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2:21-47)
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주로 부르심바 된 주의 이름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22, 개역)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행 2:23,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 2:24, 개역)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5, 개역)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6, 개역)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행 2:27, 개역)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2:28, 개역)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 2:29, 개역)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개역)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개역)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2, 개역)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3, 개역)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 개역)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개역)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46, 개역)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개역)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원치 않는 성령을 부어주심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성령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구원은 자신의 위상과 연관이 됩니다.
그러하기에 성령을 구한 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회개도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금식도 죽어 마땅하다는 육체의 옷을 찢는 의미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을 행하는 달인이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옷 그만 좀 찢어라 라고 합니다. 인간의 실천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견디지 못합니다. 문제는 딴 인물에 귀결이 되어야 더 나은 제사가 도출 됩니다. 여기에 인간은 가인의 제사로 규정이 됩니다. 때려죽어도 딴 인물에 귀결되는 꼴은 못 견딥니다. 곰이 재주 부리고, 잉여는 왕서방이 챙기는 꼴을 못 견딤으로써 안색이 변하는 겁니다. 노동의 가치를 따지기에 원한과 가책을 펼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의미로 줘도 인간은 결국 자신의 위상을 위해
회개 금식 기도 성령 예수 하나님 십자가 부활 등등을 이용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것을 성령은 이미 다 아시고 주시는 겁니다.
즉 이런 식입니다.
주여 기도 합니다. 이런 기도 들어주셔서 응답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
그래 알았다 성령 주 마
아니 성령 말고요
내 기도 들어주세요
그래 알았다 성령 준다 안 카나
아니 아니 성령 말고요 내 기도 못들었습니까? 내 기도는요 내가 구원 되는 것을 기도 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성령 주마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아이구 답답해 주님께서 귀가 어두운가 보다 보청기 사서 달아 줘야 겠다.
주 님 여 제 기도요 제발 내가 구원 되게 기도 드립니다.
그래 알았다 아이구 귀청 떨어지겠다. 살살 캐라
성령 준다 안 카나
아니 성령 아니라카이
캬 바로 이게 정답입니다.
제가 아무리 지금까지 지내봐도
목사도 교인도 아무리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라고 해도
성령을 구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달라는 말은 곧 죽음을 달라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도하는게 뭡니까?
딩동댕 맞습니다 ! 성령 빼고 다 기도 합니다.
왜 그러면 주님은 알았다 라고 해놓고서는 들은척도 안하면서
성령달라는 소리지? 그래 성령 주마
아니 아니 성령 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오 그래 그래 호호호 그럼 성령 달라는 소리구나 그래 성령 주마 라고 하시는 겁니까?.
일부러 그러시는 것인지
아닌척 하시면서 그러시는 것인지
결국 이 말은 뭡니까?
너거 기도 안 듣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성령 달라는 기도를 해도 안 줍니다.
그 성령 캐 봐야 자기 위상을 높이는 기도로써의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달라고 해 봐야 안 줍니다. 자기 위상 높이는 십자가 이니
죽음 달라고 해 봐야 안 줍니다. 자기 위상 높이기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바보가 아닙니다.
이미 금식 회개를 누가 누가 더 화개 잘 하냐 라고 다툼으로 싸움으로 빠져버린 모습을 이미 기록하셨습니다.
즉 모든 인간이 예외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반복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서로 높고자 싸우는 것은 제자들도 예외 없었습니다.
안됩니다. 안돼.
이 글 적는 저 라고 해서 될까요 안됩니다.
결국 회개 금식 뭘 줘도 안되는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음 곧 단절인데
저런 것으로부터 단절입니다.
뭐로부터 단절?
회개로 싸우는 것
금식으로 다투는 것
이런 것으로부터 단절입니다.
회개하면 진짜 죽게 됩니다.
금식 하면 진짜 죽습니다.
살게 되는 금식은 장난이요
살게 되는 회개는 오락일 뿐입니다.
(사 58:3, 개역)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사 58:4, 개역)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 58:5, 개역)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사 58:6, 개역)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결국 인간의 믿음은 오락입니다.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서 성령을 받으면 역시나 오락질 합니다. 마귀 받은 거죠.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면 즉 원치도 구하지도 두드리지도 찾지도 않았던 성령을 받게 되면
여기서 중요합니다.
