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노동(의)으로 포장되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영국 속담이라고 한다.
속담이란 인간의 경험의 노하우가 축적된 결과로서 생성된다.
즉 저 말 또한 인간의 노동으로 집약이 된 것이다.
이런 의미가 바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지혜문서들이다.
즉 욥기 잠언 전도서 시편 아가서
한 예로 시편을 달달달 외우는, 어릴적부터 외우는 그 시편대로
예수님이 그대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볼자가 없다.
즉 시편을 안다는 그 자체로, 또는 알게 만들었다는 그 자체로 이미 선을 구축해 버렸다.
그래서 시편 대로 왔지만 정작 시편을 달달달 외우는
놀랍게도 딴 민족들은 시편의 의미를 알길이 없다.
오로지 아는 자는 시편을 어릴쩍부터 외우는 유대인이다.
그 유대인의 손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을 정작 유대인들은 알길이 없었던 것이다.
시편 즉 기도나 찬양의 의미는 이 기도가 이 찬양이 예수님을 죽인다는 의미이다.
즉 죄인 만들기 원수 만들기 가해자 만들기 이다.
왜일까! 궁금해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물론 시편을 외워서 또는 알아서 예수님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고 미리 알게 되었다면
때려죽어도 시편을 외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혜다.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알아도 소용없다. 그 안 것이 선함이 되고 노동이기 때문이다.
모르게 해야 예수님이 그들 유대인 (시편대로 살고 시편을 외우는) 손에서 죽으신다.
그럼 누가 아느냐?
놀랍게도 몰라도 된다는 것이다.
몰라야 한다.
(또 이래 말하니 모르는 조건을 갖추는 행함을 또 추구한다. 단절성이라는 의미이다. 오히려 알아야 그 단절성의 의미를 알것이다. 선악과를 건드림으로써 말이다.)
즉 아무도 알수 없다는 그 단절성이다.
딴 한 분 예수님만 아시면 된다는 것이다.
이 단절성을 성령님이 실행하심으로써
바로 유대인들이 알았다고 외웠다고 그 시편대로 살았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삭제 시키신다.
즉 노동이라는 선한 의를 삭제 시키신다.
그리고 외부에서 온 율법 외에 한 의로만 이루신다.
이 이루심만 보면 된다.
(여기서 다윗은 뿅 가버린다. 살인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은혜의 대상이 된 것이다.살인자가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했던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 선함으로 포장된 지옥길을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심때문에 비로소 벗어날수가 있었다. 화로다 화로다 지옥가야 마땅했는데 누가 날 돌이켰구나? 주여 누구십니까?)
저 쪽 예수님 쪽에서만 다 이루심만 보면 되는 것이지
이 쪽 인간 쪽에서 누가 단 한 사람이라도 이루는 자가 있는가를 기대할 필요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기대해서 나타나봐야 어차피 의미가 없다.(이 쪽에서 아무리 율법대로 살아도 그 율법으로 포장된 길은 지옥길이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자 선함으로 가득채우기 때문이다. 율법은 예수님 한 분 외에는 단 한 개도 못 지키도록 되어 있는 구조 곧 몽학선생인데 자꾸 자꾸 안지키고는 못배기는 선악이, 죄가 우리를 다루어서 벗어날수가 없다.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 노릇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율법 지키기 말씀 지키는 결국 진짜로 율법을 사랑해서 말씀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죽기가 무서워 하는 육의 속성을 마귀가 장악해서 죄가 장악해서 이다. 율법을 지키는 분만 보면 된다. 만약 교회 목사가 율법을 단 한 개라도 지키는 놈이면 그 목사 보면 된다. 모든 것을 걸어도 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너무 너무 감사하게도 목사 치고 사기꾼 아닌 놈이 없다. 오히려 목사 조차도 불쌍히 여겨주심 아니면 지옥 가야하는 자기 의 쌓기에 미쳐있는 놈일 뿐이다.)
그런 의는 어차피 지옥으로 인도하는 선함으로 포장된, 노동으로 포장된 지옥길이다.
