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말(울리는 꾕과리)과 충돌(단절 속의 동행)
사랑 없는 울리는 꽹과리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간밤에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웃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일 수 있는가?
누구든지 그 상황이면 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데?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웃사와 충돌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삼하 6:3, 개역)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삼하 6: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8, 개역)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대상 13:7, 개역)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대상 13:9, 개역)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대상 13:10, 개역)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대상 13:11, 개역)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대화내용이 느닷없이 느부갓네살 왕 이야기를 답변으로써 내어놓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꿨는데
그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미래를 쥐고 있는데
그 왕의 왕 다움을 결정짖는 꿈이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전 인류의 미래까지 결정된 꿈이기 때문에 이거 이거 그냥 넘어갈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해석해 보라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꿈을 말해줘야 꿈을 해석할꺼 아닙니까?
꿈도 말해 주지도 않고 해석해 보라니?
그런데 느부갓네살 입장에서는 꿈을 말해주고 그 다음 그 꿈을 해석하는 것 같으면 말라꼬 너를 불렀겠느냐
어 요놈봐라 빨리 꿈해석 안하고 시간벌려고 딴핑계대네? 브라우니 뭐해 빨리 물어 물어 물어
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행패 아닌 행패를 부린 셈입니다.
이것은 왕 자신의 목숨도 같이 연루된 입장이니 쉽게 그 꿈을 말해줄수가 없는 거죠.
전 국가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점쟁이 입장에서는 그런 심각함을 모릅니다.
그냥 평상시 남도 아닌 늘 자신에게 찾아와서 꿈을 해석해 달라고 해서
그 꿈을 말해주면 그 꿈에 대한 해석을 해 드렸던 그런 관계,
그 평상시의 관계가 지금은 완전히 돌변해 버린 겁니다.
돌변해도 너 ~~~ 무 돌변했습니다. 그래서 브라우니 물어 물어 물어 해버리는 겁니다.
그럼 꿈을 말해주지도 않았고 그래서 꿈풀이도 하지 못했으니 이해한다 그냥 돌아가라 이러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이 주인공이 되는 스토리가 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 조차도 주인공이 아닌 이 꿈 자체가, 이 묵시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스토리로 전개가 되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이든 누구든 모조리다 배치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는 꿈 곧 묵시 입니다.
(단 2:1, 개역)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단 2:2, 개역)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단 2:3, 개역)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단 2:4, 개역)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방언으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단 2:5, 개역)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단 2:6, 개역)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단 2:7, 개역)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단 2:8, 개역)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단 2:9, 개역)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단 2:10, 개역)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2:11, 개역)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단 2:12, 개역)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단 2:13, 개역)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웃사를 언급했는데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다윗이 무슨 나쁜짖을 하든 말든 주님은 무조건 다윗을 용서하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와 다윗 부럽다 라고 다윗에게 시선이 가겠지만
사실상 그 당사자 다윗은 도리어 완벽하게 빼앗기는 겁니다. 짖밟히는 겁니다. 빈터만들기 입니다. 원수만들기.
(지근 지근 밟아 죽여서, 이스라엘 전체를 이단만들기를 하십니다. 다윗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다윗자손의 운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빼앗습니다. 엉터리 하나님을 빼앗아서 렘런트? 레벤트? 남은자 곧 빼돌리기 하는 겁니다. 털털털 이스라엘이라는 환경에서 배운것들을 탈탈 털어버리도록 이스라엘로 부터 쫏겨나고 죽임을 당할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운명과 연관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가짜하나님을 탈탈탈 털리는 겁니다. 선악적 하나님을 탈탈탈 털리기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 입니다. 처음자리입니다.)
또 반대로 그 상대적인 인물인 사울왕은 아무리 하나님을 말씀을 백프로 지키고 실천하고,
밤낮으로 착한 생각,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그런 생각만을 품어도,
주님은 무조건 사울왕을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겁니다.
(무조건 선악을 뒤짚워 씌우는 진노의 그릇임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반대로 자신의 신체에 온갖 말씀 지킨 것들을 더덕 더덕 붙입니다. 행함의 실천을 더덕 더덕 붙이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반대로 혹부리를 더덕 더덕 붙이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 가짜 하나님에서 못 벗어나도록, 내버려 두사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온 신체에 더덕 더덕 붙이도록 합니다. 이는 사울왕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개인의 신앙 자질을 예수님께서 문제시 삼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고발하고자, 바리새인을 대표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을 뗄수 없도록 더더욱 혹을 온 몸에 붙여버리도록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들을 귀 없는 자는 못 듣도록, 혹여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서, 혹이 떼어질까봐 두려워서, 혹을 붙여버리는 겁니다. 착함? 그 위선? 도저히 못벗어나도록 착함에 빠져 살아라. 마읍판에 할례를 못 받도록, 손할례에 빠져 못벗어낫뿌라 라는 식으로 미워하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그 시대상의 환경을 대변케 하는 운명으로써 말이죠. 이런 사울왕의 노선에 이스라엘이 빠져있고, 그 이스라엘 속에서 다윗을 빼돌리기를 하시는 겁니다.)
(마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에이 그런게 어딨냐? 착한데?
(이런 반발이 나왔다는 자체가 성경말씀이 참 제대로 증거된 겁니다. 숭배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대상이 아닙니다. 날 좀 믿어줘 라고 성경말씀이 우리 인간에게 애걸복걸 날 숭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모조리 죽은자 취급해서 조져버립니다. 도리어 해석당할 입장입니다. 그러니 느부갓네살의 횡포를 해석할 길이 없는 겁니다. 더더욱 그 마귀 뒤에 여호와의 진노를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이중충돌입니다.)
아무리 착해도, 무조건 편애 받은 다윗을 옆에 둬버리면 사울왕은 비로소 완악함이 돌출됩니다.
다윗의 등장이 아니면 사울왕의 강퍅은 절대 안 나타납니다.
모두가 존경한 바리새인의 의로움은 예수님의 등장 아니면 악마인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윗에게 다윗의 자손이 등장하지 않으면 절대 긍휼을 알길이 없습니다. 죄인인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사울왕 은,
즉 편애 받는 다윗을 바로 코 앞에서 비교 시키지 않아서 그 착함(자아도취)에 속아 넘어갈 뿐이지
바로 옆에 두면 비로소 비교 당하고 그 비교에 인간은 아무리 착하고 선함의 할배라도
한순간에 한 방에 훅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손을 뿌리치시고 죽음으로 뛰어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주님은 동행 곧 함께하심 곧 은혜(선물)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차이성이라고 하고 이것만이 거룩(충돌-구멍 뻥뻥 뚫는 뿔, 박치기)입니다.
그러나 다윗이든 베드로이든 거룩을 자꾸 반대로 착각합니다.
일치성 동일성 으로 추구하고자
내 쪽에서 붙잡는 식으로 거룩을 행할려고 하는 겁니다.
