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전혀 없는 뻔뻔스러운 사귐 (미쁘심)
내가 구지 예수님을 전혀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 뻔뻔스럽게 사귐으로써 다가온 주님의 미쁘신 사랑해 주심때문이고,
반대로 내가 기여히 예수님을 믿고야 말겠다고, 예수님을 사랑하고야 말겠다고 나서는 것이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워서 전혀 못믿겨워서 믿고자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결국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겠다는 자기 숙제로써 행함을 발동한다.
그 인간이 주체가 된 행함이 또는 믿음이 발현되면 정당성을 가진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내가 정당하면 정당할수록 더더욱 그 괴리를 좁힐수가 없다. 더더욱 죄인이 된다.
타인의 얼굴은 곧 예수님의 얼굴이다. 그 고통의 얼굴을 외면하고, 유대인들은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기는 커녕
자신들의 목적만 달성하는 검소하기 짝이 없는 경건한 삶으로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어쩌면 유럽인의 광기에 촉매역할을 했으니 남탓할수가 없다. 둘다 똑같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였던가? 누워서 침뱉기 한 셈이다. 물론 이런 레비나스의 말도 인간자체에 대한 정당성 추구다.
(천주교의 내 탓이요 운동이 레비나스를 보고 울컥해서일까? 레비나스는 유대인으로써 히틀러에게 두 동생을 잃었는데 그 원인을 생각해 보니 이런 이론을 도출해 낸 것이다. 아 ! 누워서 침 뱉기 였구나!! )
결국 정당성을 갖추고자, 인간이 정당하면 정당할수록 두려움이 온다. 행하면 행할수록 두려움에 자기자신에 연민하고 시험들게 된다.
아무리 자신에게 두려워 하지마, 쫄지마! 라고 최면을 걸어도,
그 두려움은 누가 뒤짚어 씌운 냥, 비정당성, 부당함, 부조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자신의 정당성 외에는 붙들것이 없고, 앞장세울 것이 없다.
그래서 행위를 내세우면서 그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주고받는 소통으로 흐름(만남-접속)으로 만들고자 한다.
행함으로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역사성을 추구한다.
결국 그 역사(행함)의 정통 정당성의 최종결론은 죄책감과 살인의지이다.
예수님에 대한 살해로 이어지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는 없다.
그러나 복음은 비역사다. 역흐름이다. 반대의 이중성이다.
과거를 삭제하기에 정당성을 세울려고 해도 세울수가 없다
도리어 정당성이 전혀 없어서, 행한 것이 전혀 없는 전무하기에 오로지 긍휼만을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바랄 뿐이다.
오히려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죽음을 죽음의 이중성을 앞장세운다.
너희가 죽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사도행전).
바로 그 분의 죽음을 반복하는 이중성을 펼치는 것이 성령의 일이요 은사다.
그리고서는 그 은사로 사귐을 참으로 뻔뻔스럽게 주 안에서 펼치시며 자랑케 하신다.
사랑은 나의 행함을 나의 두려움을 내어 쫏아내었다고 말이다.
인간에게서 믿음이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가능케 만들어 줄려고
온갖 가능성의 장치가 손에 쥐어주고, 납득이 되도록 하고,
설명이 가능하도록, 눈에 보이는 장치인 교회 등등이 인간 손으로 세워 진다.
얼마나 안 믿겨지면 믿겠다고 행동에 나서고, 개혁하고 전복시켜 그 행위가 축적이 되어서,
그렇게 정당화 된 것을 정통이라고 불려지도록하는 역사성이다. 곧 정당성이, 역사성이 우뚝 세운다.
얼마나 앋 믿겨졌길래 역사화 했을까? 두려워서 행동으로 나선다.
얼마나 앋 믿겨지면 행하겠다고 나설까? 불안해서 하나님과 같이 동일시 일치성을 추구한다.
얼마나 사랑을 못 받았으면 사랑하겠다고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리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일까?
신념이 오기가 되는 것이다.
