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종말의 영을 부으심
원치 않는 하나님의 큰 일, 종말의 영을 부으심과 주의 이름을 부르짖다.
(행 2:1, 개역)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개역)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개역)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개역)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5, 개역)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행 2:6, 개역)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개역)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개역)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 2:9, 개역)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개역)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개역)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2, 개역)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행 2:13, 개역)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4, 개역)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 2:15, 개역)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이란 7이라는 안식의 확장입니다.
즉 기준이 7이다는 겁니다. 그 7의 증폭이 7에 7 49요 50이라고 희년이라고 합니다.
물론 더 자세한 것은 구약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시면 됩니다.
자 그럼 기준이 되었던 안식이 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이 안식은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도 알수 있듯이
인간의 정통해석가들의 안식과
예수님의 안식에 대한 해석은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써 좀처럼 그 갭을 좁힐 의향이 전혀 없는
서로가 서로의 극으로 치닫는 해석으로만 나타났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안식은 해석은 지키는 문제 곧 행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식에 대한 해석은 안식이 누구냐 라는 문제입니다.
접근 방식이나 출발 자체가 이미 다르다 곧 차이나는 겁니다.
그러니 접촉점이나 타협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 갈라지고 벌어지는 방식인 겁니다.
자 이것이 해석의 기본입니다.
기존의 해석에 출발점 자체를 달리하는 겁니다.
그리고 점점점 가면 갈수록 그 간격은 벌어지는 방식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언급이 됩니다.
성령이 언급된다는 뜻은 뭡니까?
사도행전은 소위 성령행전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반대급부인 인간이나 사도나 육의 존재들의 해석이나 활동들을 누락한다는 전제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해석을 가미할 수가 없습니다. 해 봤자 튕겨날 뿐입니다. 좁힐 방도가 없습니다.
해석이 비슷하게 가차이 가까이 접근하는게 아니라
어 이상하다 점점점 더 멀어져가는 겁니다.
그럼요 사도행전이냐? 사도는 사람아니냐?
사람이니 사람도 개입하고 사람도 해석할 수가 있지 않느냐?
사도? 사도요? 사도는 사람이 아니므소이다.
사도는 죽은자입니다.
죽은자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도가 무슨 사람입니까?
일종의 죽음의 사자처럼 사신처럼 메신져일 뿐이지요.
그러니 성령을 부음 받게 되니까 증인 곧 메신져가 될 뿐이지
사람이 아니므소이다.
그 증거는 단절성입니다.
보통 하늘에서 보낸자를 매개자 라고 합니다.
중간 접촉을 시도하는 제사장과 같은 존재이겠지요.
그런데 보란 듯이 단절시키는 자들이 성령부음받은자 증인입니다.
사도입니다.
그 어떤 접촉점이 없도록 접촉 자체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그 어떤 소통도 소용없는 겁니다.
그럼 인간에 의한 성령에대한 해석 조차도 성령이 허용하지 않고 단절시키십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접촉점이 없는데 성령을 붓게 되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므소이다.
죽은자입니다.
죽은자는 접촉을 시도하는게 아니라
본인들도 단절되는 판국에 그 어떤 인간들의 접촉을 단절시키는
접촉 매개 장치물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안식을 기준으로 해서
그 안식은 누구냐 라는 인물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육-원인있는 결과)개념이 일체 없는 전혀 새로운 해석입니다.
기존의 해석은 오히려 비언약으로써 반드시 작용해야 합니다.
도저히 새 해석을 받아들일수 없는 완고함으로만 일관해야만 합니다.
안식은 반드시 자유로 귀결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도
금식도 기쁨으로 귀결이 되는 겁니다. 곧 자유입니다.
그런데 안식도 회개도 금식도 졸지에 족쇄가 되어 행함에 귀결이 되는 육의 자랑이 되고 마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 조차도 율법화되는 지경이니 오죽하겠습니까?.
