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일과 간격 벌리기 (행 1: 9 - 26)

이스라엘 회복이냐? vs 성령의 일이냐?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은 1장 8절까지 살펴보았다. (하도 오래 되어서 ㅋㅋ,  http://crosslamb.tistory.com/1230 )

오늘은 오랜만에 행 1:9-26까지 보자.

(행 1:3, 개역)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먼저 이 말씀이 눈에 띄였다.
왜 40일 동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셨을까?
40일 만에 과연 하나님의 일에 대한 교과과정을 다 띨수가 있을까? ㅋㅋㅋ 
물론 아니다. 왜일까? 갑자기 궁금해 졌다.

하나님의 일이란 항상 사람의 일과의 차이성으로서 증거 된다.
차이성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일이란 모호하게 들린다. 너무 너무 추상적일 것이다. 그 추상성을 제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행 1:4, 개역)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개역)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6, 개역)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주님께서는 이래 이래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신다.
그런데 제자와 많은 사람들이 정작 묻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정작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행 1:7, 개역)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너희는 알바 아니다 라고 하신다.

참 묘하지 않는가?
정작 이러한 궁금증은 놀랍게도 주께서 유발케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유대인에게 새겨진 마음판의 내용이다.
(가룟유다는 오로지 이스라엘 회복에만 관심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거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뉘우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자살한다.) 이 얼마나 순애보인가? 바로 이것이 사람의 일이다.)

주님이 새겨 놓고서는 내가 언제 새겼냐 라고 발뺌하시듯이 너희 알바 아니다 라고 하신다.

마치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 계속 계속 꼬이고 꼬이면서도
주께서 희망을 잃지 말아라 낙심하지 말고 일어나라 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알려줘 놓고서는
그 희망이 언제 이루어 집니까 라고 묻자, 이제와서 그것은 너 알바 아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를 말던가 말이죠.
실컷 시켜서 이것 하라 라고 해놓고서는 이제와서 말라꼬 내 말 듣느냐 라고 하시는 것과 같다.

결국 이런 너희가 알바 아니다 라는 과거에서 심었던 그 내용의 연결에 대해서 정작 단절성으로 싹뚝 끊고

그렇다면 단절성이 되었다면 뭔가 제대로 끊어진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아니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새로운 잇기라는 차원에서 이어지는 뭔가 새판짜기의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데

전혀 다른 의미의 이야기로써 그 단절성 마저도 느낄 틈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지체할 틈이 없을 정도로 다급하고 구체적인지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 명료하고 또렷하게 미쁘게 작용한다. 어느정도로 미쁜지 2장에서 팍팍 쓰러진다.

웃기는 것은 자발적인 증인이면 얼마나 좋은가?
단서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는 임해야 증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다급하게

과거의 모호한 추상적인 이스라엘의 회복과 무관하게
잇기의 차원이 아닌 전혀 딴 존재처럼 새로운 이스라엘이 새로운 전개를 펼치는 일에 동원이 된다고 말이다.

그들 자신들이 생각한 예상한 새로움이 아니라(동질성의 예상가능이 아니라)
너무 너무 낯설기 짝이 없는, 새로움 자체도 성령에 의한 것이니 말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유대인의 견고한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더더욱 간격을 벌려서
놀랍게도 이스라엘 회복이 아닌
(늘 이스라엘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처럼 늘 강박관념으로 남아있는데 그 실패를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그것 내버려 두어버리고서 딴 데 가버리고 그 딴데서 딴 판을 짜는 식이다.)
(땅에서 하늘로 제사를 올리는 구약시대가 아니라, 판 구조가 달라신 새 시대이다. 하늘에서 휘장을 찢어서 땅에 쏟아붓는 시대이다. 그 쓰나미에 죽어나아가야할 판국인 시대인데 언제적 시대를 그 앞에서 그 불 앞에서 운운하랴?)

이스라엘이 싫어하는 이방민족, 그것도 얼마나 이스라엘을 직접적으로 괴롭혔던 사마리아(성전재건에 지독한 방해) 그리고 지옥세력(로마세력)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예루살렘(유대) 까지 다 포함한
전 세계의 회복이 아닌
전세계의 심판성을 위해서 증인이 되게하는 성령의 일을 곧 하나님 나라의 일을 펼치시고자

그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알바 아니다 라고 아주 냉정하고 차갑게 무시해 버리고

이거 이거 앗뜨거운 이 일이 발등에 떨어졌다고
이것이 다급한 일이다 라고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 회복과는 빠이 빠이 하라는 취지로 언급하신다.

