 받으려는 죄인의 생각을 책망하시며 십자가피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럴 때 나오는 말이 아, 나는 죄인이구나. 십자가피로만 주의 영광을 보는구나. 이 고백이 성도의 고백이 되고 성도에게 임한 사도들의 말씀이(명령과 권면=가라사대) 죄인이라는 역할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나는 내가 성도인줄 알았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성도인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도는 주께서 부르시는 “얘들아” 일 뿐이다. “나는 성도다” 라고 하면 분명히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말로만, 이론으로만 하지 말고” 성도다운 삶이 있어야지” 그래야 앞뒤의 말이 연결된다. 그러니 [“애들아~”의 삶]이 있다고 하면 이것도 개그가 될지는 모르겠다. 몽둥이가 뒤통수에 번쩍이는 맛을 봐야 알아듣는다면 매일이라도 맞겠다.

성도는 그 받은 역할인 죄인의 역할이 은혜이다. 그 죄인에게 떨어지는 말씀이 그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성도의 기준(부르심)으로 죄인에게 임하면 성령님은 죄인을 십자가로 이끌고 가서 지금도 하나님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신다. 그래서 항상 기도속에 있음을 “항상기도하라” 라는 말씀으로 보여주신다.

이렇게 주님은 새언약을 오직 주님 홀로 다 이루셨음을 온 우주 만물에게 선포하신다.

몽둥이 맞은 이야기 하나 더 하면

<< 신약성경에서는 everybody 재앙을 받아요. 전부 다. 일단 저주를 다 받아요. 그리고 모두 다 성도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놓게 만들고 그 고백 속에서 비로소 이 저주가 어떤 식으로 풀렸는가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저주 아래 있을 때, 쉽게 말해서 지옥에 보내요. 지옥에서 살면서 천국이 얼마나 좋은가를 더 크게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단언합니다. 신약의 성도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재앙이 없어요. 저주가 없습니다.ㅎ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이룹니다.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이미 축복 받았어요. 그럼 저주는? 우리 행동이 잘했는가?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나쁜 짓만 합니다. 나쁜 짓을 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아야지, 저주를 받는 것은 동행하시는 아까 기도하신 분 기도대로 동행하시는 분이 저주를 다 대신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지은 죄가 어디서 해소되는가를 늘 해소되는 그 자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게 십자가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호13장15-16 / 큰 재앙/ 2011/07/24 이근호 목사 설교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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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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