자유란 결국 어떤 인물로 귀결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벨은 그 인물 때문에 손놓게 되니
더 나은 제사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 인물에 관심이 없는 우리들은
아 그럼 가인 제사 드리지 말고
아벨의 더 나은 제사 드리면 되겠네 라고
또 삯꾼 목사들의 사기에 또 놀아나게 되는 겁니다.
샬롬이라는 평안은 간밤에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도 안 죽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어떤 것도 여호와의 얼굴을 통과할수 없다는 겁니다.
다 타죽기 때문입니다. 소멸입니다 소멸
그럼에도 간밤에 여호와를 만나고도 안 죽은 것은
아무리 봐도 그 원인이 내 쪽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불이 태워도 시원찮은 판국에 무지 무지 봐줘서
억수로 억수로 봐줘서 안태운 겁니다.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만났고 맞딱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안 타죽은 것은
불이 봐준 겁니다.
그것을 배려 라고 했습니다. 배려 곧 불쌍히 여겨주심 은혜입니다.
가룟유다나 나머지 11제자나 차이점은 일체 없습니다.
오로지 배려가 한 사람에게는 가지 않았을 뿐이고
나머지 11명도 똑같은 배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봐주신 겁니다.
왜? 11명이 잘 나서? 일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용서만을 높이기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이면 괴수일수록
일만달란트의 용서의 가치는 커지는 겁니다.
그 용서의 왕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는 용서 없습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요
십자가의 사랑의 용서를 무시하는 그 어떤 것도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 없음을 통해서 용서의 가치를 높이는 겁니다.
인간은 여기에 동원이 되는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동원될 뿐이지
인간 자체는 의미 없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토기장이가
그릇에게 살살빌며
그릇 구원해 줄려고 안달이 나야 합니까?
긍휼을 부으면 긍휼의 그릇일 뿐이고
진노를 부으면 진노의 그릇일 뿐입니다.
자 그럼 전제된 것이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던 자들이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이라는 인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12을 새로 세우고
오순절 희년에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아무도 원치 않았던 성령입니다.
성령을 오순절에 붓는 것은
그 기준인 예수님의 다 이루심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완성한 용서 사랑을
확장 팽창 증식 증폭으로써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성령을 입은 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다 이루신 그 사랑을 외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외치고 싶어도 외치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약속하신 성령이 부어지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약속이라고 언약을 언급했는데
약속이란 쌍방약속이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은 오로지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영광만을 위해서 약속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과연 받고 싶어 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성령을 받고 싶어 하는 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겁니다.
마치 십계명을 주었을때에
그 전제된 전문이
너희가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이끌어낸 여호와 이다 라고 전제 했습니다.
이 내용이 왜 중요한고 하니
아무도 애굽의 종에서 벗어나고픈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뭘까요?
네 맞습니다.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만드시는 겁니다.
강퍅케 만드니까 핍박이 가해집니다.
핍박이란 참을수 있을때까지 참아봤다면
참는게 가능하면 핍박이 아닙니다.
참는 것 더 이상의 참음이 불가능한 훨씬 넘어서는 것이 핍박입니다.
핍박이 부어지니까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서
부르짖게 됩니다.
캬 이제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라고
구원을 실시하겠다고 합니다.
이거 뭐 완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닙니까?
자작극 말입니다.
완전히 이것은 여호와 드라마입니다.
모세 드라마가 아닙니다.
모세 드라마가 될려면 모세탈락이 있을수가 없는 겁니다.
모세는 그저 기능일 뿐입니다.
모세를 탈락시켜서라도 그 기능은 여전히 유효한 겁니다.
그래서 모세 대행으로 여호수아가 되는 것이지
여호수아의 후계자는 필요가 없는 겁니다.
마치 사도 이후에 교부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교부를 언급하는 교회사는 완전 사기죠.
예수님의 드라마인데
자꾸 촉매자 매개자 라는 직업군들을 정당성을 운운하는 성경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탈락 되고 누락 되어야 할 판국에 인간들은 자꾸 배제가 아니라
자꾸 그 빈자리를 채울려고 동일성 동질성을 추구하니까
역시나 성령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짖음이 일체 인간이 한게 없죠?