누구 라는 구체적인 인물에 비교당하는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왜 진작 안죽이시는 겁니까? 라는
비로서 그 인물을 보고서 죽음을 마땅하다는 것을 압니다.
구체적인 인물입니다. 너 대신 달리신 예수님을 비로소 보고 왜 진작 안멸망되는지에 대한 외침이 나오는 겁니다.
성령이 결국 그 인물의 죽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위상 높이는 회개 기도 금식 이 모든 것이 그 앞에서 얼마나 허사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진작 망했어야 했구나
오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구나 ! 나 자체가 사망 그 자체이구나.
성령받으면 저절로 예수님과의 비교에 죄인의 자리에 비로소 가게 됩니다.
원수의 자리에 비로소 가게 됩니다.
오른편에 누구 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세워짐으로써 나타나는 당연한 반응이기에 단절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성령 빼고 다 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령을 안 구하는 이유가 뭐다고요?
누구 라는 구체적인 인물을 주시는 것 때문에, 나 라는 자아가 상실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 자체가 나 라는 자아를 확대시키는 것이 인간이 기도로 구하는 기도본능입니다.
나 하나 챙기기에 바쁜데
그 인물을 줘버리면
그 인물로부터 늘 책망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성령을 달라 하겠습니까?
달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달라한적이 없는데 무조건 성령을 주십니다.
죽어봐라라는 뜻입니다.
대학시험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 했는데
어 그래 성령줄게
성령께서는 자꾸 예수님과 나를 비교해서 책망하시는 겁니다,.
왜 하필이면 성령께서는 그 구체적인 인물로 예수님을 늘 비교해서 책망하실까요?
너가 죽인 예수라는 겁니다.
자 회개란 구체적인 인물로 귀결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란 죽음이라고 하니까 진짜 자살해서 죽을려고 하면 오해한 겁니다.
그런 죽음은 죽음도 아닙니다.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 없습니다.
(금식 안식 십일조 그 어떤 의미도 귀결되는 인물은 '나' 가 아니라, 내가 죽은 예수님입니다.)
진짜 산 자가 죽어야 죽음이지
산 적 조차도 없던 흙 덩어리가 무슨 죽음입니까?
정녕 죽으리라 라는 저주를 인간은 그 어떤 누구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어야 하는데
도리어 신과 같이 되어서 신이 된 것을 못 펴서 안달이 났지
즉 영웅놀이 회개놀이 금식오락 믿음장난 십자가흉내질
그것이 역사였지
언제 정녕 죽으리라가 부어진적이 과연 누구에게 있었던 가요?
없었습니다.
또 이 말했다고 내가 해 보겠다고 나서지 마세요.
이미 게임 오바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인물로 귀결이 된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언급하고자
성령은 그 예수님을 우리에게 비교 시키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도 인간의 믿음에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예수님께 귀결 시키는 것이지 인간 구원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인물입니다. 인물.
그렇다면 우리는 늘 원수의 자리에 놓여지게 됩니다.
원수의 자리에 놓여지니 사람들이 비웃게 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래 우리는 죽어 마땅한 사형받아야 할 자입니다.
그런데 대신 예수님께서 사형 당하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원수의 자리가 고마운 겁니다. 즉 원수의 자리라서가 아니라
그 차이의 자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우리의 힘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신학 박사들이요 평생을 율법 지키는데 목숨까지 건 유대인들도 몰랐던 것을
성령을 부으심으로써 우리 이방인도 유대인도 알게 된 겁니다.
바로 오른편자리가 마련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뭡니까?
오른편 자리가 마련이 되었기에
넌 원수가 되어도 되고
넌 죽어도 되고
넌 짖밟혀도 되고
넌 미말에 놓여진 찌끼가 되어도 되고
뭐든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너가 중요한게 아니라
오른편 자리 가 중요해서 말이죠.
결국 안식 십일조 회개 금식 십자가 등등 모조리 다 죄가 됩니다.
인간이 의미를 둬 버리면 뭐든지 죄가 됩니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성령 모조리 다 더러운 우상이 됩니다.
