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모양과 성만찬 - 2011.10.16 모임(1)|믿음의 글

박윤진 | 조회 15 |추천 0 |2011.10.1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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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모양과 성만찬(고전 11)

 

고린도전서 11장을 한번 쭉 읽어 보라.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남자는 긴 머리 안됨, 여자는 짧은 머리 안됨? 그럼 고전 11장은 성도의 두발 단속 규정인가. 하긴 위 본문을 놓고 시대적 문화적 차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설교를 듣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16절을 통하여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상관있는 규례라고 했다. 게다가 사도바울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지심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십자가 말고는 자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위 본문 또한 머리 모양이 아닌,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십자가만 증거한다는 바울이 성도가 알기를 원한 것이 있다. 바로 아래 표이다.

 

 

각 남자의

머리

그리스도

여자의

남 자

 

 

 

 

그리스도의

머리

하 나 님

 

 

사도 바울은 머리를 이야기 하고 싶다. 머리가 무엇인가? 머리는 몸 전체를 지배하는 곳이다. 머리는 분명 몸의 일부이지만, 몸의 전부가 되어 몸을 몸으로써 기능케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이 본문이 상관있다고 한 것이다.

 

그럼, 천천히 따져보자

 

각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럼 현재 내 머리는 필요없는 것이 된다. 즉 성도라는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의 머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거된 자들이다. 그리고 친히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셨다. 그럼, 왜 자신의 머리는 제거되어야 할까? 이 이야기는 후술한다.

 

그럼 여자의 머리는 쓸만한가? 아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 본문을 남녀차별의 결정적 증거라고 들이댄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흥분할 일이 아니다. 여자의 머리로서 기능하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보라!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잘려나갔다. 결론적으로 여자든 남자든 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이렇게 모든 인류의 머리를 다 단두질 해 버리시고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그 솜씨를 보니 이것은 바로 창조주의 솜씨라는 것이 바울의 증언의 골자이다. 머리는 몸의 어떠함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예수님의 머리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 십자가지신 예수님만 하나님으로 확인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적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런 구조 안에서만 다음 구절이 골로새서와 맞아 떨어진다.

 

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머리 속에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설계도가 내장되어 있다. 그 설계도의 이름이 바로 새 언약이다. 바울이 고전 11장에 머리 이야기를 쓴 후 바로 성만찬 예식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가 왜 머리를 차지해야 하는지, 왜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라는 단두대로 모든 인류의 머리를 잘라내어 버려야 하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것은 그 몸은 새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교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로 하나님의 죽음이 교회를 쥐고 있다는 뜻이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증거하기 위해 교회가 파생되어 나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전히 흠뻑 피에 젖어 있다. 그 피는 다름 아닌 성도라는 존재들이 맡은 역할, [죄 생산]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증거물이다.

 

다시 머리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도대체 왜 내 머리로는 새로운 창조물이 될 수 없을까?

 

고전114~5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는 늘, 새로운 머리를 욕되게 하는 쪽으로 욕망하기 때문이다.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것이 지금 현재 내 머리가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천천히 따져보자.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규례하면서 [남자는 긴 머리 안돼, 여자는 짧은 머리 안돼]라는 법을 교회 앞에 던져 놓았다. 그럼, 그 법을 놓고 그것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로 양분되어 버린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뒤따라 나오는 성만찬 예식도 마찬가지이다. 늦게 오는 자를 기다려 함께 먹으면 잘 한 것이 되고, 배고프다고 먼저 먹으면 사도바울의 권면을 무시한 셈이 된다. 그 어떤 행동방식에도 자신의 머리가 짤려 나가야 한다는 인식은 없다. 지금 머리되신 분이 머리되시기 까지 일하신 방식 즉,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림의 흔적이 나타나질 않는다. ,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하는 지가 아니라, [나 성도 맞다]를 확인하는 용도로서 작용한다.

