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오후 4:56:05 김대식
이스라엘의 이중성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데
교회의 이중성이라고 보면 된다.모든 의미는 이중적이다 라고 했다.
즉 반복적이다는 것이다. 증폭 확장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증폭의 잉여성이 발현되는 것은
소위 오류성 오기능이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의미는 육적으로 해석한 비언약과
이스라엘의 의미를 비언약을 거쳐서 선험된 언약과의 대립을 통해서
그 증폭성을 배가가 된다.
그런 의미로 아브라함 언약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이라는 당사자를 놓고 자신이 아브라함을 개조 시키는 것과아브라함 언약을 부여한 외부인이 직접 자신의 숙제로 아브라함을 개조하는 것과의 차이성이
그 증폭성을 배가 시키는 것이다.
그럼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자기자신에게 손대는 일을 감행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브람 이라는 이름에 대표성을 갖는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개종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이 손대는 그 열성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하나님은 아브람 편이 되어서 그 개종에 열심인 행함에 동기부여를 하면서 박수를 쳐준다. 성취감이 있기에 더더욱 열성적이다. 도중에 포기하면 안되도록 파이팅으로 격려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좌절된다. 그때에 동기 부여를 해주는 외부인 하나님도 도통 보탬을 줄 생각이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집착하게 된다. 속에 있던 내부의 모든 전부를 뱉어내어서 그 난관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아들 낳기 이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해준 주님에 대한 감사에 대한 응답을 보답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 가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열심은 하나님의 전체의 계획을 몰라도 그 일부분에 있어서도 맡은바 책무가 보통 큰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목숨을 다 바칠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절이다. 왜 단절일까? [믿음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되기]란 [하기]와 차이가 난다. 하기란 역사성이다. 그러나 되기란 묵시적이다.
선물이 가장 쉽게 되기 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는데 즉 잉여이다.
내 쪽에서 장애물을 넘어서 저 쪽으로 가는 것은 노동이며 역사이다. 그것은 가능성이다.
그러나 선물은 저 쪽에서 넘어와서 저 쪽이 원하는바대로 만들어 버린다.
기가막힌 예화를 들었는데 남자가 계속 택배를 받았는데 뜯어보니 자기랑 상관없는 물건이다.
무가치성이다. 무시받을만한 것 뿐이다. 왜냐? 여자 물건만 있기에
그런데 계속 택배가 정확한 주소로 김대식씨 라는 이름에 계속 날라온다.
그래서 할짖도 없겠다. 심심해서 그 선물을 한번 써보니
계속 계속 계속 그러다가 어느새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자되기
놀랍게도 철학계도(니체-들뢰즈-맑스, 라캉-지젝-맑스) 여자되기를 시도한다. 잉여임을 눈치챘는데
그 불가능성에 도전하면서 말이다. 그런 육체의 소욕마저도 이간질하면서 다가오는 성령의 소욕은 머리 짜르기 단절이다.
(아들이였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오니 딸로 변해버린 것이아. 이 마음판의 할례다. 율법이라는 오이디푸스를 제거하는 방식이, 거세로써 다윗을 거세해 버리니 다윗이 졸지에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자유인이 되어버렸다. 독자적인 자유인이 아니라. 새남편의 아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해 이스라엘 전체는 거세당한다. 할례당한다. 아들이던 이스라엘이 젊은선지자처럼 죽어서 사명을 감당케 당하듯이,
바벨폰 포로이후 돌아올때 딸로 변해서 돌와오는 것이다. 어머머머머 ~체인지 ~~~~ ㅋㅋㅋ. 이것이 선물이다.)
(렘 31:20, 개역)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거기에 믿음이라는 묵시성 까지 이중적으로 부과 된다.
믿음 되기란 그 차이성을 동반하는데 남이 아닌 아브라함에게서 그 하기가 차이로써 동원이 되는 것이다. 이 [하기]의 결과물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되기는 아니다. 묵시는 아니다. 믿음은 아니다. 행함이다.
그렇다면 [되기]의 결과물은 바로 이삭이다 라는 말인데 이삭은 무슨수로 낳는가 하는 점이다.
이삭은 바로 이 하기 라는 역사성의 단절로 인해서, 그 차이로 묵시성인 존재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100살을 넘기는 방식으로만 펼쳐진다.
100살이라는 의미는 역사성의 단절을 말한다.
그 단절을 통한 소통이다.
단절 속에서의 소통이 바로 단절의 이중성이다.
단절의 단절, 쉽게 말해서 분명히 죽었는데 죽음 속에서의 생명이다는 진짜 생명이다.
