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전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껍데기로써의 성전인 성도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오전 12:29:12 김대식
예수님을 드러내는 방법이 뭘까?
그것은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란 성도를 부정의 자리에 놓는다.
여기에 비언약의 비성도는 정당한 자리에 놓는다.
십자가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가치인 피의 기능이 바로 [죄인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성이란 그 어떤 것도 신체에 장착이 되면
정당성을 갖게 된다. 참으로 희한하다. 그 정당성이 나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성전 종사자들이 이런 정당성 때문에 그 하나님됨에 조금이라도 금이 그이면 난리가 난다.
그러나 성령의 전의 주인은 그 반대다. 성전을 파괴한다.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참성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성전 안다니면 되지 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반드시 재료로 삼아서 참성전의 가치를 높인다.
그렇다면 성도는 부정한 재료가 되는 것이지, 그런 이유로 가치있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성전 누락을 성도가 과연 받아들일수가 있는가?
자체적으로는 없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야만 한다.
성령이 와서 그의 자리를 부정의 자리로 만든다.
천하의 1급 살인자 다윗 모세 바울 베드로
여기에 피가 발리는 것이다.
피 때문에 그들이 1급 살인자가 되기를 원할까?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할수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실행하신다.
그 어떤 누구의 동의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실행해 봤자 그 자체가 정당해져 버린다. 노동의 댓가로 원한과 죄책감만 갖게 될 뿐이다.
성령이 덮치면 그것을 넘어설수가 있다. 선악을 넘어선다. 주님이 그 어떤 누구도 못 넘었던 그 선악을, 주님 스스로가 가로막았던 그 생명나무 차단길을, 스스로 배신하고, 스스로 부조리하게 해서, 스스로 언약을 파기하고 그 선악을 넘어서게 하시는 것이다. 즉 넘어서기가 가능해서가 아니라. 불가능의 불가능의 이중성이라서, 피가 넘어온 결과로 은혜를 뒤짚워 씌우는 식이다.
이런 반칙에 법대로 하지 않는다고 따지고 나오는 자가 마귀요, 그의 열매인 그 마귀 자식인 인간이다. 그 어디에도 정당성이 없는 범법에 시비를 건다.
그러나 은혜로 창조하신 주님이시기에
그 은혜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 용서의 가치만은 더 높게 드러난다.
여기에 아무리 성도라고 해서 동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조건 동의가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인간은 죽어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
모든 것을 내어준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죽어본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살아본적도 조차 없다.
살아 있다고 근육을 움직여서 꿈틀꿈틀 거려본들 산 적 조차 없다.
산 자는 죽기위해서 사신 분 딱 한 분 뿐이며
죽음으로써 다시 사신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드러내기 위한 소품으로써 그릇으로써 이용당하는
유물 물건일 뿐이다.
세간이요 누가 훔쳤는가? 그 훔친 자가 누구이며 그 세간의 주인이 누구인가만을 드러내는
유물의 이중성일 뿐이다.
성전이 그래서 파괴 됨으로써 진정한 주인을 드러낸다.
성전을 놓고 벌리는 전쟁이다.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킨 것이다.
원수의 성문을 누가 여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원수됨을 예수님이 여신다.
그렇게도 꽁꽁꽁 감추어서 온갖 신앙으로 포장된 그 악마의 문을
예수님은 벌컥 벌컥 화들짝 놀라게 열어재끼는 것이다.
다윗을 원수 삼아서 그 원수의 성문을 여니
비로소 이스라엘 전체가 악마로써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신다.
그 기준을 다윗을 원수삼으로써 드러낸다.
다윗은 악마의 뚜껑을 여는 기준이 되고
정작 다윗은 이스라엘을 배신때리고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과 전쟁 붙이고 자신은 빠져버리는 매국노처럼 그 매국노를 잡고자 하는 이스라엘로부터 추적당하는 죄인 중의 괴수요 원수가 된다.
사람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인 이 다윗을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대표로 삼아 인간 세상의 악마성을 드러낸다. 그 살인의지를 돌출시킨다.
다윗에 대한 살해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살해의지이다.
어찌 나약한 인간이 신을 죽이겠느냐 하겠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것만이 평생 어릴적부터 죽을때까지 자리 잡고 있는
악마의 집이요 원수의 집인 것이다.
그 속성을 성전에 그대로 담아서 그것을 감춘채로 살도록 하지만
그것을 지적당하고 노출 당하는 다윗을 통해서
그 다윗을 죽이고자 발악하는 숨은 존재들의 활동성을 가시화 시킨다.
성전 파괴야 말로 가장 극적이다.
이제 참성전 되신 예수님과 비교가 된다.
빨리 빨리 비교당하는 은혜로 가짜성전의 정체가 들통나는 것이 은혜이다.
참성전을 위해서 가짜성전으로 동원되도록 되어 있는 차이의 이중성으로써의 성령의 전인 성도이다. 부활이 십자가의 죽음의 반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출발이듯이성령의 전은 참성전의 죽으심을 본격적으로 실행하시는 성전 속의 성전곧 성전의 이중화인 성령의 일하심이다.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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