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구원(회복)을 괴롭히는 자여 또 성령 너 냐? (행 2:1-13)

이스라엘의 구원(회복)을 막는(단절) 자여 또 성령 너 냐


(행 2:1, 개역)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개역)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개역)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개역)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5, 개역)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 2:6, 개역)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개역)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개역)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 2:9, 개역)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개역)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개역)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2, 개역)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 2:13, 개역)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의 구원 곧 회복을 묻는 자들에게
주님은 너희 알 바가 아니다
너희 소관이 아니다 라고 매몰차게 단절 시켜 버렸다고 했습니다.

내 구원 내 구원
내 돈 내 돈 내 ~~~~ 돈 ~~~~
내 교회 내 교회
내 집 내 집
내 가족 내 가족

이런 것들이 너희 소관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 그러면 안하면 구원일까요? 역시 구원 아닙니다.
이것 해도, 안해도 구원과 무관합니다.

이래도 안된다. 저래도 안된다 우짜라꼬?

오히려 주님께서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저런 것들이 사람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성령을 주시겠다는 소리는
전혀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미 딴 것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혀 동질성이 없어서
귀에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회복(구원), 내 구원, 내 교회, 내 천국, 나의 가족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일에 대한 단절이 바로 성령을 부으심입니다.

그래서 단절성의 대표성으로써 가룟유다가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에 온 전부를 바친 인물로써
대표적으로 짤리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오로지 이스라엘의 회복에만 관심셨듯이
유대인들 전부가 그러한 악마가 들어가 있는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 입니까

가룟유다가 대표성이라면 우리 또한 동일한 겁니다.
내 구원에만 오로지 집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의 인간들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그 단절성으로 그 차이성으로써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성령을 붓겠다는 것에
성령을 거부하는 반발 세력은
이 성령 때문에 깨어져야할 입장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장치들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결국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인간 구원을 세우는 겁니다.

그럼 간단합니다.
사람의 일은 인간 구원을 위한 장치를 세우는 겁니다. 바벨탑 쌓기입니다.
이 바벨탑 쌓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서 그 대안 장치로써 세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었다면 나타나지도 않는 겁니다.

주님께서 흡집을 내니까 그 흡집의 틈을 매꾸어 보겠다는 반작용인 겁니다.
흡집낸 자가 없다면 그 틈도 없고
그 틈도 없기에 결핍도 없음으로써
그 결핍을 채울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는 동일성의 추구가 바로 바벨탑을 세워서
흩어짐이라는 분절을 피하자
함께하자 함께해서 하나님의 심판에도 너끈히 이길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자
그래 종교 만들자
그래 교회 만들자
그래 신도 만들자
그래 하나님도 만들자
그래 예수도 만들자
그래 성령도 만들자
그래 십자가도 만들자

인간을 위한 구원의 장치라면 뭐든지 만들어서
심판에 대비하자

이것이 흩어짐 곧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방어책으로써
바벨탑을 세우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일 사람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 입니까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사람의 일을 깨는 일입니다.

인간 구원의 장치를 깨 부수는 일입니다.
바벨탑을 허무는 일

바로 교회를 부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더더욱 인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저마다의 구원 장치를 세우는
바벨탑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좀처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된다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스라엘의 회복
곧 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허무는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니까
노아가 십자가를 지으니까
사람들은 미쳤다는둥
왜 십자가에 매달릴려고 하느냐 라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막아서고자
다들 어떻게 해서든 그 십자가 곧 하나님의 심판의 가시화를 막을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하나님께서 보좌에 계심으로써 땅이 흔들리기에
이것이 얼마나 안정감있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미쁘심인가 하는 점입니다.

