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선지자와 늙은 선지자(왕상13장) 그리고 십자가의 징후(편파 복음)
2012년 9월 19일 수요일 오전 12:44:19 김대식
어제 어머니께서 젊은 선지자와 늙은 선지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저도 이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무지 많이 묻곤 했습니다.
먼저 성도란 그저 개인의 삶만을 누리다가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늘의 뜻을 펼치기 위한 하나의 유물에 불과합니다.
소품이요 소모품이요 그릇입니다.
그 그릇에 담긴 보석의 가치만을 드러내도록 말입니다.
이것을 기능이라고 하는데 바로 편파적인 기능입니다.
동일하게 비언약의 인간 또한 허트로 씌여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진노의 그릇 값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꼼꼼하신데 !!
에스더는 하만 없이는 형성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돌출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의미 없습니다.
비록 그런 다윗 조차도 [다윗]과 차이나는 [다윗의 자손]이 언급이 안되면,
차이나는 다윗의 자손 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겁니다.
미래에서 땡겨져서 비교당하는 겁니다.
또 이 다윗의 자손은 바리새인의 활동이 아니면 그 차이를 통해 누구인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반드시 마귀(바리새인 가장 존경받는 흠잡을데 없는 신앙인)가 등장해 줘야
다윗의 자손 이신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일부러 누락시키는, 마태복음(유대인을 겨냥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서 빼 버리는 겁니다.
빼 버림으로써 유대인이 다윗 뒤에 숨은 그 악마성을 돌출시키고
동시에 다윗을 쪼개어서 그 속에서 담겨진 약속의 의미로써 등장하는 5명의 여자, [~ 에게서] 족보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즉 다윗 빼기가 아니면 이 족보의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고맙게도 다윗은 누락 되어 주셔야, 다윗의 자손의 의미가 부각되는 겁니다.)
반드시 다윗을 빼기 하는 겁니다.
반대로 유대인은 다윗 뒤에 자신들의 악을 다 숨겼기에 다윗 넣은 족보를 또 찾아 헤매겠지요.
(성령은 다윗을 빼버리고 누락시키는데 반해, 인간은 반드시 반드시 다윗을 집어넣는 겁니다. 이것이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입니다. 신앙 위인을 집어넣음으로써 일치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가짜 하나님입니다. 차이성인 이중성 즉 쪼개기 다윗깨뜨리기가 아니라. 누락이 아니라, 반드시 다윗 사수인 겁니다. 만약 다윗 사수가 실패하면 그들은 남자의 족보가 형성되지 않는 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 라는 커뮤니케이션으로써 단절시키는 이 족보를 거부하고 싫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남성성이 된 신앙이 우상숭배인 겁니다. 그러면 일부러 여성성을 추구하면 되느냐? 그 발상 조차도 우상적인 일치성입니다. 여성성이란 차이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치성 동일성이 아니기에 반드시 일치성에 밟힘으로써 차이나는 겁니다. 그러니 여성성이 되고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 조차도 거부하는 겁니다. 성령의 일은 무조건 육의 소욕과의 단절 차이입니다.)
자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 자체가 개인적인 사적의 삶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배치한 십자가의 구조에 배치되는 양상으로써 구조적이다는 겁니다.
집단적이며 운명적이며 피할수 없는 환경, 불가항력적인 메트릭스 구조 프로그램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젊은 선지자나 늙은 선지자나 그 시대상의 흐름을 그들은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해 주는 식으로서 두 사람이 그릇으로써 그것들을 담는 그릇이 되고 그리고 배치되는 구조 속에 놓이는 겁니다.
오늘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만
그 당시의 종교적 흐름에 대한 의식을 늙은 선지자가 대변해 주고 곧 바리새인이 그 당시의 신앙상황(유대인에게 마귀가 다 장악하여 심은 종교성)을 대변해 주듯이
젊은선지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만
그 말 자체가 이미 유혹에 넘어간다는 식이다고 어머니께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도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넘어가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더라 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이란 이길수 있다면 유혹이 아닙니다. 못 이깁니다. 유혹을 정 이기고 싶으면 유혹에 지는 겁니다.
자 그럼 우리가 예상대로 그 젊은 선지자가 유혹에 넘어간 것도 나쁘지만
그를 유혹한 늙은 선지자도 아주 나쁜놈이다 라는 결론을 쉽게 짖습니다만
(결국 누가 더 나쁜놈이냐 라는 의문으로 접근한다는 자체가 그런 교훈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서 나에게 적용시키고자 함인데 정작 누가 더 나쁜놈이 모를때는 나에게 유익으로 챙기는 것이 모호해 지는 겁니다. 그러니 선악에 갇혀진 우리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한 치 오차 없이 완성하셨다고 일방적으로 여호와 자신의 일에 영광을 돌리시는 식으로만 일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탬이 누가 되었는가? 젊은선지자? 모호하죠.
그럼 나중에 후회하고 깨달은 늙은 선지자? 그것도 모호합니다.
둘 다 보탬이 안 됩니다. 그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대변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의 일이 한치 오차 없이 다 성취했다고 편파적인 자기 영광을 높이는 겁니다.
시선이 인간 행동의 가치성에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일하심의 가치성에 좌우된 겁니다.
늙은 선지자를 통해서 그 당시의 악함을 들추어 냅니다. 대변해서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삶이라는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천국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지옥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인간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동원이 됩니다. 인간도 예외가 될수 없습니다.)
