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의 삶이 드라마(극화)가 되어야 하는가?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오후 2:09:33  김대식


인간은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를 만들어 볼려고 늘 자기자신에게 미쳐있다.
어디를 가도 그런 인간들만이 빠글빠글 좀비처럼 우글거릴 뿐이다.

(눅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막 8:3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4,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런데 이 극화를 철학자들은 여성성이라고 눈치를 챘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이 여성성의 생명성에 모든 것을 올인하자 라고 외친다.
그것이 바로 집단성 파시즘이다.

철학도 신학도 종교도 미도 윤리도 결국은 드라마화다.
이 극화야 말로
철학 밖의 철학이고
신학 밖의 신학이고
종교 밖의 종교이고
미 밖의 미 이고
윤리 밖의 윤리인
부조리 이다.

가장 드라마틱한 그 부조리만이 간택이 되는 구조(극화)이다.

그리고 그 극화(스캔달)의 부산물로서만의 증식만이 증여, 선물로서만 충만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배제요 소외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복음의 능력이다.
저들은 인간의 참여를 외치지만 그것이 철학이요 신학이요 삶을 외치는 인간이지만
오로지 누락으로만 일관하신다.

정작

오로지 십자가만이 극화된다.
그리고 그 배제된 소외된 인간에게 선물로써만 증여된다.

불쌍히 여겨주심이지
인간의 삶이 극화 되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일 자격이 없다.
십자가는 십자가의 삶을 인간이 아닌 자에게만 부여한다.
종말에 부으시는 영을 인간의 삶에 부으심이 아닌,  분명히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인간 아닌 죄인에게만 부으신다.

비로소 십자가의 영광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이 극대화에 동원되는 산물일 뿐이다.
(마귀는 정작 모든 극화를 육에게 줄려고 모든 자재를 동원했지만,
정적 모든 육체를 깨뜨리는 십자가 좋으라고 남 좋은 일만 실컷하게 되는 셈이다.)

--------

그 가장 극화가 바로 간택의 최절정인 왕의 이야기이다. 영웅의 이야기이다. 구원자 이야기에서 가장 잘 보여준다.
(왕이 없을 때 왕이 생기기 바로 직전 마치 왕 제도가 올줄 알고 미리 복선처럼 깔아놓은듯한 사사기의 구원자 이야기, 삼손 이야기가 더욱더 그렇다. 삼손의 수수께끼를 보면 상처란 상처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는 말이 계속 생각난다. 죽으면 죽으이라 라도 그렇고, 특히 광야에서 불뱀사건과 구리놋뱀 장대 높이 올린 사건 곧 십자가 사건 말이다.)

선거철만 되면 왜 인간이 하나님이 왕이 되기를 싫어하는가에 대한 성경에서의 이야기가 현실임을 보게 된다.

참나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그러는 나는 과연 주님이 주가 되는 것을 좋아할까?
분명히 말하지만 싫어한다. 이 육체는 한결같이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무지 무지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이다는 것이다.

주의 주 되심은
오로지 성령의 활동으로만 전개 된다.

인간은 이 성령의 활동에 그 어떤 도움이 되거나
종(누구의 종노릇)으로 나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럼 그 성령은 어떻게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시는가?
아무런 인간도 없이 어떻게 인간에게 그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가?

왕이 되어도 하나님의 왕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왕이며
(설사 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뽑아도 섬길려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종으로 부려먹어 이용하고자 함이다. 결국 자신의 배가 진짜 왕인 것이다. 그 왕노릇에 자신이 뽑은 대통령 마저도 종으로 삼기 위함이다. 감히 인간이 누구의 종노릇을 할 위인이 되지 못한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제사장이 되어도 하나님이 제사장 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제사장이며
의사가 되어도 하나님이 치료자 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 의사이며
의인이 되어도 하나님이 의가 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의인들이다.

이 땅이라는 지옥은 이런 왕들만 가득하고
이런 제사장만 가득하고
이런 의사가 가득하고
이런 의인만 가득차 있다.

그것에 섭해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주 아주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오히려 바랠 걸 바래는 그 망상 자체가 비정상이다.