(시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참 모순이요 부조리하죠
어떻게 땅이 흔들리는데 비로소 안정감이 드느냐 말이죠
땅이 안흔들려야 안정감이 있고 배가 흔들리면 불안해 지는 것이 정상이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마 8:24, 개역)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개역)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개역)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분명히 큰 파도가 배를 덮을 정도로 큰 놀 물결이 일어났는데도
예수님은 주무신다고 했습니다.
즉 안정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그런데 눈치 없이 자고 있으면 됩니까 안됩니까?
이스라엘 회복이 날라가고 있는 판국에 잠자고 있으면 게으르면
행하지 않고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잖아요 그래서 깨우고 잠에서 일으키고
게으리지 않게 채찍질을 하고
행하도록
근육을 사용하도록 안정감을 흩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큰 파도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큰 파도가 일어나지도 않았다면
예수님을 깨울 이유도 없고
근육 까짓껏 사용할 필요도 없이
나도 자겠다!!
나도 안심 푹 놓고 자겠다!!

그런데 배들 건드리고 배를 덮쳐서 배를 파손 시킬정도면
교회를 파손 시킬 정도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야 하고
하나님도 깨워 흔들어야 하고
모든 신들도 모든 인간들도 다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집이 무너지고 땅이 요동하여 지진나서 갈라지는 판국인데
잠을 자다뇨 ~~~~~~~~~~~~~~~

아니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입니까?

바로 여기서 시점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시점이냐 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대중적이고 보편적이고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다수라는 이유로 인해
단 한명의 시점을 무시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 단 한명이 미친자인지 정신병자인지 장애인인지 어찌 알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편성을 법으로 구성한 겁니다.
법이란 예외성을 배제시키고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버리는 겁니다.
(잠깐 여담으로 부러진 화살 이라는 영화를 보니, 판사보다 더 법을 잘 아는 사람이 판사의 무법성을 따진다고 해서 그 판사의 권력세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진짜 무너뜨릴수가 있다면 밤마다 짐승처럼 달려들어 강간하는 그 돼지짐승을 이겨보라는 겁니다. 그 무법 그 부조리를 과연 법지식으로 이길수가 있는지? 그 장면을 보고 제가 아 이거구나 라고 한 것이, 법이란 지키라고 있는게 아니구나, 법은 지키냐 안지키냐의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무법자를 양성한다는 겁니다. 법이 법 스스로가 부조리로 무법자를 뒤로 빼돌려서 많이 많이 배풀어서, 감옥에 충분히 보내버릴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봐줘서, 법 자체의 우위성을 높이기 위해 그냥 불쌍히 여겨줘서 감옥에 안들어갈 뿐이지, 법이 맘만 먹으면 그 어떤 모범시민이라도 단 3초 만에 감옥에 쳐 넣을수가 있다는 겁니다. 법 자체가 선과 악을 펼치는 겁니다. 법을 지키냐 안 지키냐로 감옥에 들어가고 안들어가고 아니다는 겁니다. 법이 맘만 먹으면 아무리 감옥 안들어갈 법 없이도 살 사람일지라도 언제든지 감옥에 쳐 넣을수가 있고, 법을 아무리 어겨도 백번 만번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할 자라도 언제든지 감옥에서 빼낼수가 있는 것이 법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법 스스로가 법의 우위성을 우월성을 두고자 하는 취지인 겁니다. 인간은 거기에 놀아나는 유물로써 들러리 재료로 사용될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힘이 없는 자라도 법 이라고 하면 그 보편성 예외 없는 보편성에서 안정감을 찾기에 법대로 하자 법대로 하자 라고 그 예외성이 없는 동질성에 더 안정감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의지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식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창작물입니다. 법 신 교회 종교 예수 십자가 성령 등등입니다. 다 이런 취지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 회복을 위한 장치로써 안정감있는 것들을 세운 겁니다. 불안케 만들고 든든함이 없다면 세워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진짜 취지는 반대급부로써 뭔가를 가릴려고 만든 가리개 무화과나뭇잎과 같은 취지를 가릴려고 한 겁니다. 그것을 확벗겨버리는 것, 불안케 만들고 요동치게 만드는 것, 그 허구를 허상을 들추어내는 것