거룩은 보란 듯이 쭐꾸덕 내 손에서 미끄려져 빠져나갑니다.
동행은 주님 쪽에서 펼치지 내 쪽에서 아무리 붙잡을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곧 거룩한 씨와의 접촉 접속 연결 함께함 세례 연합 할례 십자가의 은혜 동행 등등은
거룩한 씨 스스로 펼치는 것이지 아무리 내 쪽에서 내 편 만들기를 시도할려고 해도 안된다는 것을
아 내가 아무리 시도해도 안되는 구나 라는 것을 당해 보고서는 그 차이성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웃사는 죽어야만 했습니다.하나님께서 원수 삼으신 다윗을 돌출 시키고자 말입니다.
이런 다윗을 원수삼으신 다윗의 자손과의 접촉
죄인 중의 괴수와 피와의 접촉 때문에
다윗 쪽에서 만들어낼수 있는 가짜 거룩이란 거룩은 모조리 다 끄집어 내도록 유도하십니다.절
대로 나는 주님을 안버린다는둥 배반하지 않겠다는둥 남들은 다 배신 때려도 나는 배신 안때린다는둥
나올수 있는 모든 것, 그 거룩같지도 않는 거룩을 쓰레기처럼 다 쏟아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놓고 보기좋게 쭐꾸덕 미끄러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거룩은? 다윗의 자손이 땡기는 방식 뿐입니다. (다윗은 오히려 단절 뿐입니다. 거리두기, 차이내기)
결국 거룩이란 다윗과 다윗의 자손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차이난다는 거리감을 쭉쭉 벌리는 겁니다.
많이 용서 받은자가 많이 사랑받는 겁니다.
300만원 빚 탕감은 언제든지 빚 갚을수가 있기 때문에 그 따위 빚은 빚이라고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일반인이 천년을 살아도 만년을 살아도 못 갚는 빚이어야 진짜 빚입니다.
그 진짜 빚을 뒤짚어 씌워야 은혜라고 합니다. (믿겠다는 의욕조차 상실당하는 것)
못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거리감에 실감하는 것)
그래야 다윗은 아무것도 아니요 다윗의 자손만 높이겠다는 취지입니다. 그
래서 차이의 자리에 두기 위함이지 일치성의 연합이란 없습니다.
단절만이 유일한 거룩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충돌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거룩 자체, 차이 자체가 주인공 되기 위해 양쪽다 밟힘)
여호와의 진노와 충돌하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런데 미리 진노를 피하고자 충돌을 피하고자 거룩을 지키겠다고 허튼짖을 하는 것이
바로 죄를 지적받지 않겠노라 라는 시험에 빠지는 겁니다. (쳐다볼 연민할 나 조차도 삭제당하는 것, 미쁘심)
느부갓네살 왕은 그 꿈에 압도당하여서 말도 되도 않는 충돌을 점쟁이들한테 실시해 버리는 겁니다.
웃사를 죽여버리는 식과 같습니다.
결국 다니엘을 등장시키기 위한 차이성의 배치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에 의해서 그 꿈이 이제는 풀리게 되니
정작 느부갓네살 왕 본인이 웃사와 충돌한 여호와에게 충돌 당하는 겁니다.
놀라운 하늘의 프로젝트 계획을 알았다고 해서 충돌을 피할길이 없습니다.
그럼 다니엘은 그 충돌을 피하느냐 꿈풀이했다고 해서 피하느냐 아닙니다. 피할길이 없습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해도, 하늘의 계획을 다 알았다고 해도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넘어오심 붙들어주심 아니면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 대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그것을 막는 베드로의 손길을 다시 뿌리치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고전 13장. 십자가 라는 사랑이 밝히 보이는데, 어찌 인간 사랑, 인간의 믿음이라는 꾕과리를 울리느냐 말입니다.)
(고전 13:1, 개역)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개역)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개역)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 과의 접속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는 지독한 미움을
다른 하나는 일방적으로 편애받음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기로 되어 있음을
그 미래의 꿈이 일방적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을 돌출시키고 또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을 돌출시키는
토기장이의 권한 자유를 펼치시는데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내 쪽에서 아무릿 선한 의도로 붙잡을려고 주님 죽으시러 가시면 안됩니다 라고
붙잡아도 소용없고, 도망쳐도 소용없고, 그럼 난 베드로처럼 안 붙잡아야지, 행함을 추구하지 않아야지,
사람의 일을 하지 말아야지 해도
다 소용없는 겁니다.
차이를 내 쪽에서 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차이를 내시는 쪽에 의해서 당하는 것 뿐입니다.
차이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차이 자체가 차이는 내는 것이지, 인간이 차이를 낼 기능이 없습니다.
성령 자체가 차이내는 겁니다.
그것이 거룩을 입은 성령을 입은 은혜를 입은자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를 그렇게 당하는 겁니다.
미리 눈치 채어서 피할길을 내 쪽에서 어떤 방안으로 대처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웃사는 붙잡다가 죽었지만 난 안 붙잡아야지 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점쟁이들은 꿈 풀이를 못했지만 나는 다니엘처럼 꿈풀이 해야지 라는 것도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말이 안되는 식으로만 갑니다. 말 되는게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을 반드시 형성해서 그 차이의 간격을 벌리시는 식으로만 가는 겁니다.
이 여호와의 충돌에 의해서도 안디지고 살아남은 것을 샬롬 곧 평강 은혜라는 겁니다.
용서란 말도 안되어야 합니다.
(용서 가능한 상황에서의 용서는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 불가능한 상황이어야 용서 입니다. 용서 자체가 인간속에 있는 가짜 용서와의 차이내기를 용서 스스로가 펼치는 겁니다. 인간의 용서는 거리감 두는 검이 아니라, 화평 화목의 용서이기에 사기치는 겁니다. 단절의 용서는 용서 스스로만이 펼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입니다. 결국 성경은 당사자가 직접 내려와서 펼칩니다. 여기에 인간은 사물 취급당해 버립니다. 닭을 사물 유물 취급해 버렸는데, 도리어 닭이 베드로를 사물 유물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이중성 이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마땅히 죽어야할 극악무도한 죄인인데
용서라니? 그것도 어떤 조건도 없는 무조건 용서다 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겁니다.
탕자에게 금가락지 색동옷 살진 소 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용서의 극치입니다.
여기에 맏아들은 돌아버리는 겁니다. (3가지 확정성은 상대적인 숨은 세력을 겨냥한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용서만이 마귀를 돌출시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꽹과리 속에서 빠져나올길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존경받는 악마의 세계 속에서 벗아날길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는 세계, 예수님을 우상숭배하는 집단환경,
뼛속까지 친악 세계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지옥입니다 지옥.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 믿음은 백날해도 마귀가 시기를 하지 않아요 마귀가백날 하는 짖이 하나님과의 일치성만 추구할려고 하지
정작 마귀와의 차이성은 없는 겁니다.
