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래의 인터넷 기사를 봤는데 마침 이 내용을 십자가마을에서 다루었네요

남 이야기?  이름 : 이근호

2011-10-05 10:47:05 조회 : 124          

 
(IP:117.55.132.36) 

 
목사 꿈 접고

"요즘엔 주말에도 일을 나가셨어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마도 제 대학등록금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는 고등학교 3학년 김소은 양(18)의 눈시울은 금세 다시 붉어졌다. 패션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를 지망하는 김 양에게 "함께 실기시험에 가주겠다"고 하던 아버지는 든든하고 자상한 지원군이었다. 그런 김 양에게 대입 실기시험을 사흘 앞두고 들이닥친 아버지의 사고 소식은 충격이었다.

김 양의 아버지 김성권 씨(55)는 3일 오후 7시 40분경 서울 강변북로 일산 방향 동호대교 200m 앞 지점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는 김 씨가 중고차를 구매자에게 배달하러 가던 중 차가 고장 나 도로 3차로에 그대로 멈춘 것이 화근이었다. 다른 차들이 피할 수 있도록 수신호를 보내던 김 씨를 미처 보지 못하고 승용차가 그대로 들이받은 것. 김 씨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 씨는 10여 년간 경기 성남시 수정구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하다 1년여 전부터 목회 일을 그만뒀다. 이후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김 씨의 동생 김재권 씨(53)는 "형님은 봉사와 딸 두 가지밖에 모르던 사람"이라며 "교회를 운영할 때는 물론이고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면서도 형편이 어려운 동료 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었을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북 김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한 김 씨는 택시운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20대 중반부터는 교회에서 차량 운전을 하거나 건물을 관리하는 일을 해왔다. 봉사하는 삶을 꿈꾸던 김 씨는 3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신학대에 진학해 목사가 됐다. 교인이 적어 운영이 어려웠지만 노숙인이나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이 찾아오면 그때마다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다.

실업고에 재학 중인 김 양은 전교 10등 안에 들고 일찍부터 대학 진학을 준비할 정도의 모범생. 김 씨는 3년 전부터 건강이 나빠진 아내 대신 집안일을 돌보고 직접 학교에 찾아가 입시 상담을 하는 등 딸의 입시 뒷바라지를 해오고 있었다.

"대학 가면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하셨는데도 고맙다는 말씀도 못 드렸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시다니…."

5년 전 찍은 증명사진을 급히 확대해 만든 영정을 올려다보던 김 양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이근호 (IP:117.♡.132.36) 11-10-05 10:57  

오지랖 넓고 착하기만 한 어떤 목사가 사회 정의 실습장을 그냥 스쳐 지나치지 못하고 운전자들의 고통을 대신 덜어주기 위해 수신호하다가 그만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아, 위험한 세상, 엮인 인연들이 너무 많아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눌려 일찍 세상을 떴습니다. 남아 있는 딸과 아내는 고사하고, 수신호 미처 못보고 받아버린 가해자 운전사의 남은 생애에도 마음에 큰 구멍이 나게 되었습니다. 설치지 말아야 했을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홀로 굶어 줄을 때까지 개척교회 하면서 복음만 전해야 했을까? 건강이 악화된 아내가 죽던 말던, 사랑하는 딸의 꿈이 묵사발 되던 말던 남의 일로 여기고? 이런 판국에 '사적인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만족스러운 해답이 될까?  그렇다면 만족스러운 해답은?
 
 
이능우 (IP:203.♡.124.203) 11-10-05 13:02  

누구나 격을 수도 있는 참 가슴 아픈 사연 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건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지.
돌아가신 그 분은 주님을 어떠한 분으로 알고 믿고 살았는지.
그 분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작용을 하셨는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걸림이 되었을까?
그 말씀을 실행 한다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 했을까?
아니면 사랑이 그분의 삶을 강권 했을까?
네 부모나 자녀나 아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는 주님의 말씀이 인간 속에 담겨있는 육의 정을 단호히 절단 내 버리는 아픔의 말씀입니다.
육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차마 이 아픔을 감당치 못할 겁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씀이 왠지 마음 속을 후벼 팝니다.
사랑의 법이 그 사람을 휘감고 있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다 이루심의 말씀이 그 사람을 사용 하셨다면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더 이상 아쉬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복음 위에서 이루어진 모든 삶은 말씀 완성차원에서 주어진 주님의 결과물이기에 주님께 영광이 되겠지요.
 