미덥지 못해서 증거물을 축적하는 것이다.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숙제를 확증받을려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 시켜 줄려고 발악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절 속에서 사랑은, 사랑의 이중성을 실행한다.
오히려 그 차이의 차이가 너무 너무 신나고 놀랍고,
미쁘게 다가와서 뻔뻔스럽게 용감하게 그 차이의 간격을 즐긴다.
차이의 단절을 누린다. 너무 너무 차이 나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싸가지 없이 만끽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이 예수님의 숙제 대상, 예수님의 믿음 대상이 되어
죄인 중의 괴수로 죄인의 이중성을 누린다.
바로 이런 특이성이 저들에게는 반드시 거짓으로 악령으로 비춰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아도 저들의 정당성 저들의 역사성인 저들의 신념인 오기
즉 저들의 믿음에 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단 척결로 이어진다. 두려워서 이다. 그래서 반드시 행동으로 실행한다.
가만히 있어도 사귐(편애) 때문에 죽도록 되어 있다. 가만히 있어도 저들에게 미움 받도록 되어 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이유는 딱하나 두려워서, 그 두려움의 불안을 카바하고자
자신들의 숙제로 마련한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함이다.
그 제사는 그 행위는, (역흐름인 더 나은 제사 곧 순종(대상이 됨)에 의해 그 속내가 들통난다.
우물가의 여인의 두려운 공포를 그 어떤 누구도 생명으로 인도할 자가 없다.
어떤 누구도 영생수로 목마른 갈증을 채워줄수가 없다.
그 과거의 허물을 씻겨줄자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숙제를 펼치심 때문에 내 남편이 없다 라고 한다
맞다 맞다 일곱 즉 여섯명이나 있었으나 지금 있는자도 아니다. 단절이다. 전남편은 다 이혼 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용서 때문에 참으로 뻔뻔스럽게 나의 과거를 씻겨주는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동네방네 외친다.
그 만큼 그 미쁘심 때문에 참으로 뻔뻔스럽게 사귐을 누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자신의 숙제를 하기 바쁘다.
그 숙제에 예수님을 끌여들여 대상화 한 것이 도리어 혹부리(법)을 떼는 것이 아니라 혹을 더 붙이는 꼴이 된다.
어찌하여 다시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자신의 숙제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 도저히 넘을수 없는 선에 툭 걸려 넘지를 못한다.
그냥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을 뻔뻔스럽게 바라는 우물가의 여인과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이래 알려 줘도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방언이요 비밀언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두려워서 믿고자 행하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갭(차이)을 좁히고자
그래서 자신의 숙제 대상화 일치하고자 동일성을 추구하고자 열심이 특심을 펼친다.
남은자 7천명이 넘어온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넘어갈려고 한다.
열심이 특심인 이 정당성은 내가 크게 보이지, 주님이 크게 보일리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의 십자가는 그 차이성의 간격을 더더욱 벌려서
그 벌어진 틈의 간격을 누린다. 그 빈자리를 더더욱 만끽한다.
빈자리를 앉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미끄러진다.
7번째 씻으니 비로소 고침받을 자격조차 없음을 누린다. 처음자리를 누린다.
처음사랑(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조건 용서받음)이 크게 보인다. 난 그저 무능했었다.
가인은 놀지 않고 제사를 드렸고
에서는 놀지 않고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할려고 사냥에 전념했고
맏아들은 그래서 쉬지 않고 아버지 곁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이 일했으며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분주히 열심을 다했으며
가룟유다는 쉬지 않고 유대 독립운동을 펼쳐 이스라엘 해방을 꿈꾸며 실천에 실천을 더 했다.
이렇게 유대인은 쉬지 않고, 자나 깨나 성전생각, 하나님생각, 율법생각, 천국생각만 했다.
그 신념이 아니면 참혹한 현실에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버림받을까봐, 밉상받을까봐, 단절당할까봐, 두려워서 절망스러워서 불안해서 말이다.
행함으로 행함에 이르기 때문에 두려움만 더 증가가 되는 혹부리를 오히려 하나 더 달게 되는 꼴이다.