그 악함은 아무리 미리 알려주고! 알려주고! 제발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도
넘어 갈 수밖에 없는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간 젊은 선지자를 죽여버리심으로써 악함을 들추어내는데 성공해 버렸다는 그야말로 편파적이기 짝이 없는 상황을 죽음으로써 펼쳐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마귀가 안 보이지만 주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주님만이 심각하게 보신다는 겁니다. 아무도 그런 환경에 불만을 가지는 자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유혹한 놈을 찢는게 아니라 유혹에 넘어간 자를 찢어버려서 그 젊은 선지자의 사명을 죽음으로써,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사명을 감당케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알리바이 형성이니까 미끼를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궁민 ~~~~~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국민)
그래서 물증을 잡아서 조져버리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돌리는 방식이 뭐냐?
심판의 정당성을 찾아 그 증거로 심판하는 겁니다. 심판은 거룩을 더욱더 거룩 답게 펼치시는 사랑입니다.
악을 보고도 심판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두는 사생아입니다.
인간 보고 정의로와라 라는 말이 아니라, 자꾸 하나님과 일치할려는 대상으로 보는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대상으로 삼아서 악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잡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함을 돌출 시켜 심판의 정당성을 삼아서 거룩한 땅을 거룩케 만들겠다는 취지입니다.
주님의 의지입니다.
인간은 그런 의지가 있을수 없고
다만 십자가의 징후로써 악한세대를 들추어내는 미끼로써 포획장치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결국 그 어떤 유물도 포획장치로써 사용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죽음을 하나의 물건으로 치면 죽음도 생명도 해도 달도 다 그렇게 십자가의 이중증폭을 위해, 사건의 재료로써 사용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의 징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죽음? 내 순교?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은 딱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 뿐입니다. 이것만 예정된 것이고, 이것만 무한반복 됩니다.
영원회귀는 십자가의 사랑 용서 뿐입니다.
십자가의 십자가 즉 십자가의 이중성(무한반복=증폭=잉여)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국 죽음을 도출 시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였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사명 자체가, 은사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된 겁니다. 딴 사명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인 숨은 세력을 들추어내는 것이 없잖아요. (오히려 더 숨어들어가죠)
악을 들추어내는 것이 없잖아요,
그저 젊은 선지자 만 칭찬꺼리만를 갖는 셈이니까요
젊은 선지자는
아니 [선지자] 라는 의미는 거짓선지자이든 참선지자이든
결국 예수님을 드러내는 부정한 그릇으로, 긍휼의 그릇으로 결국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되는 겁니다.
모든 은사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양쪽 다 죽이시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은사의 목적입니다. 단절입니다.
목베인 영혼의 은사는 목베임입니다. 그것이 숨은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는 기가막힌 미끼인 겁니다.
그러니 누가 옳고 누가 틀리고가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 자체로써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진노의 그릇이요 긍휼의 그릇입니다. 선택권이 없습니다.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누굴 땡겨주시고 누굴 안 땡기시느냐 라는 그 땡기시는 분에 관한 의미만을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구조라고 했습니다.
(구조, 비역사 즉 묵시란 인간의 역사의 개입을 일체거부하는 겁니다.)
목자의 음성이 누구에게 들리느냐 라는 겁니다.
(목자의 목소리가 걸러내는 겁니다. 차이내고 가려내는 겁니다.)
다 같이 귀가 있는데
누구는 목자의 음성이 들리고
누구는 안 들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희한한 겁니다.
귀 있는 자에게 들림이 주도권을 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귀머거리는 선택권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불임여성을 믿음과 연관시켜서 내세움은 예수님 자신만의 믿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귀가 있어도 정작 들려주시는, 귀머거리도 뚫는 희년 그래서 듣게되는
새로운 귀를 만드는 자의 소관이요
우리는 새로운 귀를 새롭게 지음받아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기존의 귀로는 못듣는겁니다. 과거의 귀로 연장선상에 놓아서 잇고 이어서 들을수 없습니다.
귀 있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단절성을 격습니다.
과거의 귀 엄청 잘들렸던 그 귀 있어도 소용없고 새로 귀를 만들어 주소서 라는 자에게만 귀 만드시는 자의 기능이 발현되는 겁니다. 이을수가 없습니다. 단절성을 격은 자만이 이을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심판을 직시한 겁니다. 심판자를 제대로 본 겁니다.
나는 원래 귀가 좋아서 참 잘들린다 라는 소리를 하는 자는
심판자가 안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 단절성 차이성을 격는 것 보다는 동일성 일치성 기존의 것을 여전히 유효화 시켜서 접속을 시도하는 겁니다. 잇고 잇고 이어서 기존의 귀를 유지하고 보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귀머거리 눈봉사에게만 편파적으로 복음이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왕의 기능에서 가장 이뻐보이는 자는 왕비인 아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집에서 남자의 기능에서만 여자가 이쁜 겁니다.
남자가 남자를 집에서 아내라고 하지 않고 남자를 이쁘게 안 봅니다.
그러나 국가의 왕으로써의 기능에서는 이제는 남자가 아니라 왕이라는 직분 기능으로써는
그 나라에서 가장 불쌍한 백성만이 왕이 가장 이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냐? 백성이 잘나서? 아니지요 못난이 중에 못난이죠. 재수 가장 없는 자 입니다.