이런 우상을 배경으로 깔고서 그 위에
예수님이 말하는 예수님
예수님이 말하는 성령님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
등등이
우리 인간이 말하는 예수 성령 하나님 십자가 안식 회개 금식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왼편에 놓여진 원수짖 밖에 안되는 겁니다.
즉 오른편의 기능을 높이기 위해 우상을 까는 겁니다.
우상은 반드시 오른편의 기능을 위해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이 빛을 위해 동원이 되어야 하듯이
그러니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 성령 십자기 하나님 십자가 안식 십일조 회개 금식과의 차이를 오른편에 계신 분이 주신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남을 통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 인 죄인 중에 괴수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용서를 소유해서가 아니라
그 용서를 내가 받느냐 못받느냐 라는 나에게 주어지는 관건이 아니라
나와 무관하게 저쪽 오른편 자리에 누가 앉느냐로 그냥 게임오바가 된다는 겁니다.
그 오른편 자리에 어머나 세상에
내가 죽인 예수님이 앉아버리니까
안심 푹 놓게 되는 겁니다.
이 무슨 괴상 망측 하괴 회귀한 논리입니까?
왜 안심을 푹 놓게 되나요
죄책감을 더더욱 가져야 하지 않나요?
왜 안심 놓게 되는고 하니
내가 가진 선악의 무기가 예수님에게는 안 통하니까 그것이 너무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는 겁니다.
마치 나의 회개 나의 충성 봉사 나의 7번 용서가 예수님에게 안 통하는 것에
너무 너무 뻔뻔스럽게 싸가지 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다는 겁니다.
기도를 했는데 내 기도 안 받아 주시는 것에 너무 너무 기뻐 감사한 겁니다.
기도 하지도 않았는데 그 기도 덜커덕 당첨이 되면 이거 무시험 합격처럼 얼마나 기쁜 겁니까? 복원 당첨된 겁니다.
이것을 안 자가 바로 성령을 받아서 알게된 대표자 다윗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된 것이 주께서 내 주께 벌린 사건임을 보게 된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가 바로 주님의 자작극이였다는 겁니다.
참 뻔뻔 스럽죠.
자신이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철저하게 계산해서 죽였을 때는 언제고
그것도 자신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했었는데
이것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이 고의적으로 펼치신 자작극이였다는
주께서 내 주께의 사건을 보고 비로소 나는 행복하다 라고 운운하는 겁니다.
자 그럼 성화론자들이 제일 걱정하는 것이
이래 되면 교회 질서 개판된다.
사회질서 뿐만 아니라 가정 질서도 개판된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하니 저절로 도둑이 지발 저리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선악빨이 먹혀들지 않는 주님의 세계에 드디어 진입하게 되는 겁니다.
선악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중요하게 됩니다. 복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질서를 걱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의 세계 곧 주께서 내 주께 의 세계에서는 선악이 먹혀들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할까요? 너무 너무 기쁘지 않겠습니까?
만약 감사와 기쁨이 넘치지 않는다면
천국에서 회개장난 금식오락이 또 펼쳐지는
땅의 세계의 연장선이 바로 천국이 되는 식입니다.
우상의 연장인 겁니다.
그래서 단절의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그게 왜 죄인지를 너가 죽인 예수님과 비교 당하고 책망받으라고
내가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살인이 예수님에게 안 먹혔다는 그 다행스러움
나의 죄악이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먹보다 더 검은 죄도 흰눈 같이 하얗게 된다는 희한한 납득이 되지 않는 세계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는 세계에서는 성령이 일하는 것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겁니다.
안그러면 질서가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회개가 먹혀들지 않는 참으로 다행한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나의 금식이 먹혀들지 않는 고마운 곳입니다.
나의 행함이, 7번 용서가, 나의 믿음도 씨알도 안 먹혀드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이 안 먹혀들었다는 것에서
너무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기뻐한 겁니다.
다윗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의 열심히 특심이 안 먹혀 든 것에 대해서 감사한 겁니다.
참선지자의 선지자 활동들이 안 먹혀 든다는 것에서 그들은 감사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 어떤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월등한 행동들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들이 죽음을 곧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 할 쨉도 못된다는 것에서 너무 너무 감사해서 배설물로 여기는 겁니다.