단절을 격기 보다, 되도 않는 행함으로 잇고 이어서,
지금까지 전전긍긍 명맥을 이어서 왔다는 그 자부심, 그 정당성만 가득하지,
정작 그 두려움을 배가가 되어 증폭이 되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바로 그 완악함은 탄로가 난다.
이렇게 혹을 하나 더 달게 됨으로써 그 부조리가 옳았군요 라고 긍휼을 쳐다보는게 아니라(단절을 직시함으로써 쳐다봄)
오히려 자신의 행동, 그것도 아주 지극히 정당하고도 정당한 행동, 그런 행동이면 행동일수록
점점더 혹은 더 더 더 붙이게 되며 더더욱 정당하게 된다.
혹을 떼어내어 할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점점 더 손 할례로 혹(법)을 더더욱 온 몸에 붙이는 꼴이다.
그러니 강도만난 자를 율법과 일치할려는 행함이 가득한 자 일수록
그 강도만난 자를 피하고 빙 돌아서 가는 것이다.
선함이 아니라 악함이다.
악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온 몸에 달았다고 선하다고 우긴다. 행함의 정당성이다.
햄하면 행할수록 더욱더 나는 정당해 진다.
그래서 행함에 집착한다. 허상에 빠진다.
실상인 예수님의 믿음을 쳐다볼 이유가 없다.
두렵기 때문에 못 쳐다본다.
그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못 쳐다본다.
시험에 빠져 버렸기에 오로지 쳐다볼것은 자신의 행함 뿐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불안해서 영혼까지 잠식된 상태다.
십자가는 오히려 더더욱 죽음을 적나라 하게 까발리게 하니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에 빠진다.
그래서 대체 대안이 행함이다. 행함의 이중성이다. 행함으로 행함을 이을 뿐이다.
얼마나 안 믿겨지면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십자가의 사귐이 덮쳐진자는 그 다 이루심을 누린다.
그 완료를 누리기 바빠서 책임 질게 없다.
그 누림이 바로 차이성이다. 자기유익이 아니다.
참혹스럽게 그 차잉성을 격는다.
죄인 중이 괴수라는 죄인의 이중성을 십자가의 피의 이중성 때문에 격게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일방적으로 사귐당해 버린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예수님의 믿음의 이중성이다. 믿음의 증폭, 믿음의 무한반복이다. 얼마나 미쁜가?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살전 5:24, 개역)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래서 놀기 바쁘다. 무지 무지 놀기 바쁘다. 줍는 놀이에 푹 빠져서 자신을 돌아볼 관리할 겨를이 없다.
그 정도로 뻔뻔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진 썩지 않는 양식인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기 바쁘다.
너무 너무 뻔뻔하다. 무슨 자격으로 먹냐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데 주님이 먹고 마시라고 온 세상에 피 범벅으로 주님의 살로 온 산과 바다를 다 덮어버렸다.
다른 양식이 있으면 말해 봐라? 그냥 뻔뻔스러울 뿐이다.
이 용감함은 아버지의 숙제로 그 차이를 격었기에 ,
되도 않는 자신의 숙제가 거들났기 때문이다.
진작 거들 났어야 할 자아였다. 되도 않는 자아를 쳐다보다가 비로소 다른 인간 차이나는 진짜 인간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게임 오바다.
선지자 시므온이 그래서 외쳤다. 이제서야 내 숙제 끝
빨래 끝 ~~~~~~~~~~~~ 거룩이 와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미뻤으면 손을 떼 버렸을까?
이제 자아를 쳐다볼 이유가 전혀 없다.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나설 이유가 전혀 없다.
행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저 사랑에, 피 흘리심에 피 뿌림 당하는 일 밖에 없다.
그 사랑이 벌리는 폭력
곧 행함을, 불안을, 두려움을 내어 쫏는 그 차이의 차이를 겪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 뻔뻔스러운 사귐만 있을 뿐이다.
(딤후 2:11,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딤후 2:12, 개역)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딤후 2:13, 개역)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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