그야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지 중에 상 거지 입니다.
(경제적으로 볼때 거지 중에 상거지이듯 돌을 떡덩어리로 만들어서 주고플 정도로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도와주다가는 살림 거덜날 정도로 밑빠진 장독대 입니다. 도덕 윤리적으로 볼때도 악한 놈 중에 가장 악한 놈 즉 귀신들린자와 같습니다. 괜히 도와주고픈 동정심을 발휘했다가는 백프로 같은 놈 취급당할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 입니다. 종교적으로 볼때는 사랑을 못받아도 저렇게 못 받았는지 완전 저주 덩어리 입니다. 절대저주 입니다. 신이 저렇게 저주 할수 있을까 쯧쯧쯧 할 정도 입니다. 정치적으로 볼때는 간택 되어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버림받은자 입니다. 누구하나 얼굴을 한번 마주본적이 없이 고개를 돌려버려서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자가 없습니다. 본적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도 그것이 아 당연하구나 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떨구다 보니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적이 없게 되는 겁니다.)
왕 자신만의 편파적인(일방적인) 기능 때문에 가장 불쌍한 백성만을 이뻐하는 겁니다.
어느정도로 이뻐하느냐? 편파적일 때 반드시 그 편애에 불만을 품는 세력을 돌출시키때까지의 이뻐함이니 이것은 거의 막장입니다. 이것을 극화 라고 합니다. 극과 극으로 그 간격을 최대한으로 벌리는 겁니다. 드라마틱, 다이나미틱, 역동적이다는 겁니다. 왕의 기능 만이 역동적이다는 겁니다. 어느정도로 방금 용서한 자를 그 용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다시 벌내릴정도로 편파적입니다. 일만달란트 용서받았는데 그 용서 무시했다고 죽여버리는 용서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왕입니다. 한 사람에게 두 가지 기능이 동시에 적용이 된 겁니다. 가장 극화된 용서가 편파적으로 부어졌습니다. 일만달란트는 묵시적인 기능이다는 겁니다. 못 갚는다는 겁니다. 역사적 해석이 불가능한 편파적 용서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를 받아놓고도 줘도 뿌리쳐버림으로써 편파적으로 용서를 용서답게
기능만을 기능 답게 높이기 위해서 절대로 땅에 떨어져버린 그 용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손해 본 것 없습니다.
장자권? 주님 손해 본 것 없습니다.
민수기의 백성 숫자? 주님 손해 본 것 없습니다.
그 숫자 그대로 요단강 건넙니다.
구원 받기로 된 숫자는 그대로인데맴버는 교체 당한 겁니다.
오히려 탈락을 통해서 단절을 통해서 주님 자신이 펼친 구원의 정당성을 오히려 더 돗보인 겁니다. 짤린 놈만 손해인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희한함을 이 두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 또한 하나님의 원수이기는 맨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변화산에서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은 딱 하나 뿐입니다.
가나안에서 누락되고 탈락된 그 당사자 모세입니다.
그래서 별세해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자기 구원 챙기기 입니까?
아니지요 역사성의 삭제는 묵시 뿐입니다. 죄를 씻는 것은 피 밖에 없습니다.
율법 대표자가, 그 당사자 조차도,율법의 완성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긍휼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는 그 기능을죄인 중의 괴수로써, 죄인 이중성으로써 피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피만을 높이는데 동원이 되는 겁니다.
만약 그 당시 모세가 살아 있다면, 사람들이 다 그를 죽일려고 달려들었을 겁니다. 그 딴 소리 못하도록 말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세를 죽일려고 달려들겁니다.
그 정도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자는 이미 죽은자요
죽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만을 위해 동원되어 변화산 에 까지 나타나서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지, 십자가의 이중성이지, 나 변화산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다시 등장했지롱 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젊은 선지자의 등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배치물로써 미끼로써 악을 돌출하는데 잠깐 등장했다고 무대뒤로 누락당하는 겁니다.
탈랜트 역할이 감독의 각본대로 넌 유혹 당해서 하나님께 갈기 갈기 찢겨 죽어야 돼늙은선지자는 유혹한 것을 후회하든 말든 무관하게 북이스라엘의 심판의 정당성을 그 물증을 잡는데 대표성으로써 작용되고 동원이 되는 겁니다.이건 뭐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만 정작 눈에 가시화 되지도 않는 마귀만을 겨냥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인간 성화케 만드는 열심히 아닙니다. 오로지 마귀를 겨냥한 열심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중성입니다. 마귀 없이 되는 이중성은 없습니다. 인간 구원해 줄려고 환장한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의 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묵시의 일을 자꾸 사람의 일로 오해한 엘리야가 주장한 내 열심히 특심이다는 주장인 겁니다. 850 대 1 로 우상숭배자들과 싸워서 이겼다손 치더라도 마귀는 가시화 된 적 없습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라는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의미는 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보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왜? 행함의 책에 기록된 지옥백성인데 거기서 지워서 생명책에 옮겨서 기록되게 했다는 마귀를 겨냥한 예수님 자신의 숙제를 말하는 겁니다. 마귀란 우리의 적이 안됩니다. 그저 마귀 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것을 봐야지 왜 자기가 마귀를 물리친 것을 보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만 남았다 나 만 남았다. 라고 자꾸 자신의 노동의 정당성을 추구하니까
단절성의 7천명 그 묵시의 7천명을 볼수가 없는 겁니다.