구하라 찾으라 부르짖으라 라고 하니까
정작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인간은 구하든 찾든 부르짖든
제발 성령만은 제발 성령만은 주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것은
인간이 안 구하고 안 찾고 안 두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구하게끔 만들고
반드시 찾게끔 만들고
반드시 두드리게 만드시는 이유는
때려죽어도 받기 싫어하는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겁니다.
성령만을 받아야 기존의 것과 단절된다는 겁니다.
자식이 뱀 달라고 뱀주고
독달라고 독주는 부모 없다 라는 의미는
인간은 뱀달라는 기도 밖에 없고
독달라는 부르짖음 밖에 없기에
아무리 악한 자식이라도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는 겁니다.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약속하신 일방적으로 원치도 않은 성령을 붓게 되면
원치도 않는 하나님의 큰 일을 하게 됩니다.
방언은 곧 바벨탑 곧 애굽의 피라미드 시스템
인간 구원의 장치
곧 인간 신체성을 깨뜨리는 일과 연관 됩니다.
그것을 흩어버리는 출애굽 출예루살렘 출인간 출신체 출육의 사건이 벌어지는
십자가 사건의 재현이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기준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평안이요 안식이요 화평 평화입니다.
다 이루심이라는 완료는
미완성 미흡함 미완료 모호함 흐릿한 것들을 이제 본격적으로 깨뜨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을 성령은 어디에 보내겠습니까?
맞습니다. 모호하고 의문이 있는 곧 우상이 있는 곳에만 투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의 유월절 어린양 피흘림이 되어서
이제는 의문이 가득한 모호한 우상이 있는 곳에 배치가 되어서
십자가를 외치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작 본인들 조차도 파괴되는 겁니다.
그것이 광야이듯이
광야에서 10번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탈락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그 약속의 기능은 절대로 무효화 되지 않는겁니다.
내가 안하면 아무도 못하겠지?
웃기는 소리죠.
돌들을 통해서도 그 기능은 무효화 되지 않고
그 기능은 점점더 확연하게 드러나고 구체화 되고 또렷하게 완료됩니다.
아주 아주 깔끔하게 펼쳐지는 겁니다.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그 기능들이 실패했다고 미완료일까요?
지금 여호와의 이름도 모르고 주의 이름도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겁니다.
성령이 부어지니
자신들도 놀라는 겁니다.
이게 우찌된 일이냐 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이상한 방언들이 터지는 겁니다.
자신의 언어가 해체되고
딴나라 딴 신체의 언어가 막 터져 나오는 겁니다.
웃기게도 방언은사 받은 사람들이 사기를 치는데
방언 어떻게 터지느냐 그 방법 비결을 알려달라는 소리에
술랄라 술랄라 랄라 라라라 라고 계속 외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저절로 터지게 된다고
비법을 공개한다고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은 방언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체언어가 해체되는 기존의 언어 파괴에서 나오지
기존의 언어가 멀쩡하게 있는데 왜 방언이 나옵니까?
종말의 영이기에 위기감 곧 땅이 요동되듯이
흔들리는 해체입니다.
금식도 나의 신체 해체입니다.
회개도 나를 해체하는 겁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유와 기쁨이 오는 것은
내가 자유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기뻐서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서 기쁨이 오고
주님이 자유하심이 자유로써 오는 겁니다.
그것이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입니다.
즉 전제가 이겁니다.
기존의 것의 죽음입니다.
심판입니다. 저주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겁니다.
주님 자신이 준적도 없는 것이 왜 너를 장악하느냐 라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전쟁 조차도 시도 못한 너희가 성령을 부음 받음으로써
전쟁에 참관 되었다는 겁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기에 우리가 전쟁하는 내 숙제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을 구경함으로써 왜 이런 일들이 벌어져야 했는지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보게 되면 그 승리에 만킥하게 되어 저절로 박수 치게 됩니다.