자 이렇다면 우리 자기자신은 구원이 안된다는 것에서 과연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불가능성이 성령을 선물 받음으로써 그것이 너무 너무 감사하게 외칠수가 있는 겁니다.
왜 나의 구원이 배설물일 수 밖에 없는가 말이죠.
나의 구원은 예수님을 오른편에 세울 수가 없습니다.
웃기게도 내가 오른편에 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모든 인간들이 원수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문제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는 예수 밖에 없다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인간들의 하나님을 배신 때리고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팔을 어긋맞게 해서너가 죽은 자를 너의 주가 되게 하겠다고
원수의 자리에서 오른편에 옮겨서 너를 예수를 너를 변호하는 주의 자리에 놓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이 그만 뿅 가버린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 벌리신 그 자작극에 제가 소품 교보재로 제대로 걸려든 것이군요
푸하하하 푸하하하 난 그것도 모르고 사건이 숨도 못 쉴정도로 연거푸 덮치길래
내 변명 하기 바쁘고 사기치기 바빳는데
도저히 죄책감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는데
이 포로잡힘 속에서
이 갇혀버림 속에서
내가 내 믿음에 내 행함에 내 열심에 갇혀버린 죄악 속에서
주님께서 건져내시고자 이런 자작극을 벌리신 거군요.
어쩐지 유독 그날 따라 밧세바가 너무 이뻐보이길래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어요.
주님께서 물에 빠뜨림으로써
죽음 속에서 쳐다 보니 전에 율법 속에서 알던 그 예수님이 아님을
주께서 내 주께
정작 주님이 주님 자신을 스스로 치셔서
피 흘리심으로써그 피와의 관계 속에 넣고자
나를 주의 목전에 항상 죄 뿐인
어머니 죄중에 태어난
죽어 마땅한 자였음을 비로소 알게 하셨군요.
맞습니다. 이 십자가의 부정함이 옳았습니다.
인간의 선악은 그야말로 비도덕적이고
주님의 부정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야 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놀라운 비밀이요 은혜입니다.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나의 의가 안먹혀 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나의 의는 불법이다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불법이다는 뜻입니다.
나의 충성 봉사 7번 용서 율법 행함은 불법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그 똥덩어리를 붙잡느냐 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세운 교회도 불법입니다. 그야말로 똥내나는 배설물입니다.
이것이 먹혀 들지 않았다는 것에서 얼마나 휴 십년감수했다고 너무 너무 다행이다고 기뻐하고 감사할자가 과연 누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는 할례 곧 세례회개 금식 자기부인 등등 모조리 다 배설물이요
그것을 안 받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성령의 탄식을 들으라는 겁니다.
아이고 주님 야가 또 똥을 주님께 드린다고 합니다.
받지마세잉
정작 주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뭘 주실까요?
다윗이 받은 원수되는 것을 받게 됩니다. 곧 성령입니다.
준다 카이 이익이 되는 줄 아는데 이익되는게 아니라
받았다 카면 온 교인들이 죽일려고 달려드는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를 받게 됩니다. 주님의 자작극에 말려드는 원수되는 주님의 오른편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는데 이용되는 소모품 일회용품 찌끄래기 쓰레기 구경꺼리를 받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아무리 들따 봐도 없었던 성령을 받고
정직한 영을 드디어 받고부터
본격적으로 찌끄래기 취급을 이스라엘로부터 받게 되는
미움을 핍박은 저주를
눈만 뜨면 죽일려고 달려드는 이스라엘을
성령을 받게 됨으로써 본격화 되는 겁니다.
원수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매일 매일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오른편에 계신 주님 뿐입니다.
어제 이야기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바로왕을 걍퍅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 이런 성령을 선물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교회로부터 원수 취급 당하며
이스라엘로부터 죄인으로써 쫏겨남을 당하는데?
이것이 다윗이라는 인물이 중요해서가 아니라다윗은 단순히 껍데기일 뿐이고
다윗 속에 있는 약속의 기능이
그런 일들을 펼치는 겁니다.
