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뒤짚어 씌우시는 예수님
2012년 9월 26일 수요일 오전 11:39:36 김대식
어제 어머니께서 죄 많은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 이라고 말씀하시길래
죄에 대해서 대화를 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어머니 죄가 뭘까요?
죄란 내가 지은 것이 죄요, 내가 주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죄다 라고 말씀하시길래
제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죄란 인간에게 정의 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정의 되지 않듯이 죄란 이미 인간을 장악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내가 죄라고 정의한 그런 죄는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라고 범위를 정한 나의 죄 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범위의 죄가 진짜 죄며
그 죄를(훨씬 범위를 넘어서는 상상도 못할 죄) 남이 아닌 예수님께서 뒤짚어 씌우는 것이
진짜 죄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뒤짚어 씌우지 않는 이상 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백날 내가 규정한 죄는 죄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내가 규정할수 있는 죄는 정당한 죄일 뿐입니다.
나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죄가 진짜 죄이며
그 진짜 죄를 뒤짚어 씌워서 예수님께서 피의 의미를 대조 시키는 겁니다.
가짜 죄에서는 피를 대조할 수가 없습니다. 그 피는 가짜겠죠.
진짜 죄를 뒤짚어 씌워야 진짜 피를 대조시킬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피 만이 높이시는 영광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할 수가 없고(조작불가)
성령께서만 하시는 겁니다.
피 스스로가 피의 가치를 인간의 손대 절대 맡긴적이 없이 홀로 하십니다.
이것을 미래적이라고 합니다. 뒤에서 소급해서 선험 선취적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역사적 존재는 묵시를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반대로 포획 당하는 방식 뿐입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미리 땡겨 체험해보자 라는 기획투사를 해본들
그런 정치적인 결단, 선택, 간택을 해 본들 비켜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지 말라고 해 본들 안할 인간들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 보세요.
그래서 단절을 철저하게 당하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죄를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그 어떤 접촉점, 그 어떤 연고 없이 편파적이고 부조리한 십자가의 피로써만 용서함이
바로 은혜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이중성입니다.
이 은혜의 이중성에 이 은혜를 거부하는 선악의 이중성이 반드시 동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에스더의 [죽음]이라는 이중성에 반드시 하만이 동원이 되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선악을 배경으로 깔아서 등장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죄이기에 죄를 뒤짚어 씌우는 것이지
내가 행한 의미로써의 죄가 되고 죄가 아니 된다는 선악방식은 마귀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은혜 때문에 죄를 뒤짚어 씌우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 방식인 성령의 소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잔머리가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지을수 있냐 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이미 행함의 법칙에 맴도는 겁니다.
은혜는 그러면 그럴수록 그 행함을 거부하는 믿음의 이중성만 취합니다.
행함은 1 2 3 이라는 역사적 순서의 시간으로 형성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묵시는 3 2 1 이라는 역사를 허무는 방식, 행함을 허무는 방식,
선악을 허무는 방식, 육체를 허무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벤자민 시계를 꺼꾸로 처럼, 숫자 시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그렇게 하나님을 허무는 방식입니다.
예로 인간이 귀하게 취급하는 하나님을, 그 가치있다고 여기는 하나님을 손아귀에 고이 고이 쥐고 있으면,
예수님은 반드시 인간들에게 천하게 취급받으면서 그 가치있다고 여기는 그 하나님을 허물어버립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만 높여버리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죽여버리겠다고 인간들이 달려듭니다. 마치 예수님이 더 나은 제사를 드리니까 거기에 동조하는 하나님까지 살해해버리는
가인의 제사인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제사 곧 십자가 제사는 반드시 가인의 제사 마귀의 제사를 들추어서 차이내는 방식입니다. 안그러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하나님 믿기 제사드리기 등등을 일소에 다 죄악이라고 취급해 버리면서 성전에서 파는 비둘기 양 소 다 쫏아버리고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십니다. 이 미쁘심.)
그래서 은혜를 도출시키고자 성령의 단독적 권한으로 죄를 뒤짚어 씌워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피와 대조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이 피가 옳았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나오기 위함이지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면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것이 의인이 되는 식이니
쳇바퀴 돌 듯이 그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겠지요. 행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나 속는 자는 속이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 속도록 되어 있기에
아무리 말해도 속습니다.
그래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설득 설명 납득이 물증 증거물 백날 보여준다 해 본들
육은 육입니다.
그러나 설득도 설명도 납득도 그 어떤 증거물이 없어도
믿음이 씌여지면, 십자가의 피 라는 주체가 자기 마음대로 편파적으로 용서하면
그것으로 게임오바입니다.
자꾸 여기에 토 다는 인간들의 성향은 그래도 말씀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미쁘지 않고, 그 십자가의 용서가 불안하다는 겁니다.
정작 성경은 그런 인간의 불안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증거합니다.
일만달란트 1000년을 일해도 갚을수 없는 빚을 용서로 탕감해 줘도
정작 100 데라리온 아마 약 300만원 정도의 빚진자를 용서 못하는 상황을 발생케 만들어서
오히려 일만달란트의 빚탕감의 용서를 용서답게 용서의 이중성을 높이는 겁니다.
아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단절성으로써 용서의 영광성을 높이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행동 유무를 따지는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을
완전히 빼앗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미쁘심입니다. 미쁨의 미쁨, 믿음의 이중성입니다.
얼마나 믿음직 스러우면 아무도 용서 받을수가 없을 정도로 피의 용서가 영광스럽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 쪽으로 땡길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주체가 용서 마음대로이지
인간이 용서를 대상으로 삼을수가 없는 겁니다.
피가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피 마음대로입니다.