저절로 기뻐하게 되고
저절로 춤추게 되는 겁니다.
희년이 덮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피리를 잘 불었으면 얼마나 노래를 잘 불렀으면
생전 한번도 움직여 본적이 없던 앉은뱅이도 벌떡 일어나 춤추게 되고
생전 단 한번도 빛도 본 적이 없던 소경도 눈이 뜨여지며
생전 단 한번도 말해본적이 없던 벙어리도 주의 이름을 외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생전에 단 한번도 소경이 되어 본적이 없던 자들이 소경이 되어버리고
생전에 단 한번도 앉은뱅이 되어 꼼짝도 못해 못움직여 본 적이 없던 활발하게 움직이던 자들이 졸지에 앉은뱅이가 되며
생전에 단 한번도 벙어리 된 적이 없던 자들이 벙어리가 되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일이
주의 이름 때문에 펼쳐진다는 것이
성령 부으심으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 사건때의 두 양 쪽 상황의 서로 대치되는 반대와 똑같습니다.
한 쪽은 피발림으로써의 구원과
다른 한 쪽은 어린양의 피 발림이 없음으로써의 심판 말입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라는 말은
오로지 이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두 패가 갈려지는 현상입니다.
그 수천년 전의 일이 또 벌어지고 또 벌어지고 계속해서 또 또 또 벌어진다면
과연 그 십자가의 피의 영인 성령을 우리가 받기를 원할까요?
맨날 밑도 끝도 없는 전쟁과
맨날 밑도 끝도 없는 피 바다가
1년 내내
수천년 내내
수만년 내내
평생을
아니 죽어도 끝나지 않고 자자손손 대대로
그 일이 반복이 된다면
그 근원인 성령을 과연 우리 인간이 원하느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원하든 원치 않던
자녀에게 젊은이에게 늙은이에게
남종에게 여종에게
부어넣겠다는 것은
인간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인간 구원은 날라가 버린 거비다.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크시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일에만 동원이 되는 영광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허구한날 피와 불과 연기만 땅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땅은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다는 겁니다. 거기에 발 붙여사는 인간도 모든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평행이론처럼(썽둥이 권법) 하늘과 연계되어서 하늘에 벌어지는 일들이 투사되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분의 통치로 인해 (보좌에 앉으심) 때문에 땅이 요동하는 겁니다. 흔들리는 겁니다.
얼마나 안정감있냐 말이죠, 든든하다. 나의 죽음이든 땅의 죽음 곧 땅의 멸망이든,
모든 피조물들의 심판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 때문에 벌어짐으로써
오히려 죽음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더더욱 또렷하게 나타내는
미쁘심(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움)의 안정감 곧 평화(샬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의 육체든 뭐든 위기가 닥치는 겁니다.
주님의 살아계심 때문에
종말을 부으시는 겁니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
즉 여호와께서 영광받고자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 영광받으시고자
10가지 재앙이 전조로 깔려서
그 심판 속에서 구원의 영광을 높이고자 하심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전혀 아닌
피의 가치를 드디어 펼치시는 겁니다.
피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전혀 알길이 없었던 그것이
바로 이런 전조를 통해서 드디어 개봉 박두 하시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남종 여종이 바로 이 전조로써 10가지 재앙의 역할인 심판을 증거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마치 개구리로 변해서 애굽을 괴롭히듯이 인간 신체와 그 우상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듯이 말이죠.
그것이 회개를 퍼붓는 겁니다.
금식을 퍼붓는 겁니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10가지 재앙중 마지막 재앙이 뭡니까? 장자죽음 아닙니까?
인간이라는 우상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 전조 뒤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이런 전조를 깔고서 말이죠,
해를 어둡게 하는 역할로써
달을 피로써 변하게 하는 기능으로써
성령부음 받은자들이 소모품으로써 카페트 깔리듯이 깔려
내 뒤에 오신 분을 쳐다 보라는 세례요한처럼 외치는 성령을 받는 겁니다.