 

나 성도요 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그대로 유지 하고 있는 자들은 남자들의 경우, 자신의 머리가 별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 그대로 있음]을 드러내고 싶다. 보이지 않는 머리는 머리가 아니라면서 지금 자신의 머리에 무엇을 쓰는 행동을 하면서(혹은 쓰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내 머리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머리에 무엇을 쓰던 쓰지 않던 지금 내 머리가 논란의 중심에 선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자신의 머리가 뻔히 보인다. 남자다. 그래서 이번에는 머리가 없는 셈치고 행동에 나선다.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이다. 내 머리가 여기 버젓이 존재하는데, 남자가 내 머리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생각하던지, 혹은 남자가 여자인 제 머리 맞습니다고 인정하든지 상관없다. 여전히 자신의 머리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것 또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

권면()

각 자 머리로 판단 및 행동

머리되시는 예수님 욕되게 함

 

 

인간은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속성이 있고 이것이 바로 예수 안으로 들어올 때 그의 몸을 창으로 찌르고 대못으로 박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예수 안은 바로 이런 자들이 용서받았음을 선포하는 곳이다. 매일같이 잘려버려질 머리가 자라는 곳이다.

 

이제 성만찬 예식 문제로 넘어가 보자

 

고전 11:20~21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주의 만찬이 주님의 일하심을 기념하시듯 자기의 만찬은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기념한다. 주님의 만찬은 먹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지만, 자기의 만찬은 그런 떡과 음료를 먹는 []를 전한다.

 

 

인간

성만찬

각 자 판단하여 참여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는 말씀에 근거)

지금도 피 흘리시고 계신(새언약을 주신) 예수님을 욕되게 함

 

 

지금까지 이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꽤나 답답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야 한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성만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거냐, 하지 말라는 거냐? 머리에 쓰라는 거냐 쓰지 말라는 거냐?”

 

이 글의 요지는 지금 그렇게 답답해하는 그 머리, 이미 잘려 나갔음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머리 모양이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성만찬에 어떻게 참석했던지 간에 그런 것들은 모두 이미 십자가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 완성된 사랑에 의해 폭싹 주저 앉아야 하는 자기 의에 불과함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 머리는 온통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욕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런 똥 오줌으로 가득한 머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죄인의 괴수에게 딱 어울리는 머리주시고 딱 잘라버리시는 그 십자가 칼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 일하심에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감사하면서도 꼼수를 늘 챙기도록 조장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의 귀한 피가 떨어지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 글은 아래의 말씀을 좀 길게 썼을 뿐이다.

 

6:14 상반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마을 댓글

이근호 11-10-18 20:29  

개인이 모여서 유기체적 집단을 이룬다는 소위 '유기체적 교회론'의 문제점은 십자가가 개입하면 개별자의 특수한 정체성이 일반성에 결합되기 위해 뿌리채 근절시키는 작용을 일어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즉 개인이 가족이라는 좁은 공동체로, 가족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로 넘어가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십자가가 작용하면(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현실성이 작용하면), 개인은 가족에 의해서 배신감을 갖게 되고, 가족은 공동체에 의해서 배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 배신감이 교회라는 공동체에 내부에서 수시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투로 발산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왜 우리 개인의 가치를 모독하는가?"하고 대들게 됩니다. 이처럼 개인은 영원한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방해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내게 있는 내 머리를 누가 감히 싹뚝 잘라! 내가 그것을 허용할 것 같아? 어림도 없지!"
 

 
김대식  11-10-18 22:56  

머리 없는 신체 (기관 없는 신체 ? 빈자리로써의 십자가가 머리 되기)

기존의 교회론이 머리를 위한 유기체적인 신체론으로 교리를 형성하다 보니 그 머리의 자리에 결국 보이는 교회를 머리로 둠으로써 교회를 건드리는 놈들은 다 치리 대상이 되는
그럼으로써 교회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명목으로써 교회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교회란 머리 없는 교회다. 예수님의 신체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마치 머리 짤린 그 십자가가 비어있는 머리로써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십자가를 머리로써 둠으로써 성도 개개인이 머리가 짤려야 함을 마땅함을 보여준다. 목사가 마치 최고의 지위로 보이는 그 유기체적 조직관에서 정작 목사는 목사로써 머리가 짤려야할 머리 없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내 머리 주님이 짤랐어요 라고 외치는 목사로써 머리 짤려야 머리를 외칠수 있다는 것이다. 머리 짤리 않은 목사는 자신의 머리를 짜른 분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목사는 삯꾼이다.