즉 이 지혜문서를 인간이 획득하면 결국 육의 자랑인 노동이 된다. 율법이 된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야 한다. 이 지혜문서대로 다 이루신 분은 예수님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 이루신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불쌍히 여겨주심인 피 값이다.
내가 내 스스로 죄인 되기가 아닌(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일부러 짖는 노동이라는 또 하나의 선한 의 쌓기)
성령께서 죄인 중에 괴수 만들기를 하셔서 예수님의 피의 대상으로 삼으신다.이 예수님의 선함이 지혜문서의 율법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없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이 피흘리심의 죽음 뿐인 십자가 뿐이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인간의 노동을 곧 선한 의라고 주장하는 성화론은
구원 이전에는 그랬지만 구원 이후라는 시간적 표현으로 미혹하면서
노동(근육 또는 개방)의 가치를 운운하면서 시험케 하지만화목제는 그런 조건아래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제사를 인간 쪽에서 드리면 된다는 가인의 제사이다.(다윗도 뿅 갔듯(그래서 왕 뻔뻔으로 여디디야 외쳤듯, 욥도 미래의 예수님의 제사에 뿅가서 자기 제사(믿음 행함 의) 를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그래서 엘로힘 형상에서 여호와 형상으로 옮겨짐을 당하는 것이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이다. 이삭이라는 약속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덮친 것이다. 다윗이 비로소 아 이거구나 라고 뿅 가버렸다.(롬 4장) 나는 무슨 짖을 해도 죄 뿐이고, 예수님은 무슨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닌 옳았음 뿐이다. 왜 무슨 죄를 지어도 라는 표현을 쓴 것일까? 반드시 부정적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십자가 라는 부정성이다. 아무리 봐도 선하게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인간 이라는 자아 곧 나 에게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나를 치면서 오기 때문에, 나를 원수삼기 때문에 다윗도 아브라함도 욥도 당췌 알수가 없었다. 약속하신 선물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았을 때 즉 피라는 생명-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심 때문에 그 선물을 받고서야 비로소 나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원리 무조건 부정성으로 오시고, 또 반드시 나 라는 자아를 원수삼으시고, 타인을 원수 삼을 때는 구체적이지 실재적이지 않다. 그 실재성은 반드시 나를 쳐야 비로소 실제상황이 된다. 말씀이 살아 움직임을 직시하게 된다. 그 나를 원수삼아 죄인 중의 괴수 삼으셔서, 지옥 감이 마땅함을, 심판 받아 마땅함을 직시케 함으로써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심이 아니면 안되는 그 단절성을 뼛속까지 알게 하신다. 그 우발성의 은혜만을 공급함으로써 피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도록 만드시는 것이 십자가의 원리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은혜 뿐이다.)
(롬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고전 15:10, 개역)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쪽 인간의 제사는 무조건 단절이다.
이 개방이 아닌 단절의 의미가 바로 성령의 활동 뿐이기 때문이다.오히려 사랑만이 개방을 거부하고 단절을 추구한다.인간의 손에서 짖지 않는 성전이듯이
사랑은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지옥으로 가는 선함이라는 포장된 길에 빠질수 있으랴?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로만 다 이루신 사랑이다.
인간은 여기서 처음부터 배제되고 누락 되었을 뿐이다.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심이라는 무시 만이
이 잉여를 선물 받을 뿐이다.
내가 선물을 소유할 자격이 되거나 선물을 획득할 수가 없다. 소유 자체가 안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선물이 나를 소유할 자격을 모두 획득했다.
피 만이 그 증거이다.
피는 오늘도 인간의 노동에 무시 당하면서 부지런히 죄인 중의 괴수 라는 가해자를 만들고자 쉬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일하신다.
그 피의 숙제에 당하는 은혜만 있을 뿐이다.
주여! 이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종교 즉 자기사랑이라는 종교라는 마약에서 건져주시옵소서!!
ps
그나저나 내 딸 서영이 왜이리 재미있는거야? 점점 재미있어지네?
완전 오이디푸스 내용으로만 가득차 있잖아 ㅋㅋㅋ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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