 
고관규  (IP:58.♡.206.52) 11-10-05 13:30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이지요..
대리기사들의 많은 분들이 목사 강도사 전도사들이 많다고 전부터 예기 들었습니다.
어려운 개척교회 하면서 야간대리하는 목사들 숨어서 밥때문에 해야만 하는 그들에게
누가 뭐라 하겟나요? 그래도 교역자들이 젤 편하게 숨어서 할 수 잇는 일이 대리라고 하던데..

도대체 사명이란 뭔지요...굶으면서 해야만 하는 사명인가? 옐리아를 까마귀로 먹이신 기적은
현실에서는 그리도 힘이 드는가?
 
 
고관규 (IP:58.♡.206.52) 11-10-05 13:34  

돌아가신 목사는 사명으로 목회하지 못 하는,,,죽으면 죽으리라,,하는 믿음없는 목사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자본권력에 모두다,,무너지는군요...
 
 
이능우 (IP:203.♡.124.203) 11-10-05 17:29  

오타 정정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사랑하는 자는
 
 
박윤진  (IP:122.♡.53.57) 11-10-05 21:21  

아무리 구구절절한 사건도 탕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맏아들과의 갈라짐을 양산해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울컥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주되심이 썩 미덥지 못한 모양입니다. 가면은 십자가 지신 피묻은 예수님의 손에 의해서만 벗겨집니다. 스스로 탕자되지 못하게 하신 그 피가 고맙습니다.
 
 
구득영 (IP:203.♡.97.143) 11-10-05 21:54  

평생 거지로 살면 되는데,
가끔은 암행어사가 되고 싶은 겁니다.
전혀 남의 일이 아니군요.
하지만 저의 오지랖을 쳐부수는 주님의 솜씨가 있기에...
 
 
김대식 (IP:124.♡.86.13) 11-10-05 22:08    

강도의 소굴과 예수님의 죽음

인간의 죽음은 이 세상이 지옥임을 드러낼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로운 삶을 남들이 다 인정할 정도로 살았더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마귀가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안 속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가장 거룩한 교회 마저도 지옥임을 들추어내십니다.
강도의 소굴임을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떠날 생각 조차도 안하기 때문에
오죽하면 죽음 아니면 다른 길이 없을까요? 모든 중간의 막힌 담을 다 헐어버릴정도로 그 어떤 것도 중간에 매개체(중보)가 될수 없도록 모든 의문은 찢어 버렸습니다.

영화 도가니처럼 또는 영화 도그빌처럼 죄인(죄) 하나가 나타나면
이 세상은 그 죄인을 의인 만들기 위한 악마성이 가득한 바벨탑성전(이데아 국가)임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도리어 들추어내는 것이 바로 죄인을 미끼로 던지시는 성령의 일이요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 땅이 지옥이다는 내막을 드러내는 미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흠집내기(미끄러뜨리는 빈자리)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지옥을 땜빵하듯이 도리어 그 흠집난 홈페임을 매꾸어 보고자 봉합하는 차원에서
비록 세상은 악하더라도 아름다운 선함을 소문내며 아파할줄 알고
또 못땐 성폭력자들의 잘못을 일깨워 줄줄 아는
살아있는 양심, 정의실현, 비폭력주의,
선한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는 운동은 아직 남아있다고 합니다.

희망을 꿈꾸고 천국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이 땅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십자가 홀로의 움직임은 뭐가 됩니까?

원수성을 들추어내는 뚜껑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 원수성이 뚜껑열릴까봐 빨리 빨리 봉합하자는 것이 이 땅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가장 거룩한 인간의 모습을 한 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그 장소가 바로
사실상 강도의 소굴임을 그 어떤 누구도 들추어 뚜껑연적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열어 버립니다.