생명의 이중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이라고 외쳤는데 막상 죽으니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평상시에도 생명이 아닌셈이다.
이삭이라는 약속은 그런 의미에서 등장한다. 약속의 약속이다.
인간 아브라함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약속을 누락 배제 시키고(즉 이스마엘을 배제)
약속이 직접 성취한 완료를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부어지는 방식에서의 이삭이 진짜 약속되기가 된 셈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약속성취로 자신을 더더욱 쳐다보는 것이 아닌미래의 예수님을 쳐다보게 된다.
어떻게 예수님을 아브라함이 쳐다볼수 있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묵시다. 믿음으로 보는 것이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어떻게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볼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바보다 라는 선언 밖에 안된다. 그래서 안쳐다본다.
그런데 쳐다보게 됨을 당한자는 예수님을 쳐다보게 된다. 안쳐다보는게 정상인데 졸지에 순간 씌여버리는 것이다.
묵시성이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쳐다본다.
물론 이 믿음이라는 의미도 이중성이라는 것을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믿음은 행함을 유발케 하면서 행함을 쫏아낸다.또 비언약을 유발케 하면서 둘로 쪼개어 아브람을 쫏아내고 아브람의 열매인 이스마엘도 쫏아낸다,
사랑은 두려움을 쫏아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음은 이중화 된다. 믿음 자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접근해 와서 아브라함을 개조하는데 있어서 믿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다.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우와 육의 방식이 아닌 믿음의 방식으로도 사람이 태어나는 구나?
남성의 성기 즉 인간들의 생식기를 통하지 않는
오히려 단절된 방식의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이 새로운 족속을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
이 이중성은 아브라함이 죽어도 이스라엘에게는 계속된다.
야곱을 아브라함 언약이 졸졸졸 뒤 따라 와서는 그의 허리를 쳐 버린다.
아브라함 언약은 할례 언약이기 때문이다. 할례는 육의 방식의 생산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유일한 생산 방식
남자는 탐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의
남녀의 생식기를 통한
다른 방식이 없는 생산 방식의 차단이다.
그래서 고자와 불임여성으로 만든다.
유일하게 인지되는 생명의 생산력 입장에서는 유일한 저주요 원수이다.
100세를 넘긴 남근, 임신이 되지 않는 죽은태
이 죽음을 이 단절을 거쳐서 나오게 된 생산이 된 생명이라면
인간에게서는 딴 신체의 외계인인 셈이다.다른 신체성
이런 이질감은 동질성을 파괴한다. 모든 공동분모의 질서에 졸지에 균열이 생겨버린다.
질서를 파괴한다.
그렇게 되면 이 신체는 다른 신체의 생명력과 전쟁을 벌리던가
아니면 파괴 당해야 할 입장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새생산체제의 생명방식의 생명체가 집단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기존의 생명탄생방식체제를 무너뜨리는 전쟁을 벌린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런 이질적인 생명집단이
저거들끼리의 전쟁인 내부전쟁에 까지 돌입한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의 전쟁이 펼쳐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가분열하는 세포처럼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자가분열하는 그런 이스라엘로 향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의 전쟁이 다윗언약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동안 한번씩 이스라엘의 미약한 되도않는 것들이
코끼리 덩치의 이방민족에게 시비를 걸 때 마다 성가셨는데
정작 그들이 외치던 그 여호와라는 신이
또 그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자기들끼리의 전쟁에 여호와가 실행하는 것에 대하여
100퍼센트 자멸, 스스로 멸망하는 모습을 관심있게 보지 않고서는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자멸이
정작 미리 온 이방 민족의 자멸을 미리 보여주는 선취라는 취지로써 여호와가 실행케 되니
그들의 목격은 정작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아주 아주 당연하고도 당연한 멸망을 보는 것이기에
누워서 침 뱉을 입장이 되지 못한다.
지금 현대를 보자
수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은 딱 한마디로 말해서 몸철학인데
이 몸들이 놀랍게도 반성하자 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회개의 달인의 신체인 것이다.
왜인고 하니
그들 철학자가 평생을 걸쳐서 연구한 역사가 결국 정당성을 가진 역사가 아닌
회개 할 것 밖에 없는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앞으로 한 발자국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회개이지
반성한다고 고쳐질 신체는 아니다는 것이다.
더 강도있게 빠르고 높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역사의 방해물들을
태클거는 걸림돌들을 미리 미리 고르고 골라서 달리기에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길딱기를 하자 라는 것이다.
도움닫기 하는 속도를 더 높이자 라는 취지이다.