그래서 이 피가 죄를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둘 다 죄를 뒤짚어 씌워서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써 피의 가치를 높이고 (오직 피 때문이였군요 ? 은혜창조)
다른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써 피 때문에 지옥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생뚱맞게 피가 등장했는데 그 피를 보고 입맞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를 못 알아봤다는 이유로 영 엉뚱한 이유로 지옥가는 겁니다. 그래야 지옥에서 이빨을 가는 겁니다. 이빨 갈아야 하는 것도 피 때문이지, 죄 때문이 아닌 겁니다.)
사랑은 이렇게 질투적이며 시기적입니다.
이런 편파성을, 이런 단절성을 더더욱 극대화 그리고 거리감을 벌리는 것이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반복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믿음 대상의 부활이란 없습니다.
인간 종교성의 대상으로써 부활은 육을 잇고 이어서 걸어서 하늘끝까지 연결시키고자 하는 노림수요 노동의 정당한 댓가를 꿈꾸는 사기술 마술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반복으로써 부활은 오히려 그런 마술을 단절 시키는 겁니다.
어 베드로 너 기가막힌 마술을 부리네
돈 줄 테니까 그 마술 방법
그 기술 테크닉을 나에게 알려주라
얼마면 돼? 궁금해 궁금하니까 500원
(행 8:9, 개역)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행 8:11, 개역)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행 8:1, 개역)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2, 개역)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 8:3, 개역)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 8:4, 개역)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8:5, 개역)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행 8:6, 개역)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행 8:7, 개역)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행 8:8, 개역)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19:13, 개역)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행 19:19, 개역)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성이 없는 독자적인 기술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을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사모하고 그 기술 습득에 미쳐있습니다.
신학도 놀랍게도 이런 마술 습득입니다.
철학을 보니 얼마나 웃기게도 전부다 마술입니다. 기술입니다 기술.
인간 신체가 신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죄책감에 저촉 당하지 않는 기술 마술 습득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자유라고 하는데 일종의 최면입니다. 최면술, 속임수
속임수란 안 속는 가능성이 있어서 속임수가 아니라.
안속는다고 자부하는 천재들도 다 넘어가는 속임수가 진짜 속임수입니다.
이것이 철학이요 신학입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있어서
십자가를 외면하고자 하는 마술습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회피하고 고개를 돌리고자 하는 정당성의 학문이 철학과 신학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 자들은 교회를 살릴수 있어도 예수님의 죽음은 살릴수가 없는 겁니다.
반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유지 보수 살리는 마술을 부리는 것이 바로 신학인 겁니다. 곧 자기육체 보존입니다.
그래서 보기좋게 성전 파괴를 하는 겁니다. 멘붕 멘붕 멘탈붕괴 성붕 성붕 성전붕괴
그래놓고 편파적으로 부조리하게 따집니다.
왜 성전 파괴 시키냐?
아니 주님이 파괴 시켰잖아요
내가 언제? 요놈 봐라 지가 잘못 해놓고 나에게 뒤짚어 씌우네?
라고 선악의 법으로 따지는 놈을 선악적으로 다루어 버립니다.
성전 파괴 시킨 죄목을 뒤짚어 씌워서 지옥 보냅니다.마치 노아의 외투처럼, 무지개 언약처럼,
언약의 이중성은 선택의 이중성을 더더욱 돋보이게 하고
배제의 이중성을 더더욱 돋보이게 하는 부조리로 일관하는 은혜 그 자체입니다.
은혜의 이중성입니다.
(여기서 이중성이라는 말은 반복이라는 의미입니다. 배후세력까지 다 집단화로 몰아간다는 겁니다. 배후세력이 나올 때 까지 계속 무한반복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이란 없습니다. 집단적인 구조로 양 쪽 두 세계를 두 개인을 통해서 유물적으로 소품으로써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한 개인인 아무것도 아닌 한명의 개인이 천국을 대표하는 천국 전체를 보여주는 인물이고, 또 한 개인인 보잘 것 없는 아주 미약한 단 한명이 지옥의 무한한 저주를 대표해서 지옥 전체를 대변해서 보여주는 삶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이중성입니다.)
그리고 편파적으로 너는 왜 성전을 파괴 시켰느냐 물으니
아니 진짜 성전이 여기 있는데 말라꼬 성전 필요합니까? 성전 뿌쌰야지 참성전이 드러나야 할 것 아닙니까?
라고 은혜를 뒤짚어 씌워서 천국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조리하게 보내버립니다.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사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말입니다.
여기에 말려드는 의인이 바리새인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으로써
예수님을 반드시 시험하고자 말기 때문입니다.
안그러면 역사적으로 쌓은 자신들의 신앙이 이 한 개인 예수님에 의해
와르르 무너진다는 그 위기감과 불안함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을 그냥 보낼수가 없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놀랍게도 마침맞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딱 아달이가 되어서
예수님을 시험할 수가 있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 되어 준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겁니다. 감히 하나님의 법을 회파 훼방하니 말이죠.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 높이기 자작극에 말려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피 앞에서
유대인은 어찌할꼬 라고 성령이 임한 티가 나며
(행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얼마나 미쁘면 배신하고 죽였고 심지어 원수가 되어 원수로 삼아서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는 그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죽여도 소용없이 그 십자가의 용서의 피 확산을 막을 길이 없는
오히려 불난 집에 석유를 붓는 식으로 도와주는 꼴이 된 것이 십자가의 용서를 거부하는 쪽입니다.
이 십자가의 용서 앞에서 역사는 파괴 되는 식으로써
강탈당하는 식으로 십자가의 피에 역사는 모조리 빼앗겨도 상관없는 은혜가 무한확장 되는 겁니다.
그 은혜 때문에 죄를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오로지 피만을 높이기 위한 은혜의 선물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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