캬 이것은 얼마나 일방적으로만 퍼붓는 절망적인 선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이게 절망을 느낄수가 없는게
성령이 임하면 절망할 겨를도 없이 이 일에 동원이 되어서 무지 무지 바쁠 수밖에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그 어떤 접촉점이 없는 성령의 일방성 앞에서
그렇게 무구한 세월 속에서 인증샷 받아온 약속은 휭 날라가 버리고
이스라엘 회복은 물 건너가 버린 붕 떠버린 멘탈붕괴가 된 것이니

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 1:9, 개역)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개역)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그리고 그 말 하시고 안 보이신다. 단절 중의 단절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뭐 어쩌하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다. [뭐 어쩌라는 것인지]에서 너희는 할게 없다는 것이다.
정하고프면 이스라엘 회복시켜 보라는 것이다.
회복시켜 봤자 주님이 또 뿌쑤어 버린다.
당연히 안된다는 것은 저들도 안다. 그래서 물어 본 것인데?
알바 아니다 라고 하신다.

그래서 멍 하니 멘탈붕괴가 되어
이스라엘 회복이 단절 되고
알필요가 없다고 자신들의 관심사가 싹뚝 짤려버리고
또 그렇게 구름 속으로 사라져 안보이게 되니
참 기가 막히다.

그래서 천사들이 뭐그리 멍하니 있노? 멍하니 있을 이유가 뭔데 라고 막 다구친다.

(행 1:11, 개역)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최대의 관심사는 완전 단절 되었다.
그리고선 증인이 된다는 성령의 일하심이 곧 오게 된다는 소식은 듣게 되었다.

과연 절망소식 J M 인가? 기쁨소식인가?

마치

(마 9:5,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2:9, 개역)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중풍병자에게 죄사함 받았다 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쉬우냐 라는

참람 한 소리와 같은 것이다.

즉 참람해야 복음이요 기쁜소식이다.

(이 참람한 말을 듣고 이스라엘 장로들은 옷을 찢느다. 회개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부정하게 불렸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회개를 하며,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려고 한다.)

우리가 예상한 그것을 이루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우리가 금기시한 그 뿌리까지 원천 차단, 원천 뿌리채 뽑기, 원천 단절로서의 차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복음이 아닌 것이다.

즉 사람의 일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알바 아니다 라고 해 버리신다. 단절이다.

그리고서는 단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절의 간격을 점점더 벌려 버리시는 일이 바로 증인이 되는 성령의 임함이 하나님의 일 곧 점점점 간격을 더욱더 벌리는 것이다.

그것만이 사람의 일을 뚫어버릴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남이 아닌 가장 기독교적이다 라고 가장 신앙적인 사람이 하는 신앙의 일을
오히려 단절시켜 버리고 그 신앙의 일을 사람의 일로 취급해 버리면서
그 사람의 일과 성령의 일의 차이점이 뭔지 그 간격을 더욱더 벌림으로써
그 차이성이 또렷해 지도록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린아이도 쉽게 알아먹게 되는 것이다.

남이 아닌 가장 복음적이다 라고 사람들로부터 추켜 세워진 사람의 신앙적인 일을 무참히 짖밟아 배설물로 만들어서 말이다.

그 다음 구절이 하이라이트 이다.

여기서 깜짝 놀랬다.

아 그럼 증인이 되게 하는 성령의 일이 펼쳐지겠구나 해서 그 다음 구절을 보니

뭘 뻔히 멍하니 보노 퍼뜩 안 흩어지나 해서
그 다음에 제자들이 하는일이 놀랍게도

가룟유다가 짤렸다 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일로서 맛디아 라는 사람이 뽑힌다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에 너무 너무 놀랍다.

왜 그런고 하니 맛디아를 그냥 단순히 뽑는게 아니다.
오히려 가룟유다의 단절성을 아주 아주 부각하는 식이다. 맛디아는 이 선취 다음의 후취이다.
성령의 일은 사람의 일의 단절성이 선취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구름타고 올라가신후 제자들이 처음으로 하는 일이다. 기게 참 놀랍니다. 이것을 제일먼저 한다.

(행 1:15, 개역)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행 1:16, 개역)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 1:17, 개역)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행 1:18, 개역)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 1:19, 개역)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 1:20, 개역)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행 1:21, 개역)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행 1:22, 개역)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이 내용이 왠지 새롭게 다가와 보이는데

그냥 단순히 한 사람 빠졌으니 보충하자 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의 차이성을 부각하면서
또 의도적으로 12명이라는 자리를 갖춘다.

그런데 이 12에 너무 너무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갖춘다는 것이 놀랍다.
왜냐하면 정작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다면 13이 되고 또 누가 사도가 되면 14이 되어서
정작 숫자는 의미가 없어지는데도 불구하고
12의 의미를 부각하는 것은
오로지 가룟유다 때문이다는 취지이다.

