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방언  십자가

2012년 9월 28일 금요일 오후 2:06:17  김대식


다문화 가정에서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이라서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고
자녀는 영어를 몰라서 한국말만 하는데
소통이 되지 않아서 간격이 점점더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그 간격이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소에 소멸되는,
하나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두 언어가 전혀 필요하지 않는 딴 나라의 언어였습니다.
이들이 서로의 언어를 몰라도 서로가 알아먹는 언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케스트라 음악이라는 공동언어라고 합니다.

요즘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흥겨운 음악 때문에 졸지에 대박이 된 노래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미국이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한국말을 아느냐? 오 ~~~ 섹시 레이디 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쿡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전혀 한국말을 몰라도 된다고
아주 모르는 것을 당연히 하면서도 이 노래에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한다는 거죠.

결국 공동적인 언어가 있는데 바로 누가 가르쳐준적도 없는 언어인 음악이였습니다.

저도 사춘기때 무지 팝송을 들었고 뜻도 의미도 모르고 그저 이유없이 좋아했는데
배철수씨 말대로 딴나라 세상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음악을 배운적이 있느냐? 처음부터 타고난 언어였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고픈 말이 바로 이겁니다. 타고난 언어
누구로부터 배운적이 없고 가르쳐준적도 없는 그 언어
그 공동언어를 저는 십자가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선악으로 만들지 않았고, 법으로 만들지 않았고, 오로지 은혜로만 만들었고
그 은혜를 위해 인간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개념을 우리가 얼마나 무시를 하는지?
흔하디 흔한 공기처럼 무시하는 식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공기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를 은혜로(공짜로) 주신 주님을 우리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순순히 물러날 분이 아닙니다. 공기단절이 은혜를 알리는 방식입니다.

선악체제에 눈이 떠버린 인간세상에 십자가를 은혜로 못 박아 버렸습니다.
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이 이제는 부여됩니다.
심판을 부으십니다. 종말을 부어 주십니다. 곧 성령을 부으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겁니다.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행 2:8, 개역)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 2:9, 개역)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개역)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개역)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2, 개역)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 2:13, 개역)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4, 개역)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 2:15, 개역)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니 은혜라고 해 놓고서는 심판이라니? 모순이요 부조리가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모순이요 부조리 맞습니다.

그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은혜는 없습니다.

에이 그런게 어디있냐? 물러가라 물러가라

이렇게 반응하기도 하고

어 그래요? 까짓꺼 그게 뭐 어렵남 ! 그 모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부조리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됐죠? 됐죠?

그러나 이것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악적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받아들였으니 이제 날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은혜란 아무리 봐도 나는 지금 당장 심판 받아 마땅하다 라는 것을
은혜를 제대로 봤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 심판입니다. 종말입니다.

십자가가 은혜로 보이지 않는 자는
나를 향한 그 심판이 감사한게 아니라
비로소 완악함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여전히 십자가를 대상으로 본 겁니다.
은혜를 대상으로 본 겁니다.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 곧 투사 투시를 했다는 겁니다. 일치화 동일화 동질화 했다는 겁니다.
여전히 차이로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룩(차이)로 보이지 않기에 대상으로만 삼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본 겁니다.

왜 십자가가 유일한 방언이며 공동(일방적)방언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께서 정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쳐준 이도 없고 배운적도 없기에 은혜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싫어서 가르치는 자를 쫏았고 배우기를 바랬던 겁니다.
그리고 가르친 댓가와 배운 댓가를 쫏아서 법을 추구해 버렸습니다.
선악을 추구했고 몸 자체가 선악에 눈이 떠 버린 겁니다.
(라캉에 의하면 언어의 발생이 결핍 결여에서 생겨난다고 봤습니다. 반대로 들뢰즈 쪽에서는 과잉 잉여에서 생겼다고 본 겁니다. 문제는 둘 다 선악의 몸에서 나온 언어이기에 과잉의 선이든, 결핍의 악이든 벗어날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신체성입니다. 그냥 처음의 몸으로 되돌아 가자 라는 운동만을 펼치는 하나님 형상 회복과 같은 식입니다. 그것이 심판을 극복하는 몸이다고 본 겁니다.) 극복해야할 몸이랑 이미 극복한 다른 신체 라는 몸이랑의 차이는, 제사와 더 나은 제사. 곧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는 그 차이를 부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말을 심판을 부어버리시는 것이 약속 성취 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적극적인 반응의 몸을 추구하는 바벨의 몸 선악의 몸만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적으로 벌거벗은 몸은 약한 몸이고 강하지 못한 몸이고
병든 몸이고 건강하지 못한 몸이라서 가려야 한다는 겁니다.
결핍 채우기 입니다. 또는 과잉의 능동적인 인간이 처음의 자유의 인간이다 라고 오바합니다.
얼마나 노예였으면 자유를 그렇게 해서라도 추구할려고 하는 초인이 되고팠던 것일까요?
초인 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노예인 몸이다는 겁니다. 초인 될 필요 조차 없는 자유의 몸 과의 차이를 격는 것이 은혜 입니다. 은혜를 소유할 대상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은 뭔가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인간을 만든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리는 것을 가르치고 감추는 것을 배우는 인간이 되었기에
그런 가짜 인간을 심판함이 마땅합니다.