감히 마귀도 거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려고 하는지?
그래서 다윗을 원수삼으시는 겁니다.
(다윗을 원수 삼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입니다. 인간에게서 해석 되지 않는 거룩입니다.)
나를 원수삼지 않는 예수님은 가짜입니다.
원수 삼아야 인간들이 습관적으로 믿어대는 그 예수와의 차이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넘어오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넘어갈려는 나를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지적하시면서,
물에 빠뜨리시면서 다시 보게된 예수님은 낯선 주님입니다. 나를 죽일려는 주님입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데 어찌 나를 살리시겠습니까?
나를 죽일줄 모르는 예수님은 가짜 입니다. 나를 죽이시는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넘어설 필요가 없이 예수님이 그 가짜 하나님을 넘어오셔서 차이나는 자신을 직접 증거하심으로써 말입니다.
다윗을 원수삼지 않으면
다윗의 자손과의 접속이 안됩니다. [다윗]과 [다윗의 자손]은 다릅니다. 그 어떤 연결고리가 없는 단절성입니다.
그 단절성을 직시케 하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은 이 둘 만이 원수지간 만듭니다. 그리고 충돌시킵니다.
(원수됨을 거치지 않는 동행은 인간에게 해석당하는 동행이나 사귐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두려워 앵겨붙는 앵벌이 만들기 입니다. 사생아 죠. 징계만이 자녀에게 있습니다.)
다윗 자손과 마귀와의 차이성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단절 시키는 겁니다. 원수지간 만듭니다. 3일이라는 죽음의 간격을 직시케 합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용서를 다윗에게 퍼붓는 이유가 뭐라고요?
잘나서? 거룩해서? 너무 너무 믿음이 좋아서? 그 어떤것도 다윗 쪽에서는 없습니다.
죽어야 하는 다윗자손 쪽에만 있습니다. 죽어서 넘어오시는 사랑입니다.
이뻐서?
아닙니다. 오죽 못났으면 저쪽에서 무지 무지 많이 봐줬다는 겁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불도 훅 하고 끄지 않는 것은
주님 쪽에서 무지 무지 참았다는 겁니다. 그만큼 지금 당장 죽여도 할 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이런 죄인 중의 괴수인 나 라는 벌레이다는 겁니다.
(사 42:3,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마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웃사와의 충돌은 사실상 다윗과의 충돌이요 오늘날 우리 와의 충돌입니다.
꿈도 해석하지 못하는 점쟁이들과의 충돌은 다니엘과의 충돌이요 오늘날 우리 와의 충돌입니다.
대처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련할 길도 없습니다.
뭘 해도 죄입니다.
오로지 주님 쪽에서 불쌍히 여겨주심, 주께서 넘어오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내 쪽에서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거룩으로 넘어갈려는 그 바리새인의 짖과 똑같은 그 악한 사람의 일인 그 사고방식과 (바리새인에게 해석당하는 천국(예수님)은 가짜 입니다.)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지신 십자가의 용서와의 충돌로써그 차이를, 그 간격을, 그 거리감을 누리는 겁니다.
사랑은 바로 간격 벌리기입니다.
감히 넘어갈수 없는 3일 이라는 죽음의 간격
이 간격도 못 넘는 믿음인 주제에,
이 간격도 이 충돌도 못 벗어나는 행함인 주제에,
어딜 꽹과리를 울리냐 말이죠.
이 충돌이 옳았습니다. 말도 안되는 용서를, 은혜를 성취하고자
일방적으로 버리시고, 내 뜻대로 때려죽어도 안되도록 하심이 옳았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를 버리심이 마땅합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이 버리심, 이 충돌, 이 찢으심이,
인간의 행함을 내어쫏는, 두려움 없는 사랑인 겁니다.
왜 버립니까?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대신 버림입니다. 너가 버림받아야 하는데 대신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잘못한게 없는데!!. 니가 받아야할 죄 처벌을, 대신 죄 값을 치르기 때문입니다.
대신 일만달란트
천년의 빚을 대신 무랐다는 겁니다. 무한집행유예, 계류기능(이중성)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천사말 꽹과리를 전복시켰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감히 말이죠. 감히 천년의 빚이 있는데 말이죠.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얼마나 제대로 동행했으면, 함께했으면, 하나 되심 이였으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제대로 버림 받았겠습니까? 제대로 단절 되었습니까?
[차이] 이다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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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강-삼하6장6-15(법궤에서나온복)-2sa091213-(이 근호 목사)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6장 6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7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6:6-15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오늘 이 대목은 정말 상당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법궤라는 것은 바퀴 달린 것도 아니고, 손도 발도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의 수레에 실려서 법궤가 이동하는데, 소가 발작을 일으켜 뛰니까 법궤가 떨어지려 하니까, 웃사가 붙잡았죠. 이게 중력의 법칙이 통하죠. 중력에 법칙에 의해서 떨어지려 할 때, 붙잡았습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붙잡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물리학이 여기에 동원되죠. 물리학에 의하면 중력에 반 중력으로 붙들면, 그 자리에 고정할 수 있다. 이걸 웃사가 물리학을 안 게 아니고, 딱 보면 알죠. 떨어질 때 붙잡으면 안 떨어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웃사를 쳐버렸습니다. 웃사의 죽음은 그냥 쳐버리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법궤를 니가 건방지게 붙드느냐’하는 겁니다. 그 소식을 들었던 다윗이 놀랬습니다. 세피하게 본 겁니다. 서울 사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법궤를 우습게 본 겁니다. 법궤를 무서워했습니다. 아! 겁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윗이 겁난 것은 뭐냐 하면, 웃사가 법궤를 모욕했다든지, 웃사가 법궤를 저주했다든지 이래서 벌 받은 것 같으면 안 하면 되거든요.
‘하나님, 저 법궤 좋아하거든요.’ 이러면 복은 절로 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웃사가 법궤를 만진 것이 법궤를 도리어 보호하려고 다칠까봐, 깨질까봐, 지켜주려고 했는데, 죽었다 말이죠. 다윗이 해석이 안 됩니다. 법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해석이 안돼요. 뭔가 감추어진 원리원칙을 뽑아낼 수가 없어요. 중력의 법칙이 통하지 않아요. 법궤를 어떻게 다룰 때, 잘 다룰 수 있는가 뽑아내는 그 원리원칙을 알 수가 없어요. 쉽게 갑시다.
시골에서 형님이 시어머니 모시다가 형님이 사정상 시어머니가 시골에 계시지 못하고 서울에 와서 둘째 아들네 아파트에 있게 됐다. 예를 든 겁니다.ㅎ 그런데 이 시어머니가 법궤와 같아요. 기본 법칙이 통하지 않는 거예요.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모시면 전부 다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어머님, 커피 드세요.’ ‘커피 싫다. 내가 외국 사람이가?’ 하고 던져 버려요. ‘어머니 요새 족두리 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냥 파마 하시고?’ ‘그거 뽂는 거? 싫다.’‘어머니 애들 방에 가지 마이소.’‘ 내 손자 내 맘대로 가는데 왜 못가?’ ‘애들 낼 시험치는 데 방해 됩니다.’‘시험이 문젠가. 내가 손녀 보겠다는데,’모든 게 맞지 않아요.