남이 아닌 나의 죄성, 원수성, 악마성을 뚜껑열줄 모르는 십자가는 가짜요 가짜 복음입니다.

(시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자 이렇게 되면 이 세상 그 어떤 곳도 다 지옥이라는 겁니다.
도가니의 인화학교를 폐교 해 버리면 지옥이 물러납니까?
지옥이 사라집니까? 마귀가 비웃습니다.
사실상 인간의 개개인의 신체 자체가 지옥 그 자체입니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그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안 들키고자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 국가이듯이
국가는 희망을 줘야지 장사가 되지
절망을 주면 딴나라로 이민하게 됩니다.
교회 운영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겁도 없이 가장 거룩하게 아담하게 꾸민 성전을 강도의 소굴을
들추어 내어버리듯이. 인간의 신체를 벌컥 벌컥 열어버립니다. 지옥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우물가의 여인이 들켜버리니까 비로소 선지자를 만났다고 외치는 겁니다. 그 지적이 사랑입니다. 아무도 벌컥 열지도 않는 꽁꽁 숨겨버린 그래서 그런 죄성에 자신도 중독되어 더 이상 자신도 죄악에 잠식당한 그 상태를 주님이 열어주신 겁니다.

지옥임을 들키기 싫어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게 꾸민 것이 말씀 지키기 행하기 근육키우기 개방소통 수용의 미덕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큼은 안 속습니다.
그래서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만 죽여버리면 들킨 것 의미 없게 되니까 말이죠.

가인의 제사가 악마의 제사임을 아벨을 죽여버리면 안들킵니다.
가장 정성스럽게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요소를 골라 골라서 드린 것이 가인의 제사 이지
엉뚱한 것 드린 것 아닙니다.

문제는 미래 완료가 아니라
과거를 거쳐서 현재의 정성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미흡한 겁니다.
앞으로도 미흡한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미래완료의 예수님의 제사인 십자가를 덮쳐서 열납하게 되니
졸지에 살인사건 곧 미움이 발생한 겁니다.

미움을 발생시킬 정도로 제대로 된 완료의 제사 이다는 겁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겁니다.

결국 가인은 회개해도 수정해도
아무리 보완해도 더 나은 제사를 드릴수 없습니다.

반대로 아벨은 막제사드려도 엉터리로 올려도
이미 아벨 것을 받은 적이 없이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받아버렸기 때문에 무조건 더 나은 제사입니다.

여기에 가인은 자신의 작은그림을 버리고 큰그림에 덮침당하듯이
어 이게 더 나은 제사 이네요 라고 자기것을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너무 정성을 드렸기에
너무 충성을 다했기에
뒤돌아 볼만큼 아깝기 때문에 따로 챙겨버리니
시험에 들어버리듯이 죄의 소원은 그것을 노리고 파고들어와서 넘지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평생 더 나은 제사를 넘어볼려고 자신의 쪽에서 넘어서기를 추구하는 겁니다.

아벨은 그런 제사가 아닙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 온 제사입니다.
그러니 아벨은 한게 없는 겁니다.

바보 같이 한 것이 없는 자를 붙들고 경쟁하듯 싸워본들
젖먹이랑 싸우는 꼴 밖에 안되는 겁니다.

다 큰 어른이 그래 젖먹이 것을 빼앗아 젖을 먹으면 맛있을까요?
비린내 나서 못먹습니다.

이런 방식이 십자가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실제적으로 매일 벌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말씀을 제대로 안다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마저 과시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
향유를 깨뜨린 여인
날때부터 소경이 된 실로암 소경 등등을 이용해서 과시하는 겁니다.

이왕 그럴꺼면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을 무릎꿇혀놓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버금가는 말씀을 제대로 안다고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나은데?