보여주니, 생명책에 기록케 하실려고 마귀 속에서 빼내시는 그 차이성을 보게 되니
부끄 부끄 부끄입니다.
그러니 심각한 것이 없는 겁니다. 혼자이든 7천이든 이미 옮겼느니라 게임 오바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의미 없습니다. 완료된 미래가 닥쳐오니, 묵시가, 7천명이 닥쳐오니 에이 괜히 심각했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어도 상관없고, 잘려도 상관없고, 도살장에 끌려가도 상관 없고, 미말에 둔 구경꺼리 놀림꺼리 왕따꺼리 찌끄레기 쓰레기가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요 5:24,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왜? 사망책(행함책)에서 생명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진짜인지 아닌지 우찌아노? 알려줄까? 알려주는 방식은 딱 하나 죽여버리는 겁니다. 차이내는 거룩은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의 이중성 곧 십자가 사건의 재반복 무한반복을 계속 계속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라 동일하게 성전에서 터지고, 그 어떤 장소도 성역이 없이 구석 구석에서 이 편파적인 복음사건은, 그 십자가사건은 멈춤없이 펼쳐지는 겁니다. 무한반복재생 증폭
결국 여기에 늙은선지자는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대변해서 그를 속였고 그를 유혹했고 그를 죽임으로써 개인적인 행동을 한게 아닙니다. 대변 대표성으로 담은 겁니다.
본인은 꿈에도 몰랐죠. 죄란 개인이 펼치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미워하심이 뒤짚어 씌여져서 하는 겁니다.
이카니까 또 예수님께 뒤짚어 씌우는데 힐문할 자격자체가 없는 겁니다.
힐문 자체도 노동의 정당성이지요. 편파 앞에서 우찌 힐문하는 겁니까? 힐문의 자격은 오로지 동급 동질의 신만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없고 신 뿐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힐문할수 있다고 본 겁니다. 피조물이 없어요 세상에. 인간 중에 인간이 없어요. 다 신 뿐입니다. 다 하나님 뿐입니다. 그러니 동질 일치성 동일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졸지에 신앙이 되고 만 겁니다.
그게 마귀 자식이다는 증거죠.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이 마귀의 특징입니다. 대상으로 삼을수 없을 정도로의 미쁘심을 모르는 겁니다. 미쁘심이란 그 정도로 안 믿겨질 정도가 미쁘다는 겁니다. 반대의 의미의 이중성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의 믿음을 다 동원해도 안 믿겨지는 것이, 그 불가능성이, 그 단절성이 바로 미쁘심이다는 증거입니다.
아 나는 도저히 하나님 못 믿겠더라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하는게
그 정도로 미쁘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말씀 답다 라는 겁니다.
어딜 감히 믿을려고 해요?
어딜 감히 주여 주여 마귀를 예수님 이름으로 쫏아냈습니다 라고 하느냐 말이죠.
영적물건들이 대상물이 되느냐 말이죠,
에라이 닭한테 무시 받아라 라고 닭이 울어주어야만 구원받는 겁니다.
닭이 이빠이 이빠이 무지 무지 참고 참아서 닭이 나를 용서해줘야
그렇게 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울어줘야만 하는 닭이 있어야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내 소관이 못되는 겁니다. 닭의 대상물로 취급당하는 것이 처음자리입니다.
똥물에 7번 씻겨짐을 당할정도로 그 정도로 저주 받아 마땅한 자로 취급당해 져야할 자가
처음사랑이 미쁘시게 넘어온 겁니다.
이 편파성이 십자가의 이중성입니다.
십자가의 가치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겁니다.
믿을게 아니라 십자가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야만할 정도로 너는 죄인 중의 괴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신 달렸다는 무시 중의 무시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널 구원했으니 이제 너가 나를 잘 믿어야 한데이 ~~~
날 배신 하면 안된데이 ~~~~
이렇게 되면 십자가는 무한반복이 아니지요. 누가 주인공입니까? 누구한테 애걸복걸합니까?
십자가는 끝까지 무시해서 죽여버리는데 까지 가는 겁니다.
그러니 찌기가 되는 영광 뿐이지
성화되어서 믿음 있는자로 인정받게 되는 역사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묵시는 그런 역사를 적극적인 파괴로써 십자가만 반복하는 겁니다.
늙은 선지자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 말려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구조를 그렇게 배치시키는 겁니다. 선 혼자 스스로 독자할수 없고. 악 혼자 스스로 완악해 질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맞물려야 합니다. 상호작용인 겁니다.
늙은선지자만이, 개인 개개인적으로만일까요?
모든 인간은 여기에 다 해당됩니다.
늙은 선지자는 고맙게도 우리의 자화상을 대변해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가룟유다도 바리새인도 동일합니다.
그들만 그렇게 안일하게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를 쉽게 쉽게 대하느냐?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용으로써, 단순히 구원의 과정으로 소유화 된 이론, 또는 교리 신앙으로써 취급하는, 그 우상화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예수님은 움직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포착이 안됩니다. 쭐꾸덕 미끄러집니다.