그래서 그 지역 이름을 오늘 성경 책에 보면 ‘베레스웃사’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웃사와 충돌했다.’웃사를 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웃사와 충돌했다. 충돌을 야기 시킬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땅의 구조에 하나님의 법궤는 안치될 수 없다. 안식 될 수 없다. 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다윗이 겁이 나서, 하나님을 왕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힘들어 가지고, 어디 모셨느냐 하면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십니다.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셨다는 이 이야기에 오랫동안 교회 다니시던 분들은 스물스물 촌에서 부흥회 했던 30년 전에 부흥회 했던 것이 기억나실 겁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더니만, ‘하나님께서 그 집에 큰~~복을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교회 법궤를 어쩌란 말입니까? 모시렵니까? 안 모시렵니까? 여러분이 집이나 짓고 아파트 넓히는 데 신경 썼지, 언제 교회 법궤 모시는 데 신경 썼습니까?’ 우리 교회는 다행스럽게 장로님들이 교인들과 섞여서 처음 오신 분들은 누가 장로님인지 모르지만, 기존 교회는 장로들만 따로 뽑아서 앞에 있습니다. ‘장로님들 뭐하십니까? 먼저 소처럼 법궤를 메고 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소가 미친 소라면,ㅎㅎ 그 법궤가 떨어질 때 만약에 목사가 그걸 잡는다면, 그 목사는 웃사가 되는 겁니다. 논리상. ‘장로님 뭐합니까? 집 팔아서 전세 옮기고, 우선 법궤부터 모셔야 나중에 여러분의 집은 큰~~ 복을 받습니다.’ 제가 해도 신나네요.ㅎ 기분 좋습니다. 이게 맞습니까? 맞는 이야깁니까? 그냥 추리라 생각하세요.
다윗은 오벧에돔 집에 복이 온다 소리 듣고 갑자기 입이 째졌습니다. ‘야! 요거 괜찮은 물건이다.’해서 다시 마음을 홱 바꿔가지고 오벧에돔에 복 내리는 것을 시기해가지고, 그 법궤를 어디로 이동시키느냐 하면,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이걸 옮기려고 하는 겁니다. ‘지가 처음에 떡 먹을 때 맛없다고 버린 떡을 남이 맛있게 떡 먹으니까 시기나서 남 먹는 떡을 빼앗는 심보죠. 이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 있다고 복이 내렸다는 말은, 오벧에돔과 관계없고, 다윗이 자손은 다윗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 대목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이 실제 다윗과 얼마나 차이나는 구조를 가지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8절 제가 읽어 볼게요.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은 ‘다윗의 씨로 말미암아 다윗의 씨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 분이 바로 ‘다윗의 씨’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윗의 씨는 떼버리고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이 반가운가 봐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성립이 되려면 우리는 웃사와 오벧에돔, 다윗,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사고방식과 일치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법궤가 지금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되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rock(락)그룹이 공연하다가 지가 fill을 받았죠. 예를 들면, 부활 공연 하는데, 기타리스트 김태원이가 필을 받아서 무대가 한창 잘 나가니까 무대에서 뛰어내려오니까, 뭐를 의도하는가 하면, 팬들이 팔로 가수나 연주자가 땅에 닿지 않게 앞에서 뒤까지 이동시킬 때 사람들에게 타는 고 기분, 그야말로 부활 된 기분이죠.
지금 하나님 손에 받쳐서 법궤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동할 때 법궤를 좋아해서 이동하는 그것은, ‘난 당신의 팬입니다. 난 법궤 팬입니다. 난 하나님 팬입니다.’하는 뜻에서 받들어 모시는데, 받들어 모신다가 저주를 받아서 죽게 되었을 때, 그 법궤는 도로 어디 떨어집니까? 툭 땅으로 떨어지겠죠. 무슨 말인지 모르시네요. 지금 소가 법궤를 땅에 떨어 뜨질 뻔 했죠? 그걸 소의 자리에 웃사가 갖다 받들었을 때, 웃사가 칭찬을 들은 게 아니고, ‘아이고, 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칭찬 들은 게 아니고, 도리어 큰 재앙을 받았다 말이죠. 이것은 어떤 인간도 법궤를 받들어 모실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법궤를 독점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두자로‘동행’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면, 최초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나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이래 돼 있어요. 하나님과 동행 했더니만 에녹은 세상에 있지 않고 죽음을 보지 않고 그냥 하늘로 가버렸어요. 그 뒤에 창세기 6장 9절에도”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래 돼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고 개인 동행이 아니고 집단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할 때,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동행하게 되면, 기존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삶의 구조, 사로방식 이걸 끍어 버립니다. 홈을 파죠. 홈을 쫙 내버립니다. 다이아몬드가 대리석 같은 데를 지나가면, 그 단단한 대리석에 뭐가 파이느냐 하면, 끍히는데 홈이 파이는 겁니다.
우리 법궤가 우리 하나님이 거기에 안치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웃사와 오벧에돔, 웃사는 죽은 사람이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은 사람이죠. 한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복 받은 사람과 저주 받은 사람 둘 다가 현재 무엇을 구성하고 있느냐 하면, 다윗의 평생(일생)을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왜? 법궤가 오므로 말미암아.
쉽게 이야기 할게요. 다윗의 평생은 웃사 같은 경우를 거쳐야 오벧에돔이 되는데, 그러한 체험은 법궤가 다윗이 법궤를 쥐려고 유도하는 계기를 통해서 법궤는 다윗과 함께 기거(동행)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묘한 전략(수법)이었습니다. 웃사가 죽을 때 다윗이 기겁을 하고, ‘난 안해 난 안해, 법궤 싫어. 무서운 법궤 싫어.’