결국 이것이 세례입니다. 연결 접속 소통이 연합이라는 의미의 세례인데
뭔가 단절이 안되고서는 연결이란 없다는 겁니다.
그 단절을 실시하는 장 본인이 바로 성령이다는 겁니다.
끊어내겠다는 겁니다. 고추 끝을 짤라내 끊어내어서
비로소 연합하는 겁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안 짤라낸 자가 있다면
아무리 여호와의 전쟁에 이길수 있는 여건이 될수 있다고 여겨도 여호와의 전쟁은 패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끊어낼것이 신약에서는 뭡니까?
구약이야 손할례이지만
신약은 백날 손할례해도 소용없습니다.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것을 무슨수로 할수 있겠습니까?
두 손을 댈수가 없는 것이 마음인데
추상적입니다.
마음판을 짤라낼수 있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마음판을 짤라냅니다.
늘 우상으로 가득한 우리 마음을 말입니다.
결국 10가지 재앙을 미리 앞당겨 받아야
다시 10가지 재앙을 퍼붓는 성령을 증거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전조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크신 영화로운 날을 위하여
해를 어둡게 하는 역할
달을 피로 만드는 역할
이 얼마나 웃기는 소리 아닙니까?
바로 그겁니다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애굽왕 바로왕이 피식 웃었듯이
비웃어야
주님께서 영광받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들 자신이 그 재앙을 미리 받는 겁니다.
우리 또한 역시나 비웃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먼저 선취로서 매 맞는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먼저 얻어터진다는 것
먼저 매 맞으면 미리 알수 있는 것이
내가 비웃었듯이 너도 똑같은 반응을 하는구나
그래 한 대 맞아도 비웃는구나
라고 저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를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해 해 줄수가 있다고 해서
봐주는게 아닙니다.
성령 부음 받은자들 또한 주님이 봐 주신 것이 없이 얻어터져서 알게 된 것이니
그대로 실시할 뿐입니다.
10대 두들겨 맞아도 안될 놈은 안돼 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은 피 까지 가는 겁니다. 끝까지 가는 겁려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 전제된 겁니다.
인간이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들어간 이상
예수님을 죽인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자부이 있는 이상
절대로 중도 포기란 있을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활동하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면 그렇게 나오지도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10가지 재앙으로써 우리는 투입이 되어서
피까지 도달되도록 하는 역할이요 기능입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소모품이 되는 거죠.
미끼입니다. 미끼
그리고서는 주의 이름에 까지 극에 치닫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언제 인간이 부르느냐 하면
더 이상 부를수 있는 이름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부르는 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도 깨지고
기똥찬 영웅의 이름도 깨지고
한 10개의 수호신의 이름을 내어 놓는 쪽쪽 깨어져 박살이 나니까
그제서야 더 이상 내어 놓을 이름이 없어서 최종적으로 불려지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나 그 이름 모른다
즉 나에게 수 많은 이름이 있다.
그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아야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이름이라면
왜 내가 몰랐겠는가
또 이제 와서 이미 내 마음에 꽉찬 이름들이 빽빽하게 있는 판국에
구지 여호와라는 이름이 차지할 내 마음의 자리가 없다
그러니 썩 물러가라 라는 이 비웃음이 있어 줘야
그 이름의 가치가 비로소 발현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분의 이름이 그래서 이런 취지로 전조를 까는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렸다메? 죽었는데 왜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줘야 하느냐?
십자가가 구원용이면 오늘날 기독교처럼 까짓거 믿어주지 라고 비아냥 거립니다.
애굽와 바로왕과 다를바 없습니다.
늘 수시로 싸움을 걸어서 이런 전쟁을 벌리는 십자가는 기독교가 처음부터 버린 십자가요
기독교가 무시하고 비아냥 거리는 십자가입니다.
이미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차 있으니 구지 마음의 자리를 내어줄 리가 없는 겁니다.