또 그 미끄러짐을 확대하기 위해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더더욱 많이 나타나야만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인간은 이 십자가의 움직임에 말려들어 도리어 움직이지 않는 십자가로 취급하다가, 십자가로부터 발로 차여, 발로 까여서 비로소 움직임을 직시하고, 정작 자신은 그 움직임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죽게되는 신세, 무시받는 축구공 신세가 될 때 십자가가 십자가 스스로 십자가의 이중성을 펼치는 그 차이성을 격는 겁니다. 십자가를 대상으로 삼았다고 작살남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버릇은 어쩔수 없으니 당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니 얼마나 그 물 위를 걷고 싶을까요? 일치성을 추구하고픈 본능에 어쩔수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걸으니 그것도 주님 앞에서 그 감격은 마치 하나됨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여겼을 겁니다. 이제 남들에게 자랑할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자랑은 십자가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토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일치성 하나됨이 아닌, 철저한 단절성을 그 차이성을 격어야 하기에 물에 빠뜨려 죽여버립니다.
죽다 살아나니 하나되고팠던 예수님이 아닙니다. 얼마나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날 죽일 양반이구만 그래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심판성을 직시하는 겁니다.
그 심판성이 아니면 가짜 예수님을 상상한 자신의 신체에 놀아날 뿐입니다. 누가 이걸 수용하겠습니까? 자신이 죽었다. 오로지 저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살아있는 것이다 라고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생명은 십자가 뿐이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요? 생명은커녕 시체만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생명이고, 정작 자신들이 그것을 보면서도 죽었구나 라고 비로소 생명을 보고 외치는 겁니다. 죽었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이 전도된 전복된 시선은 누가 심은 겁니까? 십자가의 영 뿐입니다. 성령입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숭배의 대상이 될수 있습니까? 숭배할려면 자신은 살아있다고 전제를 하는 꼴인데.무조건 죽은자로 취급하는 것은 생명만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만이 생명이다고 편파적으로 주장하는 성경말씀 앞에서 비로소 죽은자로 선언되는 겁니다.
그것을 세례요한이 외쳤지요. 그는 흥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고, 나는 반드시 쇠하여 삭제당할 수밖에 없는 찌끄래기 라고
생명을 제대로 봐 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나는 일치성이 아닌 전적인 극화인 극과 극의 간격을 직시하는 겁니다. 나야 말로 진짜 죽음이구나 왜? 진짜 생명을 봐서 그 차이를 실감했기에
그래서 또 이상하게 참으로 희한하게 외치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시체 봐라 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생명 봐라 캐야할 것 아닙니까?
십자가의 증폭인 이중성입니다.생명봐라 카면 안 봅니다. 다들 자신들이 이미 생명을 안다고 우기기에 나도 한 생명한다. 생명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그런 인간에게 죽음봐라 라고 하니 어디 어디 라고 쳐다보는 겁니다.
선지자란 결국 이 충돌을 유발케 하는 싸움붙이기입니다. 차이성 붙이기입니다. 말려드는 포획성입니다. 십자가와 무관한 인생은 없습니다. 반드시 맞불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싸움붙이기 입니다. 싸워 이기라는 말이 아니라 이길려고 살려고 하는 강박증밖에 히스테리 밖에 없는 자신이 죄인됨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적어서도 최고의 병법을 실행하는데?(
죽었는데 어떻게? 얼핏 라디오에서 스쳐지나가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명한 고사성어도 있었는데 !!!)
그 최고의 병법이 바로 이간질 입니다. 아 이거다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이간질 입니다. 소욕 곧 원하는 바를 못하도록 갈기 갈기 찢겨지는 것을 당하라 곧 이간질 당하라 라는 겁니다. 이 단절성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주신 은사로 기능을 발휘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구경꺼리가 되는 것으로 사명을 감당케 하시고, 젊은 선지자처럼 누가 봐도 실패해도 주님은 실패란 없기에 갈기 갈기 찢겨죽이시므로써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겁니다. 결국 주님의 숙제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은사 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귀와의 이간질. 늙은 선지자가 했던 방식 곧 육의 소욕인줄 알았는데 도리어 성령의 소욕에 걸려든 겁니다. 최고의 병법이 이간질이라는 것, 오히려 마귀들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어떤 장로 둘이가 투덜거리던데 왜 이간질 하느냐라는 것이 그들의 이상스럽고도 희한한 공동 발언입니다.
그 전에 목사들과도 충돌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희한하지요.
그들의 특이한 공동 발언이 있는데 이간질한다고 공격하면서 자신들은 은폐시키던데,
아 맞구나 성령께서 이간질 불화 시키시는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 ㅋㅋㅋ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누가 이걸 수용하겠습니까?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겠습니까?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이해가능하도록 하는 복음은 없습니다. 이해불가. 설명해줄려고 노력하는 복음은 없습니다. 미쁘심을 인간 쪽에 땡기는게 아니라 주님의 편파성에 있는 것이 미쁘심입니다. 누가 믿겠느냐? 아무도 못믿도록 하는 철저한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팔 마음대로이지 그 마음대로가 미쁘심이지, 그 팔이 나타나도록 또 잘 믿을수 있도록 도움주겠다? 그거 사기꾼입니다.)
그래서 동일성이 아닌 차이성 이라고 하는 겁니다. 반복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동일하고 싶은데 차이 내고, 일치하고 싶은데 이간질을 하니, 성령의 은사가 인간의 기술에 놀아나겠습니까?