처음에 시어머니가 서울 둘째 며느리 아파트에 왔을 때, 일부러 기괴한 행동을 합니다. 자식 손녀들 있는데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닌다든지, 일부러 침해 걸린 것처럼 수도 물을 팍 틀어놓고 가스 불 켜놓고 해서 며느리가 기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며느리로 하여금 ‘나 이런 어머니 못 모셔.’ 셋째 며느리에게‘니 모셔가라. 난 천만금 줘도 난 안 모셔.’이렇게 유도를 해놓고, 종용히 둘째 며느리를 불러내서 ‘사실은 며느리야, ’예‘ ’니가 나 때문에 괴로웠지?‘ ’어머니, 저 못살겠습니다.‘ ’사실은 내가 숨겨진 유산이 있다.‘ ’왜 그걸 이제야 이야기 하십니까?‘ ’내가 세 며느리 놓고 테스트 해 봤다. 어느 며느리가 이 찬란한 유산을 받을지, 어느 며느리가 이 족발 집 운영권을 쥘지, 어느 며느리가 이 회사를 인수받을지 내가 시험을 해 봤다. 첫째 며느리는 일주일 하다가 못 견디고 갔다. 셋째 며느리는 2시간 하다가 갔다. 그런데 니는 아무 소리 안하고, 석 달간 견디는구나. 이제 테스트 기간 끝!! 이제 내가 정상으로 돌아올게. 복 줄게.‘
바로 이게 동행 이예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제가 너무 산티나게 예를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ㅎ 하나님은 다윗을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과 연결시켜 주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구원 못 받아요. 다윗이 구원 받는 것은, 오늘 아침에 이야기 했지만, 다윗의 자손을 인하여 구원 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희한한 이야기 했어요. ‘아브라함이 내 때 보기를 원하다가 나를 보고 기뻐했느니라. 고 했어요. 아브라함과 예수님 거리가 2천년입니다. 2천 년 전에 있던 아브라함을 거론하면서 ’얘들아, 아브라함이 내 올 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 보고 기뻐했다.‘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단독적으로 구원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예요.
이러한 동행에 제가 산티나게 예를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바로 엘리야 같은 경우입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에 동행이 누구냐 하면, 바로 까마귀였습니다. 그 이야기 하면 비참해요. 엘리야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마치 웃사가 법궤를 보호하려고 한 것처럼. 시키는 대로 했더니만 적들이 현상수배 내려서 엘리야를 체포명령을 내렸습니다. ‘현상금 5만 달러, 잡히면 즉각 사살하라.’이게 나왔을 때, 엘리야가 놀래서 갈멜 산으로 도망갔어요. 도망가서 거기서 죽으려고 했습니다. 죽으려고 했는데 보니까 먹을 게 있어요. 보니까 까욱 까욱 까마귀가 음식을 날라다 준 겁니다.
여러분! 이거 기뻐할 일입니까? 슬픈 인생입니까?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못하죠. 여러분 우리 다 집 떠나서 산에 가서 까마귀가 물어다 준 거, 이미 까마귀가 입맛 본 거, 까마귀가 자장면을 배달해 주겠습니까? 짬봉을 해주겠습니까? 무슨 음식을 주겠어요? 그거 먹고. 그것도 모르고 어떤 목사는 ‘여러분 까마귀 보세요.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데, 왜 안 물어주나.’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교인들 목사 월급 주지 말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 주면 돼요. 이게 비참한 겁니다. 그야말로 뭘 모르느냐 하면, 죽는 것과 사는 것은, 절대로 니가 사람 뜻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니가 살고 싶어도 니가 죽고 싶어도 못 죽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동행이요. 살고 싶어도 니 뜻대로 못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동행이다. 이래도 좋으냐. 동행이?’ 이 뜻 이예요.
그런데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경계선에서 고 좁은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가야 될 사람이 누구냐, 다윗이고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입니다. 제가 기도할 때 했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 안 해도 다 줄게. 이 말씀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이, 현재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온 구조는 뭐냐 하면, 옆에 많이 재워놓고 풍성하게 쌓아놓고,’아이고, 배부른 상태에서 빼 먹는 식으로 사는 걸 우리는 그걸 두자로 ‘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산다’는 10년이고 20년이고 풍족하게 창고에 넉넉하게 곡식을 채워놓고 살아야 우리는 ‘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의 산다는 것은 그 창고에다가 중국산 라이타로 불 질러 버리고, 창고 없애 버리고, 방향을 넉넉한 곡식이 아니라 넉넉한 용서, 넉넉한 사랑, 넉넉한 영생, 그 맛에 뭐를 잊어버리느냐 하면, 옛날 삶의 구조를 잊어버리는 것을 가지고 관계가 살아있는 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참 제가 말을 해도 부끄럽습니다. 왜 부끄러우냐 하면, 이게 정답인데요.ㅎ 정답을 말하는 저도 그렇게 못하면서 정답을 말하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건 일단 여러분이 양해해 주셔야 할 문제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를 해석할 때,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 말씀을 지킨 분만 해석할 수가 있어요.ㅎ 누굽니까? 예수님만이 성경 해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엘리야도 해석 못 합니다. 그래서 뭘 기다립니까? 변화 산에서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아브라함도 해석 못 합니다.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의 때를 보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틀린 게 아니고 정답이지만, 우리 하고 상관없는 정답 이예요.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정답. 따라서 우리가 해석 안 되고 지킬 수 없는 이야기만 성경에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방치 됩니까? 우리는 버린 받은 자식입니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뭐를 유도하느냐 하면, 법궤를 통해서 우리 구조의 홈을 파버려요. 우리 인생에 금이 가도록, 하는 족족 일이 안 돼. 자식은 애를 먹여. 분명히 전교 최고인데 이 번데 2등 했어. 미치겠어. 정말.ㅎ 분명히 서울대학 수석인데 서울대학 2등 됐어. 아이, 맘 뜻대로 안 돼. ‘2등도 잘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조치 바뀝니다. 2등에서 3등해 버립니다. ‘3등도 괜찮잖아요.’ 하면 홈 또 파버립니다. 그럼 56등? ‘그래도 괜찮잖아요?’ 그러면 떨어져 버립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죽을 때까지 우리 인생에 홈을 파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 의를 그 나라에서 주어진 그 관계성이(예수님과 우리) 생명을 공급해 준다는 곳을 보게 하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짬짬이 알죠. 2초 내지 3초. 짬짬이 아는데 왜 짬짬이 아느냐 하면, 홈 팔 때 알아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 은혜 줘서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 잘 믿겠습니다.‘ ’자 예수 믿고 구원 받았고 이제부터 옛날 구조로 돌아가서 옛날식으로 풍성히 돈을 채워놓고 살아야지.‘라고 나가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신체의 태생이거든요. 그러면 ’니 맘대로 해라.‘ 그리고 하면, 슬슬 법궤를 긁어 놓죠.
여기서 제 아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실례 되지만... 제 아내 인생이 늘 긁혀요. 특히 여름철에. 일하고 자려 하면 왱~~ 하고 모기가 와서 잠을 못 자요. 그런데 얼마나 불행인지 같은 모기가 옆에 자는 저한테는 오지를 안 해요. 제 아내 냄새가 그렇게 좋아요. 잠을 설치게 되요. 홈을 파죠. 그럼 저는 제 아내 덕분에 편안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 없으면 여름밤은 장담 못합니다.ㅎ
주님께서 동행한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마땅히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 좋아하고 이기주의, 자기 명예 좋아하고 그렇게 늘 죽어야 돼요. 그런데 동행하시는 분이 바로 어떻게 이 땅을 살아왔는가를 우리에게 늘 곁눈질하게 만들어서, ‘아! 돈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고, 세상이 우리의 축복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축복은 이러한 인간을 동행해 주시고, 결국은 죽음을 보지 않고 가신 에녹처럼, 또는 노아처럼 그렇게 하시려 하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 찾아온 예수님의 본래의 뜻이라는 거죠. 오라 하지 않았는데도 와 주시고, 동행해 달라 하지 않았는데도 동행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누굴 인식하라 하시느냐 하면, 그 나라 의가 있음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홈을 파는 일을 하는 겁니다.