결국 약속이라는 언약이 이스라엘 전체의 속성을 다윗이라는 미끼를 통해서 들추어내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이라는 기능이 이런 일들을 십자가 사건의 재현으로써 확장 증식으로써 또다시 벌리시겠다는 뜻입니다.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인간은 자기 이름 밖에 모릅니다.
모든 것들은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기호가 붙여져 있는데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지는데 기표는 표시된 문자요 기의는 그 내용인데
인간들이 이름을 붙이면서 자기 나름대로 표시하고 그 표시대로 내용이 부합되기를 바랬는데
기표 문자와 기의 내용이 아무리 해도 안 합쳐지더라 라는 겁니다.
기의가 항상 미끄러지는 겁니다.
남자라는 기표가 여자라는 기의와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합칠수가 없는 차이나는 존재로써 살 수밖에 없는 기능을
이미 남자로써 여자로써 그 기능 그대로 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바로 기의처럼 늘 미끄러지듯이 부재성으로써 빈자리 빈공터로써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이름은 그 빈공간을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자꾸 채울려고 하는 겁니다.
그 빈공간을 뭐든지 이용해서 채울려고 하면 채울 때 마다 미끄러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의 기능입니다.
곧 인간이 의미화 시킨 것들을 미끄러뜨리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성전을 짖고자 하는 다윗의 일치성을 미끄러뜨리는 겁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게 되는 겁니다.
결국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대상이 되어 동질화를 추구할려는 선악의식이 먹혀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주의 이름 때문에 쭐꾸덕 미끄러지는
기름 빠다에 미끄러져서 웃싸꺼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의 기능입니다.
인간들은 뭔가 의미가 있다 싶으면 이름을 붙일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항상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은 이름이 부재합니다. 이름이 없습니다.
모세가 주의 이름을 묻자 말라꼬 알려고 하느냐 거부당하죠.
그래도 알려달라고 이름을 묻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여이 붙여서 자기에게 의미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괜히 말려든 겁니다.
물론 여호와 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싸움신의 달인이라는 별명이지 이름이 아니죠.
결국 애굽의 바로왕은 이름이 붙여진 수 많은 신을 방패막으로(우상=자기를 위한)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신에게 당한 겁니다. 인간들이 유행하는 영웅의 이름을 마다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름 없는 무(없음)명의 신이 이름이 있는 신들을 박살내었다는 것에서
곧 인간의 손, 인간의 입으로 붙여진, 이름 붙여진 대상물들은 모조리 우상화 된 것임이 들통나는 겁니다.
결국 최종적인(10번째 재앙의 마지막 우상신은 장자=인간아들) 우상인 인간의 이름에 대한 공격을 전제하는 것이 주의 이름의 기능인 겁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을 기초로 해서 처음으로 이름이 주어집니다.
임마누엘이라 하라
(사 7:14, 개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결국 다윗은 우상을 전제로한 여호와의 전쟁에서 빼돌린 방식으로써의 한 인물인 겁니다.
그런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시는 전쟁이 바로 이 이름을 통해서 구체화 되는 겁니다.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게 아니라 내 하나님과 함께 한다)
라는 단절성인 겁니다.
(땅의 이스라엘 하나님과 함께하는 니 하나님과 vs 새이스라엘 곧 하늘의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내 하나님과 다른 그 차이성을 그 거룩을 제대로 보여주겠다)
이 말 뜻이 결국은 이스라엘을 두 조각 내어서 이스라엘의 내부의 전쟁이 벌어지는 방식입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했듯이
다윗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의 운명을 보여주는 껍데기로써 활용하신 겁니다.
(눅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결국 이름의 기능은 오로지 전쟁입니다. 거룩한 전쟁입니다. 십자가 전쟁입니다.
아니 같은 편 이스라엘인데 전쟁의 대상이 됩니까?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나는 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종 다윗의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에서 추호도 갈라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스라엘을 두 조각 내는 겁니다.
정작 두 조각나는 적극적으로 막고자 하는 자가 다윗 본인 당사자가 아닙니까?
성령 받게 되니 이스라엘을 두 조각을 내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이요, 그런 기능이 주의 이름이 실현을 하는데 이름이 없음 무입니다.