그런 가짜 인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심판이 감사한 겁니다.

더더욱 감사한 것은 선악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인 십자가로 심판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더더 더더 더욱 감사한 것은 그 심판은 먼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심으로써 그 길을 틔여주셨습니다.
그 길로만 가면 됩니다. 우리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작살에 꼿혀서 땡겨짐을 당할 뿐입니다. 참 쉽죠잉 ~~~~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사도바울의 외침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데 장난으로 취급하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야 말로 십자가의 길로 가면 안된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어느정도로 심각한고 하니 그 십자가의 길을 선악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교회에 그 제도 시스템에 빠지도록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가능성의 구원을 대문을 활짝 열 듯이 열어줌으로써 뒤로는 장사를 하는 곳으로 변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라고 했습니다.
헐어보면 왜 딴 성전이 있어야만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매일 매일 육체를 허물어 버리듯이
매일 매일 성전을 허물어 버리면

딴 몸이 있었음을
딴 성전이 있었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처음 언어인 십자가입니다.
가르쳐준적도 없고 배운적도 없는 십자가입니다.
단 한번도 듣고 보도 못한 비밀언어 듣보밀입니다. ㅋㅋㅋ 

그러나 인간들끼리 이미 소통이 되는 언어가 있었는데 선악법의 몸 언어입니다.
그 선악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가 좌우되는 식입니다.
많이 먹으면 많이 보면 많이 지혜롭게 탐스러우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그 서열이 정해지는
서로 서로가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이 되는가 의 동일성 일치성에
점점점 그 간격을 좁히는 방식으로써 좌우되는 몸이,
그런 언어로만 구성된 몸이, 그런 소통법만 추구하는 법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만든 몸은 은혜의 몸입니다.
은혜 빼고는 모조리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자 해서
도리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버리는 그 정도로 미쁜 몸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정반대의 몸은 도저히 그것이 미쁘기는커녕 가장 악마적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무리 아무리 좋게 좋게 봐 줄려고 해도,
그 당시 가장 존경받는 몸으로써의 바리새인(정통역사를 따르는 정통신학박사 전문가들)은
예수님을 악마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물증까지(선악까지) 포착함으로써 내린 결론으로써 선포합니다.

당연하지요 당연하지요 아무리 봐도 마귀죠 예수님은 정통신학자들에 의해서 마귀였습니다.
그들 바리새인이 이런 규정에 있어서 역사적인 반성을 역시나 동일하게 했씁니다.
과거 선진들이 참선지자를 거짓선지자와 손 잡고 죽였기에 그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했고
거기에 대한 반성에 의해 겹겹이 예수님을 조심 조심스럽게 실수없이 조사했습니다만
정작 예수님이 오히려 그런 바리새인들의 성향을 알고 더 빨리 죽음을 재촉하듯이
그들의 시험에 도리어 말려들어주면서 그들을 시험하시는 겁니다.

은혜의 언어인 십자가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늘 선악으로 상대방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 시선에서 벗어난 십자가의 시선을 가지지 못하도록
더더욱 선악의 판단에서 못벗어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감히 심판자(은혜)를 심판자도 못되는 주제에 심판하고 조사하고 달려드니 웃기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더욱 은혜롭게 하기 위해서 이중은혜로 인해 그들은 더더욱 말려들어야 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더욱 말려주심으로써 그 간격을 그들의 습관대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간격을 벌려버림으로써 은혜를 더하시는 겁니다.