아하! 복과 저주는 우리 구조에서 결정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이 복을 원하지만, 그건 복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는 항상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임하는 거예요. 참 희한해요. 웃사 죽었다는 것을 알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이동시키니까 같은 법궤인데,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잖아요. 이미 그걸 안다는 겁니다. 웃사와 다른 구조, 그냥 있으면 복이 오게 돼 있는데, 거기에 인위적인 것이 가미돼 버리면, 나라는 존재로서 복을 섞으려 하면 그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돼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그 나라 의를 그냥 거저 받으세요. 손대지 말고. 더 빠른 복, 더 큰 구원, 그런 걸 손대지 말고 주시는 복만해도 넉넉하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는데, 주께서 그 나라 의를 알려주시는 자체가 우리에게 영생이 되고 넉넉한 복이 되는 줄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그걸 소유하려 하고, 독점하려 하고, 손질하려 덤벼들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늘 살아가는 자체가, 동행 자체가 넉넉한 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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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례 10-12-29 19:22
◈ 설교 전 기도 ◈
하나님아버지 그 나라 의가 없다고 장담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성장했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웬 은혜가 임해서 그 나라 의가 분명히 있고, 우리는 이곳에 떠돌이며 떠날 곳인 것을 저희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떠날 때 어떻게 떠나야 되며, 미련 두지 않고 떠나야 될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던 세계가, 그 속성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 의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늘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김대식 12-09-15 06:53
감사합니다. 찾고 있었는데 녹취를 해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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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자리로 몰림당하기 위한 화평과 동행과 하나님 형상
김대식 2009-12-17 13:24:57
화평(사귐), 동행(함께 하나됨), 형상(닮은 꼴)을 보기 위한 심판의 자리에 몰림당함
이상규 집사님이 웃사에 대한 이야기를 설교를 듣고 다시 질문을 했다.
왜 웃사가 죽을 수 밖에 없는가?
그러나 사실상 웃사 자체의 행동 때문에 벌어진 죽음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의 죽음을 통해서 그 죽음을 해석할려고 달려든다.
이미 죽은 놈 뒤통수 치듯 씹어대 본들 죽은자가 반박을 하겠는가? 덤벼들겠는가?
죽은자 보다 해석하고 판단하기에 딱 좋은게 없다.
산자는 곤란하다. 그 판단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까봐 선뜻 산자를 향해서 해석을 적극적으로 나설려고 하는 이는 좀처럼 잘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살았다와 죽었다 앞에서 자신을 살았다는 기준으로 두고 죽음을 해석한다.
죽음을 왜 해석할까? 자신이 살았다는 반증으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돋보이고파 하는 이유이다.(바리새인 앞에 실로암소경은 딱 좋은 해석꺼리요 연구재료다. 이미 죽은자와 방불하다. 죄 연구 잘하면 성과물이 생김으로써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와 심지어 하나님까지 연관시켜 유익이 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 앞에 그들은 도리어 그 생각들이 악마적임이 드러나도록 동원된다.)
또 그 해석이 명쾌하고 명해석이 되면 자신이 죽어도 그 명해석이 남아서 사람들에게 길이 길이 이어지는 역사 곧 신화가 될 수 있기에 영원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지옥 그리고 죄 (병든 인간)]
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할려고 달려 들었다가 병들어 죽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앞으로도 이 실제 상황으로 닥친 죽음이라는 숙제를 풀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달려들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도 풀은적도 없고, 지금도 해석 불가이며, 앞으로도 풀었다고 나타날 인간은 없다.
(죽음도 못 풀면서 화친을 이룬다? 심판도 못 통과하면서 구원을 바란다? 저주도 모르면서 어찌 사랑을 알겠는가?)
도리어 더 깊어진다. 참 신비롭게도 죽음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뽀드락지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음성적으로 은폐되고 숨어버린다.
율법이 그러하다.
모든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고자 율법이 주어졌는데 여기저기서 자신은 행할 수 있을 정도로 행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너무 너무 많이 나타난다.
그들이 농땡이 부려가면서 율법을 행했겠는가? 천만의 말씀.
누가봐도 자부할만 하다는 증인들을 앞장세우면서 등장한다.
저 사람의 행함은 가히 칭찬받을 만해 라는 자발적인 주변의 목격담과 그 근거로 인해서
철저한 타당성을 가지고서 등장한다. 그것도 건전하다 라는 이름의 검증과 검증 아래서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도바울의 열심
어제 설교의 예레미야의 정의와 공의를 주장하는 마음
그리고 엘리야의 나만 남았습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으니 차라리 죽여달라.
다윗 또한 법궤로부터 오는 그 복을 자기 쪽으로 땡기고픈 그 마음
모세가 도저히 못참아서 이래도 못 믿겠는가? 기적 또 보여줘? 봐라 실컷 봐라? 라고
안 믿고는 못배길 것이다 라고 해서 주어지는 바위를 두 번 쳐서 주어지는 갈증을 해소하는 신령한 음료
이 모든 것이 율법성에 갇혀서 나오는 완악함이다.
그 모든 것을 누려 본들 다 배설물이다.
죽음을 통과할 길이 없다. 모조리 죽음을 비켜가고자 주변에서 맴도는 짖 밖에 안된다.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일 뿐이요 완악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겸손한 마음은 무엇인가? 화평 곧 사귐과 함께 하심의 동행
그리고 흔히 성화론자들이 사기쳐 먹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무엇인가?
매우 매우 간단하다. 너무 너무 간단하고 쉽고 어린아이도 다 아는 것이라서 무시한다.
일체 가치 있다고 여길 수가 없다.
가치성이란 항상 자신의 이해력을 가미 시킴으로써 나오는 결과이기에 자신의 것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무시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즉 아무것도 내가 가미 시킨 적이 없고 도리어 소외되고 배제 당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진짜 유일한 가치있는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요, 우발성이요, 잉여요, 처음부터 완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랑한 것이다 라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반드시 [아니요] 라는 개념을 집어넣어서 나오는 상대적인 의미로써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상대적인 자리인 [아니요]의 자리에 앉혀지지 않은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다.
바로 이것을 완악한 자들은 누락 시키고 빼버린다. 감해버린다.
또 잔머리 굴리는 놈들은 그 [아니요]의 자리에 넙쭉 앉아버린다. 더해버린다.
자기가 자신에게 손대고야 말겠다는 심뽀이다.