쉽게 말해서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이스라엘의 회복이 눈에 가시적으로 안되었다는 의식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의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2의 의미를 제대로 갖춤으로써 가룟유다라는 사람의 일을 제대로 차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정작 지금 증인으로써의 성령의 일에 의해
그 경계선의 이스라엘이라는 조그마한 영역이 아니라
전 세계의 영역으로 확대되어서
회복 곧 심판 속에 이미 이스라엘도 포함이 되는 식이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더 아이러니 하게도 이스라엘을 제대로 깨뜨리기 위해 빠진 놈 빠뜨리고
한 사람 채워서 12을 제대로 갖추어서 깨뜨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성령을 통해서
사람의 나라 속에서 전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격었던 무구한 그 많은 세월이 (때론 짖밟히는 역사였고, 잠깐의 기쁨이 있었던 역사였을 지언정)

이제는 더 영역이 확대되어서
(마치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퍼져서 똑같은 이스라엘이 격었던 역사의 과정을 밟아야 하듯이)

그 일에 동원이 되는 자로써 12을 일부러 구체적으로 갖추는 식이 되는 것이니

이스라엘의 회복을 외칠게 아니라
전 인류의 회복 인 심판

곧 회개를 외치도록 만드는 성령의 일에 증인이 되는 12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스라엘 속에서 했듯이
이제는 인간의 나라, 사람의 일만 가득한 곳에서 외치게 되는 것이다.

회복 운운할 겨를이 없다.

오히려 모조리 다 심판 속에 넣기 바쁘다는 것이다.

이런 주님의 일하심에 단 한번도 계획대로 안된적이 있더냐 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심판 속으로 집어 넣는 것에서
남이 아닌 이스라엘이 그 참선지자를 가만히 내버려 뒀는가 하는 점이다.

뻔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 12을 채워 이 12의 운명은 뻔한 것이다.

회복이 아니라 심판이니 말이다.

캬 완전히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재현 하는 일만 벌리겠다는 성령의 일에
사도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증인들을 모조리 집어 몰아 넣는 것과 같다.

그  불 속에 넣는 일에 순서를 정하듯이 제비뽑기 한다.
어차피 그런 운명에 다 놓여있는데
남들이 보기에 웃기지 않은 순서표 은행 대기표 뽑듯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의 운명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마치 이 의미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엽기적이고 약올리는 모르게 하는 비밀처럼

이 영광을 아무나 받을수 없다라는 식으로써 도살장 도살 대기표 순번으로써 제비뽑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순번으로써 12의 아주 아주 구체적이고 또렷한, 절대 추상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 ㅋㅋㅋ)

(행 1:26, 개역)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사도의 수에 가입한다는 것은 죽을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다.

아니 요즘엔 목사를 뽑아도
아무도 아이구 너 죽을수 있는 영광 받았네 라고 축복해 주는 자 없다.
전신에 다들 하는 말이 아이고 너 이제 돈 벌었구나 라고 한다.

하물며 직분은 오죽하겠는가?

아이고 너 직분 받았네 이제 제대로 왕따 당해 죽는 영광을 얻었네 라고 하는자 가 없다.

오히려 소외되었던 권력을 이제는 말빨이 생겨 행사할수 있겠네 라는 식으로써
직분를 거래 하는, 권력을 돈주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 인간 나라를 뻥뻥뻥 구멍 뚫는 도구로써의 소모품 바늘로써
점점점 간격벌리는 일에 동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알수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 속에 쳐들어 와서 떡하니 자리잡고 있듯이
예수님 싫어하고 복음도 싫어하는 교회(사람의 일로만 가득한 가룟유다처럼 돈버는)에 떡하니 가시처럼 송곳처럼 찌르는 고슴도치처럼 집어넣어서 개죽음 당하게 만들겠다는 취지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방해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을 말이다.
인간 나라의 일을 말이다.

우리는 그 성령의 일에 그 간격을 점점점 실감하면서 격는 목격자이다.
(이스라엘이 참선지자를 왕따 시켜 죽이는게 아니다. 먼저 참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자꾸  지 혼자 왕따 시켜버리기 때문에 그 방어책으로써 다시는 그 후속의 인물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로 왕따 시켜 죽이는 것이다. 이 정치성이 등장해야 그 간격이 하나님나라의 일과의 차이성으로써 벌어지는 것이다.)

회복? 아니 지금 배부른 소리 할 입장이 못된다.
오히려 불이 떨어는데?