바로 이것을 깨어 버리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시점에서 다시 봐 버리면
흔들려야
깨어져야
배가 뒤짚어져야
비로소
인간의 보편성 시점에서 해결 못하는
그 한계성이 드러나는
사람의 일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동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 요동이 도리어 잠을 잘 정도로 쉼이 있는 평안이요
안정감이요 든든한 미쁘심입니다. 어느정도로 안정감이 있는고 하니
잠을 잘 정도로
손을 놓아도 될 정도로
푹 코 골고 잘 정도로의 안정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일은 이 성령의 일이 등장할 때 반대의 양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정반대로 흔들려도 너무 ~~~~~~~~~~너 무 흔들리니까 난리 법석인 겁니다.

맞습니다. 성령의 일은 사람의 일을 무효화 시키는데 있어서 죽음 곧 하나님의 진노를 심판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저주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등장하면 인간이 그 동안 세웠던 모든 것들이 허물어 지기 시작합니다.
우수수수 막 떨어지는 겁니다. 우수수수 막 깨어지는 겁니다.
그런 인간의 행함으로 결집된 역사는 묵시 앞에서 허물어지고 자빠지고 깨어지고 박살이 나서
마땅히 단절되고 마땅히 짤려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바벨탑이 더더욱 견고하게 세워지는 겁니다. 다른 방안이 인간에게는 없기에
공격이 있다는 증거가
땅이 요동되는 증거가
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계심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견고한 바벨탑을 유지 보수 더 강한 역청 본드(합체) 더 튼튼한 공사 더 큰 돈이 그 결핍을 그 흡집을 매꾸어 넣는데 쏟아 부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서론을 띄우고 사도행전 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날 약속하신 성령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성령을 원치 않습니다.

이 둘이 상충되게 충돌하는 겁니다.

칠 칠이 49해서 50으로 해서 오순절이라는 구약의 절기를 차용해서
약속하신 성령을 일부러 역사속의 시간을 맞추어서 부어지는 것은

12을 일부러 맞추는 원리와 같습니다.

즉 12을 가룟유다처럼 엉터리 곧 사람의 일은 이스라엘의 회복 때문에
12이라는 숫자를 구색갖추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고방식인 비언약을 이용해서
진짜 12의 의미를 들추어내고자
오해한 것들을 가지고서 진짜를 이야기해야
차이가 나서 그 간격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을 더더욱 벌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 12에 손댈수가 없는 겁니다.

오순절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제가 절기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잘 몰라서 상관없습니다. 인터넷 검색하시면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거 알아서 뭐하냐 말이죠.
어차피 가룟유다처럼 12의 의미를 어차피 오해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 안할래 라고 하지 마시고
하세요 니 마음대로 하시고
그 인간 마음대로 한 것을 가지고서
예수님이 하신것과 비교하시고 그 차이성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재료가 있으면 그 차이를 더 빨리 알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마음대로 사세요 막사세요 그래야 그 차이성의 간격의 벌려짐을 알게 되는 겁니다.
간격이 안 벌려지고 시원 시원하게 간격나지 않고 모호하게 그 경계선이 아주 아주 좁게 좁게 나타나면 도저히 차이성이 나타나지 않아서 모호해질 뿐인 겁니다.

7은 안식과 연관된 것 불교사람도 다 압니다.,
그 안식은 나의 안식으로 나의 구원으로 끌어들일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귀에게 장악당했기 때문에 가룟유다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독립투사로써 평생을 걸 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그 짖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야 엉터리 안식이라는 7이라는 평안의 의미를 가룟유다처럼 갖추겠지요
그렇다면 왜 이것 조차도
말씀지키기 복음대로 행하기 조차도 죄가 되는지
그 기준되신 예수님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차이를 알아보자 라는 겁니다.

간단합니다.
아주 아주 쉽습니다.
너무 너무 쉬워서 놀라정도이자 동시에 너무 너무 무시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가 너무너무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1초도 멈추면 다 몰살 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공기에 고마워서 기뻐 하루종일 팔짝 팔짝 뛰는 자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도 무상으로 주신다는 소식이 화가 납니까 기쁜소식입니까?