(베드로가 그러했다.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서자. 그가 질책받은 행동에 자연스럽게 자신은 반대의 행동을 한적이 있다고 여겨서 그 빈자리에 넙쭉 앉아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비켜가버리신다.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복음에 가미 될 수 없도록 하신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을 우리는 다 봐야 할 입장이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와의 차이성을 그 두 모습이 반드시 나타남으로써 알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
선한 목자가 전혀 선해 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담 백배이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을 상대적인 늑대가 양을 등쳐먹는 일과 대조해서 드러내셨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즉 인간 자신의 기준에서 선함이란 그렇다면 목숨 버릴게 아니라 늑대가 늘 있기 때문에 목숨 버리지 말고 늘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줄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늘상 해주어야만 하지 혼자 영웅 노릇하고 떠나버리면 남은자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계속 곁에 동행해서 늘 지켜 주어야 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늑대를 주변에 깔아 놓는다. 그 빈자리를 늑대들이 다 차지 하도록 하신다. 정작 평강이다, 화평이다, 사랑이다, 절대로 저주 없다, 심판 없다, 버림이 아니라 선택이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뿐이다, 유기가 아니라 구원이다, 절대지옥이 아니라 절대천국이다 라는 소리만을 외치면서 웃음띤 미소와 다정다감함과 어려움이 닥칠 때 언제라도 뛰어나와서 목숨걸고 도와주는 섬김으로써 삯꾼 노릇을 어쩜 그리 주님이 시키신대로 딱 맞게 해주고 있다.
아쉬운 것은 양 뿐이다. 정 선한목자 사랑하고 보고싶으면 그 길을 따라 가면 된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다. 따라갈 능력이 없다.
도리어 삯꾼들이 자신들은 따라갈 담대함이 있다고 시범까지 보이면서 놀려댈 뿐이다.
그저 무능함 뿐이다. 그 무능함을 깨우쳐 주겠다고 성화론자들이 발벗고 나선다.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할 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일체 나오질 않는다.
나오면 큰일 난다. 나와 봤자 지옥이다. 천국은커녕 지옥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사탄아 너가 지금 하나님의 계획에 인간의 계획을 가미시킬려고 하고 있느냐? 사탄아 썩 물러가라 !
좀처럼 베드로의 다가감과 사귐(화친)과 동행과 닮아보고자 하는 형상 따위는 일체 거부당한다. 도리어 마귀 라고 욕만 대따 배터지도록 먹게 될 뿐이다.
바로 이 일치성이 아닌 차이성을 곧 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웃사는 죽어야만 했다.
웃사는 의도적인 행동도 아니였고, 그 어떤 원인도 웃사에게서 찾을 수 없다.
도리어 생판 남인 다윗을 통해서 그 죽음이 해석이 된다.
아니 사실상 다윗도 아니다. 다윗과만 차이나는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유일한 단 하나의 해석이 나온다.
즉 영의 일이다.
성령의 일 곧 하나님의 일이란 (여기에 동원되는 선지자, 은사, 천사 등등의 하늘의 것)
반드시 땅의 실체 육의 실체 어두움의 실체를 파재낀다.
베드로의 다가고자 하는 그 친화력인 사귐
사울(사도바울)이라는 청년의 율법으로부터 흠이 없는 저 열심
엘리야의 내 열심히 특심이다는 자신만이 남았다는 하소연
예레미야의 공의와 정의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라는 물음
다윗이 이름 없는 아이를 살려달라는 눈물의 회개와 금식
누가 봐도 선하게 보이는 그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고
그 실체를 파재끼는 성령(하나님의 영광)이 덮쳐보니
선하기는커녕 똥내나는 악취였고
더럽기 짝이 없는 역겨운 썩은 오물이였다.
바로 그런 실체를 파재껴짐을 당하기 전까지는 거룩하다 라고 자부했던 것들이
도리어 악취였고 썩어 빠진 것이다.
차라리 인간들 다수가 더럽다 라고 한 것이 주 앞에서는 훨씬 깨끗했다.
바로 이것을 격도록 하는 것이 선한 목자의 취지이다.
창녀와 (더럽게 돈 벌고 더럽게 하나님이 주신 몸뚱아리를 팔아서 생존을 유지하는)
세리가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팔아서 자기 입만 챙기는)
먼저 하나님 나라가 간다고 했다.
결국 그 동안 인간들에게 해석되어져 온 하나님 나라가 엉터리 해석이다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해석 되어져 온 율법, 율법의 열심, 행함, 믿음, 성전, 메시아, 하나님, 성령, 이스라엘 그 모든 것들이 다 엉터리 해석이요 버릴 판국에 놓여진 것임을
깨끗하고 절대로 불의함이 없음을 추구하는 자아가 도저히 용납 못하는 창녀와 세리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집어 넣는 그 예수님을 새로 만남으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져야 할 판국에 놓였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성화론자들과(왜? 성화론자들은 자신들이 한국교회와 분리되었다고 인식하기에) 그리고 개혁주의(수준 높은 건전한 개혁, 수준 낮은 개혁, 온갖 잡탕들이 다 모인) 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구원 받은 강도(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염치없이 낼름 구원만 딸랑 챙긴 한국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자 = 왜? 조직 시스템을 갖출려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꾼들의 변명꺼리로 동원 되기에)와
의로운 롯(아무리 봐도 의롭지 않고 그 롯의 의가 교회에 들어와서 퍼질까봐 전전긍긍하기에)
도저히 그동안 해석으로 다루어진 구원과 의에 부합이 되질 않기에
그것만큼은 슬그머니 빼버리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또 앞으로도 도저히 수긍을 못함을 통해서 고맙게도 그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역시 주님의 의와 구원하심은 어떤 인간들에게도 해석 되어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구원 받은 강도(평생을 강도짖과 살인만 해 온 자)
의로운 롯(평생을 의의 길을 간적이 없는 자)에 대한 해석을 엉터리로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참 신기하다.
그들 보다 훨씬 깨끗하다 의롭다 라고 하는 그 자부심이
주님 앞에서는 차라리 구원받은 강도가 의로운 롯이 훨씬 더 나은 제사요 훨씬 더 깨끗하다 라는 성경의 외침을 그들은 그동안 사기를 쳐 먹고 정작 그들이 더 돈을 세리 보다 더 등쳐먹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늘날도 똑같고 앞으로도 똑같다.
왜 그럴까?
왜 웃사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을 옛부대로 낡은 부대로 교체시키는 작업을 주님 쪽에서 실행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사는 죽어야만 했다.
마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현장에서 간음해야만 했다.
또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그냥 땅에 한순간에 다 허비해 버린 그 창녀는 반드시 그 비싼 향유를 땅에 허비하는 짖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
앞에서 말한바 대로 웃사 자체의 죽음은 의미 없다.
반드시 결합이 되어야 할 인물과 연관된 죽음이기 때문이다. 다윗이다. 다윗의 후손이다.
다윗을 역어서 봐야만 하는 다윗의 후손이다.
비로소 동행의 의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를 보게 된다.