단지 저쪽이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의미를 붙이면
일부러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임마누엘이라고 너와 함께 하는게 아니라 나와 함께 한다고
차이성으로써 반대의 기능으로써 등장하다가 사라지는 이름, 부재의 이름으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 라는 이름이 그 당시에만 해도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여러분의 이름도 한국에서만 적어도 두명 이상입니다.
운 좋게 딱 한 명인 본인의 이름이 있을지라도 역사 속에 찾아보면 결국 둘 이상이 될 겁니다,
그러면 누구가 진짜 예수라는 겁니까?
인간은 저마다 예수를 상상해서 조작하고
성경박사들 마저도 예수를 성경을 통해서 조작해 내고 있는 판국에
성경 스스로가 예수를 증거하는 그 예수는 무슨 수로 순정품인 예수인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결국 기능입니다. 죄 없이 못박힌 예수 라는 분은 딱 한 분 뿐임을 성령만이 증거하는 겁니다.
인간이 아닌 성령. 곧 부재성입니다. 대상화 되거나 일치시킬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미끄러짐을 당할 뿐인 다윗이 바라본 아브라함이 본 사도바울이 핍박하다 만난 단 한 분입니다.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소리로 기호로 문자로 기의로 주 주 주 라고 부르면 구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의 이름의 기능이
인간이 이름을 부여하는 그 이름 가진 모든 것들을 적으로 삼아 원수로 삼아 전쟁을 벌리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복하라 라는 겁니다.
너의 이름은 삭제 되었다는 겁니다. 이름을 가진 너를 박살내겠다는 겁니다.
모든 이름이 주의 이름에 무릎 꿇게 된다는 겁니다.
(롬 14:11, 개역)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기생라합은 이 부재성의 이름에 간담이 녹아 써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죽게 되었다는 겁니다.
회개하고픈 마음이 있어서?
금식하고픈 마음이 생겨서?
아닙니다. 이 이름의 기능이 느닷없이 덮치게 되니 그저 죽게 되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민족신 자신의 친척 자신의 국가
든든하게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부재하는 그 이름에 한방에 훅 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자기민족이 여호와의 군대에 의해 다 죽어 심판받는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로 구원을 얻은 겁니다.
그것도 정작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신하는 가운데
멀리서 이스라엘도 아닌 이방 여자요 천한 기생의 신분인 라합이
정작 이 주의 이름의 기능에 제대로 발현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뻔뻔하게 외칩니다. 자신의 이름도 이 이름의 기능에 의해 동원된 자임을 뻔뻔스럽게 다윗도 그러했음을, 다윗도 뻔뻔했음을 당당하게 외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이죠.
기생라합이 주의 이름에 간담이 녹아 죽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연관된 모든 이름이 무릎 꿇게 되었듯이
이제 너희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왜 모든 이름이 주의 이름에 무릎 꿇게 되는지
그 똑똑한 현장을
십자가의 전쟁의 증식으로써
산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캬 이 얼마나 당당한 소리 입니까?
자신이 성령도 아니면서 성령인것처럼 말하는 저 뻔뻔
책임 질수 있느냐 말이죠.
이스라엘도 실패한 판국에 주의 이름도 모르는 자들이 어찌 구원을 받고
이름도 모른채 어찌 구원이 된다고 장담을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름을 부르는 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이름 자체의 기능임을
베드로 자신이 아닌
성령을 통해서 알았기에 성령을 통해서 증거하는 겁니다.
육으로 행함으로 사람의 일로써 머리로 습득해서가 아닌
철저하게 베드로는 성령의 꼭두각시로써 움직여짐으로써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이렇듯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시지 않는 겁니다.
철저하게 주체는 보이는 인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부재의 이름을 증거하는 성령 뿐입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주님 !! 주의 이름이 나의 이름을 깨뜨리기를 원합니다.
나 라는 우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갇혀버려 포로된 얽매인 이 사슬을 끊는 주의 이름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상(나)을 깨뜨리는 이름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사오니 그 이름에 간담이 녹아 죽여주시옵소서
이 악한 나를 주의 이름이 전쟁 벌리셔서나의 죄악이 전혀 예수님에게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목격하게 하옵소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내가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모든 이름이 주의 이름에 무릎 꿇는 그 실제상황에
나의 이름도 삭제 당하여 무릎 꿇게 하여주옵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사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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