자 차이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지킨다고 했던 7 또는 안식일 지키기 등등
우리 한번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진노에 집어넣어서 통과하는지 안하는지
그것만 보면 된다는 겁니다

(안식도 십일조도 율법도 십계명도 뭐든지 자꾸 내 숙제가 되면 답도 없고 어설프기 짝이 없고 모호하며
결국은 내 육의 자랑이 되는 식입니다. 모호한 주제에 말이죠.
그러니 선악 마저도 자신의 숙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간단합니다. 선악을 알 필요가 없었듯이 예수님만 알면 되듯이
예수님만 쳐다 보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저런 숙제를 잘 하셨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발견하면 졸지에 내가 왜 죄인으로써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감사함이 넘쳐나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새롭게 죄인을 만드시는 겁니다.
의인들이 판 치는 세상에 죄인으로써 투입이 되는 겁니다.
죽음도 통과 못하는 의인의 세계에 졸지에 죄인이라는 성령의 집단으로써 말이죠)

칠칠이 사십구든 오십이든
7번 용서이든 7에 70인 490번이든
무한대의 용서이든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인 십자가를 통과 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주 쉽죠

과연 큰 파도를 통과 할수 있는 배인가 하느냐 라는 점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물어 볼까요?
우리 어린이 친구 자 여기에 큰 파도가 일어났어요
배가 있네요 큰 풍랑이 배를 삼킬려고 해요
배는 큰 풍랑을 통과할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린아이는 이런 쉬운 문제를 왜 내냐 라는 투입니다.
배가요 박살이 나서 산산 조각이 나요


맞았어요 정답이예요

자 이것이 답입니다.
통과 못하는 겁니다.

통과 못하는 것을 가지고서 왜 평생을 거느냐 하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고 7번 용서하고
490번 용서하고
7번 똥물에 씻고
7천명이 아닌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아무리 아무리 외쳐도
정작 죽음을 못 통과 하는 겁니다.

죽음 못 통과하면
하나님의 저주 못 통과 하면
하나님의 진노 못 통과 하면
하나님의 심판 못 통과 하면
십자가 못 통과 하면

그거 허수아비 우상 허구 허상 안개입니다.


쓸데 없이 가짜 붙잡고 애지중지 껴안고 기름 빠다 발라가면서
품에 껴안고 있어봤자
발가벗겨버리면
수치가 해결이 된게 아니라
수치가 더더욱 거기서 알 까고 있어서 빠글 빠글 더더욱 새끼 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확 깨버리는 겁니다.

노아홍수 심판의 대안으로써 바벨탑이 구체화 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졸지에 그 대안으로써 눈에 보이는 성전이나 교회 신 종교 등등이
이제 본격적인 인간 자신의 신체를 그 대안으로써 구체화 하게 된 겁니다.
(마치 마귀가 인간의 신체를 집으로 삼아서 그 뒤에 숨어 꼭뚜각시로 삼듯이, 역시나 인간 또한 성전 신 하나님 예수 교회 성령 십자가 등등을 자신을 숨기는 꼭뚜각시로 삼는 구원의 장치로 삼는 겁니다.)

자 그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성령을 약속하시고
오순절날 성령을 부으시는 그 취지는 뭡니까?


바벨탑이 노아홍수로 구체화 되면서 점점점 그 간격이 벌어지듯이
더더욱 바벨탑은 인간 결집 하나됨으로 그리고 나중에 민족과
그리고 언어를 깨뜨림으로써 바벨탑이 무산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촉발케 하는 불난집에 기름 붓듯이 더욱더 활성화 증식 증폭이 되어서
곳곳에 바벨탑이 수평적으로 퍼지게 됨으로써 비로소 국가가 결국은 등장하듯이