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원수로써 피와의 만남이 우발적으로 된 겁니다. 필연성을 갖출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은혜의 의미를 또 선악적으로 여전히 그들처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반성해서요? 아니요
아 저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되는구나 해서요? 아니요

그 반대죠
우리도 저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은혜인 겁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은혜 입니다. 빚이 갚을수 있는 것이면 빚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연하게 그 빚을 잊어버릴수가 있는가? 도저히 못 잊도록 해 버리는 것이 빚 다움입니다.
빚 스스로가 빚 다움을 발현하는 겁니다. 그것이 용서의 왕을 증거하는 일만달란트 비유입니다.

심판이 곧 용서를 용서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보존하는 겁니다. 인간이 용서의 가치를 보존하는 방식이면 이미 용서가 아니요, 빚도 아닙니다. 빚을 대상물로 삼을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빚의 대상물이 되니까 빚진자 입니다.
이것을  - 되기 라고 합니다. 그 반대의 의미가 - 하기 입니다.  대조적인 차이로 쉽게 그 차이를 알게 되는 겁니다.
(안식 되기 vs  안식일 지키기, 십일조 되기 vs 십일조 하기, 교회 되기 vs 교회 하기, 기도 되기 vs 기도 하기, 한 쪽은 예수님의 액션 즉 예수님의 믿음의 대상이 된 것이고, 다른 한 쪽은 그 반대로 예수님을 대상물로 삼은 방식이고 ...)

오로지 사랑하실 자만 사랑하시겠다는 겁니다.
주님만의 언어인 십자가 언어입니다.
주님의 기획투사(죽음을 미리 앞당기는 프로젝트)인 십자가 사랑입니다.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죽어도 상관없는 사랑으로 다가온 그야말로 선악을 넘어선 은혜입니다.

은혜가 너무 너무 미리 앞서가고 있기에(기획투사)
후회도 죄책감도 원한도 가책도 살인의지도 미리 앞당겨 들통이 나는 겁니다.
(십자가란 살인행위가 나타날때까지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미리 앞당겨서 죽어버림으로써 살인했다고 뒤짚어 씌우는 식입니다. 이것이 누구에게는 은혜의 긍휼로, 또 다른 누구에게는 완악함으로 졸지에 미리 앞당겨 들통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의 확대 재생산 탈십자가 즉 십자가의 이중화 입니다.)

그 은혜 앞에서
다른 것은 다 허구요 허상이며 우상입니다.

“다 이루었다.” (미래완료, 이 보다 더 명확하고 또렷한 사랑은 없습니다.)

아무리 내 쪽에서 저들처럼 사랑받고파 구원받고파 그 조건에 해당되는 것을 갖춘다는 것은
여전히 가르칠 것이요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무거운 돌을 일부러 지는 척 하는 겁니다. 얼마나 무거울까요?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가볍고 쉽습니다.
어른(지혜추구, 신을 추구) 에게는 감추이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니 얼마나 쉽고도 쉬운 은혜인가 말입니다.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느 정도로 쉬운가 하면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 소돔의 심판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 사람들은 소돔처럼 심판받을 만한 조건을 모조리 배제시킴으로써
그 어떤 심판성도 없는 그런 도시의 조건을 갖춘 겁니다.

유별나게 의롭고 깨끗한 착한 식당, 착한 마을, 착한 도시도 아니요,
그렇다고 의도젹으로 타락한 도시가 아닌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의 도시입니다.

즉 죄인의 조건을 단 하나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자가 와서 죄인을 찾는데 있어서 죄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자가 오면 인자가 찾는 자는 죄인 밖에 없는데 죄인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돔 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심판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소돔 보다 더 악하다는 말입니다.
소돔이라고 뒤짚어 씌워 버립니다. 소돔적인 요소가 없는데?

졸지에 새로운 기준이 소돔이라고 규정을 해 버리는 더 악하다로 선언이 되는 겁니다.

아니 소돔 보다 악한 조건을 없애버렸는데? 소돔 보다 더 악하다니요?

예수님이 와서 죄인을 찾는데 죄인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기적을 베푼 도시입니다.
그래도 죄인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이 맞나요? 가버나움 사람 말이 맞나요?

