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그림 하만 찾기와 죽으면 죽으리라 이중성 (쌍둥이 공명[에스더] = 왕자과 거지)


(에스더 4:16, 개역)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막 8:3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에스더 이야기는 은폐되어 숨어있던, 일체 가시화 된적 없던 하만이
우발적으로(없는데서 있게하시는 무에서 유로 창조) 돌출 되지 않으면
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에스더와 하만의 대립이다.
이 노선이 곧 예수님과 눈에 가시화 된 적 없는 마귀만을 겨냥한 대립과 같은 구조다.

어제 어머니께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좌를 일부러 비워 두니까(부재성)
남들은 다 가만히 자기 할 일 그대로 있던 없던 맡은바 소임을 다 하는데(종말)
괜히 이상하게 분답스럽게 나대는 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비워 있으니(부재) 괜히 불안해서 안절부절 어쩔줄 몰라 한다
비로소 숨어있던, 없었던 강퍅이 드디어 등장한다. 

구지 내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 뻔뻔스럽게 사랑받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비워있어도 그 자리 자체가 든든하게 안정감있게 온 천하만국을 운행하신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기여이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설쳐대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야 말겠다고 자부한다는 베드로의 다짐 자체가,
바로 전혀 미더움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서 이다.

사랑은 두려움(행함)을 내어 쫏는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 빈자리를 일부러 형성해 보니
두려움이라는 행함이 돌출한다.

보좌가 얼마나 든든하게 있으면
땅이 요동하겠는가?
그 든든함에 더더욱 증폭시키고자 하는 빈자리의 차별성 이중성 빈자리의 빈자리
아무리 봐도 비어 있을 뿐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땅을 흔들어 버린다.
흔들어 보니
두려움이라는 행함들이 발악을 하면서 정체를 드러낸다.

(시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왕이라는 보좌가 그 보좌됨을 증폭시키기 위해 일부러 비워버린다.
반칙이다. 부조리다. 모순이다. 배신 때리기이다.

여기에 두려움이 말려든다. 하만이 말려든다.
왕자과 거지(평행이론)의 이중성(쌍둥이 권법)에 악마가 말려드는 것이다.

 

 

이중성 자기들끼리(아버지와 아들의 소원) 짜고 치는 고스톱에
행함이라는 정당성이 그 반칙에, 그 부조리에, 그 모순에, 그 불륜에 더더욱 말려들 수 밖에 없는 이 구조를
묵시라 한다. 곧 비역사성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비역사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뻔뻔스럽게 사랑만 바랄 뿐이다.
그러나 역사란 아무것도 믿을수 없기에 자신의 자취만을 믿겠다는 정당성이다.
그래서 행함 뿐이다. 행하면 행할수록 더더욱 두렵기 때문에 행함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래서 역사를 구축한다. 시간이 1 2 3 으로 흘러서 그 획득한 성과를 축적하는 것이 행함이요 역사요 그 역사는 역사다울수록 정통 곧 정당성이 되는 법이 된다.

그러나 법이란 없다. 허구이다. 남근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절로써만 일하시는 성령 곧 묵시의 활동만이
미래에서 3 2 1 로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것이다.처음부터 미래완료만이 일방통행으로써 의문이 없는 다 이루심의 결과만을 도출해 왔지
그 어떤 것도 완료 없이는 행한적이 없었다.
믿음으로 믿음을 이루셨다. 믿음의 이중성(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남근의 없음, 법 체제가 없음, 우상성이 없음, 행함을 내어 쫏음, 두려움 없음이
바로 여성성이다. 할례 단절이다. 십자가이다. 곧 복음이다. 사랑이다.이제 사랑의 증폭인 사랑의 이중성 뿐이다. 십자가의 십자가 뿐이다.
온 세상을 온 역사를 피의 피로 물들여 놓는다. 그 피가 과거의 모든 허물도 일방적으로 덮어버린다. 아니 오히려 그 십자가의 피를 높이고자 그 어떤 허물도 가지고 오라 하신다. 이 얼마나 자유의 자유인가? 은혜의 은혜인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으시다.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왕과 거지 라는 동화의 공명은 곧 약속과 여자의 후손의 공명(이중성)으로써 구조를 형성한다.

이 이중성은 이 증폭성은 이 차이성은 고맙게도 반드시 그 역할을 해줘야만 하는 하만(행함)의 등장으로 그 이중성이 또렷하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차이의 간격은 모호하거나 흐릿하지 않다.
누가 봐도 다 알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도 너무 너무 쉽게 알수 있다. 너무 너무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과 기름의 구조처럼 말이다.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이중구조 곧 묵시구조이다.(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런 비역사인 묵시를 똑똑하고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무능한 자인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은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 간격이 너무 너무 의문, 의심할 꺼리가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는 쳐다볼 이유가 없다. 지혜를 소유한 행함이 정당화 되어 있기에 두려움 곧 시험에 빠져버렸고
슬기로움이라는 자신의 것이 명확하게 있기에 그 슬기로움의 정당함으로 다른 행함을 볼 이유가 없다. 그것을 본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자기 지혜 자기 슬기 자기 숙제가 있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믿음 이유도 없다.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 숭배의 대상이 안된다.
그저 예수님의 긍휼 대상만이 될 뿐이다. 그분의 숙제만을 바라볼 뿐이다.
자신이 정당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다. 사랑이 숙제를 다 하기 때문이다. 그 이중성에서 놀기 바쁘고 누리기 바쁘다. 과거의 자취들을 축적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래서 비역사적이다. 삑사리다. 여성성도 삑사리다. 축적할 이유가 없다. 맨날 새는 바가지 그 모양 그대로 예수님의 숙제에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받아 마시면 된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자나깨나 자기숙제 뿐이다. 그 행함이 정당화 되도록 하고자
더더욱 두려움에 행함만을 붙잡을 뿐이다. 자기 외에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 긍휼은 쳐다볼수가 없다. 그래서 하만은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한다. 그 빈자리에 괜히 충성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노리는 반역자를 처단하여 자신이 공로자가 되는 그 정당성을 소유하고자 했다. 거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무능한 여성성인 거지 에스더가 말려들어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이중성은
사랑의 사랑이다.

두려움이라는 행함이 일체 삭제당한 누가봐도 행함(법체제)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인, 무능의 무능이다. 죽음의 죽음인 이중성이다.

하만에게 벗어날 길이 없다.


바로 이런 배경을 깔고서 십자가는 두려움이라는 행함을 거부하고
은혜를 펼친다. 모든 것을 은혜로 창조했듯이 말이다.

행함과의 극적 차이가 바로 믿음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두려움의 극적 차이가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만이 행함을 내어 쫏아 낸다.


그 뻔뻔스러운 흥분되는 사귐만이
행함의 댓가를 바라는 자를 내어쫏는다.

그래서 베드로를 뿌리치시고
곧 죽어 마땅한 무능의 죄인 중의 괴수에게 뛰어드시는 것이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내 죽을께 너 살아 낫 뿌라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고전 13:1, 개역)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개역)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개역)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4, 개역)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개역)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개역)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개역)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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