꼭 자신 보다 못한 사람 끌고와서 그 사람 보다 낫다고 하면

웃끼는 배꼽잡는 일인 겁니다. 이것이 사실상 모든 인간이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모습이며 인간 자체가 지옥덩어리이다는 것을

도리어 예수님은 창녀 세리 강도 소경을 통해서 그들이 지옥임을 지옥자식임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역으로 걸려든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비교해야지
비스무리 한것들끼리 모여서 도토리 키제기하듯이 비교하니까
지옥임을 알 리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들이댑니다. 예수님과 비교하라고
예수님과 비교하면
큰 그림과 비교하면 이 땅이 지옥입니다.
도가니 그 지역만?
도그빌 그 지역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가장 거룩한 교회
가장 사랑이 넘치는 곳

완벽하게 감추인 지옥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그런 곳이다 라고 서로가 자부하는 그 곳을

예수님은 과감하게 강도의 소굴로 들추어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자녀인 성령의 집은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구해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애굽왕을 강팍하게 함으로써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하신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집인 기도하는 집이다는 겁니다.

지옥을 봤으니 살려주세요 구해주세요 라는 소리 울부짖음을 안하고는 못배기는 거죠.

그러나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곳이다 라고 여기는 자는
지옥을 본적이 없으니 기도의 집이 될 리가 없죠.

기도의 집이 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저 목사처럼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려는 자가 아닙니다.
그 목사 당사자는 어떤지 몰라도 기자가 저런 기사내용으로 꾸민 것은 그야말로 악마성입니다.

살려 주세요 구해주세요 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무시해도 저렇게 무시할수 없는 내용으로만 채운 겁니다.

성금 모아서 저 가정을 도와주자 가 살려주세요 라는 내용입니까?
그렇다면 떠날려는 마음 조차도 없겠지요.
애굽왕을 강퍅케 하신 것은 떠날곳이 있다는 겁니다.
살려주세요 구해주세요 라는 것은 이 곳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미 죽어버린 목사는 그런 소리를 외쳤는지는 몰라도
이 기사 내용에서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은 지옥이 아니라
이런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희망을 잃지 말고 힘내자 라는 식입니다.
영화 도그빌에서 말하는 수용의 미덕을 죄인에게 보여주겠다고 하는 개방성과 똑같습니다.
악마의 소리인데 말입니다.

문제는 갈곳이 없다는 겁니다.
떠날 곳이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졸지에 이 땅의 일에 이제 미련이 삭제 당해 버립니다.
뱀은 이 땅에서 매매하면서 정착할수 있는 영역에 발 못붙이도록 밑둥치를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약속은 주의 주 되심의 위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을 괜히 왕이랍시고 자신이 율법 4배나 갚으라고 할 위치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안 것은 머리가 짤림당해 버렸기 때문에 딴 머리 곧 이미 완료가 덮쳐버렸기 때문이니 손놓은 겁니다.

그리고 손놓으라고 외치고 다니는 일이 졸지에 생긴겁니다.
딴 머릿돌이 성전임을 외치다가 다 이스라엘로부터 교회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 성전을 박살내 버리는 겁니다.
그것도 처참하게 자근 자근 밟아버림으로써
모호하고 흐릿한 그림자를 더더욱 잘개 잘개 쪼개버림으로써
더더욱 선명하고 또렷한 미래완료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참선지자 이듯이
또 여기에 그 참을 방해하는 요소인 거짓선지자를 천상회의에서 보내듯이
얼마나 제대로 된 완료가 왔으면
아벨을 죽이는 가인이듯이
참선지자는 갈기 갈기 찢겨야하고 거짓으로 취급받아야 함으로써 이루시는겁니다.
그 노선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아 이 땅은 예수님을 죽인 지옥이구나를 십자가를 볼때마다 아는 것이지

십자가에서 눈길을 돌려버리면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라고 곧잘 빠지게 되겠지요.

교회 재미있게 개방하면 교회가 강도의 소굴로 지옥으로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들추어 냄으로써

이 땅에 그 어떤 소망도 가지질 않도록 하셨습니다.

오로지 그 어떤 소망도 가지질 않도록 한 그 십자가만을 감사토록 하신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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