그 불의 징후로써 증상으로써
12은 먼저 파견 되는 것이다.
개죽음 당하라는 소리이다.

이 단절성을 외치는 자로서 12은 선발대로써 먼저 방문하는 것이다.
피하세요 대비하세요 회개하세요 라는 말은
절대로 못 피하지롱
절대로 못 대비하지롱
절대로 회개 못하지롱
이라는 단절성 선포이다.

그런데 만약 딱 한 명이 회개를 하는 말도 안되는 기적이 벌어지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다는 것이다.

(창 18장 의인 50명? -- 40명? -- 30명? -- 20명? -- 10명?   0 OK 빵빵빵, 없음 없음 없음 빈자리)

결국 성령이 일은 빵명이라는 단절성으로써 벌리고 벌려서 성령이 뒤로 빼돌리는 짜고치는 고스톱을 벌리는 것이다.

만약 저렇게 증거하다가 뻔하게 다 죽어버렸다.
그럼 12은 소실되겠구나 푸하하하 순엉터리네 라고 해도 소용없다.
12은 소실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 죽고 딸랑 사도 한 명만이 남아도 그 한 명을 12 이라고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표현해 버린다. 즉 인간의 언어가 아니므 소이다. 하늘의 언어 숫자 이므 소이다.

그러니 12에서 반대로 오히려 늘어나 13 14이 되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12이다.
증인은 12이다.
군사는 12이다. 3 3 3 3 동서남북에 144000 퍼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고 목격하는 증인이요 목격자이다. 우와 말씀대로 응한 것 맞네 맞네 라고 확인하면서 박수치며 응원하며 그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는 확정적인 12이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간격은 벌어졌다는 것이다.

자 그럼 물어보자
12 사도가 성령을 받은 증인으로써 그때 제비 뽑아 맛디아를 채워 증거했다면
지금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간격은 실로 어마 어마하게 간격이 벌어져서
누가 봐도 세상나라 곧 인간나라 또는 사람의 일과
성령의 일, 하나님의 일, 하나님 나라의 간격은 또렷하게 간격이 벌어져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안벌어져 있나?

라는 점이다.

캬 이거 너무 너무 정곡을 찌른거 아닌가?

문제는 맞다 간격이 한참 벌어져도 벌어졌음이 보여야 한다.

안보이나?

보이는데!!

성령을 받은 자는 보인다.

문제는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아무리 교회 다녀도 보이지 않는다.
목사 장로 권사 백날 되어도 안보인다.

안보이게 되면 안 보이는대로 행동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간격성이 보이지 않기에 당연히 관심사가 보이는 쪽만 관심두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일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간격이 보이는 것은 성령이 임했기에
사람의 일을 뚫어버리고 깨뜨리는 성령의 일에 본인도 당하면서도 그 당한 것을 옆에 전염시켜서 옆에도 당하게 되는 연쇄작용에 실감하게 되어 본인들이 성령에 그만 넋이 나가 버리게 된다.

맞네요 맞네요 성령님이 하신 일이 맞네요
나의 일은, 사람의 일은 깨어짐이 마땅함이 맞네요 라고 말이다.

그 다음 사도행전 2장 부터는 막 접시가 팍 팍 깨어진다.
시원하게 깨어진다.

그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성령의 바람을 느끼게 된다.
그 간격의 벌어짐이 그 둘 사이에 바람이 슁슁 부는 것을 통해서 맞네 맞네
간격있네 간격벌어진게 맞네 라고 놀라움과 감탄과
왜 이제야 왔습니까? 이스라엘 회복이 중요한게 아니라.

빨리 나도 심판해 주십시오
나를 두 조각 내셔서
그 쪼개긴 갈라진 틈 사이로 바람(성령)을 슁슁 불게 하셔서 그 간격의 실상을 알게하소서

사람의 일로는 그 간격을 벌리거나 또는 좁히거나
나 자신을 회복 시킬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간격이 더욱더 벌어지겠끔
나를 심판하심이 마땅한 주님이 다 이루심이 옳았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외치는 것이다.

나를 차이나게 하는 구원은 거짓이다.

오로이 예수님만이 차이나는 그 간격을 벌어짐이 하루 하루 매일 극과 극으로 점점점 벌어질 때

감히 감히 그 사랑의 피흘리심 앞에서 그저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
심판해 주십시오 라고 밖에 나올 말이 없다.

그것이 2장에서는 바람이 휭휭 불면서
접시를 깨뜨림으로써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 회복이 약속 성취가 아니냐 라는 것이
이제는 접시 깨지는 것을 보고 약속 성취라니?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접시 깬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비로소 인간나라는 누락 되는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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