인간의 종교적 신앙 곧 믿음은 본능적으로 일치성 동일성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동일 일치하게 되었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믿음은 그 반대 입니다. 차이 이간질 갈라내기 단절 입니다.
이 예수님의 믿음 곧 십자가를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이미 마귀와 한 패인 인간인데 !!
아니 그럼 그런 인정함을, 십자가가 꼭 인정받아야 합니까? 십자가는 그 따위 인간에게 인정 안 받습니다.
숭배 대상이 될수 없습니다.
도리어 언 놈이 날 인정해 라고 밟아 버리기 바쁘고, 인정은 커녕 밟히기 바쁩니다. 제대로 단절 시키는 것을 미쁘시다 라고 하는 겁니다. 미쁘심의 반대말 시험 입니다. 자기를 쳐다 봤다 하면 일치성 동일성 추구하니 시험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자아를 제대로 밟지 않으면 그 자아라는 허구 또 쳐다보고 또 시험에 빠지거든요.
(미쁘시도록 밟아버리는 겁니다. 팔은 제대로 밟아버리는 팔이지 편들어 주는 팔이 아닙니다.남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원수 삼으심 당하는 판국에 모두 다 정죄하는 상황에 놓여지는 것이 팔 나타나심의 전조 징후 징조이지. 내 편 되어주겠다는 팔은 없습니다.)
자 이런 입장이라면 젊은 선지자가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한게 맞지요? 죽어서 말이죠. 죽여버리심으로써 말이죠.
사명이 결국 그를 움직이며 사명 스스로가 성취하게 되는 것이지
선지자 본인이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구조는 없습니다.
성화론자들, 오늘날 개혁주의 들이 그래서 마귀인 이유죠. 바리새인들이 그래서 마귀자식인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을 마귀라고 몰아세워도, 우리 또한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자격이 있는게 아닙니다.
주님의 시선이 따로 있습니다. 1 2 3 이라는 시간적 역사적 순서로 포착될 수 없는반대로 3 2 1 로 거꾸로 쳐들어 오는 방식 뿐입니다. 그래서 자꾸 단절 단절 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역사는 묵시에 의해 침공 당하는 방식 뿐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묵시 운동을 펼쳐서 묵시를 성전처럼 쌓아 올렸어도
직접 묵시 당사자가 쳐들어 오는 방식은
바로 그렇게 묵시운동했다고 쌓아올린 그 성전을 먼저 가장 먼저 깨뜨리면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세울려다가 다윗을 일부러 빼는 겁니다.
그 어떤 남자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남자의 씨를 잇고자 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의 의식 구조와 반대인 여자에게서즉 여자에게서 라는 이유는 그 남자와의 단절성 곧 묵시성을 말하는 겁니다.반드시 십자가의 사건에 의해 단절됨으로써 동행케 된 [여자 에게서]를 통해서 연결된 겁니다. 접속이 된 겁니다. 그것만이 예수님의 족보 곧 여자의 후손과 연관되는 겁니다.
뱀과의 차이, 뱀의 후손과의 단절성이 없는데 어떻게 여자의 후손과 연합할수 있겠습니까?
늙은 선지자처럼 후회하고 반성하고 회개해서 죽을 때 젊은 선지자 옆에 묻어달라고 해서
그 단절성은 무효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냥 격는 것이내 속에 있는 뱀의 후손적 기질,
마귀가 심은 하나님 이미지, 가짜 하나님을
보기좋게 마귀보란 듯이 짤려나가고 단절되고 할례당하고 짖밟히고
엉터리 약속관으로써 무능한 여자 개같은 이방여자인 다말에게
뒤짚어 씌울려다가 도리어 뒤짚어 씌움을 당한 사건(종말사건, 죽음사건)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 중의 괴수임이 밝혀졌을때에 비로소 여자의 후손과 연관되는 겁니다.
내가 연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이런 의미를 지식적으로 알았다고 소용없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더 지으랴? 롬 6:1)
믿음은 자신의 숙제를 남에게 안 맡깁니다. 어설퍼서 그 꼴을 못 봅니다. 직접 은혜가 우리를 지근 지근 밟아서 원수 삼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손에 끊쳐지고 하나님에게서 마저도 등돌림을 당할 때? 욥은 그 단절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모조리 예수님의 죽음을 가치 두게 하기 위한 배치입니다. 거기에 성령의 일 곧 은사도 다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성질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내 것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젊은 선지자는 그 몸을 제대로 치여 죽게 되는 겁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몸이 갈기 갈기 찢겨져서 해체되는 그 적나라한 그 몸의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는 이유가 그리스도의 몸이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럼 젊은 선지자 잘못없네 그리스도의 몸이 있으니까? 이래되면 또 나 라는 존재를 미리 선택해 놓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주님 마음대로이니 우리가 알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겁니다. 젊은 선지자 늙은 선지자 이야기에 인간선지자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뿐이다는 겁니다. 부재는 오히려 나타나고 가시화된것은 오히려 누락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숙제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몸은 안 찢겨지나? 네 안 찢겨지는 겁니다. 이미 거쳤거든요. 찢겨져도 다시 뼈와 살들이 붙어버리는 겁니다.
그 차이나는 몸이 있기에 해체되는 몸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늙은 선지자는 그 몸 그대로 안고 갑니다. 딴 몸을 쳐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새몸을 쳐다볼 이유가 없기에. 갈기 갈기 찢겨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 몸 그대로 가지고 가소서 입니다.