곧 유목주의처럼 그들은 묵시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바리새인하고 너무 너무 닮았다. 아니 모든 인간들은 바로 그런 신체에 갇혀 있다. 다른 신체란 없다.
이런 육은 육의 모든 본성을 다 드러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육의 생산방식에서 떠난 이미 완료된 약속성취방식의 딴 몸에서 딴 신체에서 오는 생명의 활동은 오히려 저들의 창조행동에 창조가 아닌 살인만이 난무하는 저주가 팽배케 만들어 버린다.
가인이 제사를 잘 드리면 잘 드릴수록 그 정당성이
아벨의 죽음을 더더욱 재촉케 만든다.
가인은 살인 외에는 다른 생산방식이 없도록 그 신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아벨은 자신의 신체의 부재당함을 통해서 그 빈자리에 딴 신체의 생명력을 과시 한다.
그 생명력의 파괴가 바로 예수님께서 외치신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갚겠다는 약속이다.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런 약속이 말씀에 기록되면서 약속의 이중성은 더더욱 증폭되고 확장된다.
그 어떤 개인도 이 약속의 범주에서 벗어날 운명이 없는 것이다.
이 의로운 피가 살해당함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였고
정작 너희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죽어 없어진 그들에게도 다시 살려서 죽음이라는 차이성으로써 확고히 드러내겠다는 취지이다.
그 어떤 목격자도 없이 단지 기록만 되었던 아벨의 피흘리신 사건이
그것이 현실이라고 지금 이순간에 재현되는 방식이 바로 묵시이다 라는 식으로 증거하신다.
이것이 믿음이요 믿음의 이중성이다.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신앙에 머무는 식이 아닌
집단적이고 묵시적으로 활동하는 그 믿음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믿음이다는 믿음의 주체성이다.
도리어 그 믿음에 유물로 취급받는 것은 역사요 그 역사의 산물인 인간신체가 도리어 유물로 취급당한다.
방금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까마귀에게 엘리야가 먹을 것을 주도록 하나님께서 했는가?
까마귀는 소위 부정한 재수없는 동물 아니냐? 시체 뜯어 먹는?
그러나 정작 이렇게 답했다.
850 대 1 로 우상숭배 제사장과 싸워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꼬라지 하고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 주어서 생명을 근근하고 있으니
참 꼬라지가 말이 아닐정도로 비참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 열심히 특심이다 라는 것을 차단 할 수가 없다.
아니 사실상 그렇게 했기에 본심이 튀어나온다. 까마귀가 주니까 내 열심히 특심이다 라고
인간이 모이를 줘서 까마귀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우찌 거꾸로 되어서 까마귀가 먹이를 줘야 엘리야가 먹고 살수가 있으니
이거 뭐 주객이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바로 그거다. 이것이 믿음의 이중성, 단절의 이중성, 묵시의 이중성이다.
닭에게 모이를 줬던 베드로가
거꾸로 닭에게 무시를 당하듯이 닭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울어주지 않으면
베드로는 그 미쁘심의 세계로 들어갈수가 없다.
기여이 자신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은혜세계의 거부인 선악체제 행함체제 행함책에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용서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처음부터 닭이 울어 줘야만 되기로 되어 있기에
예수님을 세 번부인 했다 손 치더라도 뻔뻔스럽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너무 너무 잘 아십니다 라고 당당히 외치는 것이다.
맞습니다 맞고요 닭이 저를 향해 울어 주어야 저는 살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바라볼수가 있습니다.
그 닭의 울음이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고 싸가지 없게 대답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한 고백이다는 것이다. 선악체제의 반대이다.
선악체제에서는 바로 저것이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비웃었다. 그런데 웃음을 받았다.
이런 은혜체제로 옮겨질수가 없다.
도리어 선악체제에만 끝까지 뒤짚어 씌움을 당할 뿐이다.
결국 이스라엘 조차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처럼 공명화 되어서 이중화 되어서
껍데기 훌훌 벗어버리고 육체를 훌훌 벗어버리고마귀 손에 잡혔다가 쭐꾸덕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마귀가 놓쳐버리는
이 마귀의 활동을 구체화 시키는 묵시를 가시화 시키고 떠날 뿐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기가막힌 자작극이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 그 신랑의 그 신부인지
이 노래가 공명화 된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원수삼아서
그 원수를 자신의 피로 씻기시는 그 공명은
비로소 악마의 공명화 되지 못한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계획을 듣고서 마귀는 그 천사의 자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하늘에서 있었던 그 상황을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의 영광을 재현 확장 다시 재공명 무한반복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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