(마 11:12, 개역)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개역)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 11:14, 개역)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1:15,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분명히 피리를 불었습니다. 피리를 불었으면

즉 공동언어인 유일한 방언 십자가를 외쳤으면
죄인이 나와야 합니다. 은혜가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인과 먹고 마시고 춤추고 친구로 삼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겁니다.
처음언어요 가르쳐준적도 없고 배운적도 없는 저절로 몸이 말춤처럼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선악의 법을 안묻는 몸이 은혜의 몸이 반응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춤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절로


그런데 이 은혜를 놀랍게도 선악으로 몰아버린다는 겁니다.
왜? 선악의 몸 밖에 없다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선언해 버린 겁니다.
딱 제대로 걸려든 실족이요 포획당한 겁니다.

아이들은 걸려들 이유가 없습니다. 신나거든요
막 춤추고요
막 먹고요
막 마시고요
저절로 흥에 겨운 겁니다. 그래서 몸이 저절로 들썩 들썩 해서 춤추는데

어른들이라고 자칭 성숙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것을 판단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찌 죄인과 함께 먹냐
어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과 같은 사람이냐?
어찌 민족의 배신자 이스라엘을 배반한 매국노 세리와 율법에 의한 더러운 죄인을 친구로 삼느냐?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율법적으로 볼 때 무조건 율법에 반하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이니
그 판단이 그야말로 마귀가 밀까부듯이 정확하게 조사한 것들을 나열하는 겁니다.
그것이 그들의 지위를 직분을 자기자리를 더더욱 곤고히 해주기 때문입니다.
밥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한 율법으로 오셨다면 그들은 당장 다 죽어야 하는 겁니다.
100%를 완벽하게 안지키면 다 죽이는 것이 율법입니다.
아쉽게도 100개 중에 하나 틀렸고 99%를 맞아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웃끼는지?
율법은 단 1%로도 단 한 개도 지킬수 없도록 만든 규정이 율법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지키라 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도 못 지키면서도 말이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목사들이 다 압니다. 왜 모르겠어요 다 배웠는데 다 알지요. 
그 당시도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어주어야
돈이 됩니다. 악한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는데 그 기적이 요나의 기적이라서가 아니라
돈이 되고 인기가 되고 대중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대중에게 감추는 이유는, 사기치는 이유는, 
그렇게 되어버리면 교회질서가 개판된다고 스스로가 불안해서 그런겁니다. 요걸 앞세워 돈버는 겁니다. 
그래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어쩔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 그 놈의 손모가지를 짜르면 되지, 아예 그 근원을 짤라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성전이고 성전과 공명이 되는 하나님을 못 박아 버리는 겁니다. 졸지에 우상이 사라지면 허물어버리면 그 우상을 앞장세우고 우상뒤에 감추인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교회를 무화과나무처럼 가리개로 가리고서 감추고자 한 그 실체가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런 노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 교회일까요?
인간의 운영능력에 좌우 되는 것이 교회일까요?
염연히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교회를 미쁘시게 운영하심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손을 뗄 수가 없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대상물이 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어른이 되고픈 것이지요. 교회 어른은 예수님 혼자 뿐 만으로 만족하면 되는데
그러면 더더욱 무서운 분 때문에 더 잘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쓸데없이 안 믿겨지니까 미리 교회 질서 잡겠다고 나서니
여의정 좌의정 누가 큰 자이니까 싸움판이 되는 곳이 교회 입니다.
아니 일부러라도 그렇게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여줘여만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차라리 그런 모습이 들통나는게 낫지 오히려 감추면 더 골치아프겠죠.

어쨌던  에스더 같은 희생자가 발생되고
도리어 에스더 포획장치에 하만 같이 왕질하다가 걸려드는 겁니다.
바보
괜히 자기 무덤을 파는 꼴입니다.
이 십자가 노선이 은혜이다는 겁니다. 이런 사건이 반복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은혜입니다 은혜

그래서 더더욱 권력을 추구하고픈 놈은 교회에 와서라도 그 짖을 해야만 합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그것에 미친놈은 어딜 가도 미쳐있으니까요

오히려 교회는 더더욱 멍청이들이 많이 모여있기에 사기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순진하니까 사기꾼들이 더욱더 많이 모여드는 겁니다

어쩔수 없어요 수요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사기당할 놈은 사기당해야 하고
사기치는 놈은 아무리 사기치는 손모가지를 짤라내어도
또 여전히 물 만난 고기마냥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명이 사람을 다루지, 사람이 사명을 담당하지 않거든요.