너무 너무 흔해빠져서 무시하는 공기 햇빛 밤 잠 피 심장 마실 물도 일체 만들지도 못하는 주제에 뭘 하겠다고 나서는 겁니까? 주는 것이나 감사하며 잘 받아먹으면 되는 겁니다.
젊은 선지자는 유혹받아서 죽어야 하는 사명이였던 겁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숙제일 뿐이다는 겁니다.
죽었뿌면 의미 없잖아? 그 개인은 의미 없습니다. 원래 처음부터 의미 없었습니다.
또 그 개인이 의식을 해서 집단에 이롭게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웃기는 겁니다.
그저 사로 잡혀서 할 뿐입니다.
해 놓고서는 그 모든 과거는 삭제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룬 것과의 차이성 때문에 단절될 뿐입니다.
에이 그러면 어차피 단절 될꺼 삭제 당할꺼 말라꼬 하노?
그 단절성을 차이나게 직시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이루신 것과 얼마나 차이나는지 비교를 해야 아니까요(차이나는 몸)
베드로가 사람의 일만 생각 한다고 무시 받아서 사탄이라고 욕먹는 그것을
우리는 미리 알아서 피하자 라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겁니다.
정작 베드로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우리는 더 더 더 지적을 받아야 하는 그 코스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는 방식으로만 가겠다는 것이 늙은선지자의 그 당시 환경을 대변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이라도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꽹과리 안되게 하자 라고 자꾸 해석하는데
사랑이란 예수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방식이 아니면 모조리 꽹과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자 라고 하는 것도 꽹과리입니다. 천사의 말일 뿐입니다.
그런말 보다 싸가지 없게 저분이 진짜 사랑이고 나는 절대 절대 말씀 지킬수 없는 죄인일 뿐이고 뭘 해도 죄요 뭘 해도 가짜인 꽹과리 라고 비로소 꽹과리 아닌 분을 만남을 당하니까 외칠수가 있는 겁니다. 저분이 진짜 의인이다 라고 자꾸 자꾸 양도해 버리는 그 싸가지 없음이 바로 사랑이 제대로 덮쳐진 겁니다. 그것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왜 내가 숙제 해야 하나요? 다들 자기가 숙제 하다가 지옥 갔잖아요.
제대로 숙제 할 수가 있다면 숙제 당연히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 숙제는 가능한 동일성의 숙제가 없습니다. 차이성의 숙제입니다. 거룩은 주님은 소관입니다. 구원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자기도 구원 안되는 단절성인데 남 구원하겠다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거죠.
저분이 진짜 숙제하실 분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것이 꽹과리가 아닌 분을 소개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는 꽹과리 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증거하는 나를 따르라고 할 필요 없이 그 분을 따르라 하면 그만인 겁니다.
그 사람 조차도 예수님께 양도해 버러야지 포교해서 전도왕 될 이유가 없습니다.
보라 세상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도대체 누굴 보느냐?
선불교의 유명한 예화 손가락 쳐다보지 말고 손가락을 가리키는 달 쳐다봐라. 이정표가 널 구원하냐?
목사말 말라꼬 듣냐? 네 죄를 위해 목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적이 없는데? 저분이 어린양이다. 어딜 쳐다보냐?
목사 조차도 죄 씻김 받아야할 죄인인데?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데 목사 말 말라꼬 듣는가?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3:30, 개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거꾸로 꽹과리 더욱더 되자 라는 식으로 천사의 말을 하겠다고 자기숙제를 펼치니
사랑이 그것을 박살내는 겁니다. 그 박살 당할 때 그것이 사랑인 겁니다.
오히려 요란한 소동의 온 동네방네 우당탕탕 쾅쾅쾅 민폐를 끼치는 것은 사랑이고
절대 절대 네버 네버 남 민폐 안끼치는 천사의 말처럼 부드럽게 소동이 안나는 것이 진짜 꽹과리이겠지요.
결국 인간에게 해석당하는 말씀은 없다는 겁니다. 그 반대로 말씀에 의해 해석당하는 인간들만이 배치 될 뿐인 겁니다.
해석 당해서 외치는 외마디? 헉! 퍽! 윽! 으~ 악 ~~~~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이게 참미쁘신 복음입니다. 얼마나 제대로 밟았으면(제대로 버렸으면,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으면)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님은 성도와 비언약인간을 하나 하나 다 쓸모있게 쓰십니다. 허트로 쓰거나 버릴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지옥도 꼼꼼하게 채우시고, 천국도 직접 꼼꼼하게 채우십니다. 얼마나 가카가 꼼꼼하신지...
아낌없이 모조리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내어주셨듯이
피 한 방울 한 방울 모조리 다 짜아내어서 모조리 다 뿌려버렸습니다.
향유를 깨드린 여인처럼 그 귀한 피를 한 빵울 남김없이 허비하시면서 땅에 쏟아 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늘의 뜻을, 그것도 인간의 뜻만 비켜가는, 인간이 추호도 원치 않는 그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슬라이더 촬영 영상 발현케하는 기계로 기능으로 만드시고
또한 비언약 사람은 마귀의 은사를 받아서 그 당시의 비언약의 흐름을 발현하는 영사기 기계인 겁니다.