구원 받은 강도 자체의 행동은 의미 없다. 의로운 롯의 행동 자체는 의미 없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행동 자체는 의미 없다. 비싼 향유를 때려부은 여자의 행동 자체는 의미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동을 자체를 보고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네 또는 하지 말자 라는 취지로 말하는 자들은 거짓선생들이다.
해야겠네 라는 자들은 베드로처럼 또 걸려든다.
하지말자 라고 하는 자들은 하지 않는 의로운 행동을 앞장세움으로써 뒤로는 썩을 것을 감추는 개기로 삼기 때문이다. 예로 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듯이 교회에 돈 바치라는 그 더러운 사기술
아무리 강조해도 그 사기에 넘어갈 사람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졌기에 말릴 필요도 없다.
그들 자체의 행동은 의미 없다.
다만 그들의 그 행동을 가지고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데 사용하는 예수님의 개입만이 믿음이다.
문제는 자꾸 인간이 개입하게 되니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과 충돌해야만 한다.
그래서 베드로 엘리야 예레미야 모세 다윗은 충돌하게 된다.
충돌하지 말자가 아니라 또 충돌하자 라는 말이 아니라
그 충돌로 통해서 교체당하고 우리의 구조를 새언약의 구조로 새롭게 편성한다는 것이다.
행함의 요구가 아닌 세계(근원의 자리, 처음자리) 자체를 바꿔버리겠다는 것이다.
행함과 상관 없는 세계에서 행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느 세계 사람인가?
세계가 바뀌었는데 결코 정죄함이 없는 세계로 바뀌었는데
또 다시 정죄함이 있는 세계로 되돌아 갈려고 하니
헌 술은 새 부대에 들어올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성화론자들처럼 그 말씀을 자기유익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그런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 방종을 제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라고 또 자신들의 탐욕을 또 남을 섬기는냥 하고 있다. 고맙게도 악한 영을 받지 아니하면 그 사명도 감당 못한다.)
바로 옛세계와 새언약 세계에 중간에 낑겨서 동시에 심판의 자리에 몰려 새언약인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그들의 운명은 결정이 난 것이다.
결정이 났기에 발버둥을 쳐 주는 것이다. 왜? 발버둥 쳐도 소용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 발버둥 침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더욱더 그 완료성을 잠잠히 변함 없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보다 강하시다.
바로 그 쓰레기 자리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 해골의 자리에 몰림 당하도록 일을 벌리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다. 선지자는 자꾸 자꾸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자리로 몰아간다.
당연히 누가 반발 하겠는가? 이스라엘이 반발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은 그 길 뿐이다.
웃사와 충돌 함으로써 다윗과 동행하는 분이 있는 곳으로 몰아 넣는다.
그 다윗의 후손이 바로 저주의 자리에 있다.
그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늘 가짜 하나님의 형상에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고 다 그렇게 속아서 무엇이 형상인지 물에 물 탄 듯이 모호한 소리로 형상이라고 말하는 그 놈도 형상은커녕 이중성만 보이는 그 짜가들이 외치는 가짜 형상인 인간들 속에서
생전 보도 듣고 누가 알려준적 없는 그 하나님의 형상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의 형상 그 당사자 본인이
찾아 와버렸다.
비로소 외친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이 그 동안 우찌 하나님의 형상을 운운해 왔던고?
그 망하는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서는 망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 진다.
선한 목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형상이다.
단 한번도 자기 목숨을 내어준적 없는 인간들이 외치는 형상은 다 가짜였음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런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은 결국 돈 벌기 위한 또는 자기이미지 관리를 하는 삯꾼들의 형상이였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형상 운운을 했으니
누가 알았는가? 불타는 그 심판의 불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줄?
그 명료한 하나님의 형상을
불 근처에도 간적 없는 놈들이 하나님 형상이라고 모호한 소리로 의문의 소리로
시험의 소리로 사라질 소리로 사기를 친 것이다.
화평은커녕 검을 통해서, 화평과 차이나는 검을 통해 화평 사귐을 보게 되고
동행은커녕 동행 곧 하나됨과 일치성을 추구한다는 그 함께함이 도리어 근처도 못가본 놈들이 외치는 소리였고 정작 동행자는 하나된 분은 일치된 분은 차이나는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서 비로소 동행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내어줌이다. 이것이 아버지와 나와 하나 된 뜻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하나 된 뜻을 미워했을 뿐이다. 왜? 자기를 소외시켰고 일치는커녕 차이나게 했다는 이유이다. 그 차이성 때문에 다윗을 심판의 자리에 몰아넣고자 웃사를 치신 것이다. 다윗이 봐야할 하나님의 형상이 다윗이 생각한 하나님의 형상을 박살을 내는 형상이 그 심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다윗 이후에 등장하는 선지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 종말의 자리로 몰아간다. 몰아가면 갈수록 더 격렬한 반항이 거세게 일어난다. 안일어나면 안 되도록 악한 영까지 부어버리신다.
옛구조를 새언약구조로 바꾸고자 하는 취지이다. 바로 십자가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편성되는 새 구조이다.
이제 정의로울 필요 없이 처음부터 정의로운 세계로 교체 되었고
열심낼 필요 없이 처음부터 열심히였던 세계로 교체 되었고
의로울 필요 없이 처음부터 의로운채로 태어난 세계로 교체된
새 세계의 새 피조물이다.
이 새 언약의 시대에 반드시 동원되는 옛언약의 옛구조를 다시 주장하는 자들이 반드시 주변에 깔려야 한다.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된 고마운 어두움이다.
십자가의 심판의 자리를 더욱더 또렷하고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동원되는 십자가의 저주자리를 철폐시키고 무가치로 돌려버리는 자들이 반드시 많이 많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들의 메시지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화평이다 화평이다.
생명이다 구원이다. 의롭다 성화다 라는
반드시 새언약에 대비되는 옛구조들을 주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전혀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 소식인
곧 심판의 자리로만 몰아넣는 소리를 통해서
이미 완료된 것을 보여준다.
그 당사자들도 매일 매일 교체 당하고 매일 매일 죽음으로 몰리면서 말이다.
사랑이란 곧 성령의 일이란 성령의 은사란
이보다 더 명료하고 뚜렷한 것이 있으면 나와보라 라고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몰아 넣는 것이다.
십자가 안 만이
인간들에게 널려 있는 모호한 동행과 차이나는 유일한 동행(함께하심과 일치성)이요
인간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모호한 사귐과 차이나는 유일한 화평(넉넉한 승리=나 보다 강하심)이요
인간들에게 지나개나 외치는 돈벌이 형상(우상 이미지=자기유익))과 차이나는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이에 끼여서 두 세계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동원된 소모품 미끼 쓰레기 로써 말이다.
(빌 1:15, 개역)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빌 1:16, 개역)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빌 1:17, 개역)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빌 1:18, 개역)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9, 개역)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 1:20, 개역)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개역)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개역)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개역)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개역)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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