십자가의 죽음과 성령 부으심은 무엇을 점점더 간격 벌리게 하시는고 하니
인간 자체의 신체를 구체화 시키는데 활성화 증식 증폭이 되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학 철학 문화
심지어 무정부
유비쿼터(무소부재) 시대 (신체/육의 무소부재)
심지어 무자아 무주체라는 해탈의 시대까지를 맞이하면서

인간의 신체는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과 같이 된 티를 팍팍 내도록 되어 있는 것을

성령의 부으심 사건 때문에 더더욱 활성화 구체화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

간단하죠
그런 신체와 차이난다는 이유로 차이의 간격을 점점 벌릴 수밖에 없는 짖만 골라서 할 수밖에 없도록
성령 부음을 당하는 겁니다 (정작 당사자는 원치 않는데 말입니다. 재수없게 걸려든 겁니다. 그게 은혜죠)

방금 어머니께서 옆에서 이사야 본문 중에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금식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쁘시도록 해야 하는데
금식하니까 도리어 서로 싸우고 다투고 주먹을 친다는 겁니다.

(사 58:3, 개역)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사 58:4, 개역)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 58:5, 개역)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사 58:6, 개역)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 기뻐하는 금식
어찌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서로가 내가 금식 더 잘해
아냐 너 보다 내가 더 금식 더 잘해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아나리아 삽비라의 이야기를 가지고서 삯꾼목사들이 서로 서로 부채질해서
교회라는 바벨탑을 활성화 시키는데 이용하더라 말이죠.

금식은 곧 죽음입니다.
죽음을 통과 하는 겁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안 죽이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니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겁니다.

자 그럼 7이라는 안식은 날짜 시간 개념에서 인물 개념으로 바뀌는 겁니다.
제사 개념이 인물로
십일조 라는 숫자가 인물로
12이라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인물이라는 머리 개념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렇기에 손 놓고 주님을 쳐다보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죽음을 통과한 분을 쳐다 보자 라는 겁니다.
(울고 불고 반성 자아부정 해도 소용없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문제요 외부에서 덮치는 의미입니다.
외부가 밖의 한 의 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누가 장대 높이 달렸는지? 너가 달려야 할 그 자리에 너 대신 누가?)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물 속에, 죽음 속에 빠뜨리는 겁니다(세례).
누구 쳐다 보라꼬?

안그러면 자기 것을 놓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손 놓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 속에서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보니 아까전에 봤던 주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여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좀 전까지만 해도 알던 그 예수님이 아닙니다.

주여 뉘 시니까?

죽음만이 예수님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 부으심 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죽음을 퍼트리는 증인이
온 유대 사마리아 예루살렘 땅 끝까지 퍼트리는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종말의 영을 받았으니
당연히 심판을 외치는 겁니다.

이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심판 곧 죽음만이
증인의 삶이다 라는 겁니다.
교회란 종말의 단체입니다.

이스라엘 회복이나
교회 자신들의 구원에 얽매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이 땅에 심판을 부으시는
성령을 부으시는
그 십자가의 저주 속에서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손들이 모조리 강탈당해서 손 놓은 존재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외치는 것이 종말의 교회입니다.

죽음 속이 아니면 금식을 줘도 인간은 자기 인정 받는 이스라엘 회복을 위할 뿐이지
때려죽어도 본래 취지인 십자가의 저주를 통과 할려는 취지는 아예 무시하는 겁니다.

자기 숙제로만 보고, 동일성을 추구하고자 자기제사에만 얽매입니다.
그 외에는 달리 할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열매로써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만 나오듯이 말이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예수님의 제사와 비교 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인데 제사로 장난 치고 서로 싸우는 겁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연히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통과 못합니다.

그렇기에 누가 통과 하는지 보자 라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통과 했습니다.
이 통과한 인물을 7이요 7천이요 12가 그 덕택에 참예된 겁니다.
모조리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그림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실체가 왔으면 게임오바인 겁니다.