어딜 이런 구조를 벗어나서 나 만의 세계, 독자적인 세계
또 성도 조차도 나 만이 좋은 믿음, 이쁘게 성화된 신앙세계
이런 두 세계의 사적인 세계가 일체 허용됨이 없이 양쪽 다 지근 지근 밟아버려서
결국 주님 좋게 하는 일만 실컷 하도록 되어 있는 짖만 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미래완료 그 미쁘심 모호함과 의문이 없는 또렷한 밝히 보이는 십자가 구조의 완성
그것을 그저 넉넉하게 누릴 뿐입니다.
이 편파성(부조리)만이 옳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입술로 새로 지워버렸습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졸지에 망하게 되었구나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마땅하구나
(사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1,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 6:12, 개역)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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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지자 늙은 선지자 이름 : 우리교회
2009-03-17 19:38:56
왕상 13장
젊은 선지자 늙은 선지자에 대한 관점도 아래 두 질문과 답변의 의미와 같은 맥락입니까?
하나님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고 또 반드시 속여야 하고?
그것이 타작마당을 정하는 그런 의미인지요?
이근호 09-03-18 07:27
'정한다'는 말은 깨끗하게 더럽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조치가 정당하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행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조차가 합당하며 정당하다는 겁니다. 열왕기상 13장에서, 북쪽 나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행위와 심판 행위는 합당하고 정당한 것입니다.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 선지자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고 합당하기에 말씀대로 수행하지 못한 선지자는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젊은 선지자를 속인 늙은 선지자는 결코 정당하지를 못합니다. 이로서 북쪽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위해서 북쪽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변명의 여지없이 악했음이 드러나는 계기를 하나님쪽에서 마련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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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선지자 젊은 선지자
원수의 성문과 예루살렘 성과 연관 되나요? 이름 : 관리자
2007-01-18 13:22:05 조회 : 3084
1 . 원수의 성문을 연다는 것이 그 당시의 의미로만 작용이 되나요? 확대해서 예루살렘 성 곧 신약의 의미까지 확대가 되는 겁니까?
2. 구약의 젊은 선지자와 늙은 선지자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늙은 선지자가 돌이킨 겁니까? 아니면 둘 다 아닌 겁니까? 찢겨 죽은 젊은 선지자는 그럼 어떻게 보아야 할런지요?
항상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이근호 07-01-18 18:31
아브라함 가족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줄기찬 언약 성취 현장 한 복판에 놓여 있는 가족입니다. 자기가 기거할 땅은 없고, 모두 타인의 소유로 확정지어진 입장에서 어떻게 그것이 아브라함이 땅으로 전환되느냐를 몸소 체험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언약'과 '언약'의 대립 속에서 아브라함 가족의 소유로 전환됨을 만끽하게 됩니다. 전쟁입니다. 단순히 무력으로 쟁취가 아니라 이미 땅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복의 근원이 아브라함 가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됨을 파악케 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브라함 소유로 전이되고 그것이 언약진행의 증거물로 확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의 근거지를 확정짓는 전쟁입니다. 아브라함의 적은 자발적이던 혹은 무력이든지 간에 아브라함의 복에 무릎을 꿇고 성문을 아브라함 가족들 앞에 개방하게 됩니다.
2. 선지자는 개인적 처지에만 해당되는 계시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당하게 되는 사태가 그 선지자들이 속한 나라가 당해야 하는 미래의 모습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만약에 선지자가 자신의 유익만 챙긴다면 늙은 선지자 꼴이 나는 겁니다. 젊은 선지자는 아직 늙은 선지자가 지니고 있는 선지자적 사명의 중요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인간적인 관계로서 다가서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늙은 선지자를 사자에게 찢겨 죽게 하므로서, 젊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어왔느냐를 절감케 합니다. 물론 젊은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경솔한 태도를 갖게 만든 것은 물론 그 사회의 영적인 안일함의 여파이겠지요. 이 늙은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뜻은, 인간들이 아무리 태만하게 하나님을 취급해도 하나님의 활동은 성실하게 이 땅에 임하고야 만다는 점입니다. 늙은 선지자는 처참하게 죽음으로서 그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입니다. '처참하게 죽는 것', 이것은 그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멋지고 황홀한 최후의 이벤트입니다.
"불꽃처럼 타오리라!" 이것이 주의 종의 마땅히 담당해야 될 운명입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말입니다.
(왕상 13:1, 개역)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왕상 13:2, 개역)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왕상 13:3, 개역)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왕상 13:4, 개역)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왕상 13:5, 개역)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왕상 13:6, 개역)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왕상 13:7, 개역)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왕상 13:8, 개역)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 13:9, 개역)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왕상 13:10, 개역)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왕상 13:11, 개역)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왕상 13:12, 개역)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왕상 13:13, 개역)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왕상 13:14, 개역)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왕상 13:15, 개역)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왕상 13:16, 개역)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 13:17, 개역)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왕상 13:18, 개역)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왕상 13:19, 개역)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왕상 13:20, 개역)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왕상 13:21, 개역)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왕상 13:22, 개역)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왕상 13:23, 개역)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왕상 13:24, 개역)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왕상 13:25, 개역)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왕상 13:26, 개역)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왕상 13:27, 개역)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왕상 13:28, 개역)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왕상 13:29, 개역)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왕상 13:30, 개역)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왕상 13:31, 개역)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왕상 13:32, 개역)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왕상 13:33, 개역)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왕상 13:34, 개역)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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