선악이 덮친자는 끝까지 선악입니다. 미리 앞당겨서 터트리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가룟 유다야 어서 니가 맡은 일을 속히 해야지?

(요 13:20,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 13:21,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 13:22, 개역)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요 13:23, 개역)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4, 개역)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요 13:25, 개역)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요 13: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 13:27, 개역)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 13:28, 개역)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요 13:29, 개역)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그러나 은혜가 덮친자는 끝까지 은혜인 겁니다. 닭 울기 너는 세번 나를 부인한다.

(마 26:33, 개역)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개역)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개역)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은혜를 지키고 사수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도리어 원수 삼으시사 말씀이 말씀을 지켜서 이루신 것을 은혜로 그냥 무상으로 주신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청구해도 도장 찍어 주지 않아서 베드로는 무조건 은혜 속에 놓여진 겁니다.

이 부조리가, 이 모순이 바로 은혜 입니다. 불법자의 동류가 되는 것이 은혜 완성 희년완성입니다.

(눅 22:37,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너무 쉬운 겁니다.

이렇게 확연하게 보여주고 어린아이에게 물으면 뭐가 좋니 하면
죄인의 친구 예수님 이라고 하지 (불법자의 동류)

바보 멍청이 같이 가버나움 도시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바보인고 하니 이래 알려줘도
제가 지금 쭈욱 설명한게 다 알려주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알려줘도 가버나움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어른 곧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 입니다.

참 희한하지요
아이들은 그 반대 입니다. 불법자의 동류 입니다. 차이가 반드시 생겨버립니다.

왜냐하면 선택한다는 자체가 어른에게 있어서는 선악적이고

어린아이에게는 선택의 의미도 모른채
은혜가 그냥 어린아이에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냥 피리를 부니까 그냥 몸이 은혜의 몸이라서 저절로 반응합니다.

어른은 때려죽어도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일한 방언은 십자가 라는 은혜라고 한 겁니다.
결국 단절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에게는 소통의 언어 입니다.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고
어른은 무조건 배격하는 편파 십자가 이기 때문입니다.

편파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언어인 십자가 뿐입니다.

그래서 선악의 언어를 배운적도 또 가르친 적도 없기에

공명이 되는 겁니다.

이 공명이 인자와 죄인의 짝꿍됨 커플됨 단짝됨입니다. 원수와 피의 단짝되기 처럼, 기능땜에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에 의인이 쓰잘데기 없습니다. 제발 막 사세요.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런 공명조차도 배울려고 가르칠려고 하니까
그 하나됨이 인자와 죄인의 하나됨이 아니라

인자와 의인의 하나됨, 인자와 선악의 하나됨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도통 다른 언어를 모르는 오로지 선악의 언어로만 해석하는 해석권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를 흘리기 위해서 달음박질 하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막을 수밖에 없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는 겁니다. 선악의 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깨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그런 선악의 몸을 못 박아버리겠다는 겁니다. 단절 차단 입니다.
예수님 나라에는 그런 몸이 절대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들통나서 그 몸 뚱아리를 새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 태가 바로 십자가 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은혜의 몸으로 만들고자
십자가의 피에 부합하는 죄인으로 새피조물 로 만들고자 십자가로, 그 은혜의 언어로,  

선악체제를 전복시키고자, 선악의 몸을 구멍을 뻥뻥뻥 구원의 뿔로 희년의 뿔로 은혜의 뿔로 뻥뻥 뚫어버리는 겁니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겁니다.

그 십자가라는 기준에 의해 새창조로 새피조물로 새언어로 새몸으로 새입술로 새노래로 노래 부르는 겁니다.
(새롭다의 새가 아니라. 새언약의 새 입니다. 즉 상대적인 옛언약이 아니다는 겁니다. 의문의 증서 율법은 찢으시고 도말했다는 겁니다. 물론 새언약의 대상물에게만, 그러나 선악의 인간에게는 더더욱 강화된 의문의 부조리에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겁니다. 미리 앞당겨 후회 죄책감 그리고 원한과 가책 살인의지를 도출시켜 버립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도시
슬픈노래를 불러도 울지 않는 도시

이 세상의 모든 도시가 모든 마을이
이제는 소돔 보다 더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며
가버나움 보다 더 더 더 심각한 무반응으로
소돔심판보다 더한 심판에서 예외가 될수 없다는 것이 이 얼마나 은혜 다운가 말입니다.