그것에 대해 감사하냐 아니면 나는 못통과 하는데 왜 너는 통과 하느냐 라는 본격적인 시기심이냐,
그 차이성이 도리어 감사하냐 아니면 동질성이 되지 못함에 있어서 본격적인 원한과 가책인 살인의지인 안색이 변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인은 부합되지 못한 겁니다. 아무리 제사를 잘 드려본들 더 나은 제사가 있는 이상 부합되지 않습니다.

아벨은 심판과 연결되었고 가인은 행함에 연결되었으니 백날 다시 해본들 같은 결과입니다.
신약까지 가인이 다 알고 다 봤다해도 안 바뀌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설득이나 이해가 아닌 오로지 성령인 겁니다.

성령 자체가 분절 차이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또는 가룟유다는 또는 우리는 백날 해 본들 나를 살리는 방향의 해석 밖에 안됩니다.
심지어 주를 위해 죽겠다 라고 선언해도 자기선언이요 자기죽음이지(자기 숙제) 성령과는 무관합니다.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면서까지 자살한 가룟유다를 보세요.
얼마나 막살지 못했으면 뉘우치고 깨닫고 회개까지 하면서 자살할까요?
우리라고 별수 있는줄 아십니까?

아벨도 베드로도 다윗도 심지어 성령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죽인 사도바울도 동일합니다.
차이성은 예수님이 직접 그런 사망의 권세 속에서 이들을 건져 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차이성을 보게 됨으로써 십자가의 사랑을 외치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에 뛰어들겠습니까?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아벨이 보게 된 겁니다.
보여주시니까 본 겁니다.
아벨이 무슨 수로 보겠습니까?
보여주시니까 그 하나님의 진노로 뛰어드는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
화목제사를 보고
자기 자신의 제사를 철폐하는 겁니다.
이것도 죄라고

그 차이성이 또렷하니
자기 제사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서
예수님을 보고 기뻐 한 겁니다.
보여주셨으니 비로소 그 차이성에 무릎을 팍 치면서
아이고 이것도 믿음이냐 라고 자기 믿음을 버린 겁니다.
그러니 괜히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될려는 자기 행함을 손 놓은 겁니다.
손 놓으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막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용서에 감격 감격 뿅 가는 겁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가 했기에 자기 제사를 손 놓을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손 놓으면 하나님에게 인정 받을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가짜 하나님을 손 놓을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비밀이 바로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십자가 전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 하나님을 못 박는데 있어서
예수님 자신의 신체까지 함께 못 박혔습니다.

이제 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신체와 모든 인간의 신들이 이 십자가에 같이(함께) 못 박힌 겁니다.

(고후 5:13, 개역)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의 일은 결국 이 가짜 신에 대해서 손을 못 놓는데에 대해서
성령의 일은 그 신을 깨뜨리는 겁니다.

그 뭔데  허구인데
허상이요 안개인데

사망이 왕노릇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종노릇함으로써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함에 자유케 하시는 것이

십자가 죽음의 통과입니다.

금식을 왜 합니까? 행위를 하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더 금식 잘 했다 라고 또 싸울 겁니다.

죽는 판국에서 그렇게 노골적인 모습이 나도 모르게 막 튀어나오는 인간의 신체성을 고발당하고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겁니다,

아직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실제상황으로 안 맞딱뜨려져서 그런 겁니다.
도망치는 것이 가능한 자는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죽음에서 나온자입니다.

징계가 있기에 자녀인 겁니다.

금식이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회개란 죽여주시옵소서 라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봐도 내가 대견스러운 그런 행함을 주님께 드렸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 죄를 만듬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신 일과 비교 당하는 겁니다.
비교당함으로써 그 차이성 때문에 새로운 죄인으로 새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뭘해도 죄가 되기에 비로소 가벼운 겁니다.
이제는 법의 세계가 아니라 은혜의 세계 피의 용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믿음과 행함이 덮쳐지지 않기에
그 차이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끼리의 비교에서 누가 더 나은 제사인가 라는 동질성으로 비교우위를 따지다 보니
회개하면서 싸우고
금식하면서 오락을 즐기는

누가 누가 잘하나 라는 장난에 빠지는 겁니다.