우리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그런데 바뀐 것은 성령을 받으니
마음에 가득찬 것들이 아작이 나버렸기 때문이요
이 주의 이름이 그것들을 다 깨어부수고 자리를 혼자 다 차지했기 때문인 겁니다.
매일 매일 그런 식으로 성령이 부어지는 겁니다.
그런 관계입니다.
오늘도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뭔가 아작 났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떡 하니 그것들을 물리치고서 자리를 차지한 겁니다.
그러니 한번 할례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닌
이제는 매일 매일 쳐들어 와서
모든 것들을 아작내고 떡 하니 자리를 차지 하는
주인을 결박시켜서 세간을 늑탈하는 식인 겁니다.
뭔가를 빼앗겼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내 마음 판에 누군가를 의지할 만한 이름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를 리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본인이 정작 빼앗김을 당했고
나도 빼앗김 당한 것처럼 너도 빼앗김을 당해 보라는 식으로
전조를 까는 기능으로써 성령을 받아 카페트를 까는 겁니다.
그것이 기쁘제 안기쁘나? 어 나는 기쁘던데?
여기서 갈라지게 하시는 주의 이름의 능력에 또 다시 한번 감탄하는 겁니다.
캬 놀라운 겁니다.
정작 주의 이름과 관계가 있다고 관계성을 따지는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원치 않습니다.
다른 이름이 이미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는 그들은 이방인들을 주의 이름도 못 부르는 자들이라고 비아냥 거렸는데
정작 주의 이름도 모르면서 누구인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이방인들 입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졸지에 그 비아냥이 뭐가 된 겁니까?
애굽인과 다를바 없는 이스라엘이 되어버린 겁니다.
부르는 입술을 가진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닌
이름 스스로가 벌리는 일이
이렇게 팔을 어긋맞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서야 비로소
과거의 역사 따위를 그 이름앞에 내세울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그 역사는 우상이 되었기에
주의 이름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부인할수 없는 상황이
진짜 실제상황으로 벌어짐으로써 목격하게 되니
이런 경험을 성령받은 당사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한 장본인들로써(사도바울) 또렷하게 마음판에 새겨져 있으니
그 심판성을 붓지 아니 할수 있냐 말이죠.
당연히 부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사는 겁니다.
마치 죽어야 사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이한 기능처럼
죽어야 사는 것이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날을 위해
심판을 붓는 성령의 일에
지금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 되는 꼴이고
이방인들을 비웃었던 이스라엘은 10가지 재앙을 받는 꼴로써
이제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아
출애굽 하듯이
출 예루살렘
출 인간
출 신체
출 세상을 감행하는 대장정을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면서
지팡이만을 의지하면서 출애굽 했듯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 주의 이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성령
그 어떤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 감히 건방지게 출 세상을 시도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그 이름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채로
감히 출 세상 엑소더스를 실행하는 겁니다.
과연 애굽왕 바로왕이 봐줄까요?
세상임금 마귀가 순순히 놓아줄까요?
주의 이름이 어떻게 실시하시는지
이 두 세계에 낑겨서 그 실감나는 십자가의 실재성을 목격하도록
성령은 오늘도 쉬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 어서 건져주시옵소서
왜 이 세상임금 마귀를 건드려서
탈출할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시는지?
도리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퍼붓는
해를 어둡게 만들고 달을 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퍼부으시는지
오로지 하나님의 영화로운 날을 위한
소모품이 되는 성령을 부으시는지?
그 이유를 주의 이름에 나의 이름을 박살나면서
하나 하나 알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가 다 묵었잖아 !! (0) | 2012.11.20 |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2:21-47) (0) | 2012.11.18 |
이스라엘의 구원(회복)을 괴롭히는 자여 또 성령 너 냐? (행 2:1-13) (0) | 2012.11.14 |
배려(은혜) 없이는 1초도 못 살아 (0) | 2012.11.12 |
이스라엘 회복 vs 간격 벌리기 (행 1: 9 - 26) (0) | 2012.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