선악의 몸은, 지헤롭고 똑똑한 자에게는 감추어진 은혜이고
어린아이같이 은혜의 몸에게는 나타낸바된 겁니다.

선악의 몸을 더더욱 선악적으로 몰아버리고 (이마에 도장 찍어 보호하는 가인의 확산 확대)
은혜는 더더욱 은혜로 몰아버리는 겁니다. (그런 가인의 배경을 깔고, 선악의 몸을 배경으로 깔고, 은혜의 몸인 아벨을 퍼뜩 죽여버리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된 십자가를 졸지에 미리 앞당겨 보여줌, 하만의 등장이 없이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의 의미가 드러날수가 없듯이 ... . 이 얼마나 부조리인가? 이 부조리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기생라합이 자신의 민족과 자신의 도시를 멸망 심판하러 온다는 여호와의 소식을
얼마나 기쁘게 은혜롭게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가요?

본인이 죄인인줄 알았기 때문에 은혜만을 바라보았던 겁니다.

그 긍휼을 죄인의 자리(심판받아 마땅한 자리)에서 보았기에
유일한 은혜였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겁니다.

이게 따라한다고, 가능성을 부여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은혜의 몸으로 바뀐 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 곧 불쌍히 여겨주심의 십자가의 피흘리심 때문입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이 새피조물인 죄인의 몸으로 태어난 은혜의 몸 됨을 가지고
선악의 몸들의 세계에 증거하십니다. 결국 아벨의 몸의 확산이 되는 셈이겠지요.

(눅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선악의 몸들의 반응들이 얼마나 가관인지?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죽어도 상관없는 선악의 몸, 심판 받아도 상관 없는 몸으로
감히 감히 건방지게 십자가를 외칠수 있는 입술을 주셨다니
감히 감히 건방지게 은혜를 외칠수 있는 죽음을 주셨다니
이것이야 말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가?

십자가를 외친다는 것은 곧 죽음이요 자살행위 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할 벌떼들을 건드리는 겁니다. 악의 소굴을 건드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사로 벌컥 벌컥 원수의 문을 벌러덩 벌러덩 확 확 열어재끼니
인간들이 비로소 선악을 발산합니다. 완악함을 강퍅함을 심습니다. 심어

그러나 은혜의 대상자는 은혜를 받을만해서가 전혀아닌
오히려 전혀 은혜와 반대인 죄인이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피의 기능에 은혜의 기능 땜시롱 졸지에 이뻐보이는 겁니다.

왕의 기능에서 가장 이뻐보이는 자는 백성 중에 가장 무능한 자 입니다.
자신의 왕의 기능을 가장 잘 발현 되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가장 미약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했고
가장 작은 수 라서 일부러 선택한 겁니다.
여호와의 기능 때문입니다.

(신 7:6, 개역)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7,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오로지 기능 때문에 즉 섬김 때문에 반드시 돌출 되어야하는 족속이다는 겁니다.
우리의 기능이 아니라, 예수님의 섬김의 기능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기능을 반대로 활용합니다. 섬겼다고 우겨댑니다.
섬김이 졸지에 선악의 법이 됩니다. 육의 자랑 곧 육신의 법이 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기능 때문에 가인과 아벨이 차이나야 하듯이,
그 차이가 섬김 때문에 발현되도록 되어 있지. 우리의 기능은 오히려 섬기지 않습니다.

7번 용서할까요? 에라이 490번  무한대의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주님의 기능에 졸지에 당할 뿐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원수에게 딱 입니다.
죄인의 친구 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자의 동류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낮아지신 대신 죽으신 섬김입니다.



누구도 배운적이 없었고
누구도 가르친적도 없었던
처음의 언어인 이 유일한 방언인 십자가로
원수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이 단절의 언어만으로 소통케 하심이 무조건 옳고도 옳았음을
은혜로. 성령으로, 십자가의 피로 알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영은 우리에게 듣도 보도 못한 언어로만 소통합니다. 바로 은혜의 언어로만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언어 입니다.

유일한 소통언어 십자가 !!  죽이지 !!!

(고후 5:13, 개역)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 개역)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20, 개역)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1, 개역)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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