자기들 따나 잘하고 있는데
성령을 입은 증인이 나타나서
그것도 회개냐?
그것도 금식이냐?
따지니까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치 않는자여? 또 너냐? 또 성령 또 너냐 라고 비꼬는 겁니다.
우리 회개 하는데 우리 금식하는데
왜 시비냐 라는 겁니다.

이것을 온 유대 사마리아 예루살렘 온 지구 땅끝까지 성령을 부어서
인간의 회개 오락 금식 장난을 깨뜨리고자
괴롭히는자를 투입시키는 겁니다.

(왕상 18:17, 개역)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왕상 18:18,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인간은 오늘도 내일도 쉼도 없고 끝도 없이
자기 구원의 장치를 매일 매일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괴롭게 하는 것이 성령 부으심입니다.

바벨탑이라는 인간의 신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더더욱 구체화 되어
수평적으로 확장 됩니다.

그 배경을 깔고서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인간 신체를 깨고자 하는 성령의 일의 확장이이 오순절에 펼쳐집니다.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부어짐과
그 눈에 또렷하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방언을 통해서
이제 인간의 신체를 깨뜨리는 이스라엘 군사가
성령으로 인해 결집이 됩니다
(패턴이 노아홍수 심판과 바벨탑건설과 동일합니다. 바벨탑으로 홍수심판에 대비한다고 하지만 정작 방언이 졸지에 생겨버림으로써 심판은 여전히 현재하며 심판을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집결을 파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 결집은 심판 결집에 의해서 흩어짐을 당하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인한 방언은 심판으로써 흩어버리고자 하는 취지 입니다. 인간 신체의 결집이 십자가에 의해 모든 육체는 못박히는 사건이 여전히 유효하게 확대 증식 재생산되면서 인간 신체 해체가 본격화 된다는 취지입니다. 방언 은사를 누구는 가졌는데 나는 왜 안되냐 라는 순복음의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기가막힐 금식으로 누가 누가 잘하냐라는 오락이요 다툼이 되었지, 괴로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취지의 회개 금식 자기부인은 없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비교가 아닌 여전히 인간 대 인간의 싸움에서 지기 싫어하는 우리의 악한 모습을 반영하기에 성령은 이런 것들을 대상으로써 해체하고 흔들어버리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자기신체의 언어가 깨어지는 방언 곧 침투야 말로 자아상실을 얻게 되는 그야말로 벙어리가 되는 꼴이요 소통의 단절입니다. 유일한 소통은 십자가의 심판만이 여여 붙어라 십자가만 쳐다볼사람 여여 모여라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만이 자유 입니다.)


동서 남북 3 3 3 3

이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확장 시킬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서 흩어지지 않고자 하자
핍박을 받도록 함으로써 성령께서 동서남북으로 확 퍼트리시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함과 전혀 일치점이 없는 방식으로써
오로지 인간의 손을 비켜가는 방식(반대를 위한 반대)으로써만
차이나는 방식으로써만
이 하나님의 진노인 심판은 확장되는 겁니다.
이 심판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들이 자유케 되고 보게 되고 억눌림에서 풀려나는 해방을 누리는 겁니다.
그 거점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출발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무시하는 유물인 이 십자가의 활동만이
유일하게 차이나게 하는 복음입니다.무슨 차이?
인간의 가짜 하나님과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십자가)만이 유일하게 가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갈라지지 않습니다.

구별 곧 쪼깨지 못하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지 못하는
영원히 갈라서게 하지 못하는 것은
모조리 다 거짓일 뿐입니다.


주님!! 우리는 허구라는 자아에 갇혔고 미쳐있습니다.
자아를 손 놓지 못하고
주님을 쳐다 볼려고 하지 않는
자기부인을 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성령을 부으시고
자아를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죽음 속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생명되신 예수님을 보고
늘 예수님과 비교 차이 당하는
성령의 간섭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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