자식도 한집건너 친인척도 한다리 건너면 모조리 다 의사 제사장 왕 의인이 가득하다.
오히려 그런 구조의 네트워크의 빽빽 촘촘한 밀집성(군중 속의 고독, stand alone complex) 에서
찾기 힘든 것은 죄인이다. 아니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한 죄인 찾는 숙제를 펼치는 것이 바로 약속 곧 복음이다.
인간이 복음을 믿을수 있는 가능성은 1프로도 안되는 제로이다.

오로지 복음이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죄인찾기라는 불가능성을 구체화 한다.
99마리를 배제하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그 불가능성 말이다.
어찌 이스라엘 유대인 속에서 개같은 이방인 곧 희년의 대상자인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암(저주, 지옥)의 백성들,
개같은 이방인 나그네 라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는 말인가? 유대인 흔하디 흔한 99마리 내버려 두고 말이다.

이 죄인을 찾는 것이 진짜 왕이 아닌가
진짜 의사 진짜 제사장 진짜 의인이 아닌가?

왕은 자신이 섬겨야 하는 이방인 객을 찾아내는 것이다.
99마리 양은 필요 없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이 왕은 필요하다.

의사에게는 건강한자가 필요없다. 오로지 환자만을 찾아내는 것이 의사이다.

구원자에게는 의인이 필요가 없다. 죄인만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강도 만난자를 피하기 바쁠 뿐이다.
저런 기쁜 소식 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강도이기 때문에 단물 빨아먹어 다 소진되어 내 뱉어버린 것은 피해야 한다.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될 자는 아무도 없다.
누가 강도만난자를 섬길려고 하겠는가? 그런 이웃은 없다.
그저 정치적인 소통을 위한 가짜 이웃만을 주위에 배경인물로써 깔아놓는다.

마치 바벨탑을 쌓듯이 스펙으로써 말이다.
믿음 좋은 인물들 다 깔아놓는다.

오히려 더 벗겨먹을려고 할 뿐이다.
이웃이 되겠다고 나서는 자는 또 한번 벗겨먹겠다고 나서는 자일 뿐이다.

두 번 죽이는 꼴이다.

나 자신도 주의 주 되심을 싫어하고
주께서 왕이 되는 것을 그저 싫어하며
인간 왕이 왕이 되는 것을 고대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쓰잘데 없는 무가치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진짜 실재란 죽음을 거치고서 쳐들어와 이런 질문을 발생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서는 상처를 내고 깊숙이 찔러 쪼갠다.

왕을 뽑기도 전에 하늘에 구멍이 뻥 뚤려서 노아홍수에 모조리 다 떠내려가야만 하듯이
이제는 불심판이 떨어져서 이 땅을 구석 구석 새까맣게 불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 재가 우리 모습이다. 이게 진짜 현실이다.

어쩌면 왕을 뽑는 그 투표날인 땅의 페스티발 잔칫날이
제삿날이 되는 것이 종말의 가장 큰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새까맣게 재로 변해야 할 주제에 어딜 감히 왕을 뽑겠다고?
뽑아 본들 불심판도 통과 못할 것을 왕이랍시고 섬기겠다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섬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살 길이다.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다.

다른 것은 모조리 죽음 뿐이다.

그 뿔이
나를 찌른 그 뿔만이
나의 왕이며
나의 치료자이시며
나의 제사장이요
나의 구원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성경전체가 이런 구조이다. 상처를 낸 그 창에 의해서만  유일한 치료되는 구조. 이 부조리, 이 십자가, 특히 삼손의 이야기는 이런 수수께끼를 제대로 보여준다. 사랑보다 가장 잔인한 폭력은 없다.)

내가 버린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였는데 !!!

늘 부활을 꿈꾸는 나를 허물어 버리고
나를 찢어버리는 이 십자가야 말로
인간을 극화 할려는 그 몸을 찢는 유일한 사랑인 십자가이며
병든 손을 고치는 유일한 거룩.

뾰족한 십자가이다.

인간의 삶이란 이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찢겨져야만 할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