남자 여자 개념도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도 머리 짤린 신체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다.
남이 아닌 내 손으로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머리를 짤라버렸기 때문이다.
남자의 머리도 동일하다.
그런 죄인끼리 만나서 그분의 머리 짤림을 서로 서로에게 외치라고 한 몸 되게 하신 것이다.
머리 없는 신체로써 한 몸 된 것이다. 마치 신랑된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가 한 몸 되었듯이 말이다. (의인을 부르러, 의인을 신부 삼으러 오신게 아니라. 죄인을 신부 삼으러 왔다. 주변에서 얼마나 비웃을 준비를 할까? 그것을 미리 아시고 도리어 누가 미끄러지는지를 염두하고 신부 삼으러 왔다. 아가서에서의 사랑은 질투를 동반하고 죽음을 동반한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런 확장성이 교회에서 집단화로 보여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서로 서로 싸움을 붙여서 자신의 머리가 짤려나감으로써
내 자신이 예수님의 머리를 짤라버린 그 사건을 또 새록 새록 현실화 시킴으로써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과 긍휼함을 느끼는 인간으로써 그 사이에 또 머리 되신 주님이
그 갈라진 틈사이로 횃불이 지나가듯이 거룩을 펼치시는 것이다.

매일 매일 해쳐모여 하듯이 교회에서는 떨어져 나가버리는 자와
주님께서 또 다시 새롭게 끌어 모으시는 자로써 늘 교체작업이 벌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머리 되심 외에는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머리 되기의 비밀을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덮쳐온다.

포착되지도 않는 머리. 보이지도 않는 머리.
그러나 그 빈자리는 그 빈자리에 누가 앉음으로써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누가 그 빈자리에 앉아서 미끄러지고 누락시켜버리고 자빠져서 탈락 시킬때에
그 빈자리는 분명 없는데 그 없음이 생생하게 실제상황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녀 부부 사이에서의 이 머리없는 신체로써의 머리가 (확대 확장 증식되어)
이제는 교회라는 한 몸으로써 머리 없는 신체로써의 머리로 생생하게 자리잡음으로써
이 보이지도 않는 머리
잡히지도 않는 머리를 무시했다가
빈자리 라는 이유로 무시했다가
된통 굴욕을 당할때에
머리(빈자리 : 십자가)는 그때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모세는 괜히 두 번 지팡이를 바위에 치다가 누락 되었다.
누락 당함으로써 생생하게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서는 변화산상에서 빨리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머리 되소서
나의 주가 되옵소서 라고 외친다.
제가 된통 당해 봤잖습니까?
괜히 빈자리에 앉다가 쭈우욱 미끄러져자빠졌잖습니까?
모든 인간들을 주우욱 미끄러져 자빠지도록
십자가를 이루소서

다 이루심으로써 주가 되심으로써 머리가 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들은 미끄러져야 한다.
교회란 미리 이 미끄러뜨리시는 머리 되심을
미끄러져 자빠짐으로써 아 머리가 참 주님 이셨지 라고 알게 하신다.
베드로를 물 위에서 만나시지 않고
물 속에 빠뜨리심으로써
예수님이 왜 머리 되심인지?
내 머리를 물 속에 죽음에 쳐박으심으로써
내 머리를 짤라버리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알게 하신다.
(마치 할례하듯이 내 신체의 머리를 짤라버리듯이 단절이라는 성령의 소욕을 십자가로써 이루신다. 교회란 자신의 머리가 짤린자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할례당한자들이다. 자신의 머리가 짤리지 않은 자는 십자가에 못박혀 짤리던가? 아니면 저절로 밀려나감을 당하는 미끄러뜨리는 실족케 하는 빈자리의 위력을 생생하게 격던가? 당해서라도 주의 주 되심, 머리 되심을 주님 스스로 머리 스스로 증거하신다.우물가의 여인이 비로서 남편 다 날 버리고 갔는데 비로소 머리 만났다 라고 외친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내 죄를 아는 자가 떳어요 떳어.)

그리고서는 외친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주께서 저를 순결케 하셨나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짤려진 내 머리를 보고서는 세상에나 마귀머리였네 라고
(그것도 모르고 저 머리를 지킬려고 주님의 머리를 짤라버렸으니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어찌할꼬 내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 어찌할꼬. 그러나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구나 보라 이전 머리를 짤려버렸으니 보라 새 머리가 오셨도다.)

비로소 바지 벗겨지라고 막춤추고 빠아  빠 빠 빠빠빠빠
막마시고 막먹고 잔치를 벌릴 것이다.

그 빈자리라는 처음자리를 다시 되찾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죽음의 자리(십자가)를 찾은 그 기쁨에 넘쳐서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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